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눈물인가?
언뜻 사마헌의 눈가에 맺히다 사라진 투명한 물기는...
[그럼에도 노신이 소천주, 당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은... 이 모든 음모자가 누구임을 알았기 때문이오이다. 그들은 당신과 노신이 너무도 신임했던 인물들. 그래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던 인물들. 물론 그들에 의해 당신의 부친께서도 암살을 당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제거하실 수만 있다면 한 가닥의 희망은 있소이다. 그들을 제거하고 강제로라도 장로원의 구대장로를 끌어낸 후 대소림사의 무한한 잠재력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사지로 뛰어든 군협천의 고수들을 삼할이라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일을 완벽하게 중양절 이전까지만 끝내실 수가 있다면 희망은 있소이다. 다시 천마교를 이 땅에서 척멸할 수 있는 희망이...
그러나... 그러나... 어려운 일이오이다. 참으로 어려운...]
사마헌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사마헌은 그 불가능에 매달린 채 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어둠 속에서웅크린채 한 사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다. 어쩌면 이 순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생의 의미라도 되는 것처럼.
사마헌은 시선을 먼 어둠속으로 던졌다. 그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초췌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바로 철류향이라는. 사마헌은 문득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시오. 소천주? 노신이 당신에게 기대하는 한 가닥의 희망은 어쩌면 당신의 무한한 잠재력 바로 그것일 수도 있음을.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으나...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은 노신이 본 인물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한데 바로 이때였다.
부르르... 돌연 사마헌의 전신이 격렬한 떨림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뿐이 아니었다.
피! 그의 메마른 입술을 헤집고 흘러 나오는 것은 시뻘건 피였으니... 그리고, 그의 가슴의 옷을 적시며 번져가고 있는 것도 피였다. 그의 가슴. 핏빛의 검 끝이 애초에 거기에 붙어 있었던 것처럼 옷을 찢고 헤집고 나와 있는 것이었다.
[으으...]
처음에 사마헌의 두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그러나 그 경악의 빛은 이내 체념의 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문득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아이야. 너는 아직도 깨닫지 못했더냐. 사는 영원히 정을 이길 수 없음을? 이 할아비가... 십팔 년 전 너를 죽이지 않고... 그래도 핏줄로 이어진 인연이기에...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세상 사람을 속인 채 이 군협천에 너... 너를 데리고 온 것은... 헉헉... 네가... 네 녀석이 비참하게 죽어간 네 아비의 뒤를 이어 천마교의 부활 따위나 꿈꾸라고 한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이곳에서... 정의 온상지에서... 사는 정을 영원히 넘볼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깨우쳐 주려는데 더 큰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사악한 심성을 씻고... 이 무림을 위한 영웅이 되어 주길 이 할아비는 진정으로 바라고 바래왔다. 헌데...]
돌연, 사마헌은 벼락처럼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한데, 네놈은 지난 세월 동안 오직 한과 증오만 키워왔다. 겉으로는 온화한척, 관대한 척 했으나 내심으로는 천마교의 부활만을 노리고 있었고 사악한 심성만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할아비마저 죽여야 할 정도로 네놈의 마성은 극에 이르렀다.]
[그만하시오.]
지극히 무심한 음성이 돌연 사마헌의 등쪽에서 들려왔다.
어둠, 그곳에 고요히 서 있는 한사람. 일신에 백의를 휘감고 있는 그는 이삼사세 가량의 청년이었다. 용모는 어둠속에서도 가히 눈이 부실 지경. 짙은 눈썹은 은연중 남아의 힘찬 기개를 풍기고 있었으며 그 아래 두 눈은 차가움과 뜨거운 열정을 함께 품고 있었다. 콧날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채 뚜렷한 윤곽을 지녔으며, 입술은 꽃잎처럼 붉고 연농한 매혹을 풍긴다.
게다가 청년의 피부는 여인의 속살처럼 희고 투명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청년의 미태는 눈을 씻고도 한 점의 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완미 그 자체이다.
아름다운 사마운. 군협천 내에서 가장 깨끗하고 청결하며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특이한 기질의 인물이었다. 인간을 포용하는 능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누구나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자질이 근세 무림사상 보기가 힘들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대장로 사마헌에 의해 십팔 년 전 군협천에 들어선 어린 아이였다.
사마헌이 대장로의 신분으로 이백여년을 넘는 세월 군협천주를 대대로 보필해온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화된 사실이지만. 그러나, 누구도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정확히 그는 백년의 세월동안 군협천을 떠나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세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철저히 비밀리에 가려진 백년의 공백기간, 그리고 그는 그 사라진 백여년만에 천마교주 적용사우의 죽음을 끝으로 다시 군협천에 나타났다.
증손자라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당신 그 어린아이의 나이는 팔세. 그러니까 십팔년이 지난 지금 그 어린아이의 나이는 이십 육세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는 이 사마운이며... 한데 지금, 그 사마운이 증조부 사마헌의 등에 검을 쑤셔박은 것이니 이것을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이때 사마운의 입술이 무겁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오. 오히려 이런 인간들에게 아버님께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이 원통했을 뿐이오.]
그는 천천히 사마헌의 등을 감싸 안았다.
[할아버님... 당신을 용서하고 싶었으나... 내게는 그런 자비가 없었소이다. 당신께서 이 몸을 원망한다 해도 그것은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후회는 않소이다.]
사마운의 눈에 보일 듯 말듯 물기가 스쳐간다.
사마헌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입으로 연신 핏덩이를 토하며... 이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마헌은 비애 서린 웃음을 툴툴 흘렸다.
[아...아이야...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너의 핏줄로써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네 아비의 뒤를 이어 천마교의 부활만은 막아 달라는 것... 헉헉...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너의 파멸을 보고 싶지 않음에서... 마지막 부탁...]
간절했다. 사마헌의 피와 함께 토해지는 음성은. 그러나, 사마운의 얼굴엔 싸늘한 냉소만이 물려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죽음. 비참한 그분들의 죽음이 머리속에 남아있는 이상. 그리고 나의 쌍둥이 동생... 그 아이는 행여 나의 신분이 이곳에서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어린 나이에 흉측한 검상을 얼굴에 그려야 했습니다. 그 한.. 그 처절한 증오를 어찌 잊을 수 있겠으며... 이제사 복수할 기회가 찾아들었는데... 어찌 그것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손에 의해 천마교는 다시 부활될 것이며 군협천의 시대는 끝이 나고 천마교의 시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후후후. 그리고 이 땅에 정은 사를 넘볼 수 없다는 하나의 진리를 만들 것입니다.]
[아아...]
사마헌은 절망했다. 정신이 희미해진다.
(그때 죽였어야 했거늘... 아아... 내게 남은 한 가닥의 자비가 이런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될 줄이야...)
- 사마헌아... 사마헌아... 너는 이런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거늘... 백년의 버려진 세월... 천마교에서 생활한 백년의 세월... 아아... 군협천의 마지막 승리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천마교에서 첩자로 생활한 백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백년의 공백 기간속의 나는 천마교의 모든 비밀을 빼내는 임무를 맡은 첩자였던 것이다. 헛허... 나는 좀더 완벽한 천마교인이 되기 위해 천마교인 가운데 한 여인과 결혼까지 했다. 당시 백여살이 넘은 나였기에 그 나이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기실 나는 동정불로공을 연성하여 약관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결혼을 했고 또 아이까지 보았다. 그리고 그 아이는 결혼하여 다시 손녀를 보았고 그 손녀의 자질이 특출하고 미모가 출중하여 천마교주 적용사우의 정실로 선택이 되었으니... 아아... 아마도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나 보다. 적용사우나 나의 손녀 사이에 운명처럼... 운명처럼 남녀쌍동이가 탄생했다. 나의 외증손자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의 나이 팔세가 되었을 때 천마교는 적용사우의 죽음을 끝으로 거의 파멸에 이르렀고...
천마교의 파멸이 가속화된 것은 적용사우가 이 몸을 완전 신임하여 자신의 비밀을 서슴없이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아... 그 모든 비밀을 나는 충실히 군협천에 전했고... 결국은 천마교의 파멸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협천에서 내려진 명. 노부에게 내려진 명. 오오... 그것은 나의 손으로 직접 적용사우의쌍동이 남매를 죽이라는 것. 노부는 당연히 그 명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참으로 모질게도 이어진 것이 핏줄간의 인연인 것인지. 노부는 그 두아이를 죽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설사 군협천주의 명이라하더라도... 그 아이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부는 두 아이들 중 여아는 다시는 무공을 연성할 수 없도록 그 아이의 십대경락을 폐쇄시켜 이름 모를 촌부에게 맡겼고 남아는 군협천에서 성장케 한 것이다.
백여 년의 세월동안 모든 나의 사생활 만큼은 군협천에 알리지 않았기에 그 아이는 적용사우의 자식이 아닌 다른 천마교인의 자식으로 변신이 가능했으며 군협천주도 이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군협천주는 노부의 백년 공로를 인정하여 비록 그 아이가 천마교인의 후예이기는 하나 기꺼이 나의 곁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한데... 사마운 아니 적용운 그 아이는 자신이 당한 한을 결코 잊지 못했으며 군협천 내에 거대한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고 있었으니... 아아... 삼년전 소천주께서 내분자를 말씀하라 했을때, 한사람을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은 노부에게 적용문을 사랑하는 한가닥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
그것이 실수였다. 노부 손으로 그때 죽였더라면... 그때 죽였더라면...아아... 소천주이시여... 소천주이시여... 노부를 용서하소서... 덧없이...
참으로 덧없이 사마헌의 고개를 꺾어지고 있었다.
우수수... 한줌의 낙엽만이 피에 젖은 그의 손에 쥐어졌을 뿐... 그의 피에
물든 동공에 사마운, 아니 적용운의 모습이 차갑게 굳어들었을뿐... 천마교
의 패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 일세의 노웅은 결국 이승을 하직한 것이다.
적용운은 굳어진 듯 멍하니 사마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님.]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수려한 눈에 눈물이 솟는다.
[이 눈물은 사마운이 흘리는 것. 결코 적용운이 흘리는 것이 아니옵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동안 그렇게 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망막 속으로 군협동의 석문이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섭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철류향... 당신을 사랑했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나 사랑하고 만 것도 운명인 것이지...]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원수의 자식. 사랑. 이 갈림길에서 나의 긴 방황은 시작되었고... 이제사 그 방황은 끝이 났소. 바로 사마헌의 죽음이 그것이며 사마운이 적용운이 된 것이 바로 그것이오.]
우수수....
[당신을 죽여야 하오. 지금 이 순간이 어쩌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오. 차마 당신을 죽이지 못하고 떠남은... 아직도 조금은 남은 사랑 때문일 것이오.]
우수수... 멀어지고 있었다. 적용운의 음성은 점차 아련히... 그리고 계속되는 그의 음성은 여운처럼 길게 어둠을 타고 흐른다.
- 이 적용운이 자라기엔 이 군협천이 가장 이상적인 곳이었소. 그 누구도 나를 의심치 않았으며 사마헌의 손자라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나는 극진한 대우를 받았소. 십팔 년의 세월... 어쩌면 내게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을 것이오. 떠나는 지금 분명히 하고 싶은 한 가지는... 군협천의 파멸은 나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오. 나는 다만 작은 내분을 일으켰을 뿐. 아아... 또 다른 한사람에 의해서 군협천의 파멸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오. 그를 당신은 막을 수가 없소. 그는 너무도 거대하여 무림의 모든 것이 그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기에... 당신은 그를 막을 수 없소. 막을 수 없소... 막...을...수...가...없...소...
장산은 막무가내였다.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고집 또한 황소고집이었다.
- 장산을 종으로 받아주시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이몸의 청을 거절하시면 이곳에서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겠습니다.-
다른 말은 아예 할 줄도 모른다는 듯, 오직 이 말들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무려 한 시진 동안이나. 결국, 단엽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고집을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운명, 아마도 단엽은 이 장산이라는 거한에게서 기이한 운명의 충동을 느낀 것이리라.
한낮의 거리. 땡볕이 내리쬐는 거리는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아담한 항구 남통의 거리를 거닐고 있는 사람이라야 상인들과 어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여기 그들과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는 두 사람이 빠르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찌 보면 느릿하게 걷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자니 바람처럼 빠르다. 일신에 걸친 옷은 그야말로 누더기. 산발한 머리에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얼굴.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의 모습이었는데 나이는 어림잡아서 십오륙세 가량의 남녀 비렁뱅이였다.
소년은 그 피부가 지극히 검었으며 소녀는 반대로 눈처럼 희다. 땟국물이 자르르 흐름에도 희게 느껴진다면 그녀의 피부가 어느 정도로 희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은이 있으리라. 이때, 두 비렁뱅이는 마치 입씨름을 하기라도 하듯 무어라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적사도의 마인들이 아닐 거야.]
[아니다. 적사도의 마인들이다.]
[그럴 리가 없다. 적사도의 마인들이 아니다.]
[틀림없다. 그들은 적사도의 무서운 마인들이다.]
중얼거리는 얼굴에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것은 공포의 빛. 두 다리는 다리가 안보일 정도로 달리고 있었고 입이 쉴 새 없이 벌어졌다 다물리고 있었다.
[그럴리가 없어. 적사도의 마인들이 이곳에 나타날 리가 없단 말이야.]
[이런 멍청이. 이 소백자의 말이 말 같지가 않아. 그들은 틀림없이 적사도의 악랄한 마인들이란 말이야.]
소녀 비렁뱅이가 결국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소백자라고 불리는 모양이다. 그러자 소년 비렁뱅이의 검은 얼굴이 더욱 검어졌다.
[후후후. 소백자 너는 언제나 입으로 이 소흑자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데...]
[그래서?]
[그 일곱 사람은 나이가 많아야 겨우 사오십 정도로 보였단 말이야.]
[그래서?]
[그리고 그들 중에는 우리 또래의 어린아이의 모습도 보였는데.]
[그래서?]
[그런데 그들이 수십 년 전에 적사도에 투옥된 마인들이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호호... 너는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소백자는 소흑자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소흑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계집. 너는 도대체 아는 것이 얼마나 되기에 그따위 소리냐?]
[흥! 적어도 네가 모르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뭐?]
[그 일곱 사람이 누구란 것은 알고 있단 말이지.]
[뭐어?]
소흑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소백자는 입술을 삐죽였다.
[흥,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흑접, 마동, 지옥겁, 은사혼, 그리고 소
수천마, 사목, 빙후라는 대마인들이다.]
[헉...]
소흑자는 입을 딱 벌렸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 검은 얼굴엔 미미한 경련마저 일으키고 있었다.
[저...정말 그들이란 말이야? 그 무서운 대마인들?]
[정말이다.]
[그...그렇다면 큰일이 아니야.]
[큰일이지.]
[이...자...작은 마을에 고해동의 마인들과 적사도의 마인들이 동시에 나타나다니...]
고해동이라면 바로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하나를 말함이다.
전설의 섬 고해도에 있다는 고해동. 그곳의 마인들도 이 남통이라는 작은 항구에 나타난 모양이다.
이때, 소백자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서 이 사실을 대장로에게 알려야 해. 그래서 그들 마인들과 군협천의 인물들과의 충돌을 막아야 한단 말이야. 알았어?]
소흑자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구나. 만약 이번 충돌을 막지 못한다면 군협천의 삼백 육십여 고수들은 전멸을 면치 못할 거야.]
[물론이야.]
소백자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알 수가 없어. 이곳에 보내진 군협천의 고수들은 당연히 최고 고수들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말이야. 누가 봐도 이번 격전은 군협천 인물들의 패배로 돌아갈 것임은 뻔한데... 그들이 무모한 대결을 하려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글쎄?]
소흑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백자가 모르는 것을 그가 알리는 만무했다.
[대장로께서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이던데 통 말씀이 없으시단 말이야. 어째서일까? 혹시 적사도의 마인들이 이곳에 나타날 것을 예측 못했기 때문일까?]
소백자의 의혹은 갈수록 그 도를 더해간다. 그녀의 희디힌 피부 아래 자리잡은 새까만 동공은 흑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는데...
이때, 두 사람은 남통의 번화가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신형을 한차례 꿈틀하는 순간 희뿌연 안개처럼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놀라운 신법.
평원. 끝 간 데 없이 너른 벌판. 보이는 것은 오직 갈대밭뿐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출렁이는 갈대의 파도. 그 위로 핏빛을들이 처량하게 쏟아져 내린다.
[으아악!]
[으악!]
비명소리. 갈대밭을 피로 적시며 피보다 진한 노을을 타고 흐르는 비명.
그것은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금 이 적막한 평원은 결코 적막하지만은 않았다.
대혈전.
수백여 명이 함께 어우러져 펼쳐대는 무서운 혈전은 이제 극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평원의 북동쪽에 있는 노인, 그는 팔짱을 낀 채 싸움을 여유 있게 주시하고 있었다. 짙푸른 청의에 목에 푸른 염주를 걸고 있는 인물. 청목사승이었다.
무려 일백 팔십 여년 전 고해동에 투옥이 된 천마교의 대마인.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단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나타난 고해동의 인물들은 정확히 일백 십팔인. 그들은 미쳐 있었다. 실로 수십여 년 만에 맛보는 비릿한 피내음. 그것은 그들의 지난 고통의 세월에 대한 작은 대가일 뿐인 것이다. 그들과 맞서 처절하게 죽어가는 인물들, 그들의 수효는 어림잡아도 이백여 명은 넘어보였다.
숫적으로는 절대 우세를 잡고 있는 그들은 바로 군협천의 인물들인 것이다. 그러나 숫자적으로는 우세한 위치에 있지만 일백 십팔인 고해동의 인물들은 그야말로 일세를 피로 물들인바 있는 이 땅의 대마인들. 어찌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죽어가는 자는 군협천의 인물들이었으며 눅눅한 갈대내음 속으로 그들의 짙은 피비린내만이 풍겨져 오를 뿐이다.
[후후후...]
청목사승은 비릿하게 웃었다. 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깡마른 얼굴에 젖어드는 노을.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이제 천하는 우리 고해동의 아래에 완전히 장악이 될 것이다.]
흔들린다. 무성한 잡초가. 그리고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핏빛 노을이 흔들리고 있었다.
[후후... 천마교의 부활. 그것 역시 시작일 뿐이다. 누가 과연 천마교주가 될 것인가? 후후... 본 청목사승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천마교주의 자리는 넘볼 수가 없을 것이다.]
돌연 청목사승은 하늘을 우러르며 앙천광소를 토했다.
[크핫하하하. 오직 본 청목사승만이 천마교주로서 자격이 있을 뿐이다.]
무림칠대뇌옥의 파괴는 이런 야망자들을 무림에 끌어들인 것이던가.
무림칠대뇌옥의 마인들.
그들은 과거에는 천마교주 아래의 직속인물들이었지만 이제는 천마교주로서의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미 수십 년에서 백 수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그들은 엄청난 변신을 이루었고 그로인해 그들의 일신에 지닌 무공은 가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 남의 아래에 설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그들은 유아독존의 야망에만 들떠 있었으며 모두가 천마교주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천마대회합.
이것은 그 야망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아아...절망이다.]
죽어가는 군협천의 고수들을 보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는 인물.
대략 오십세 가량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우람한 체구에 금포를 치렁하게 걸쳐 입었다. 첫눈에도 패웅의 호기가 느껴지는 주사빛 각진 얼굴. 굵직한 호안의 윤곽에 교룡수염이 잔잔히 나부꼈다.특히,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요한 가운데 두 동공 깊숙이 강물처럼 일렁이는 뜨거운 정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철혈무제. 군협천 서열 육위의 인물. 기실, 군협천 내의 서열 육위 정도의 인물이라면 실로 엄청난 신분임에 분명하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능하고 이쯤 되면 불가능이란 말은 아예 모르고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이 철혈무제의 입에서 지금 분명히 절망이란 말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니...
[이건 애초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절망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탄식과 한마디, 거기에는 다분히 불만의 빛도 서려 있었다.
[우리 군협천의 힘은 이렇게 허약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데 이렇게 당하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진 잘못된 명령 때문이다. 좀더 강한 고수들로 저들 고해동의 마인들을 상대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 군협천의 이류고수들로 무모한 공격을 감행케 한 것은 분명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철혈무제의 얼굴은 온통 실망과 체념의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만약 내게 군협천의 일류고수 삼백인을 주었다면 이런 비참한 패배는 결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천주이시여... 당신을 원망해야 하오리까? 아니면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오리까... 헛허허...]
허탈한 웃음, 그 웃음 위로 처절하게 깔리는 비명소리.
한편, 이 광경을 멀리서 주시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두 명의 비렁뱅이. 소백자와 소흑자였다. 그들은 싸움을 지켜보며 경악했다.
[늦었어. 미처 대장로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도 전에 싸움이 붙어버렸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소흑자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에 비해 소백자는 그런대로 침착했다.
[완전히 절망적인상태는 아니야. 비록 고해동의 마인들이 강하다 하나. 군협천의 고수들을 쉽게 전멸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전멸하고 말거야.]
소흑자는 부정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소백자는 문득 버릇처럼 콧등을 찌푸렸다.
[아니야. 저들이 한 시진은 버틸 수가 있을 거야. 그것이 군협천의 잠재력이거든.]
[그래서.]
[그동안 대장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고... 그리하면 저들 가운데 삼할은 구할 수가 있을 거야. 자, 서둘러야 해. 어서 이곳을 떠나자.]
[그렇다면 서둘러야지.]
두 사람은 신형을 날리기 위해 막 몸을 돌렸다. 한데 그 순간,
[어헉...]
[읍...]
두 사람은 두 눈을 크게 뜨며 그대로 굳어지고 만다. 안면근육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두 다리마저 떨렸다. 그들의 전면에 서 있는 정확히 팔인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로 적사칠혼과 장산이었다. 노을 속에서 어둠의 신처럼 서 있는 그들. 바닥까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끌고 있었으며 전신에서 풍겨지는 사악한 기운은 가히 살인적이다.
소백자와 소흑자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암중 그들을 은밀히 조사해 오던 터였기에.
(죽었다. 우리는...)
(이들 악마들이 이곳에 나타난 이상 모든 것은 절망이다.)
그들은 암담한 눈빛으로 적사칠혼과 장산을 주시했다. 이때, 마동이 징그럽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헤헤헤... 네놈들은 왜 그렇게 소태씹은 표정들이지. 뭐하다가 들킨 놈들 같은데... 쯧쯧... 두 다리는 왜 그리 떨고 있누?]
(으으...이자가 마동이다.)
소흑자와 소백자는 한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얼굴은 십 사오세 가량으로 보이는데 머리는 서리처럼 희디힌 백발인 마동. 이 소동도 노인도 아닌 마동의 괴이한 모습에 그들은 전율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소흑자. 네가 이들을 잠시 막아라. 내가 대장로께 이 사실을 알릴 테니.]
소백자는 소흑자의 등을 밀며 전음으로 말했다. 소흑자는 기겁을 했다.
[무슨 소리! 내가 대장로께 전할 테니... 네가 막아라.]
[빌어먹을 놈!]
소백자는 소흑자가 꽁지를 빼자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밖으로 흘리고 만다. 순간, 마동의 안색이 홱 변했다.
[뭐야? 빌어먹을 놈이라고?]
[그...그것이 아...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찢어죽일 연놈들.]
마동은 당장이라도 두 비렁뱅이를 잡아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러자 흑접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마동. 무엇을 망설이지? 당장 황천으로 보내라.]
[흐흐...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한데 그 순간이었다. 마동은 엉겁결에 이렇게 말해놓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흑접을 쏘아보았다.
[미친 계집. 이 마동이 이 두 비렁뱅이를 죽이는 날에는 주인께서 당장 나를 잡아 죽일 것은 뻔한데... 네년은 도대체 나와 무슨 감정이 그리 많아 나로 하여금 살인을 하게 하려는 것이냐?]
마동은 말하면서 힐끔 단엽의 눈치를 본다. 흑접은 교소를 터뜨렸다.
[홋호호... 마동, 죽음이 두려운가 보지?]
[헤헤... 그러는 네 년은 죽음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호호. 살만큼은 살았지 않아? 마동...솔직이 말해 이 몸은 너의 외모로부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뭐?]
[너의 그 어린아이 같은 몰골은 우리 적사칠혼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란 말이야.]
[뭐...뭐...]
[홋호호. 너 한사람으로 인해 나머지 적사육혼이 남에게 어린아이 대접을 받을까 두렵단 말이지. 그러니 너는 죽는게 나아. 우리를 위해서 말이야.]
[으으...]
마동은 분기탱천했다. 이어 짐승처럼 울부짖더니 흑접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러나 단엽이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막았다.
단엽은 은은히 얼굴에 살기를 띠웠다.
[할 수 없는 인간들이로군. 좋다. 정히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너희들 두 사람은 이 자리에서 자결토록 해라.]
[주...주인...]
[우리가 실수를...]
마동과 흑접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자결이라니...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들은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도 할 것 없이 무릎을 접은 후 싹싹 빌었다.
[제발 한번만 용서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주인...제발...]
이런 마동과 흑접을 바라보며 단엽은 차갑게 말했다.
[이번 한 번 뿐이다.]
[가...감사합니다.]
[만약 다시 이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는 우리 스스로 알아서 목숨을 끊겠습니다요.]
[알았다. 어서 몸을 일으켜라.]
[감사합니다.]
마동과 흑접은 그제서야 살았다는 듯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지난 삼년의 세월 적사칠혼에게 변한 것이 있다면 이런 철저한 주종관계였다.
한편, 이 광경을 주시하던 소백자와 소흑자는 아연실색했다.
(저 인물은 소수천마인데? 그가 나머지 인물의 주인?)
(헌데 이상하다. 그는 무서운 살인마인데, 살인을 하지 못하게 하다니?)
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때, 장산이 앞으로 나서며 소흑자와 소백자의
어깨를 툭툭쳤다.
[어이...어린친구들. 자네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가?]
장산은 두 사람을 향해 순박하게 웃어보였다. 그의 품에는 한 자루의 도가 들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단엽의 천마도였다. 기실 이 자리는 그가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나선 것은 벌벌 떨고 있는 소백자와 소흑자가 안쓰럽게 보였기 때문이리라.
소백자와 소흑자는 사람 좋아 보이는 장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될 수 있으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장산은 순박하게 웃었다.
[무슨 걱정거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주인에게 부탁한다면 기꺼이 들어주실 거다.]
[예에?]
소백자와 소흑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장산은 눈짓으로 단엽을 가리키며 은근히 말했다.
[우리 주인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야.]
(소수천마가 좋은 사람이라고?)
(이 놈이 미친 것 아냐?)
[늦기 전에 어서부탁해라. 우린 태호로 가야할 바쁜 몸이다.]
장산은 순박하게 웃으며 재촉했다. 소백자는 엉겁결에 이렇게 말했다.
[실은... 저들은 고해동의 마인들과 군협천의 고수들인데...]
[그래서?]
군협천의 고수들을 구해야 하거든? 그런데 우리에겐 힘이 없고...]
이렇게 말하다가는 소백자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미쳤지... 이놈들도 저 마인들과 같은 통속인데...)
그녀는 힐끔 단엽을 주시하며 고개를 숙인채 손가락만을 만지작거렸다.
장산은 격전장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군협천의 인물들은 좋은 사람이겠지?]
[으응...]
소백자는 다시 단엽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산은 입
을 쩍 벌리고는 웃었다.
[우핫하하... 그러면 걱정 없다. 우리 주인께서는 기꺼이 군협천의 고수들을 구해 주실 거다. 우리 주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다.]
장산은 단엽에게 다가왔다.
[주인... 좋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서 구하셔야지요.]
단엽은 묵묵히 격전장을 주시했다.
한편, 적사육혼은 장산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주인께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그래서 군협천의 죽일놈들을 구할 거라고?)
(흐흐흐. 어림도 없다. 군협천의 인물이라면 이빨을 가는 주인이신데. 구하기는 커녕 죽이라는 명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소수천마를 잘 알고 있기에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구해야지...]
단엽은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저 악마들로 하여금 더 이상 살인을 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이어, 적사육혼에게 군협천의 고수들을 구하라는 명을 나직이 내렸다.
[예에?]
[주인? 무엇인가 착각을 하신 것 아니옵니까?]
지옥겁과 사목이 황급히 물었다. 빙후 역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단엽은 그들의 말을 잘랐다.
[구하라면 구하는 거다. 천마대회합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해동의 인물들과 천마교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오... 그렇군요.]
[이번 기회에 저들 고해동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한다.]
[흐흐... 그렇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지.]
단엽의 말에 적사육혼은 그제서야 알았다는 눈빛을 빛낸다.
[오랜만에 몸을 풀게 된 것이 기쁘다.]
순간, 빙후를 제외한 나머지 적사오혼은 앞을 다투어 격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빙후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군협천의 인물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요?]
단엽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후후... 지금은 때가 아니오. 우리가 정식으로 천마교주가 된 후... 그때 그들을 응징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오.]
그제서야 빙후의 안색이 펴졌다.
(언제부터인가 달라진 당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이 나를 앞서 간다는 것... 좋아요. 나의 모두를 당신에게 일임하기로 하죠.)
이때, 장산은 단엽이 자신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우핫하하... 이봐. 어린친구들. 어떤가? 우리 주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 아닌가?]
그러자 소백자와 소흑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들도 모르게. 그러나, 그들은 각기 엄청난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소수천마가 군협천의 인물들을 구하다니..)
(이것은 세상이 놀랄 일이다. 만약 이 사실을 대장로께서도 아셨다면...
그분은 놀라서 아예 삼일 동안은 기절하실 거다.)
그들은 기이한 눈빛으로... 아니 무슨 동물을 보는 눈빛으로 단엽을 보고 또 본다. 아무튼, 적사도의 마인들에 의해 군협천의 인물들이 위기에서 구해지는, 다시 말해 천마교의 인물에 의해 군협천의 인물들이 목숨을 건지는 이 고금에 볼 수 없는 희귀한 광경은 마침내 벌어지고 있었다.
흑접, 그녀의 머리에 장식된 검은 나비가 허공에 무섭게 뿌려졌다.
파아아...
그것은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고해동의 마인들을 향해 집요하게 날아든다.
마동, 그는 허공을 날고 있었다. 천진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의 발끝이 정확히 고해동의 마인들의 머리를 짓이길 때마다, 그대로 고해동의 마인들은 지면으로 쑥쑥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불의 사나이 지옥겁. 그의 손은 바삐 포대자루를 들락이고 있었다. 그때마다 가공할만한 불줄기가 그의 손끝을 차고 뿜어져 나왔으며 고해동의 마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 했다.
은사혼, 그의 은발. 그것은 하나의 가공할 무기였다. 마치 은사슬처럼 허공에 풀어지며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고해동의 마인들은 신음을 토하며 나뒹굴었다.
사목, 나무인간.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은 벼락처럼 허공에 수만 줄기의 검광을 뿌렸다. 찰나지간에 뽑혀지고 다시 가슴으로 들어가야 하는 검. 그 검의 위력 앞에 고해동의 마인들은 사색이 되어야 했다.
만약, 살인을 하지 말라는 단엽의 엄명이 없었다면 실로 반각이 채 지나지 않아 고해동의 인물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으리라. 어쨌든 청목사승과철혈무제는 동시에 경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