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28, 팔십대의 노인이 된 삼손목사
마태목사 탈출사건이 있었던 그때로부터 40여년이 지난 2011년 어느 봄날 저녁, 부산의 동래 농심호텔앞 ‘부산 한정식’이라는 식당에서 세칭 동방교의 김태문 삼손목사와 만나 저녁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 노영구시절에 동방교의 대기처를 떠나 간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2대 교주 노영구가 그를 다루기 힘드니까 무슨 구실을 붙여 집으로 돌려 보냈다고 알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무슨 지시를 받아 어떤 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굳세게 믿고 있는 불통의 사나이다.
1대 교주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후 그의 시신을 안양의 어느 공동묘지에 가매장 했다가 경기도의 소사면 소래리의 세칭 동방교에서 부르는 '성지'로 이장한 장본인이기도 한다. 노광공 교주의 묘지가 있는 성지(聖地), 경기도 소사면 ‘소래’라는 지명의 뜻이 원래 성민(동방교 신도를 일컫는 통칭)들이 ‘솟아나서 오라’는 뜻이라고 그때는 한창 말하고 있었다. 다음은 ‘질곡의 삶, 애증(愛憎)의 세월’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에 나오는 실화 한 토막이다.
[ 이곳에서 나의 경험담이다. 내가 심취했던 이 이단종교의 자칭 하나님인 교주가 54세에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1967년에 사망했을 때 무슨 하늘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옥체(玉體)를 어느 공동묘지에 임시 가매장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경기도 소사면 소래리(박태선의 신앙촌에서 서쪽 방면)에 있는 산을 단장 하더니, 가매장한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파내어 이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그리고 왕릉처럼 무덤을 성역화 해 놓고(그 곳을 성지(聖地)라고 불렀다) 전기불도 없는 캄캄한 밤 산속에서 한 두 시간에 한 번씩 나는 랜턴을 들고 순찰을 하며 하나님(?)의 무덤을 지켰다. ]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61-
김태문 삼손목사, 그는 얼굴에 우뚝솟은 큼직한 코를 달고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성질도 그에 못지않다. 명명(동방교에서 부르는 이름)이 삼손인데 덩치도 크고 힘도 장사라 그 이름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원래 부산의 세칭 동방교 '당감동10교회' 출신으로 권병찬 아마샤 전도사(후에 어느날 부터 갑자기 목사라고 불렀다)와 같은 출신이다.
뚜렷한 직업도 없이 힘 하나로 버티던 그는 부산 당감동의 철도공작창 인근에 살면서 야밤에 공작창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무거운 고철을 훔쳐내어 팔아먹던 일명 ‘도꾸다이’(特攻隊의 일본식발음)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어찌 세칭 동방교에 전도를 받아 들어와 서울 대기처로 올라가 동방교의 중간간부 서열에 올라간 인물이다.
상부의 명령을 받으면 우직하게 밀어 부쳐서 대기자들에게는 엄청 고역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서울 용산의 수원정으로 올라가 일하고 있을때 주로 양학식 베드로 목사가 주관하는 밤12시경 점호성격의 예배가 끝나고 나면 나를 별도로 불러 손가락 두어개 굵기만한 막대기로 10여차례 허벅지를 갈기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의 눈에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보다. 찍 소리 못하고 얻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수십군데에 산재한 여러 대기처의 건물이나 농장에 작업이나 보수할 일이 있으면 그가 대기자들을 차에 실어 데리고 가서 목재를 다듬고 세멘트와 모래를 섞어 비비고 바르고 떼우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였다. 힘쓰는 일에는 장사지만 머리 쓰는 일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
[ 삼손 목사의 설교가 시작된다. 아니 이것은 ‘설교’ 라는 말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으며,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군대에서 군기를 잡는 점호 시간이다. 군대에서 이유란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다. 특유의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 “무씬 노무(무슨 놈의) 일을 그 따위로 하고 있어!” 두들겨 팰 태세는 항상 완료되어 있다. 조직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는 누구 한 명은 시범 케이스로 자신의 몸을 교관(간부)들의 현란한 구타 기술에 샌드백이 되어주는 수밖에 없다. 삼손 목사, 나사로 장로, 등등 어리석은 중간 간부들,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들 역시 특별한 지식과 기술, 직업 없이 어디에서 예수 믿다 한 사람( 사이비교주)에게 속아서 위대한 간부의 서열까지 오른 사람들인 것이다. ]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45)
마태목사를 잡아다 놓고 심판할 때 ‘영혼은 할아버지(노광공)가 책임 지세요, 육신은 내가 책임 지겠습니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던 바로 그 사람이다. 마태목사가 탈출하지 못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으면 어느 대기처 넓은 농장 한쪽 구석에 시신 하나로 묻어버릴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만큼 그는 우직하고 충성심 덩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사람이 어떻게 변했을까 무척 궁금했다. 40여년만에 서로 연락이 되어 밥 한그릇 나누는 자리인 것이다. 수인사(修人事)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수십년 전의 추억을 더듬어 나갔다. 그것도 추억이라 할 수 있을까. 올해 83세라고 하는데 큰 덩치는 옛날 그대로이고 질뚝없던 그 성격도 그대로이다. 지금 자기 주위의 사람들은 자기를 영국신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 하 하 하 ! 웃음이 터질 일이다.
그러면 나는 영국왕실이 내린 백작 작위를 수여 받았다고 해도 되겠다. 또 자기의 전생 고향은 영국이라고도 한다. 아마 노광공 교주가 그런 말을 했던가 보다. 그 전생을 굳게 믿고 있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세칭 동방교의 전(前) 중간간부, 그렇다면 세칭 동방교는 불교일까? 예수교 간판을 달고있는 기독교일까?
사람에게는 원판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부산의 변두리 어느 동네에서 한때 세칭 동방교의 신도였던 그의 부인과 조그만 슈퍼를 운영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한때는 생계를 위하여 택시운전도 했다고 하는데 편집증(偏執症)적이고 자기 혼자만의 망상에 사로잡혀있는 구제불능이라 할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금도 자기가 세칭 동방교의 교주로부터 무슨 큰 비밀사명을 받아 일을 수행하고 있는것 처럼 자기도취에 빠져서 한참 수다를 떠는데 자기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요절, 세상을 하직한지 50년이 다 되어가는 1대 교주 노광공에게서 무슨 밀명을 받아 지금도 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긴다.
한번 잘못 주입된 이단사이비의 종교사상은 이렇게도 질긴 것이었던가. 내가 기가 차다는 어투로 ‘무슨 일을 하는지 본인이 말을 안하는데 남이 우째 알거요’ 하니 그냥 계면쩍게 씩 웃고 만다. 대화중에 나눈 다음 몇가지는 기억에 남아 있다.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자기보다 다섯살 위인데 마산세관 계장 출신이었다고 한다.
교주 노광공은 평생에 두 번 결혼했는데 대구 동산병원 수간호원 김정선과 두 번째 결혼 할 때는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주례를 섰다고 한다. 이땅에 두 번째 오실 그분은 결혼을 두 번 하게 되어 있다고, 그것이 무슨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딱 들어 맞았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설명했는데 두 번째 오실 그분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그 예언서가 무엇인지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1대 교주 노광공이 세상을 하직한 후 안양공동묘지에 40일간 가매장했다가 경기도 소사면 소래로 이장한 장본인이 자기라는 자랑도 빼 놓지 않았다. 마태목사를 잡아다 놓고 심판할 때 ‘영혼은 할아버지(노광공)가 책임 지세요, 육신은 내가 책임 지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주먹을 치켜들고 입에 침을 튀기며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형사법상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사건이라 마음놓고 떠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