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시라는 것을 써온 저의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순서 없이 나열해 보겠습니다. 많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육신의 늙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시가 늙어서는 그 누구도 읽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늙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나 다 알면서 안 한 거나 못하거나 하는 것이다. 아닌 게 귀찮다고 다 아는 사실인데 뭐 하면서 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몇 편의 시를 읽으셨나요. 그것도 현대시를 몇 편이나 읽으셨나요. 그렇다고 현대시만이 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젊은 작가의 시를 찾아 얼마나 읽으려 노력을 하셨는지요.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현대시를 읽지 않고 시가 늙지 않는다고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항상 깨어 있지않으면 안 되는 것이 시인입니다. 오늘 당장 시경 삼백수를 읽어보세요…. 어떤 감흥이 일어나는가를 보시면 알게 되겠지요. 저는 그 시경이라는 것을 읽고 알았습니다. 시도 한 시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뉴스였다고요. 지금와 보면 그때 그 당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을 그 시경의 시편들도다 말장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말이 틀렸는지는 모릅니다. 지금 이 현실에서 나의 시는 어느 정도 시대와 동떨어지지 않고 발맞춰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최소한 시인이라면 아니 글을 쓰고 있는 문인이라면 오늘 과연 몇 편의 시를 몇 줄의 수필을 읽었으며 썼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지자 불여 호지자 호지자 불려 낙지자 한 말처럼 아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낫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을 쫒아갈 수 없다는 이 말은 무슨 말인가요. 즐길 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즘 현대시 정말 얼마나 머리가 아픈가요. 저도 머리가 아파 싫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도 없이 읽습니다. 뒤처지기 싫어서요. 그리고 무작정 씁니다. 누가 읽어주든 아니면 알아주든 상관없이 읽고 씁니다. 그러다 보니 그저 습관처럼 읽고 습관처럼 써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는 이렇고 저렇고 수학 문제처럼 공식으로 백번 천 번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체험하고 체득하고 실천하는 삶 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누군들 처음부터 좋은 시를 썼겠습니까? 그렇다고 제가 시를 잘 쓰고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시는 좋고 나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그 시에 감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시를 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 좋은 시라 할 수 없지요. 다 사설입니다. 문학회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습니다. 문학동아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문학의 척도가 되기도 하고 함께 응원하는 곳이 문학동아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현학적 권위의식으로 무시하거나 무관심하면 함께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가끔 술도 진탕 먹고 가슴을 비워보기도 하고 혼숙도 하던 문학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통용되는 시대는 아닐지라도 서로 마음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문학을 주제로 토론하고 성숙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라는 장르가 가볍거나 쉬운 장르는 결단코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누군가 아리스토텔레스인지 아랫도리 털 났다 인지는 모르나 그 이후로는 창작은 없다. 모방일 뿐이라고 하는 말에 왜 자꾸만 공감이 가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시를 잘 쓰든 못쓰든 시를 쓰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읽기입니다. 읽어야 모방을 하든 흉내를 내든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남의 시를 읽지 않으면 자신에게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갇힌 우물 속에서 갇혀있는 비단잉어가 자신의 몸집을 더 키우지 않은 코이처럼 스스로 만족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시를 쓰시고 문단의 윗자리에 계신 선생님도 계시고 이제 막 시란 무엇인가에 빠져있는 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십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읽고 쓰기를 반복하면서 시란 무엇인가를 이백오십 꼭지를 썼습니다. 만 그래도 시란 이런 것이는다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시란 그만큼 어렵고 광범위한 분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잡았다 싶어도 미꾸라지거나 지렁이기가 십상인 것이 시입니다. 그리고 지난달 10분 강의에서 언급하였듯이 기왕 시를 쓰기로 하였든 산문을 쓰기로 하였든 사설(辭說)은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시가 외면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은유가 어떻고 비유가 어쩌고 그것보다 우선 씨앗을 발견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씨앗이 안 좋은 것을 아무리 기르고 가꾸고 한들 씨앗이 없는데 섭만 무성하게 키우면 뭐하겠습니까? 훗날 추수꾼이 불더미에 넣어버리고 말 것을요. 그렇다면 좋은 씨앗을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많이 읽기입니다. 많이 또 많이 그것도 목숨 걸고 읽어야 평생 좋은 씨앗 하나 건질까 말까입니다. 씨앗만 좋으면 이렇게 키우든 저렇게 키우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여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시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합니다. 남이 다닌 길을 백날 다녀봐야 남이 주워보고 신통찮아서 버린 쓰레기만 만지작거리며 보물인가 하는 것입니다. 남이 다녀보지 않은 길의 것은 모두가 신기한 보물입니다. 이런 눈을 뜨려면 밤새워 책을 읽어야 하고 밤새 몽상 속에 헤매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어디 보물이 나 여기 떨어졌으니 주우시오. 하고 큰 행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여기서 보물 하나씩 건지신 분은 다 그렇게 남잘 때 잠 안 자고 남 놀 때 남의 시를 읽든 필사를 하든 하였습니다. 보통 시인의 첫걸음이 좋은 시 삼천 편 필사하기가 있습니다. 삼백 편씩은 필사하셨겠지요. 말이 삼천 편이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정말 어렵습니다. 아마도 제가 시라고 끄적거린 것이 만편정도는 될 것입니다. 다 버릴 것들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시인은 만 편을 버리고 오천 편 정도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루에 몇 편을 써야 만 오천 편을 쓸 것이며 얼마의 시간을 투자해야 그렇게 되겠는지요.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는 시를 읽을 때 시력도 안 좋고 수시로 꺼내 읽기도 좋고 하여 꼭 복사지에 프린트해서 읽었습니다. 어느 날 그것을 버릴 수 없어 모으다 보니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우더군요. 아마도 복사용지로 30개는 몰라도 20개는 족히 넘을 겁니다. 물론 그것을 주머니에 꽂고 다녔으니 옷소매가 성할 리 없었죠. 옷소매가 다 헤졌습니다. 지금와 생각하면 미쳤던 거죠.. 무엇이든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춘문예를 거치면서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와 생각하면 무척이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스스로 만족했으니까요. 그러면서 즐거움이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요즘도 시를 쓸 때면 두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씨앗을 만나면 아직도 첫사랑처럼 밤잠을 설치곤 합니다. 시가 이렇고 저렇고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형이상학이 어쩌고 형이하학이 어쩌고 이미지가 어쩌고 뭐 그런 것은 다 하나의 언어에 수학공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학문 그것이 살아가는데 도움은 될지 몰라도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냥 최선을 다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빨래하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도마질을 하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기왕지사 시작한 것이니 끝이 어디쯤인지를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죽는 것이겠지만요. 요즘 저는 별도로 생각하지 않아도 중독이 돼서 그런지 몰라도 밭일을 하든 풀을 베든 시를 쓰다 보면 그 상황들이 중복되면서 시에 스며들더라고요. 이것이 바로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시를 써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어서 시를 써라! 이 말은 저는 시를 쓰기 위하여 고서를 먼저 읽었습니다. 논어 맹자 소학 대학 주역 명심보감 성경 불경 닥치는대로 읽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많이 읽은 것은 논어와 주역이었습니다. 논어는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아 많이 읽었구요. 주역은 이해할 수 없어서 가장 많이 읽었습니다. 요즘은 우주변화의 원리 라는 책을 읽습니다. 음양오행에 관한 책입니다. 그 어느 깊이에 시의 씨앗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안에서 구하는 것보다 창문을 열어보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사물들이 무한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 그것이 바로, 모두가 다 시인 입니다. 저들은 시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서 있는 것입니다. 무지한 우리가 그 시를 읽지 못할 뿐입니다. 시선이라는 것은 인간의 눈높이로 보는 것이 아닌 시의 눈높이로 보는 것이 바로 시안인 것이지요.. 시인이 열리면 언어도 당연히 따라 열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새로운 시어도 탄생할 수도 있고요. 꼭 새로운 시어가 아니어도 구어체로도 시와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얼마나 진실성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가 문제지요. 하지만, 그 시선이라는 것이 잘못하면 이상한 세계가 보일 수도, 혹 볼 수도 있지요. 자칫하면 혼자만의 세계에 속에 갇히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누가 꺼내줄 수도 없습니다. 좌우간 기왕지사 시작한 거 끝이 어딘지 한번을 봐야하지 않을까요. 이제 뒤 돌아 선다는 것은 너무 허망한 일이니까요.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릅니다. 시란 무엇인가를 250여 꼭지 쓰다 보니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오영록 시인/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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