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종(唐宗)이 위 정공(魏鄭公)의 집을 사서 돌려준 고사를 본받아야 하겠다.”
초년에 태종(626~649)이 위 정공(魏鄭公 위징(魏徵)의 봉호가 정국공(鄭國公)임)
자제비(自製碑)를 무너뜨렸으니 : 위징(魏徵)이 죽은 뒤에 당 태종은 금원(禁苑)의 서루(西樓)에 올라 위징의 상여(喪輿)를 바라보며 곡하고 스스로 비문을 지어 돌에 새기게 하였는데, 뒤에 위징이 천거한 후군집(侯君集)이 반역죄에 걸려 죽자 간신의 참소를 듣고서 그 비를 허물게 하였다. 《自治通鑑 唐紀》
위정공(魏鄭公) : 580~643. 중국 당나라 초기의 공신ㆍ학자인 위징(魏徵)을 지칭한다. 위징의 자는 현성(玄成)으로 636년 양(梁), 진(陳),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의 5개 왕조에 대한 역사 편찬을 주도한 공으로 광록대부(光綠大夫)에 임명되었다. 태종을 도와 훗날 동아시아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모범이 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 정공은 당 태종(唐太宗)의 명신(名臣)이었던 위징(魏徵)이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일컫는 것이고, 소릉(昭陵)은 당 태종과 그의 비(妃)인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능인데, 문덕황후가 먼저 죽었으므로 그를 먼저 그곳에 장사하였다. 당 태종이 문덕황후를 소릉에 장사하고 나서 아내 생각을 억누르지 못하여, 후원(後苑)에다 여러 층의 관망대를 만들어 놓고 소릉을 바라보곤 하다가 한 번은 위징을 데리고 올라가 같이 바라보도록 했다. 그러자 위징이 찬찬히 보다가 “신은 눈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니, 태종이 저기라고 가리키므로, 위징이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 당 고조(唐高祖)의 능)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신이 이미 보았습니다.” 한 것을 가리킨다. 《唐書 卷97 魏徵列傳》
위 정공(魏鄭公)에 …… 고사 : 위 정공은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진 당(唐) 나라 위징(魏徵)을 가리킨다.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국가의 제도를 무시하고 중남(中男 20세 미만의 남자)을 뽑아서 입군(入軍)시킬 것을 명하자, 위징이 그 부당성을 직간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대단히 진노하여 위징을 꾸짖으므로, 위징이 임금의 여러 가지 허위적인 처사를 열거하면서 그 부당성을 자세히 설명하니, 태종이 자신의 과오를 크게 뉘우치고 중남을 입군시키는 일을 중지시킴과 아울러 위징에게 금항아리 하나를 하사했던 고사이다. 《魏鄭公諫錄 卷1 諫簡點中男入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