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五 章 谷邊風景
북국의 봄은 아직도 견디기 어려운 찬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백설을 이고 솟은 높은 산마루는 찬란한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니, 가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빛을 어지럽게 한다.
깎아진 절벽 위에는 두어 그루의 고엽나무가 마른 가지를 비스듬히 뻗고 있고, 한 허리에는 고사리밭이 깔려 있으니, 그 옛날 은(殷)나라에 살며, 왕위를 찬탈한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 항거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몸을 묻고,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천명을 끝마친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충절(忠節)이 이곳에 다시 살아 나오는 듯하였다.
이 고사리나무 밭 바로 위에 여기 저기 깔려있는 바위틈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홀연히 나타났으니 그 조그마한 사람의 몸은 거석(巨石)에 위압되어 소인국(小人國)에서 온 낯선 행객인 양 보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그림자는 나는 듯 빨랐다. 어느 사이엔가 바위틈을 누비고 골짜기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응당 상당한 경공술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이윽고 그림자는 한 곳에 이르러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손을 이마에 대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 품이 무엇인가 주위를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자 그림자는 자기 키보다 큰 바위 곁으로 몇 걸음 옮기더니 다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 찾는 듯하다가 이윽고 산 아래에 깔려있는 광막한 대지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을 멀거니 서 있었다. 눈 아래 펼쳐진 광막한 골짜기는 적막에 쌓여 조용하기만 하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바위틈을 이리저리 누비며 걸어오다가 하나의 큰 바위 옆에 이르러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다 허물어진 낡은 비석이 서 있었으니, 유구한 세월동안 가진 풍상을 겪어온 비석에는 알아보기조차 희미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사람도 역시 이 세상 가진 풍상을 다 겪은 연륜이 지긋한 한 사람의 도인(道人)이었다.
노인은 비석(碑石)으로 향해 한 발 다가서더니 장삼(長衫)의 소맷자락을 들어 비석의 먼지를 털고 다시 손으로 닦으니 선명한 고전체(古篆體)의 세 글자가 나타났다.
『침사곡(沈沙谷)』
노인은 글자를 보자, 가벼운 탄식을 하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노인의 희고 긴 수염을 날린다.
그의 양미간에는 수없이 많은 주름살이 줄줄이 그어지고, 이제는 그것이 아주 굳어버린 것 같았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눈부신 햇빛이 노인의 흰 머리카락을 비추니 빛은 다시 은색으로 반사되어 산골짜기로 번져 나간다.
노인의 두 발에 어느덧 경력(經力)이 발휘되면서 그 몸은 허공으로 치솟아 큰 바위 위를 날아 일직선으로 북쪽을 향하여 하늘 위를 달려가니, 얼마 뒤에 그의 몸은 벌써 멀리 보이는 뾰족한 산봉우리 위에 이르고 있었다.
노인이 몸을 멈춘 그 산은 더욱 신비스럽고 기이한 광경이니 산봉우리 아래에는 깎아 놓은 것 같은 절벽이 있고, 그 절벽 아래에는 둥글게 휘어 있는 골짜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을 것 같았으나, 맑은 물 대신에 누런 모래밭이 깔려 있었다.
이 오랜 침묵과 정적과 신비에 쌓인 골짜기――
아, 침사곡!
노인은 다시 바위에서 몸을 날려 절벽 위로 몸을 날린다.
골짜기에 보이는 누런 황사의 모래밭은 햇빛을 받아 거울같이 맑아 보였으며, 조용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삐죽삐죽 솟아 있는 바위는 이 조용한 가운데 말없는 석상처럼 보였고, 더욱 신비로움을 안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노인은 절벽 위에서 골짜기의 누런 모래밭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침사곡의 바위들이여! 그대들에게도 영(靈)이 있을진데, 빈도(貧道)로 하여금 진상(眞相)을 캐어 내는데 도움을 다오!』
그때 돌연,
『콰르릉!』
하고 노성(怒聲)이 울렸다.
어느 틈엔가 하늘에는 검은 뭉게구름이 꽉 들어차고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뇌성벽력이 들려오니 갑자기 풍운(風雲)이 변하고 이상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며 골짜기의 누런 모래는 어지럽게 휘말려, 드디어 골짜기가 모두 누런 모레 속에 파묻히는 듯싶었다.
노인은 삽시에 변하는 자연의 변화에 놀라, 정신을 잃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본다. 백설 같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모습, 수염은 바람에 날린다. 그는 입을 열어,
『설마하니 지난 날 모임에 나왔던 고수들이 불운(不運)하게도 전부가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으랴! 그렇다, 침사곡이여 너 대답하여 보아라!』
『콰르릉!』
다시 사나운 우레소리가 들려왔다.
이 때다. 여기저기 솟아 있는 바위틈에서 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 사람 역시 먼저 노인과 같이 이곳 지세에 대단히 밝은 것 같았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오다가, 뇌성벽력과 함께 번쩍 하는 번개에 놀란 듯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본다.
벼랑가에 서 있던 노인은 이 사람을 보지 못한 채 무엇인가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듯싶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어 우뚝 서 있는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봉우리를 바라보던 도장(道長)은 대단히 이상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큰 바위 하나를 사람이 깎아 놓은 흔적이 보이는 것이었다.
노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또 다시 혼자서 중얼거린다.
『내가 네 번이나 이곳을 답사하였어도 보지 못하던 바위인 것 같은데……』
노인은 말이 끝나자,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숨소리를 죽이며 슬금슬금 몸을 큰 바위 뒤로 숨겨 버렸다.
뒤에 나타났던 사람의 경공술은 보통이 아니어서 그의 몸은 유성(流星)과 같이 이쪽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바위틈에 몸을 사리고 이 모양을 보고 있던 노인은 크게 놀라 마음속으로 되뇌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일까? 그의 몸 움직임을 보건데 경공술이 보통이 아닐 뿐 아니라 허공을 딛는 순간 무게가 수십만 근이나 되는 내공으로 보이니 절정 고수가 틀림없어. 지금 세상에도 저런 고수가 있었나? 도시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 사람은 갑자기 몸을 멈추더니 한 곳에 있는 큰 바위를 이윽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바위 위에는 초서(草書)의 글씨로,
『살(殺).』
이라는 글자가 한 치 정도의 깊이로 새겨져 있었다.
바위를 바라보는 사나이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아! 인도(人屠), 인도! 뜻밖에도 임가(任家) 네가 아직 살아 있었구나!』
바위 뒤에 숨어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있던 노도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음! 전에 내가 이 침사곡에 왔을 때 만난 자가 바로 임여(任厲)였군! 어쩐지 공력이 비상하더라니! 그러나 나는 그를 알아보았었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그 사나이는 살(殺)자를 한참동안 멀거니 쳐다보고 서 있더니,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앞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태산압정(泰山壓頂)의 위엄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도인은, 먼저 그가 기공을 운행시켜서 공중에 솟았다가 땅에 내려앉는 모습을 연상했다. 한 송이 꽃을 연못가에 던진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것은 사나이의 공력이 뛰어남을 입증하는 것이다.
도인은 바위 뒤에 숨은 채 자신에게 묻기를,
『나에게도 당년에 저런 공력이 있었는가? 만약 지금 나의 혈맥이 막혀 있지 않다고 하면 저런 공력이 나올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자문에 대해 스스로를 위안하는 듯,
『청목(靑木)아! 너에게는 분명히 그 이상 가는 공력이 있었느니라.』
하는 대답이 나왔다.
이런 자문자답(自問自答)이 끝나자, 그의 얼굴에는 분명히 자위(自慰)의 웃음이 떠오른다.
사나이는 아직도 청목도장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터에 다시 걸음을 옮겨 청목도장이 몸을 사리고 있는 바위 앞으로 다가선다. 그는 거의 육순(六旬)이 넘어 보이나 누르스름한 얼굴 표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것을 보자 청목은,
――흥! 이놈은 인피(人皮)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구나! 네 공력이 아무리 좋고 재주가 비상하다 할지라도 나를 속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은 드디어 벼랑가에 이르러서 방금 청목이 서 있던 자리에 섰다.
그는 골짜기 밑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음, 오늘이 또 보름이로구나! 침사곡의 모임이 있은 뒤로 십 년――나는 매달 보름날 오시(午時)에는 어김없이 들었지! 꼭 귀신이 우는 것 같은 소리를. 헌데, 세상에 귀신(鬼神)이란 것이 실제로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바위 뒤의 청목은 깜짝 놀라면서 암암리에 외친다.
――십 년 전? 십 년 전에 이곳에 어떤 일이 있었단 말이냐? 빨리 말해 다오!
그 사람은 여전히 골짜기 아래를 바라보면서 얼굴에 차갑고 쓴 웃음을 지으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또 중얼거린다.
『원귀(怨鬼)들은 울며 부르짖고 음산하게 쏟아지는 비 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으니! 흥! 침사곡을 귀사곡(鬼沙谷)으로 이름을 고쳐야 하겠군!』
바위 뒤의 청목도장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나이는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는지 나지막한 바위 위에 무릎을 포개고 앉았다.
조금 지나자 가면의 사나이의 이마에서는 흰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하였다.
흰 연기는 그 양이 많아졌다 적어졌다 하기를 몇 번 되풀이 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는 바위에서 벌떡 일어나며 허공을 쳐다보며,
『이 나의 공력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나의 내상(內傷)을 낫게 할 수가 없단 말이냐? 아! 내상이 이렇게 지독할 수가 있단 말이냐? 벌써 십여 년을 두고 치료해도 효험을 얻을 수가 없으니――』
도장은 돌 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생각하기를,
――뭐라고? 이 자도 심한 내상이 있다고? 십 년을 치료해도 낫지 않는다고? 그럼 설마――
이러는 사이에 그 가면의 사람은 다시 중얼거렸다.
『허나 나의 내상은 반은 나은 셈이란 말야! 오직 힘이 다하도록 싸움을 할 수가 없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은 별 상처도 입지 않은 것 같고? 이 넓은 천지에서 누가 감히 나로 하여금 힘이 다하도록 싸우게 할 사람이 있겠는가?』
사나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 장을 쳐서 바위를 때렸는가 했더니 사방은 자욱이 먼지로 가려지면서 바위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바위 위의 도장은 깜짝 놀라면서
『엇! 아미파의 지천획지(指天劃地)! 그렇다면 저 자는 아미파――』
그때,
『팍.』
하는 소리가 나며 그의 오른손의 장풍이 또 하나 다른 바위를 후려쳤다.
이번에는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는 대신 바위위에 깊은 장인(掌印)이 새겨진다.
도장은 또 한 번 놀라면서,
――오 오! 막남(漠南)의 금사장(金沙掌)이로구나! 이게 어떻게 된 셈이냐?
그 사나이는 어지럽게 날고 있는 돌가루와 새겨진 장인(掌印)을 보고 득의만면하여 웃으면서,
『하! 하! 그 당시 혜진(慧眞) 스님의 지천획지의 술법도 나의 이 신통한 일장(一掌)을 당해 내지는 못했거든――』
바위 뒤의 도장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소리 질렀다.
『혜진스님은 옛날 아미파의 장문이었어! 혜진스님도 당시의 새북대전에서 실종된 인물이 아니냐? 어째서 이 자는――』
도장의 마음에는 계속해서 놀라움의 파도가 물결쳤다.
이 때 갑자기 사나이가 돌을 걷어차는 소리가,
『팍!』
하고 요란스럽게 주위의 공기를 뒤흔드는가 하는 찰나, 사나이는 번개같이 몸을 옆으로 비틀면서 쭉 찢어진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누구냐? 빨리 나오너라!』
도장은 사세가 급함을 깨닫고서는,
――일이 난처하게 됐는걸. 나는 경공을 빼놓고서는 다른 면은 하나도 회복된 게 없는 데 지금 저놈에게 발견된다면 일전(一戰)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눈앞에 벌어진 정세는 이 이상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차라리 남에게 먼저 발견되어 낭패를 보는 것보다 스스로 먼저 걸어나가서 자기의 정체를 그에게 보이는 것이 떳떳할 것 같아서 재빨리 몸을 날려 바위 위에 가볍게 올라섰다.
사나이는 도장의 가벼운 경공술을 보자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저윽이 놀란 표정이다.
사나이는 도장의 이 미묘한 경공술을 처음 보는 것 같았으나 시침을 떼고 오히려 메마른 웃음을 입가에 띠우면서
『노인 도사는 바로 무당파의 장교(掌敎) 백백진인(白栢眞人)이구려?』
도장은 한동안 머뭇거리며 어떻게 대답을 할까 하고 망설였다.
망설이는 도장의 머리에는 또 하나의 번개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자는 날 도사라고 보는 모양이며, 나의 경공술을 보고서는 무당의 백백진인이라 생각하는 모양이군――
이윽고 도장의 입에서는 자기의 정체를 해명하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빈도는 결코 무당파가 아니오.』
『도를 닦으신 고귀한 몸의 도사께서 어찌 이런 곳에 왕림하셨습니까?』
도장은 머리를 숙이면서,
『빈도는 천하를 주유한지 오래 되나 이런 험지(險地)를 만난 것은 처음이오. 오늘 이 계곡을 바라보니 조물주의 신비스런 솜씨를 알게 되는 것 같소이다. 정말 보통 정서(情緖)로는 보아 넘길 수 없는 곳이오. 시주께서도 풍류인(風流人)이시니 역시 나와 같이 느끼시리라 믿소이다.』
도장의 천성이 청산유수 같은 화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어색한 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나이 역시 도인의 말에 현혹되었는지 조금도 의심스러운 눈치를 보이지 않고 호탕스럽게,
『폐인은 이 골짜기에서 벌써 만 이십 년을 지냈소이다. 그 동안 한 사람도 이 험지(險地)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도사의 기개는 정말 장하십니다. 이것도 도인과 폐인과의 인연 같으니, 제가 기거하는 집으로 가셔서 이야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장은 사나이가 이렇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나오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도장은 그의 사람됨 바탕이 아주 선량하리라고 믿으면서,
『원래 시주(施主)님의 댁이 이곳에 있으신 것 같은데 물론 시주님의 체면에 부끄럽지 않을 곳이겠지요. 댁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이 골짜기 아래에 있어.』
도장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갑자기 말씨가 사나와지다니!
그러나 도장은 웃으면서,
『이 골짜기 아래에 내려가란 말씀입니까? 빈도는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라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사나이는 차가운 웃음을 웃으면서,
『노도(老道), 무얼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빨리 나와 함께 내려가자니까.』
하며 손을 들어 벼랑 아래 침사곡을 가리킨다.
도장은 이 사나이의 태도를 보고서는 몹시 화가 치밀었으나, 억지로 온순한 태도를 보이면서,
『오십 년 이래에 빈도에게 이렇게 명령하듯 말하는 사람은 천하에 하나도 없었소이다.』
태도는 온순하였으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일파의 종사(宗師)로서의 늠름한 기백도 담겨 있었다.
사나이는 마음속으로 슬그머니 겁이 나기도 하였다. 노도사의 내력도 잘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였으니 후환이 무서워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늙어 꼬부라진 앞에 서 있는 도사에게 지고 싶은 생각은 전연 없었다.
『나 역시 도사와 같소이다. 내가 말해서 듣지 않는 자, 천하에 한 사람도 없었소이다.』
도장은 호통을 치듯 큰 소리로 물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호통을 치는 도장은 자신이 공력을 완전히 잃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이 일전을 맞이할 것 같은 태도였다.
『아니면 저 침사곡으로 밀어 떨어뜨려 주마!』
하며 사나이는 또 한 번 골짜기를 손가락질하여 보인다.
이 순간 도장에게는 하나의 영감(靈感)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영감이란,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 줄 사람은 눈앞에 기고만장하여 서 있는 사나이다. 그는 의문의 실마리를 풀어 줄 것이다.
이런 영감으로 해서 도인은 자신이 몸에 닥쳐올 안위(安危)를 생각할 나위가 없었다.
도장은 점잖은 목소리로,
『빈도는 시주께 한 마디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소이다.』
돌발적인 노도사의 말에 사나이는 깜짝 놀라면서
『뭔데?』
도인은 천천히 어조를 높이면서,
『오랫동안 불의(不義)를 행한 자, 자멸(自滅)하는 법이니 시주께선 조심하십시오.』
노도장의 불같은 눈동자는 사나이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러나 사나이는 태연하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표정이 굳어져 버린 것 같았다.
왜냐 하면 그는 그의 본색 얼굴을 감추고 인피(人皮)로 가장했기 때문이었다.
도인은 자기의 이 말로서 그에게 어떤 자극을 주리라 믿고 있다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서는 몹시 실망하였다.
갑자기 사나이는,
『하핫 하핫!』
웃기 시작하니 노도사는 전연 안중에도 없다는 투다. 그는 거만한 소리로,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우주 안에서는 나를 정복할 자 없으리라!』
그리고는 말이 끝나자 다시 먼저보다 더욱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이 때 별안간,
『우르릉 우르릉.』
하며 대지가 무너져 나갈 것 같은 천둥소리가 주위를 진동시키면서 들려오더니 사나이의 웃음소리를 뒤덮어 버렸다.
사나이는 웃음소리를 멈추고 도장과 함께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나이의 눈가에는 한 가닥 공포의 표정이 어린다.
그러나 잠시 뒤에 주위를 뒤엎어 덮고 있던 구름이 흩어지자 밝은 햇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대지를 향하여 쏟아져 나와 비추니 땅 위에는 왼쪽을 향하여 짧은 그림자가그려졌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사나이의 그림자는 오른쪽으로그려졌다.
이 진기한 그림자를 바라보던 사나이는,
『음, 정오(正午)로구나!』
도인은 사나이에게서 경멸하는 것 같은 말을 듣고 모욕을 참지 못하며,
『빈도가 알기로는 세상에서 당신을 이겨서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소이다.』
도장은 사나이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암시하여 주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도장의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십 년 전 신주(神州)의 제일고수 천일대사(天一大師)도 나를 당해내지 못하였거늘 너 같은 풋내기가 뭐 어쨌다고――』
이 말을 들은 도장은 양미간에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천일대사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도장은 뒤통수를 쇠망치로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던 것이다.
사나이의 목소리에는 우주를 뒤엎을 것 같은 불세출(不世出)의 호기가 가득차 있었다.
『그대는 천일대사가 그대에게 당하지 못했다고 해서 빈도도 그대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아는가?』
사나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감히 자기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기 또 있을까 하는 표정으로 상대를 멀거니 바라본다.
다음 순간 사나이는 돌연 흠칫 놀라며 몇 발 뒤로 물러섰다.
『당…… 신은 청목도장(青木道長)이지――』
목소리마저 위축되어 속삭이는 듯한 낮은 음성이었다.
도장 역시 목소리를 낮추어,
『인제 알았나……』
사나이는 이 말을 듣고 이번에는 무의식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물끄러미 청목도장을 쳐다보다가 슬금슬금 벼랑가로 몸을 옮겨 전신의 공력(功力)을 모으며 호흡을 조정하고 있었다.
청목도장은 머릿속에,
――내가 바위 뒤에 숨어서 그의 자문자답(自問自答)을 들었으니, 저 자는 나를 죽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공력을 쓸 수가 없으니 잠시라도 저 자와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이냐――
청목도장은 아무래도, 결과가 좋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 가닥의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청목도장은 희망을 품고 몸에 진기를 모아 보았다. 그러나 모인 진기는 단전(丹田)을 통해서 흩어져 버리자 다시 모이지를 않는다.
그는 사나이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었다.
청목도장의 마음속에는,
――이 자는 인피의 낯가죽을 썼으니 정체를 알 수가 없다! 그의 공력은 사람의 심금을 놀라게 하리만큼 강력한데, 아마도 막남(漠南)의 금사문(金沙門)의 장력을 단련한 것이리라.
그나 그뿐이 아니라, 또한 아미파의 내가 신공도 구비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러나 이런 순간에 나는 그에게 두려운 동정을 보여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반쯤 뜨고 그가 수십 년의 수양으로 얻은 힘을 발동하여 긴장을 억누르고 조용히 서 있었다.
과연, 도장의 표면에는 비할 수 없이 담담하고 안정된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무서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어서 맞은편 사나이의 발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자기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되리라 생각하고 번쩍 눈을 뜨며 스스로의 헝클어진 마음을 수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나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얼굴은 마치 한 가지 극히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려는 듯한 지극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이때 청목도장은 지나치게 긴장한 끝에 스스로 상대방이 자기의 신분을 알고 함부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때 사나이는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처지를 어림하고 있었다.
――재미없게 됐는걸! 내가 조금 전에 멋도 모르고 중얼거린 비밀을 모두 들었을 테니! 그러나 이 늙은이는 이름을 천하에 날리던 청목도장이 아닌가! 나는 그와 싸우더라도 최후의 일각까지 못할 것이니 승패는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니냐?
청목도장은 사나이가 이상하리만큼 신중하게 몸을 도사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속에 또 하나의 의문이 일어났다. 사나이의 태도는 진정 어림하여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장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앞에 서 있는 사나이는 청목도장을 한 번 쏘아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니 순간 예리한 침으로 찔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아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곧 마음을 도사려 잡는다.
――저 늙은이가, 설마 일부러 저러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찬찬히 청목도장의 몸짓을 바라보았다.
청목도장은 태연스럽게,
『시주께서는, 달리 할 말이 없으십니까?』
사나이는, 대답을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몰라서 망설인다.
――이 늙은이가, 나의 비밀을 알았으니 살려둘 수는 없고, 더욱 저렇게 억지로 엄살을 피우니 더욱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사나이는 이렇게 단정을 내리고는 곧 진기를 장심(掌心)에 모으고 일거에 돌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다시 마음이 풀리니 워낙 청목도장의 이름에 너무나 무서운 위압을 받았기 때문에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몸의 진기를 풀은 사나이는 다시 머리에 한 가닥의 생각이 떠올랐다.
――내 차라리 그에게 한 번 패배를 당하더라도 여기서 싸울까? 그러나 큰 낭패를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청목도장은,
『그럼 빈도가 먼저 실례하겠소이다.』
사나이는 청목도장의 말을 듣고 차가운 웃음을 띠운다. 그러나 도장이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자 또 다시 마음의 초조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청목도장의 뒷모습을 보자 사나이는,
――저 늙은이가 아무리 청목도장이라 하더라도 도망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 할 것이 뭐람! 내가 적당히 암수(暗手)를 쓰기만 하면 제가 도망갈 수 있을라구!
생각한 사나이는 급히 온 몸의 공력을 오른 팔에 모았다.
청목도장은 뒤에 남은 사나이를 모른 척하고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한발을 앞으로 내딛자 칠, 팔십 자 앞에 그의 몸이 날아가 버렸다.
이것은 전진파의 경공절학(輕功絶學)이었으니 청목도장은 있는 실력을 다하여 몸을 날려 사나이의 기를 꺾으려는 시위이기도 하였다.
사나이는 손을 들어 노인을 공격하려다가 다시 멈칫하여 버렸다. 그의 잔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천만 다행이었다고 자위하였다.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아서 다행이었구나! 저 늙은이는 진실로 청목도장에 틀림없어!』
중얼중얼하면서 청목도장의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청목도장은 뒤에 서 있는 사나이의 심리적 변화를 느끼지 못한 채 곧은 자세를 유지하면서 큰 걸음으로 앞을 향하여 날아가듯 걸어가고 있었다.
뒤에서 청목도장을 바라보고 있던 사나이는 천성이 변덕스럽기 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날으듯 앞으로 달려가는 청목도장이 도망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늙은이를 그대로 보낸다는 것이 어닌가 아쉬움을 느껴 기어코 일 장을 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자,
『청목도장이면 어때?』
하고 소리를 지르니 지금까지 잠잠했던 호전적(好戰的)인 그의 붉은 피가 혈관에서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내 기어코 그 늙은이를 일초(一招)에 녹여버려야지!』
사나이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두 손을 입에 모으고 보일 듯 말 듯한 청목도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봐 도장! 잠깐 기다려. 노부(老夫)가 손님을 보낼 준비를 할 테니, 도장 들었나?』
그는 경공술을 운행시키면서 큰 걸음으로 그를 뒤쫓기 시작하였다.
사나이의 경공술은 점점 무서운 힘을 발휘하며 앞으로 달려간다.
청목도장은 사나이의 마음이 변한 것을 깨닫고 시끄러워질 앞일을 생각하여 더욱 빨리 몸을 날리면서,
――나는 경공(輕功) 역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그 자의 공력으로 보아 오래 달리고 오래 쫓으면 반드시 나를 추격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청목도장은 우뚝 몸을 세우고 그 자리에 정지하였다.
그러자,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나이 역시 청목도장의 옆에 몸을 날려 왔다.
청목도장은 마음속으로 사나이의 공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저윽이 놀랐다.
청목도장이 몸을 돌려 사나이를 바라보니 사나이는 앞으로 나서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도장께서는 기왕 이 험지까지 오셨다가 잠시도 머물지 않으신다면 노부와는 영원한 이별이 되는 것이니 도장께서는 노부의 송객(送客)의 예를 받으시오.』
말이 끝이 나자 그는 합장(合掌)을 하고서는 공손히 절을 한다.
청목도장은 사나이가 합장을 하여 작별의 예를 드리는 척하면서 두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청목도장은 사나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뒤쫓아 올 때는 심한 마음의 동요를 느꼈으나 그가 옆에 오자 도리어 더욱 굳센 투지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청목도장은 호쾌하게 한바탕 웃고 나서,
『건방진 놈! 감히 누구의 앞이라고 함부로 까불려 하나?』
이때 갑자기 비웃는 소리가 허공으로 번져나가자 한 줄기의 세찬 진력이 도장을 향하여 쳐들어갔다.
이때 도장은 공력이 완전히 소실되어 있었기 때문에 몸이 앞으로 끌려 대여섯 걸음 사나이에게로 다가섰다.
이때,
『펑!』
하는 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자 사나이는 뜻밖에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청목도장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호호백발 노인이 마악 몸을 날려 사나이의 진세(陣勢)를 소거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청목도장은 곁눈으로 그 늙은이를 힐끔 보았다.
약간 눈에 익은 사람 같았으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사나이 역시 놀란 눈을 크게 뜨면서 호호백발 노인을 바라보았다.
청목도장은 호호백발 노인이 쏟아 낸 진기로 인하여 생긴 기류는 두 사람의 일류 고수가 서로 싸울 때 생기는 특징이란 것을 금시에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나이는 이 호호백발 노인의 급습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나이는 노기를 띠운 음성으로,
『이름을 대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일 장이 노인을 향하여 쳐 들어갔다.
사나이의 초식은 바로 무당문파(武當門派)의 절초인 귀전단비(鬼箭亂飛)였다.
이 초식을 보자 청목도장은 크게 놀라면서
――어째서 무당파의 절초를 그는 저렇듯 정순(精純)하게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초식의 내력은 아마도 옛날의 나 자신도 저보다는 못했을 것이다――
사나이의 일초가 갑자기 쳐나가자 수십만 근의 우레가 몰려오는 것 같은 기세가 있었다.
그러나 사나이의 양 손바닥은 허공에서 정지한 채 내리지를 않는다.
청목은 비록 공력이 전실(前失)되었으나 무학(武學)의 깊이는 당대 무림에서 그를 쫓을 자가 없었다.
그는 한 번 바라봄으로써 사세를 똑똑히 판단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백발노인은 두 팔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오른손을 위로 올려 뒤집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펴서 사나이의 장심(掌心)을 향하여 은은히 쳐 나가니 손가락에서는 갑자기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나이는 크게 놀라면서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금은지(金銀指)! 바로 너였구나!』
청목은 사나이의 목소리를 듣고서는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호호백발 노인의 옆얼굴의 윤곽에는 아직도 그 옛날의 무공을 떨쳤던 대마두(大魔頭)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산천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늙었구나! 이제는 바로 젊은이의 시대로다! 아니! 운학(鄆鶴)의 천하다.
바로 그 호호백발 늙은이야말로 마교오웅(魔教五雄) 중의 둘째인 금은지(金銀指) 노이(老二) 구정(丘正)이었다.
금은지는 백설 같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네 늙은 놈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나는 모조리 알고 있단 말야! 빨리 그 가죽을 벗어 나에게 정체를 보여라!』
사나이는 갑자기 껄껄거리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며 몸을 솟구쳐 나는 듯 오던 길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청목은 사나이가 도망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엇인가 머리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가다듬어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청목은 금은지 구정이 들으라는 듯이 허공을 바라보면서
『그는 누구일까? 많이 낯이 익기는 하건만!』
금은지 구정은 몸을 돌이키며 호탕하게 웃으면서
『하아하아, 도장(道長)께서는 별래무양(別來無恙)하시오? 나의 회포가 아주 크외다!』
청목도장은 그가 자기를 소도사(小道士)라 부를 줄 알았는데 도장(道長)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서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읍하면서
『구노선배(丘老先輩)님의 만강(萬康)하신 모습을 다시 뵈우니 얼마나 다행하고 기쁜 일인지 모르겠소이다.』
이십 년 전 그들은 죽지산(竹枝山)에서 일전을 맞이했었고 이 혈전(血戰)에서 청목도장은 공력을 완전히 잃었던 것이었다.
마교오웅들은 아직 운학에게 약속의 결투가 끝나지 않아서 서먹서먹하기는 하였으나 지금 이 재회(再會)의 자리에서는 서로 과거를 씻은 듯이 잊고 점잖게 대하는 것으로 봐서 역시 당대 무림의 고수들의 위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교환하는 인사말은 겸손하기 이를 데가 없었고 서로의 과거를 축복하는 말에 진심이 깃들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무림영웅(武林英雄)들의 본색인 것이었다.
금은지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멀리 푸른 하늘을 쳐다본다. 그의 가슴에는 지난날 죽지산에서의 소도사(小道士) 청목(靑木)의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 듯 했다.
금은지의 얼굴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어느 틈엔가 눈길을 돌려 산 아래 펼쳐진 음침한 황사의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시(午時)가 지나자 또 다시 모든 것은 평정(平靜)을 되찾은 듯 조용하여졌다.
청목도장도 눈을 계곡 아래로 돌려 바라보니 황사 가운데에 갑자기,
『천하제일(天下第一).』
이라는 네 글자가 나비가 춤을 추듯 날아가는 것 같은 환영(幻影)이 보이자 가슴에 또 다시 뭉클 하는 회포가 되살아오는 것을 느꼈다.
청목도장은 갑자기 혀를 차면서,
『괜찮아! 운학은 꼭 그를 이기고 말 것이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뒤를 바라보는 순간에 금은지 구정과 시선이 마주쳤다.
구정은 화기에 찬 눈을 도장을 바라보면서,
『도장의 경공이 거의 회복되셨다는 소문을 들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올시다.』
『빈도(貧道)는 이십여 년간을 치료하여 팔맥(八脈) 중에서 겨우 일맥만을 운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직 반도 회복하지 못한 셈이 아니오리까?』
청목도장의 모습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애수가 잠겨진다.
금은지 구정은 청목도장의 내상에 대하여서는 미안할 느낌을 갖기는 하였으나 양심에는 추호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또한 금은지 구정을 바라보는 청목도장도 자기의 내상으로 인하여 그를 조금도 원망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이 없었다.
두 사람의 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서로의 대화는 조금도 어색하게 보이지를 않았다.
청목도장은 온화한 그의 얼굴을 보자 깊은 애상(哀傷)에 잠겼다.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구나! 구정의 본성(本性)은 변할 리가 있으리오만 그의 얼굴에서는 살기가 완전히 가셔 있지 않은가――
그는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사람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것인지를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구정은 담담하게,
『내년 봄 영도(令徒) 운학은 반드시 지난날의 약속을 지키겠지요! 노부(老夫)는 진심으로 그의 이름이 천하를 주름잡도록 기원하고 있소이다.』
청목도장은 명랑하게 웃으니 그 웃음 속에는 무엇인가 깊은 신뢰(信賴)가 담겨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금은지 구정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온 몸의 경공술을 발휘하여 화살처럼 몸을 날려 사라졌다.
청목도장은 인사 한 마디 없이 사라져 가는 구정(丘正)을 미소로 보내면서 무엇보다도 조금 전에 나타났던 인피(人皮)를 뒤집어 쓴 사나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그 사나이가 나타나 준다면 그의 정체를 꼭 알아 낼 수가 있으며 침사곡에 잠겨 있는 수수께끼도 풀려질 것 같았다.
청목도장은 천천히 몸을 돌리면서 몸을 날려 이 산정(山頂)을 내려서니 그 모습은 삽시에 종적이 묘연하여졌다.
청목도장이 사라진 산정 위는 다시 만물이 잠든 것 같은 적막이 찾아 들었다
이 적막한 사정없이 시간의 공백을 메꾸어 가고 있었다.
해가 공중에서 서쪽으로 얼마간 기울었다.
두세 시간의 공간이 메꾸어졌을 무렵 갑자기 산정의 가라앉은 공기를 뒤흔들며,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그림자가 다시 이 산정을 찾았다.
그가 서슴지 않고 벼랑가로 다가가는 것을 보니 이 산정의 지리에 무척 익숙한 것같이 보인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려 인적이 없음을 알자 온 몸의 진기를 운행시켜 크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청정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니 그것은 곧,
『盛夏結氷 성하결빙
嚴冬汗淋 엄동한림
寒熱之谷 한열지곡
天下奇景 천하기경
한여름에 얼음 얼고
엄동에 땀이 흐르니
차고 더운 한열곡은
천하의 기경이로다.』
온 몸의 진기를 모아 소리치는 그의 시를 읊는 소리는 사방에 메아리쳐 왔다.
그의 마지막 싯귀(詩句) 경(景)자가 입을 나가자 제일 첫째 싯귀 성(盛)자가 메아리쳐 오니 마치 금방 아이들의 돌림노래와도 같이 들려온다.
그는 들려오는 메아리를 들으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려 누군가를 찾는 모습이었으나 인적을 찾아 볼 수가 없자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냐? 나는 내가 늦게 온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사나이는 턱에 흰 수염이 아무렇게나 나 있었으며 두 눈에는 무서운 정기가 넘쳐흐르는 청수한 노인이었다.
얼마 동안이 지나자 그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걸어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중얼거린다.
『왜 아직도 오지 않을까? 이상한걸?』
그는 다시 온 몸에 진기를 운행시켜 먼저 읊던 시를 다시 읊기 시작하니 다시 메아리가 사방에서 돌아온다.
그의 마지막 경(景) 소리가 입에서 나가자 사나이의 등 뒤에서 갑자기 손뼉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노인은 깜짝 놀라면서 비호같이 몸을 돌리며 호통을 친다.
『누구냐!』
그의 등 뒤에는 귀신같이 한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키가 육척같고 몸집이 우람한 노인은 그의 뒤에 있는 돌 위에 서서 자기를 노려보고 서 있는 사나이를 보자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사가(査家), 자네였구나!』
『영호진(令狐眞) 호법께서 청하심을 받고 소제 사여안(查汝安) 이렇게 예를 드립니다.』
나타난 사나이는 바로 일검쌍탈진신주(一劍雙奪震神州) 사여안(查汝安)이었다.
영호진은 뜻밖에도 이곳에서 사여안을 만나자,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본다.
사여안은 말을 이어,
『대호법(大護法)에게 묻거니와 어째서 여기를 한열(寒熱)의 골짜기라 부르십니까? 설마 이 골짜기의 별명이 한열지곡(寒熱之谷)이라 하지는 않겠지요?』
영호진은 그제서야 사여안이 자기가 암호(暗號)로 읊은 시를 엿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거친 목소리로,
『한열곡이 한열곡이지 뭐야! 이 골짜기가 바로 침사곡이란 것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사여안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마친 사람처럼 껄껄거리고 웃으면서,
『만약에 사여안의 추측이 틀림없다면은 이 골짜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소이다.』
영호진은 얼굴색이 변했으나 침착한 말투로,
『그런 비밀을 내가 어찌 알겠소? 사대협이 알고 계시니 이 늙은 것에게 좀 들려주시구려!』
사여안은 영호진이 고의로 질문의 회답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알자 더 이상 묻는 것을 단념하고 차가운 웃음을 띠우면서,
『천하 무림에서 일제히 이 골짜기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골짜기에 아무리 비밀이 있다 하더라도 그 비밀이 오래 계속되지는 못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영호진은 몹시 당황하면서 마음속으로,
(나는 교주(敎主)를 위하여 이곳의 소식을 알려 왔을 뿐인데, 이곳에 비밀이 있단 말이냐? 설마 교주는 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나를 속여 가며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실 그는 이름만이 대호법(大護法)이지 교주의 행동거지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는 새롭게 큰 의심이 생겨남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 탄식하기를,
――이 영호진이 무림 중에 서장파(西藏派)의 지존(至尊)으로서 행세했었건만 교주의 몇 마디 간청에 못 이겨서 그 교주란 놈을 위하여 돼먹지도 않은 호법이란 자리에 올랐던 내가 바보 아니었는가? 장부일언(丈夫一言)이 중천금(重千金)이라 어찌할 수는 없지만 네놈들이 만약에라도 하늘을 거슬리는 음모(陰謀)를 꾸민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네놈들과 작별할 것이니 그때 나를 원망 말아라――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운태마군(雲台魔君)은 일생을 통하여 광폭한 살인자로서 강호에 이름이 나있는 악당(惡黨)이었으나 일찍이 무고한 살상을 한 적은 별로 없었다.
정통파 무림에서는 그를 마군(魔君)이라 부르고 있지만 사형령주와 같이 극악(極惡)에 달한 인물은 아니었다.
사여안은 그가 침묵에 잠겨 침통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를 보고 무어라 말을 걸어 볼 수가 없어서 자기 혼자 생각에 잠겨 버렸다.
(보아하니 영호진은 누구를 만나러 이곳에 온 것 같은데, 나하고 입씨름이나 벌이고 있는 사이에 상대가 나타난다면 내가 곤란해질 것 같으니 일찍이 내가 이 자를 피하는 것이 좋겠군!)
이런 결론에 이른 사여안은 팔짱을 끼고 우뚝 서며,
『나 사여안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영호법을 만났소이다. 저는 갈 길이 바빠서 먼저 실례하겠소이다.』
그는 영호진의 뒷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되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영호진의 안중에는 사여안을 문제 삼지도 않았고 그의 지껄이는 소리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다가 그가 몸을 돌려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야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어찌 되었든 천전교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있는 몸이니 응당 천전교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장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저놈이 내가 암호로 쓴 싯귀(詩句)를 들었을 것이니 저놈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운태마군은 벼락같은 소리로,
『사대협, 잠깐만――』
하며 몸을 길게 뽑으며 일 장을 사여안에게 쳐 보냈다.
사여안은 등덜미에서 세찬 장풍이 덮쳐 오는 것을 느끼자 자세를 뒤집어 도타금종(倒打金鐘)의 일초를 휘둘러 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어느 틈엔가 반원을 그린다.
두 사람의 사나운 장력(掌力)이 공중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맞부딪쳤다.
사여안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으며 영호진 역시 가볍게 돌 위에서 땅으로 내려섰다.
땅에 내려선 영호진은 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호통을 친다.
『사여안! 오늘은 살아 돌아갈 생각을 말아라!』
이 말을 들은 사여안은 양 팔을 번쩍 들면서 무림에 이름을 크게 떨친 쌍탈수(雙奪手)를 쳐내면서 눈을 부릅뜨고서는,
『나 역시 자네와의 혈전을 각오하고 있었네!』
이 말을 들은 영호진은 온 몸에 공력을 운행시키며 서장파 특유(特有)의 무공을 나타내며 사여안에게 육박하여 쳐들어갔다.
사여안은 온 몸의 내공의 힘을 오른 손에 모아놓으니,
『휘익――』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나자, 등에 업혔던 칼집에서 번쩍 칼이 뽑혀지며 영호진을 향하여 칼끝이 겨누어졌다.
그러나 영호진은 비꼬는 듯이,
『정말 훌륭한 일검쌍탈진신주(一劍雙奪震神州)로군!』
사여안은 칼끝을 영호진을 향하여 밀고 나가면서,
『지난 날 대호법께서 사여안에게 금강회나한(金剛會羅漢)을 내려 주셨으나 받지 못하여 한(恨)이던 차에 오늘 이 원(願)을 풀게 하여 주시니 천만 다행이올시다.』
갑자기 영호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고 나서,
『나는 정말 자네 같은 용감한 사나이를 존경하네. 그러나 자네는 우리 천전교의 정체를 잡으려고만 하니 미워지지 않을 수가 없단 말야!』
『천전교는 사형령주의 이름을 팔아 함부로 살상을 일삼고 있으니 나 사여안이 응징(膺懲)하지 않더라도 천하 무림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영호진 호법께서도 무림정의(武林正義)라는 네 글자를 잊지 않으신다면 악(惡)을 도와 정의에 위배되는 일을 해서야 쓰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영호진은 갑자기 사여안의 어깨를 향하여 일 장을 쳐 나갔다.
사여안은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빼며 쌍탈검으로 그의 장풍을 막아 내었다.
영호진은 사여안의 초식이 심오하고 정심(精深)함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뒤집어 단번에 삼 장을 쳐 내었다.
그러나 영호진 역시 서장무림에 웅거(雄據)한지 수십 년, 공력이 심후(深厚)함은 말할 수도 없었다.
지난 날 무림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운학(鄆鶴)의 선천기공(先天氣功)으로서 영호진의 술법을 억지로 막을 정도였으니 가히 그의 실력을 알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운학 자신도 내력이 완전히 탈진하여 졸도(卒倒)까지 하였던 것이다.
사여안 역시 지난 날 그와 맨손으로 일전(一戰)을 치룬 일이 있었는데 당시 영호진이 단번에 쳐오는 삼 장을 보고서는 그 괴상한 초식 가운데에 무궁한 묘초(妙招)가 들어 있는 것을 느끼고서는 마음속에 무서운 초조감을 느꼈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사여안은 대갈일성과 함께 왼손에 공력을 모아 일검쌍탈(一劍雙奪)의 절학(絶學)을 펴내기 시작하였다.
사실 사여안이 펴낸 일검쌍탈의 묘수는 강호의 소문 그대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였다.
영호진은 자기의 장풍이 마치 철벽에 부닥치는 것 같은 위압을 받는 것 같자,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이놈이 나이도 어린데 무림에 위명을 떨친다더니 헛소문이 아니었군!
영호진의 날카로운 삼 장도 사여안 앞에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또한 사여안도 그와 오랫동안 싸울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호통을 한 번 치고서는 마치 비호(飛虎)처럼 몸을 수십 자 밖으로 날리면서,
『이 사여안이 영호법을 오래 모실 수가 없으니 미안하오만 다른 날로 미루어 가르침을 받기로 합시다.』
소리를 친다.
영호진이 마악 추격하려 하니 사여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영호진 선배께서는 위명(威名)이 천하를 진동하고 있는데 어떤 연고로 치사스럽게 남의 수하(手下)에 붙어 악(惡)을 도우시오!』
이런 사여안의 호통을 들은 영호진의 마음속은 천근만근의 큰 바위가 덮쳐누르는 것 같은 괴로움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팔 하나 까딱도 못하고 멍하니 서서 사여안의 나는 듯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서산에 해가 기울고 대지(大地)에 어둠이 덮이기 시작하였으나 영호진은 넋을 잃은 사람 모양 눈 하나 깜짝 않고 멀기니 서 있는 것으로 봐서 사여안이 마지막 남기고 간 한 마디가 마음에 큰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었는데 그는 오지 않는 모양이군!』
바로 이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는 듯 바위틈을 피하며 영호진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영호진은 깜짝 놀라면서 도끼눈으로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소리를 지른다.
『아! 왔다.』
다가선 사나이의 얼굴을 극히 무표정하였다.
영호진은 그가 다가서자, 한 마디 말도 교환하기 전에 한 개의 금낭(金囊)을 품에서 꺼내어 사나이에게 던져주며 소리를 쳤다.
『교주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오!』
사나이는 금낭을 받아 들고서는 영호진을 쏘아보면서
『영호진! 당신은 용관(庸關)에 있을 때 무슨 말을 했었지?』
『응, 용관에 있을 때 나는 당신에게 한 수 낭패를 당한 일이 있었지! 당신은 그 대가를 나에게 요구하였기에 나는 그 어린 아이의 명령을 들어 그의 호법이 되라고 하던 말을 한 마디도 잊지 않소. 도대체 그 당시에 나이 어린 아이는 당신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오? 또한 당신들은 도대체가――』
그 사람은 사납게,
『영호진, 지금 당신은 호법이 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구려!』
영호진은 허공을 바라보면서,
『아직까지 영호진은 의리를 저버린 적이 없소이다. 기왕 당신에게 복종하기로 약속한 이상 어찌 후회란 있을 수가 있겠소?』
사나이의 목소리는 조금 부드러워지며,
『여보 호법, 얼마 전에 당신과 겨루던 그 사람은 누구요?』
『일검쌍탈진신주 사여안이오.』
대답을 하면서 영호진은 이 사나이가 얄밉고 미운 마음이 들었다.
――이놈은 이곳에 와 있은 지 오래된 모양인데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까닭이 무엇이냐――
사나이는,
『사여안! 그 놈의 공력이 얼마나 무섭다고! 당신은 내가 일찍 나타나지 않은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영호진은 서슴지 않고,
『그렇소.』
『사여안의 공력은 무섭지! 그는 당신과 싸워 무승부로 끝이 나자 사라져 버렸는데 당신과 나와 선약(先約)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으니 어찌 내가 빨리 나타날 수가 있었겠소?』
영호진은 무엇인가 수긍이 가는 것이 있는 것 같았으나 아직도 반신반의(半信半疑)의 태도를 보이면서,
『첩첩히 쌓인 이 산중에서 당신은 어떻게 사여안이 멀리 갔음을 짐작하시오?』
사나이는 지그시 웃으면서,
『내가 지금 공력을 운행시켜 사방 오 리를 찾아보니 그 사가 놈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가 없소이다그려!』
그는 다시 한 번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그 놈은 제법 멀리 가버린 모양이군.』
『당신은 교주 그 아이에게 전할 회답을 갖고 있지 않소?』
영호진이 묻자 사나이는 화를 버럭 내면서,
『당신은 다른 곳에서도 교주를 나이 어린 아이라고 부르오?』
영호진은 껄껄거리면서,
『용관(庸關)에 살 때에 내가 교주를 나이 어린 아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규정(規定)을 만든 적이 있소?』
사나이는 눈을 부릅뜨며 영호진을 노려보더니
『지금부터 당신은 교주를 어린 아이라고 함부로 부르지 말아! 아니면 우리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고 볼 테니 말이야!』
영호진은 아니꼽다는 듯이 웃으면서,
『노부(老夫)는 가오.』
하기가 무섭게 경공술을 운행시켜 나는 듯 사라졌다.
사나이는 서산머리에 솟은 오른 초생달을 바라보면서 금낭을 품에 넣더니 몸을 재빨리 날려 사라지자 멀지 않은 바위 뒤에서 또 한 사나이가 중얼거리면서 이곳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흠 그 놈의 신법(身法)이 보통이 아니야! 나도 단숨에 백여 리를 달려 이곳까지 쫓아 왔으나 그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으니 그 놈이 쓴 인피(人皮) 가면을 벗겨서 정체를 잡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중얼거리는 사나이는 몹시 가석(可惜)한 눈치였다.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로 봐서 사형령주(蛇形令主)는 천전교의 교주임에 틀림이 없고, 천전교는 그 사나이의 절제(節制)를 받고 있음에 틀림이 없는걸!』
실같이 가느다란 초승달의 가냘픈 달빛이 사나이의 얼굴을 비추니 그는 틀림없는 일검쌍탈진신주 사여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