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해설
기다림과 그리움의 융합이미지 탐색
--김영일 시집 『기다림을 키우며』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1. 자아의 인식과 인생의 의미
현대시의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은 그 전개 과정에서 인본주의를 근원으로 해서 모든 소재와 주제를 설정하고 자신의 삶의 궤적(軌跡)인 인생 체험을 모티프로 하는 경향을 감응(感應)할 수 있는 작품 창작이 우리 시문학의 한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 김영일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삶을 영위하면서 체험한 사연들이 그의 지적인 관념에서 창출한 이미지들을 모아서 첫 시집 『내 머물 곳 어디』를 비롯하여 이 『기다림을 키우며』까지 그가 천착(穿鑿)하는 휴머니즘의 실현을 위한 차원 높은 시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思惟)의 발흥은 그 시인이 간직한 오감(五感-喜怒哀樂愛惡慾)에서 생성하는 정감(情感)들이 생존 환경과 더불어 체득한 체험들이 재생하여 이미지를 창출하게 되고 시인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작품을 창작하게 되는 것이다. 김영일 시인은 이처럼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울며 태어나서 울며 떠나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구원은 무엇인가// 사소한 것과의 이별에/ 숨죽인 자아가 눈을 뜨는/ 근원은 참 많이 멀다(「우물의 언어」 중에서)“는 어조로 ”나“에 대한 존재의 문제를 의문형 화법으로 의식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아가 눈을 뜨는/ 근원”에 대하여 많은 고뇌와 번민을 정신적으로 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인생길 험난한 파도도 넘고/ 가시에 찔리지도 말고/ 고통과 어려움도 슬기롭게 넘기면/ 험한 고개도 넘을 수 있으련만(「장애물이 있으면」 중에서)”이라는 자위(自慰)의 어조로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겨울 산의 적막과 고요 속
잎 떨군 나뭇가지 같은
구원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큰 것과 작은 것 가운데
자아가 사색(思索)을 신고 간다
가끔은 정에 인연에 시간에
영혼이 흩어지고 마모되는가
자주 명상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얻으라며
파도치는 세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끊임없이 인내하라 한다
--「자아가 눈뜰 때」 전문
김영일 시인은 여기서도 자아를 탐구하면서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또는 “영혼이 흩어지고 마모되는가”라는 의문형 시법으로 시적 상황을 설정하거나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적막한 겨울산에서 잎 떨군 나뭇가지와 같은 “구원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어서 동시에 나는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해법을 구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자아와 사색의 동행에서 정(情)과 인연의 시간과 영혼이 마모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결론에서 정리한 자주 명상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얻으라는 고언(苦言)을 적시하고 “파도치는 세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끊임없이 인내하라 한다”는 스스로를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시인의 말>에서 말했듯이 “시는 항상 나를 닦는 거울이며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분신이다.”는 언지(言志)와 같이 자아를 인식하는 데는 다양한 사유의 지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품 「인연」 전문에서 “바람은 한바탕 불다 그치고/ 구름은 얼마나 머물다 갈까// 구름 같은 인생/ 그림자 같은 삶/ 모두 잠시이며 헛것인가// 생명은 길든 짧든/ 인연이 있으면 피어나고/ 그 인연 다하면 떠나는가” 또는 「미움도 사라질까」 중에서도 “삶의 속박에서 풀려나 창공을 훨훨 나는/ 비상의 날개를 펼쳐 본다--중략--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까/ 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사라질까” 그의 의문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는 “용감한 나와 비겁한 나/ 너그러운 나와 옹졸한 나/ 부지런한 나와 게으른 나/ 의로운 나와 불의의 나(「때로는」 중에서)”라거나 “예고 없이 돌변하는 날씨 같은/ 새로운 자각(自覚)이 내 안에서 움튼다(「절로 행복하여라」 중에서)”라는 어조는 “나” 에 대한 존재의식을 명징(明澄)하게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피어 있는 꽃이 없듯이
그냥 태어난 인생도 없나 봐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난과 역경의 길이라지만
세속에 찌들어 힘겨워도
삶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
험난한 이 세상
아픔은 씻어 버리고
현명하게 살아야 하나 봐
마음 비우고 살아간다면
행복은 점점 가까워지나 봐
--「누구에게나」 전문
이러한 자의식이나 자아의 탐구는 삶에서 살펴야 그의 내면에 잠재한 의식에서 진정한 인생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삶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관 형성에 지표(指標)가 될 수 있으며 생애에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게 되고 생명의 영속적인 범주에서 진취적인 행복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삶이 지속되는 동안 당면하게 되는 다양한 상황들이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김영일 시인이 감지한 것은 “험난한 이 세상”에서 삶에서의 고난과 역경을 먼저 정화하는 해법으로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난과 역경의 길이라지만/ 세속에 찌들어 힘겨워도/ 삶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는 그의 진실을 궁극적으로 적시하고 있어서 마음 비움과 행복을 동일시하는 삶의 의미가 바로 자아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A. 카뮈는 삶에의 절망 없이는 삶에의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말로 절망이라는 서회적인 모순과 갈등들을 융합(融合)하는 삶의 형태를 적시하고 있으나 김영일 시인은 “아픔은 씻어 버리고/ 현명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조로 “나”를 유도(誘導)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여기저기서 미소 짓는 꽃들을 보면서/ 삶의 속박에서 풀려나 창공을 훨훨 나는/ 비상의 날개를 펼쳐 본다--중략--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까/ 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사라질까 (「미움도 사라질까」 중에서)”라거나 “구름 같은 인생/ 그림자 같은 삶/ 모두 잠시이며 헛것인가 (「인연」 중에서)” 그리고 “유유자적한 구름/ 해질녘 짙피워 불타는 낙조처럼/ 삶의 괴로운 멍에와/ 짓눌린 속박에서 탈출하고 싶어라(「멍에」 중에서)”라는 기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아 인식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2. 기다림과 그리움의 대칭적 불가분
우리 인간에게서는 불가분의 대칭적 관계에서 괴로워하거나 애달파하는 심리적인 상황이 자주 일어나곤 한다. 이는 서로 대칭으로 생성하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상관성은 생존에서 누구에게서나 감지할 있는 삶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일 시인은 “만남이 있다는 건/ 생기 있는 기다림이다(「나그네」 중에서)”라거나 “어느덧 어둠이 밤을 점령하는가/ 불 꺼진 침실은 그리움을 밝힌다 (「그리움을 밝힌다」 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그가 천착하는 기다림과 그리움은 그의 내면 의식에서 생성하는 관념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일 시인이 이처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또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처럼 기다리는 대상에는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어떤 기대일까. 또는 불망의 인연으로 헤어진 상대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일까라는 사실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린다
이 순간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으랴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기다림은 삶의 원동력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역경과 좌절을 이겨내고
고통과 시련을 넘어서면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하고
더 풍요로울 것이라는 기대 속에
기다림을 키운다
--「기다림을 키우며」 전문
이 작품은 이 시집의 표제시(標題詩)이다. 그는 “기다림은 삶의 원동력”이라는 어조로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에 역경이나 좌절을 이겨내기 위해서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다림은 상황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기다”리는 일은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는 안도(安堵)의 어조로 “더 풍요로울 것이라는 기대 속에/ 기다림을 키운다”는 결론으로 기다림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이어령 교수도 그의 글 「증언하는 캘린더」 중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름답고 슬픈 것이다. 희망과 절망, 권태와 기대. 설레이는 희열이 있는가 하면 어둡고 답답한 환멸이 있다. 서로 모순하는 생의 기도 속에서 기다림의 꽃은 핀다”는 진솔한 기다림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 「다시 또 오라 한다」 중에서 “누구를 위한 기다림인가/ 바닷가에서 떠날 줄 모른다”, 「기다림」 중에서는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하고/ 더 풍요로울 거라는 기대 속에서/ 오늘도 기다림을 키운다” 그리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구나」 중에서도 “그립다 못 잊어 눈 감고/ 가신 님 다시 만날 날 기다리며/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다”는 애절한 어조와 같이 그의 기다림은 끝없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어제의 강물이 아니듯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지금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흘러간 시간만큼 그리움이 남고
그 그리움 속에
나만의 향기가 묻어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구름처럼
사람의 일도 구름 같아서
이별의 슬픔 막을 수는 없는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시간에
그리움의 향기를 심으며
지금을 살고 있다
--「그리움의 향기」 전문
이처럼 기다림의 대칭은 그리움이다. 그는 이 그리움의 향기는 “흘러간 시간만큼 그리움이 남고/ 그 그리움 속에/ 나만의 향기가 묻어나는 /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기원의 의식과 같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이별의 슬픔 막을 수는 없는가”라는 이별의 슬픔이 그의 의식에 깊이 잠재해 있어서 이 그리움의 원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별의 대상을 누구일까라는 유추를 하게 되는데 “초승달 닮은 기억 속의 이름들/ 아련히 스쳐가는 그리움이 사랑임을/ 이제야 깨달았다(「이제야 깨달았다」 중에서)”는 그의 각성(覺性)에서 아마도 사랑하던 사람이라는 불망의 대상이 화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론에서 “안개처럼 사라지는 시간에/ 그리움의 향기를 심으며/ 지금을 살고 있다”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심정을 화해하고 융합하면서 이해와 긍정의 수용의 미학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리움에 대한 의지의 표현은 다음과 같이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흘러 모든 걸 앗아간다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간절한 그리움과/ 가슴에 흐르는 이 슬픔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습니다(「언젠가는 고백하려 했는데」 중에서)
-햇살이 그 자리를 다시 비출 때/ 마음 한켠에 숨겨 둔 그리움을 위하여/ 엊그제 같은 추억 이 되살아난다(「그리움을 위하여」 중에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슬픔을 녹이지만/ 그리움 속에 세월만 흐르고/ 아픔과 슬픔도 그 세월에 잠긴다(「그리움 속에」 중에서)
-털어내야 가벼워진다며/ 욕심 비운 자리마다/ 무서리 내리고 찬바람 불어오니/ 뜨끈한 아랫 목에서 정으로 살찌던/ 그 시절의 그리움이 구름꽃으로 핀다(「그 시절의 그리움이」 중에서)
-저물어가는 서산마루에 걸린/ 하현달이 그리움으로 다가오면/ 님 잃은 슬픔인지/ 허공에 떠 도는 나그네마냥/ 구름 따라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중에서)
이 밖에도 작품 「피할 수 없는가」 「그리움은 기억 속에서만 피는가」 「그리움을 위하여 「마음」 「그리움은 혼자가 아닙니다」 「어느 날 밤」 등등에서 그의 그리움은 다양한 어조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우리들의 공감을 흡인하고 있는 것이다.
3.세월과 시간성의 변화 이미지 투영
김영일 시인은 무형의 세월(시간)에 민감하다. 세월은 만유(萬有)의 자연이나 우리 인간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제공한다. 말없이 흘러가는 세월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서 다채로운 양상으로 그 섭리에 따라서 변모한 자태를 보여주고(showing) 우리 인간들도 세월과 동행하면서 과거라는 시간성을 제공하고 인생행로에 희노애락의 다양한 체험을 들려주고(story telling) 있는 것이다.
대체로 세월이라고 하면 우선 우리들은 나이에서 그 연륜에 따라서 어리다, 젊다를 거쳐서 중년과 노년 등 인생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으며 탄생과 죽음이라는 생명의 문제까지도 이미지로 투영하여 작품을 완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보다 빠른 것이 세월이던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며
순간의 만남에도
즐거운 일과 행복한 일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살아가며 만든 흔적은
애잔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월의 나이테가 늘어날 때마다
세월을 먹을 때마다 고통만 쌓이는가
그래도 선한 마음 뒤끝에
선한 결과가 온다는 말을 믿으며
희망에 기대어 행복한 꿈을 꾸리라
--「세월을 먹을 때마다」 전문
김영일 시인은 너무 빨리 흘러가는 세월에 대하여 인연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살아가며 만든 흔적은/ 애잔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월의 나이테가 늘어날 때마다/ 세월을 먹을 때마다 고통만 쌓이는가”라는 과거에서 현실로 생장하는 과정에서 세월의 나이테만 늘어나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고뇌에 쌓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은 선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선한 결과가 온다는 희망과 기대가 있어서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물보다 빠른 것이 세월이라는 전제를 설정하고 이 세월의 시간성이 지닌 변화이미지를 투영하면서 우주 만물과 인간들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시법은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의 허무의식이 깔려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처럼
인생은 한 조각 뜬구름인가
세상살이 짓궂어
오지 말라 손 저어도
어김없이 내일은 오는 법
이제껏 사는 길이 같을지라도
연습은 더더욱 아니다
무심하다 탄식한들 누가 알아주리
더디 간다 힘들어도 오늘은 간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이
세월은 그렇게 변해 간다
--「덧없는 세월」 전문
그는 다시 이처럼 덧없는 세월에 대해서 인생론을 대입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은 김영일 시인의 내면에서 발흥하고 있는 세월의 흐름과 인생의 행로에서 상호 융합하는 시법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오래전에 펴낸 시집 『무얼하고 계시나』에서도 “생명성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세월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본인이 말한 바와 같이 세월과 인간의 생애는 어차피 불가피한 동반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작품 도입부분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처럼/ 인생은 한 조각 뜬구름인가”라는 문제 제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세상살이가 짓궂다는 점과 사는 길이 연습은 아니다라는 점이 적시하는 바와 같이 이를 사람들은 “무심하다 탄식한들 누가 알아주리”라는 탄식조로 세월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론은 세월이 아무리 더디 가고 힘들어도 오늘은 지나가고 있으며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이/ 세월은 그렇게 변해 간다”라는 어조로 세월과의 화해로 그의 메시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품 「세월은 흘러가고」 중에서도 “그 세월만큼 간절한/ 안개처럼 사라지는 기억이/ 애타게 다시 그리워질 때/ 산사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스님의 독경 소리에” 귀기울이고 번뇌마(煩惱魔-탐욕, 진애, 우치)를 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세월의 변화는 작품 「자연의 질서」 중에서 “봄이 오면 잎이 피고/ 여름이 오면 녹음을 이루다가/ 가을에는 물들어 떨어지고/ 겨울에는 맨살이 되어/ 다시 생장(生長)을 준비한다”는 사계절의 풍광이 바로 세월과 밀접한 관계로 형성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4. 사계절의 정취와 자연 서정의 향기
김영일 시인은 일년 사계절의 정취에 흠뻑 젖어있다. 앞에서도 자연 섭리의 질서에는 사계절의 풍광이 흐르는 세월과 긴밀한 상관성을 갖는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사계절마다 달리 채색되는 자연의 화폭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한 작품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 서정에 심취하면서 그들과 묵언(黙言)의 교감으로 정감적인 대화는 자연이 인간의 정서나 생활에 많은 혜택을 주어서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자연관은 우리 시인들이 자연을 의인화 또는 자연 그 자체의 인격화로 일체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친자연적 인격화는 감상적 오류(誤謬)라고 해서 동화(同化-assimilation)와 투사(投射-project)라는 두 가지 원리를 작용해서 자연과의 시인의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교감하게 되는 것이다. 동화는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으로 인격화하는 것이고 투사는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것이다.
꽃은 그냥 피는 게 아니다
씨앗을 터뜨리는 아픔도
목마른 고통도
비바람의 흔들림에도
참고 견뎌야 한 송이 꽃이 핀다
밟히고 꺾여도 살아내야 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
꽃잎은 떨어져 거름이 되고
다시 꽃잎을 대하는 그 기다림은
멀고도 험난하고 외로운 길
꽃과 잎이 줄을 잇는다
기쁨도 감동도
시간의 날줄과 씨줄 위에서
봄밤이 울고 있다
--「봄밤이 울고 있다」 전문
먼저 “봄밤이 울고 있다”는 근원적인 상황은 어떤 것인가. 그는 “씨앗을 터뜨리는 아픔도/ 목마른 고통도/ 비바람의 흔들림에도/ 참고 견뎌야 한 송이 꽃이 핀다”는 상황설정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듯이 봄에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밟히고 꺾여도 살아내야 한다”는 비장한 인내가 있어야 하며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잎은 떨어져 거름이 되고/ 다시 꽃잎을 대하는 그 기다림은/ 멀고도 험난하고 외로운 길”을 기다림과 외로움의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교시적(敎示的)인 어조로 꽃의 탄생이 우리 인간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참으로 서정적인 자아의 진정한 언어로서 공감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한 생명의 탄생이 “기쁨도 감동도/ 시간의 날줄과 씨줄 위에서/ 봄밤이 울고 있다”는 결론으로 봄밤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겨우내 얼었던 대지가 풀리면서 새 생명을 소생시키는 절기의 변화에서 봄밤에 앓으면서 우는 고통을 자연의 섭리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봄에 관한 제재(題材)의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도록 봄빛, 봄향기, 봄바람, 봄향연 등등 봄에 관한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우리들 곁에서 봄의 진가(眞價)를 발휘하고 있어서 그 향기에 젖어들고 있는 것이다.
겨울 숲은 애틋한 기다림으로 산다
가식의 잎 떨구고
나목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은
봄을 향한 기다림 때문이다
생명의 눈을 잉태한 무거운 몸으로
인고의 벼랑을 붙잡는 것은
봄이 온다는 믿음 때문이다
살을 에는 듯한 아픔의 강을
신음도 없이 건너가야
봄을 맞을 체면이 선다
--「겨울 숲」 전문
봄과 겨울은 지척에 있다. 봄 지나면 여름과 가을이 형태를 감추고 나면 겨울이 다가오고 다시 겨울은 봄을 기다린다. 이 “겨울 숲”에서도 애틋한 기다림으로 살고 있다는 상황에서는 봄의 기다림이 “생명의 눈을 잉태한 무거운 몸으로/ 인고의 벼랑을 붙잡는 것은/ 봄이 온다는 믿음 때문이다”이라는 생명의 잉태로 인고의 벼랑에서도 봄이 와서 다시 새로운 자연의 섭리를 순응하는 믿음의 세상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아픔의 강을/ 신음도 없이 건너가야/ 봄을 맞”이 할 수가 있다는 굳은 신념은 나무들이 “가식의 잎 떨구고/ 나목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은/ 봄을 향한 기다림”이라는 순정의 서정성을 흠뻑 내뿜고 있는 것이다. 다시 “나뭇잎 위로 비가 내리고/ 낙엽이 떨어진다/ 찬바람 사이로 나뭇잎 사이로/ 가을이 울고 있다 (「겨울 나그네」 중에서)”는 어조로 겨울 숲으로 당도하기 전에 가을의 나뭇잎, 곧 낙엽이 이 계절을 울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겨울 서정에 대하여 “진달래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지만/ 보는 사람의 눈에는/ 아직도 겨울이 묻어 있다(「아직도 겨울이」 중에서)”거나 “어지럽던 마음에도 눈이 내려/ 새하얀 길만 펼쳐졌으면 싶다(「눈 내리는 날이면」 중에서)”, “겨울 한복판이라도 숲은 온후하다--중략--/ 잎 떨군 나뭇가지처럼/ 내 영혼도 많이 헐벗었구나(「잎 떨군 나뭇가지처럼 중에서)” 그리고 “화난 얼굴로 왔다가/ 심술부리며 사라지는 서러운 겨울비(「겨울비」 중에서)” 등의 어조와 같이 겨울 이미지가 넘치는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자연 서정을 노래한 작품들은 많지만 계절적인 이미지에서 봄에 피는 꽃들에 대한 향훈(香薰)은 간과(看過)할 수 없어서 여기 열거하여 음미하면 홍매화, 동백꽃, 할미꽃, 목련꽃, 백합꽃, 장미꽃, 모란꽃, 해바라기 등 화훼류(花卉類)에 대한 감응이 바로 김영일 시인의 순수 서정적 자아의 한 모습을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의식과 자연과 시간성과의 융합의 상관성에서 탐색하는 서정적인 순순 자아의 형상들이 현실 생활(real life)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심리적인 고뇌의 해법을 갈망하는 그의 인생관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오랜 공무원 생활과 함께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성적인 시인으로서 우리 인간들의 내면에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진솔한 가치관 탐구를 위해서 인본주의(humanism)의 정신으로 복합적이며 다원화한 현실을 정화하고 순화하는 시적 기능과 시인 정신을 명징하게 실천하는 의식을 높이 받들면서 시집 상재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