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이 춤 잘춘다고 하니까 발 아픈 줄 모르고 춘다고
이렇게 복학하자 죽기살기 공부에 매달렸다. 그동안 세상 밤송이 우엉송이 다 밟아보았다. 군대에서, 욕지도에서 두 번 자살할뻔 하기도 했다. 파도소리 들리던 섬의 컴컴한 방에서 혼자 촛불 켜놓고 성경도 읽었다.
등록금은 형이 마련해줬다. 아버님은 5,16을 쿠테타로 표현한 후 정보부에 끌려갔고 교육감에서 물러났다. 가세가 기울고 있었다. 어렵게 마련해준 돈이다. 급하면 관세음보살도 찾는다. 나는 허기진 놈 밥 먹듯 책을 파기 시작했다. 사실 그 대단한 형 친구들도 무슨 별나라에서 온 사람들 아니다.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한 인호형은 부친이 신문사 지국장이었고, 그분 어른과 비봉루 정명수 어른 그리고 아버님 세 분은 바둑 친구다. 문제형 부친은 진주서 알아주던 교육자였지만, 우리 아버님도 알아주던 교육자다. 태석형 출신은 문산초등학교 교문 옆 초라한 문방구점에 불과했다.
먹돌도 뚫으면 구멍이 난다. 이후 나는 강의실과 도서관을 달리기 시작했다. ‘핫 원! 핫 투! 핫 쓰리!’ 퀴트백이 상대편 가드 머리 위로 아메리칸 풋볼 공 던지면, 런너는 공을 가슴에 안고 상대편 꼴을 향해 죽기살기로 달린다. 상대편 가드가 힢불록으로 사오미터 전방에서 몸 던져 제지해도 손으로 떨쳐 받아넘기고, 발목 잡고늘어져도 뿌리치고 달린다. 나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책가방 가슴에 안고 무조건 강의실 도서관 달리기를 시작했다. 발등에 불은 떨어졌다. 죽느냐 사느냐. 3학점 짜리 두 과목 못받으면 나는 죽는다.
고등학교 때 나는 공부 대충했다. 시험 전에 철수와 대충 노트 흩어보고 시험쳤고, 그걸로 중상 실력 유지했다. 주로 평행봉에 붙어있었고, 그러고도 고대 입학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우선 인해전술을 펼쳤다. 5년 동안 군대와 섬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동안 머리가 텅 비고 말았다. 흔들면 녹쓴 껑통소리만 났다. 기초적인 영어 단어도 생각나지 않고, 이해력도 형광등 되고 말았다. 1학년에 복학하니, 용산고 경남고 출신 신입생들은 나보다 더 총명하다. 강의 끝나면 노트 좀 보자해서 미쳐 내가 기록 못한 내용 내 노트에 베껴썼다. 철학 과목은 난해한 사상과 논리가 많다. 그래 나는 매일 6시에 일어나 그날 배울 걸 아침에 미리 읽어보고 가도 이해가 될둥말둥했던 것이다. 이렇게 구걸하다시피 진도를 따라갔다.
그 대신 나는 하루 24 시간 공부에 매달렸다. 새벽 예습했고, 저녁 복습했다. 아침 식사 끝나면 바로 학교로 갔다. 가서 도서관 제일 좋은 명당 자리에 가방 던져놓고 자리 확보했다. 강의 끝나면 거기서 공부했고, 집에 가서 저녂 밥 먹고나면 다시 돌아왔다. 밤 10시 30분 청소하는 사람들이 의자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실내 전등 일부 소등하기 전엔 절대 퇴실하지 않았다. 여름엔 한 의자에 오래 앉아있으면 엉덩이 살이 짓무르고, 피가 옷에 배인다. 그러나 나는 궁둥이가 녹아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遍 義自見) 백번천번 무조건 읽어 머리에 쑤셔넣으려 노력했다. 나는 남이 한시간 공부하면 세시간 했다. 시간은 많이 쏟지만 도서관에서 책만 펴면 잡념이 일어난다. 산만해서 집중을 못했다. 처음엔 3시간 공부하면 1시간 쯤 집중 되었다. 나중엔 3시간 앉아있으면 2시간 집중이 되었다. 집중도 밀어붙이면 실력이 는다. 이런 식으로 머리 속 꾸중물 가라앉히는 시간을 줄였다.
요는 의지력과 인내력이다. 그런데 나는 체력적으로 힘이 세고 고집불통 성격도 좀 있다. 거기다 그동안 나는 만고풍상 겪었고, 두 번 다시 쓰라린 과거로 돌아가선 않된다. 도서관에서 피를 토하고 죽던지, 강의실에서 책 펴놓고 죽던지 결단을 내야했다. 그래 나는 남보다 일찍 등교했고, 늦게 귀가했다.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간 시간도 아까워 메모 펴놓고 공부했다. 개운사 옆 하숙집에서 학교 가는 그 시간도 아까워 손바닥에 메모지 들고 외우며 다녔다. 하루 24시간 중 네 시간만 잠 잤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오해도 받았다. 고기도 오래 묵으면 어룡이 된다. 하숙집이나 도서관에서 날 고시생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래 집에서나 학교에서 날 보면 그들이 먼저 인사하곤 했다. 급우래야 5살 어린 것들이다. 학교에서 철모르는 아이들과 무슨 말 섞겠는가. 나는 수도승처럼 밥 먹거나 화장실 가는 시간, 잠 자는 시간 빼고 공부에 몰두했다. 그래봐야 그건 명륜동 진고 선배들에 비하면 포크레인 앞에 삽질이다. 나는 수치스런 제적생 신세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렇게 살았다.
그러고 시험 때가 왔다. 시험 때가 오자 할 일이 없었다. 평소에 다해놓았기 때문이다. 영어 과목은 아예 시험 범위 안에 있는 전체 원문을 달달 외고 있었다. 섬머스쿨도 무사히 다녀왔다. 그러고 6개월 한 학기 끝내고 두근거리는 가슴 안고 교무과에 가서 성적표 받았을 때다. 먼저 재시험 두 과목부터 살펴보았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뿌애지고, 목이 메이고, 가슴이 요동쳤다. 6학점 나란히 다 나온 것이다. 나는 두 눈 딱고 두 과목 다시 확인한 후엔 딴 과목은 보지도 않았다. 성적표를 소중히 웟포켙 주머니에 넣고 본관 옆 라일락 벤치에 가서 앉았다. 거기 호랑이뺏지 가슴에 단 여학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저 이쁜이들이 다시 동문이 된 것이다.
그때 누가 툭 어깨를 쳤다. 63년 입학 동기 권모라는 친구다. ‘어이! 학점 나왔나?’ 그가 그렇게 물었다. 공부 뒷전이던 네가 학점 나왔냐는 뜻이다. ‘나왔다’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좀 보자’ 그가 달라붙었고, ‘나왔다는데 왜 그래?’ 나는 짐짓 싫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가 성적표 보았는데, ‘이기 니꺼 맞나?’ 갑자기 정색하고 묻는다. ‘내꺼다 왜?’. ‘교무과 가보자’. ‘교무과는 왜?’. ‘전과목 A학점 장학금 나온다’. 나는 그가 아니었으면 장학금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교무과 담당직원은 성적표 보더니, ‘이 정도 점수면 과 톱인데...’ 중얼거린다. 그 말 듣고 나는 기절초풍 했다. 완전 지옥에서 천당 가버린 것이다. 고대 장학금은 85점 이상 짜리, 90점 이상 짜리가 있다. 확인하니 내 성적은 90점 이상 중에서 전학년 최고다. 특대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 거쳤지만, 이런 거짓말 같은 경험 생전 처음이다.
즉각 장학금 탔다는 전보 집에 쳐서 효도 좀 했다. 그런데 되는 집은 개를 낳아도 청삽살이라는 말 있다. 한번 특대생 되자, 피 맛 본 귀신 달라붙듯 책에 달라붙어 그 다음 매학기도 줄줄이 사탕이다. 산 정상은 한번 오르기가 어렵지, 오르고나면 쉽다. ‘무당 보고 춤 잘춘다 하니까 발 아푼 줄 모르고 춘다’는 말 있다. 졸업할 때까지 나는 그 장단으로 놀다가 나왔다.
첫댓글 고대에 들어가서 집념을 불태우고 궁댕이가 배기고 아파도 참고 견디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전학년에서 일등한 것이 가문의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