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제75회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영화평점 #후엠아이 #나는똥팔이다 #인덴볼켄 #자본주의 풍자 #블랙코미디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21장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인간본성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 #2베드로1장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누구는 이 영화가 적당히 재미있고 원색적인 풍자에 속 시원하다고도 하고, 반면에 그닥?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기도 한다. 그만큼 '호불호'가 분명하다. 내 평점은 취향이 아니고서는 일부러 찾아 볼 정도의 영화는 아니라는 결론이다. 나는 不好다.
결말 부분은 참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7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줄 정도까지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다. 미천한 나의 사회주의적(?) 관념과 영화 감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의문이다. 물론 인물들과 이름들, 소품과 대사들 안에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군상에 대한 숨겨진 의미들이 시종일관 내포되어 있지만 영화가 너무 노골적이고 과하다. 별로 재미가 없다.
그래도 평점으로 별점 셋(★★★)을 준 것은 영화 말미에서의 전혀 상상도, 예상도 하지 못한 참신하면서도 탁월한 깊은 사유적 마무리 때문이다.
<슬픔의 삼각형>이란 제목에서 드러나듯 돈(재화)이란 권력적 피라미드 구조에 노예가 된 작금의 세상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호화로운 크루즈船의 전복顚覆과 함께 무인도에 조난 당한 후, A와 Z의 힘의 뒤집어짐, 역할의 뒤바뀜을 대비시키며, 말 그대로 자본주의적 현 사회에 대한 냉소적 비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씁쓸한? 유쾌한? 블랙 코미디 영화다.
그냥 부의 천박함을 날 것 그대로 화면에 담아냈다. 신랄하면서도 직설적으로 세상의 가진 자들에 대해, 권력적 인간 본성에 대해 매섭고도 슬프게 관객을 향해 질문하는 도발적 내용이다.
포스터에 나타난 것처럼 인간의 허세적 욕망의 본성은 구토물마저 황금 빛깔인 역겨움이다. 결국은 그렇게 내 안의 거짓인 나, 탐욕적 이기와 사욕의 위선인 나를 다 토해내야만이 사람다운 사람, 마음이 가벼운 하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우린 언제나, 너무나 쉽게 잊고 사는가 보다.
"Who am I..? 내가 누구냐?"
화려하기 그지없는 크루즈 안에 세상의 값싼 삼각형 꼭대기 부자들이 온갖 오만한 대우를 받으며 허세를 떨고 군림하고 있는 반면 이들을 위해 일하는 선장과 승무원, 그리고 또 그들 밑의 최하위 계급으로 배를 닦고 잔일을 하는 청소부들이 존재하네요.
어쩌다가 인생 역전.
해적선에 의해 크루즈船이 침몰하면서 무인도에 남게 된 그들. 이제는 돈이 아무 쓸모도 없게 된, 그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 상황.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부자들에게 육체노동으로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생존 능력 갑인, 말 그대로 어제는 크루즈의 맨 밑바닥 청소부였던 <애비게일>이 이젠 거들먹거리던 부자 그들을 살리기도 죽일 수도 있는 생활권력의 꼭지점이 되는 반전, 권력의 판도가 뒤집혀지는 "캡틴"의 자리에 당당히 서게 되지요.
애비게일은 자신이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주기 전에 부자들에게 묻습니다.
후 엠 아이?
... ...!
후 엠 아이?
... 캡틴...!
아이 엠 캡틴!
인생 전복顚覆, 삶의 완전한 뒤집힘이지요.
그런데 갑작스런 권력의 제1인자 자리에 선 역전의 애비게일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자애와 평화로의 회복'이 아닌, 기존의 천박한 부자들이 여태껏 자기들에게 해왔던 비굴한 짓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세상 권력의 모순을 그대로 답습하는 씁쓸함이네요.
그런가 봅니다. 제도권의 꼭대기,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적 그 권력의 위치에 몸 담게 되면 모두가 하얀 이를 드러내는 "게걸 든 이리들"(마태 7,15)과도 같이 인간 본연의 저급한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광끼!의 적나라함인가 봅니다.
배가 전복하는 과정에서 화면 가득히 화장실 변기에 오물이 치솟아 오르며 배 안을 돌아다니지요. '나는 똥 팔이다' 라며 자기의 정체성을 배설한 그 고약하고 더러운 냄새나는 '똥 부자'들이 오물에 미끄러지고 나뒹굴며 온통 뒤집어 쓰는 역겨운 풍자의 장면들이 불쾌할 정도로 꽤 오래도록 비춰지고 있지요.
결국 그런 것을. 인간이 가진 본성의 사악함, 그 나약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속적 값싼 인생살이의 결과는 고스란히 동일한 내 삶에서의 상처입고 뒤뚱거리는 나의 원초적 오물덩어리의 슬픈 삶을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인데 말이지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존재적 정체성의 성찰이 아닌, '내가 누구지?'라며 은연중에 움켜진 자리에서 윽박지르던 똥냄새 풍겨댔던 얼룩진 삶의 구석구석들이 새삼 아프게 다가 오네요.
치고 박고 물고 헐뜯고 싸우는 인간의 죄에 물든 본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2베드 1,4) 하느님처럼의 삶으로 돌아설 때만이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2베드 1,4)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 찬 영원한 사랑의 날들을 누릴 수 있음인데 말이죠.
"뭍에 내려서 보니"(요한 21,9)
엊그제 같이 점심을 먹던 본당 형제가 우스게 소리로 '형, 티브이 뉴스에 나오는지 유심히 보는데 한 번도 안 보이데?' 하고 묻네요. 말인즉, 요즘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전철역과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데 그런 시위에 다니냐는 것이지요.
'어, 나는 그런(본질이 훼손된) 거 무지 싫어해!'
더 얼마 전에 아파트 부녀 회장이셨던 자매님과 이야기 도중에 '단체 회장이면 얼마 받아?' '우리(신앙 단체)는 그런 거 없는 데요.' '그래도 뭔가 생기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자기가 안 받아서 그렇지?'
사랑, 참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참 막막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작은 가방 하나 등에 메고 그렇게 가타리나와 무작정 우리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그곳으로부터의 벗어나기를 감행했지만 사랑만의 사랑이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지는 못했지요. 거저 배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열어주지 못했지요. 사랑의 신랄한 현실적 허울을 직시하는 가진 것 없는 빈주머니 슬픈 날들이 계속되었지요.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해야 하나? 이 험한 세상에서 이 몸으로 살아갈 힘은, 능력은 있는 것일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나에게 허락된 삶은? 해야 하는 건 무엇일까? 공부를 할까? 공무원 시험을 봐서 조금이나마 안정된 삶을 꾸릴까?
마음에 더없이 서글픈 늦가을의 찬바람이 스며들 그 무렵, 시의원인 어떤 분이 얼마뒤에 있을 선거 광고 사진을 함께 -크게- 찍자는 제의를 해 왔네요. 그 시의원은 후에 시의장도 되었지만 무엇보다 운수사업을 크게 하는 재력가이기도 했지요. 나는 일언반구 아무런 댓구對句도 하지 않았네요.
신앙적으로 나름 평안한 마음의 생활을 유지해 가던 어느 날, 같은(천주교 신앙단체) 회원 한 사람이 여러차례 누굴 한 번만 만나자고 하더니 급기야 그곳 사무국장인지 보좌진인지 하는 사람이 전화를 하였네요. 그러다가는 어느 날 둘이 같이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자기네 후보(?) 한번 만나 보자는 것이었지요. 이번 선거에서는 구청장으로 출마하는데 100% 당선각이라며.
자기네 정당 지구사무실이 있는 건물 아랫층에 장애인 센터 사무실을 준비하고 있으니 와서 함께 일하자는 것이었지요. '야, 그냥 니가 가서 하면 되잖아. 난 싫어.' 하고는 아예 찾아가 보지도 두 번 다시 연락을 받지도 않았네요. 몇 달 후 그분(?)이 내가 사는 구의 구청장이 되었고 그후 국회의원을 지냈고 현재 현역 국회위원이기도 하네요.
캄캄한 밤 망망대해에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간당간당 일엽편주 비루한 노를 붙잡고 있는 위태위태한 무능력한 삶의 시간이 멈출 줄 모르고 파도쳤지만 그래도 세상의 시끄러운 이전투구泥田鬪狗, 자기 욕망과 이익에 매몰되어 두려움과 오만으로 아우성치는 진흙탕에서의 개싸움 같은 삶을 영위하기 보다는 비록 "못 잡았습니다."(요한 21,5) 하고 실패한 인생을 말할지언정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요한 21,6)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하느님의 모상 imago dei, 하느님의 이미지인 '그리스도들'이 되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었나 봅니다.
보다 더 성당 미사를 찾아 다니고 성경을 읽으려 애쓰는 깡다구였네요. 어쩌면 달리 할 일이 없었기에 충분히 허락된 시간이었을지도 모를 신비로움!
그 향기로운 영의 갈망 안에서 거친 유혹의 비바람이 걷히고 고요하면서도 찰랑찰랑한 새 아침이 찾아들었지요.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감미로운 당신 목소리에 주춤 빈손의 바다를 뒤로 하고 "뭍에 내려서 보니"( 21,9), 이미 당신 친히 "숯불을 피워놓고 그 위에 물고기도, 빵도 준비해 두시고"(요한 21,9) 계셨었네요.
창조 이전부터, 미리, 예전부터 마련된 온통 넘치는 은총의 날들인 것을.
언제나 그렇게 온통 나에 대한 사랑뿐이신 것을!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시편 137,7)
영화 맨 마지막, 애비게일은 이곳이 무인도가 아닌, 더할나위없는 행복이 마련된 섬인 것을 알게된 야야를 죽이기 위해 돌을 집어드네요. 고난의 섬에서 모두가 바라는 평안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임에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작은 권력의 삶을 이어가기 위한 인간의 악한 본성에 무릎 꿇는, "보시니 좋았던"(창세 1장) 하늘 존재의 또다른 허물어짐이지요.
세상의 계급적 피라미드 삼각형의 권력 구조는 슬프지만 결코 그 형태가 바뀌지 않겠지요. 내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변할 때만이 사라지는 것이기에 말이죠.
결국 세상에 맛들이려는 내 인간적 탐욕의 본성이 침몰하고, 인식의 사고가 뒤집히는 전복을 통해 의로운 하느님 은총으로의 전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하느님 선한 마음으로의 성화된 하느님처럼의 삶 안에만이 세상 삼각형의 구조를 모두가 평등한 정육각형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겠죠.
부수려고, 우뚝 높이 서려고 움켜쥔 내 손의, 내 욕망의 돌을 내려놓아야 할까 봅니다.
이제 향기롭고 복된 당신 은총에 방해가 되는 인간 본성적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한 나의 작은 노력들이 선행 되어야 하나 봅니다.
지나가는 세상을 너무나 가까이 두려 애착하며 지내는 아침 안개와도 같은 허망한 하루하루의 반짝 즐거움을 버려야 할까 봅니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완전히 불타 올라 내 육적 인간 본성을 태워 없앨 수 있기를
내 삶의 탐욕을 불사르고 태워 내어, 하느님 본성 안에서 위로 받을수 있기를
그리하여 당신 모상의 이미지로 나를 그려가는 하늘 나라 화가가 될 수 있기를
그리스도로, 하느님으로의 본연의 '내'가 될 수 있기를!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를 행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