ἄρχων(아르콘, 주권자)에 대하여
신약성경에 37번이나 나오는 빈번한 명사가 있다. ἄρχων(아르콘)이라는 단어인데, 한글성경에서는 ‘집권자’ ‘ ‘왕’ ‘머리’ ‘관리’ ‘지도자’ ‘통치자’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마 20:25; 행 4:26; 눅 8:41; 엡 2:2; 고전 2:6; 눅 12:58). 이 명사는 고전 헬라어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동사 ἄρχω(아르코)에서 나온 것이다. 이 단어는 ‘통치하다’(rule), ‘시작하다’(begin)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동사에서 관념적인 명사 ἀρχή(아르케, 시작)가 파생하였고, 그리고 힘이나 지위, 통치영역에서 머리가 되는 존재, ἄρχων(아르콘)이 만들어졌다.
힘이나 지위 통치의 영역에 있어서 ‘머리’ ‘시작’이 되는 존재로서 ἄρχων(아르콘)이 적용되는 존재는 교회가 고백하는 예수의 존재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선지자 요한은 서두에서 예수의 존재를 “땅의 임금들의 머리(아르콘ἄρχων)가 되신 예수”라고 호칭한다(계 1:5). 이것은 승리자의 모습으로 백마를 탄 예수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계시록 후반부에서 고백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호칭이라 할 수 있다(계 17:14; 19:16).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딤전 6:15)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을 우주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하여 권세와 힘을 가진 주권자이고, 존재에 있어서 모든 존재의 머리라는 의미로 ἄρχων(아르콘)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1세기 후반에 교회가 예수의 존재를 유일한 ἄρχων(아르콘)으로 고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 이것의 배경에는 ἄρχων(아르콘)이라는 용어가 왕이나 지도자, 관리와 같은 인간적이고 세속적 존재(막 9:18; 눅 8:41; 행 16:19)를 넘어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것처럼 공중의 권세를 잡은 악한 영들(아르콘테스ἄρχοντες)과 같은 영적 우주적 존재들의 의미로 사용하며(엡 2:2; 고전 2:6, 8), 교회는 그런 존재들의 힘과 지위를 부정하고, 예수의 존재만을 유일한 ἄρχων(아르콘)이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1세기말에 이미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의 존재가 교회 안에서 발견되고 있는데(요한복음,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이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신화 같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존재들이 ἄρχων(아르콘)이다(참조, 나그 함마디 문서 중에서 The Hypostasis of the Archons). 악한 물질세계와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르콘이고, 공중(세상)권세를 잡고 영혼이 몸을 벗어나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악한 영들이 ἄρχων(아르콘)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물질세계, 코스모스(세상)를 주관하는 악한 영들을 의미하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 στοιχεῖα τοῦ κόσμου)일 것이다(갈 4:3). “세상의 초등학문”의 지배를 받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역설하였다(골 2:8, 20). 공중에서 혹은 세상에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육신을 가진 인생을 지배하는 영들의 의미가 바울과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ἄρχων(아르콘)이다.
영지주의적인 신화에서는 인간의 몸을 포함하여 물질계에 속한 모든 존재들이 물질의 4가지 요소(elements, 물, 공기, 흙, 불)로 결합되어 있고, 이 물질적 존재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ἄρχων(아르콘)이고, 이것의 지배를 어떤 물질적 존재도 운명처럼 벗어날 수 없다. 바울은 이 악한 영들을 세상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στοιχεῖα(스토이케이아)라 부르고 있다. 물질적 요소를 가진 세상의 모든 존재는 물질계 세상의 머리, 집권자인 ἄρχων(아르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신화적 우주관을 모른다면, 한글성경의 번역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말은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 물질적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 즉 elemental spirit라는 존재로서 물질적 요소로 결합된 세상의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영’이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이해해야 한다.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στοιχεῖον(스토이케이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갈 4:3; 골 2:8, 20), 에베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의 대상이 더 이상 혈과 육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말한다(엡 6:12). 바울 시대, 혹은 1세기 말의 상황에서 성경의 저자는 영지주의자들, 혹은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의 세계관에 도전하면서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인생의 주권자가 되지 못하도록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ἄρχων(아르콘), 즉 온 세상의 유일한 왕과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 인생에 주인 노릇 하려는 많은 유혹과 도전이 있다.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