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감이란
현감은 조선 시대 현의 우두머리다. 종육품으로 고려 시대의 감무를 고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현의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현령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큰 현에는 영, 작은 현에는 7품의 감무를 두었다. 이는 조선 초기까지 계속되다가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혁 때 감무를 현감으로 개칭했다. 현의 수령으로 현령과 현감을 두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현감은 현령(종5품)이 관할하는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역의 찰방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현령과 현감의 차이는 그 지역의 크기와 인구 차이였다. 조선시대에 현령은 약 30곳, 현감은 140여 곳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지방관은 행정(조세 포함) 뿐만 아니라 군사, 사법권도 행사하였다.
4. 임진왜란 중심으로 조사한 진해현감
역대 진해현감의 자료는 많지 않았다. 그 동안 정치를 잘하여 떠나가는 현감의 공덕을 기리는 역대 현감 선정비가 16개 남아 있긴 하지만, 꼭 정치를 잘한 수령에게 주는 것은 아니고 반강제적으로 진행한 경우도 많다고 전해진다. 선정비를 위한 모든 세부담은 백성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선정비가 그리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활약한 인물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① 백광언( 白光彦 · 1544년∼1592년 )
20세에 무과에 올라 일찍이 진해현감, 고성현령(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북청판관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 모상(母喪)을 당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돌아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난에 동향의 전덕린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전라감사 이광에게 달려가 그의 선봉장이 되어 서울로 진군했다. 이해 6월 5일 용인싸움에서 전덕린과 함께 전사했다.
② 박의장(朴毅長 , 1555년 ~ 1615년)
박의장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대담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동생인 박홍장과 함께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즐기면서, 어린 시절부터 문무를 겸비하고자 노력하였다. 훗날 부친의 주선으로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박의장은 1579년 훈련원봉사참군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쳐 1588년 진해현감, 1590년 경주부 판관으로 재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맞게 되어 혼란한 시기에 나라와 부민 보호를 위해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승전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통정대부 경주 부윤, 1598년 가의대부로 승진하고 1608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614년 경상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박의장은 경주판관으로 재임시기 임란을 겪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왜군의 침입을 격퇴하는 동시에 백성을 구휼하는 2가지 일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경주성 수복으로 확보한 4만 석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의 구휼에 쓰고 환곡정책을 시행하여 백성이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593~1594년에 걸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이때 그는 건강한 사람은 군사로 신체 나약한 사람은 농사에 전념하도록 하는 병농분리 정책을 통해 백성이 제각기 맡은 바에 충실하게 함으로써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냈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박의장이 경주에서 임기가 만료되었을 때 경주부민은 조정에 3차례나 연임을 청하는 글을 올릴 정도로 다해 백성에게 신망을 받았다.
박의장은 임지에 있느라 부친의 병환을 돌보지 못하고 임종도 하지 못해 슬퍼하였다. 홀로 계신 노모를 걱정하며 해직을 원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박의장에 대한 조정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경상도수군절도사로 자리를 바꾸어줌으로써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고자 하는 원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1615년(광해군 7) 정월 25일 향년 61세로 수관관사에서 운명하였다.
③ 정항
임진왜란 당시 진해현감이었던 정항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간단하게 언급된 자료가 있었다.
<난중일기 중에서>
갑오년(1594년 1월 20일 [양력 3월 11일]<기해>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추위가 살를 도려내는 듯하여 여러 배에서 옷 없는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군량미조차 오지를 않으니, 더욱 민망스럽다. 낙안군수·우수 사우후가 와서 보다. 저녁나절에 소비포권관·웅천현감·진해현감도 왔다. 진해는 명령을 거부하여 머뭇거리며 오지 않았으므로 죄주려고 했다 그래서 만나지 않았다. 바람기가 자는 듯했으나 순천이 들어 올 것이 염려되었다. 병들어 죽은 자들을 거두어 장사지낼 차사원으로 녹도만호를 정하여 보냈다.
갑오년(1594년 1월 22일 [양력 3월 13일]<신축> 맑다.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진해현감 으로 하여금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게 했다. 활을 종일 쏘았다. 녹도만호가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열일곱 명을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을미년 (1595년 7월 초6일 [양력 8월 11일]<정축> 맑다.
정항(정항)·금갑도만호·영등포만호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나 가 공무를 보고 활 여덟 순을 쏘았다. 종 목년(목년)이 곰내(고음 천)에서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을미년 (1595년 7월 17일 [양력 8월 22일]<무자> 비가 내렸다.
거제현령이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거제에 있던 왜적이 벌써 철수하여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정항(정항)을 시켜 정하여 보냈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내일 출항하여 나갈 일을 전령했다.
을미년 (1595년 7월 20일 [양력 8월 25일]<신묘> 흐렸다.
두 조방장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느지막이 거제현령 및 전진해현감 정항(정항)이 왔
다. 오후에 나가 공무를 보고 활 다섯 순·철전 네 순을 쏘았다. 좌병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
지고 왔다.
을미년 (1595년 8월 14일 [양력 9월 17일]<갑인> 종일 비가 내렸다.
진해현감 정항(정항) 및 조계종(조계종)(영등포만호)이 와서 이야기했다.
<임진장초>
임진장초에 따르면 제2차 당항포해전(1594년 3월4일 ~5일)당시 왜선 21척을 분멸한 사람 중
☞ 우유격장 진해 현감 정항 : 왜의 중간 배 1척 분멸이라고 나와 있다.
제2차 당항포해전 : 1594년 3월 4일(양력 4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아군 연합함대 124척을 출전시키고 부하 어영담을 시켜 당항포의 왜군들을 치게 했다. 새벽에 이순신은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서 20척, 전라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선발했다. 어영담이 지휘한 함대는 창원시 진동면 진동리 진해선창에 정박하던 왜선 10척을 협공하여 창원시 진동면 고현리 읍전포에서 6척을, 고성군 회화면 어신리 어선포에서 2척을, 나머지 2척은 고성군 동해면 양촌리 법동마을 아자음포에서 격침시켰다. 이순신과 전라우수영 이억기는 나머지 함대 73척을 이끌고 학익진을 펼쳐 시위를 하고 공격하여 왜군은 결국 무너져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당항만 안으로 들어가 남은 왜선 21척을 불태워지고 패잔병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 때 불탄 21척의 왜선 중 당시 진해현감 정항이 1척을 불태운 것이다.
이상으로 숙제 마무리합니다.
첫댓글 자료조사를 하면서 '임진장초'가 난중일기와 더불어 국보 제 76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도, 사상의학을 완성한 이제마도 진해현감을 역임한 적이 있었네요.
무슨 일을 하는가보다 직분에 맞게 역할을 어떻게 감당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역할이든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와 덕을 베풀수 있는 넉넉한 마음가짐이 중요하겠죠?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배우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까페 회원님들의 모습을 본받아 열공하겠습니다. ^^
진해현감님이 드디어 닉 조사를 하셨군요. 아주 열심히 준비한 흔적이 보입니다. 진해현감에 대해 여러가지 문헌과 직접 답사를 통해 숙제를 아주 잘 해주셨습니다. 다만 마지막 부분 제2차 당항포해전 시 조선 수군의 전선 척수에 대해서 124척이라는 근거가 궁금하고요,진해전투에서 3군데 중 아자음포가 아니라 시굿포가 아닌지요? 어쨌든 숙제를 잘 하신 143번째 회원이시고 우수회원과 정규답사 참가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꼼꼼하게 숙제 잘하셨습니다.
덕분에 진해현(감)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노고가 크시었사옵니다!
저는 숙제 한번 왜놈말로 빠꾸 당하여 다시 작성하여 간신히 통과하였사온데..ㅎ
우수회원으로 승차하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더불어 배울 수 있어 감사하옵니다!
읍!
하성군의 열정적인 모습을 저도 배우겠습니다.감사합니다.
@진해현감 열정도 활동도 그저 미관말직옵니다!
세로운 사실 공부하게되어 감사합니다. 숙제하시느라 무지노력 하심을 박수와 찬사를 보냅니다.
무지 노력한 게 아닌데 찬사 말씀 들으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더 노력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또 배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꼼꼼한 자료들..공부한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나네요..
다만 격군님의 조언도 참고바라면서...
우수회원 되심에 축하드립니다.
축하 감사드립니다.
진해현감...자료 감사합니다....우리모두 숙제를 잘해서 새나라의 민주시민이 됩시다아~~~고래고래~~
새 나라의 민주시민 !!
네~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죠? ㅎㅎ
숙제하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우수회원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수고마니마니 하셨습니다. 아주 잘읽었습니다.
오래전에 진동면사무소 바로옆에 있는 동헌을 보고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동헌 왼쪽에 보이는 나무가 줄기와 가지가 푸른빛을 띠는 벽오동 나무라네요. 태평성대를 몰고온다는 봉황이 날아 내려와 둥지를 튼다는....
'2차 당항포 해전당시 삼도수군이 보유한 전선의 수는 판옥선만 해도 124척에 달했다.'는 부분을 '두산백과'에서 (이런 출처 쓰면 안되죠?), '1594년 3월4일 갑오년 조선, 명나라 당항포해전승리연합전선 124척'이란부분은 '여수 거북선 사이버해전 체험관'에 나와있네요. '이순신 병법을 논하다/임원빈 지음/신서원'책에는 조선 수군 함선이 81척이라 기록되어 있어요. 왜선에 대한 기록은 곳곳에 나와 있지만 조선군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는 경우가 많고, 다른 기록도 있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격군님의 정리 부탁드립니다.
아자음포가 아니라 시굿포가 맞네요. 꼼꼼하게 공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1594년초 당시의 이순신 장계에 삼도의 전선을 합쳐 겨우 100척 정도라는 언급이 있어서...그래서 100척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린 위 상황도 중 시굿포의 위치를 잘못 표시했답니다. 시굿포를 당시 진해 땅으로 해야 하는데 창원땅으로 표시했죠? 과거 다른 분들의 연구 성과를 생각없이 활용하다 보니 위치를 잘못 표기했답니다. 최근에 상황도를 수정했긴 하지만 아직 인터넷에 올리지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격군(格軍) 위 사진은 겨북선 문화재 연구소에서 펌 했는데 격군님의 자료였군요. ㅎㅎ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근데 격군님은 제가 직접 답사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점쟁이신가요? ㅎㅎ
이런 숙제 있을 줄 알았으면 사진을 잘 찍어두었어야 하는데 이전에 찍어둔 것이라....
사진이 보이길래 답사한 줄 알았죠.ㅎㅎ
숙제를 정말 잘하셨네요. 앞으로 활동도 숙제만큼이나 열심히 하실꺼라 기대됩니다.
게으름 피우면 사명대사님께 혼날까바 걱정되네요~ㅎㅎ
꼼꼼한 숙제 돋보이십니다. 덕분에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진해현감에 대하여 지리와 함께 공부 잘했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잘봤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현장 답사사진이 모두 짤려나간게 아쉽습니다..ㅎ
카페지기께서 칭찬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신데 아주 잘 하셨다고 칭찬까지 들으시고...ㅎ 덕분에 진해현과 진해현감에 대하여 공부할 수 있어 좋습니다^^
숙제 우수상 감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늦었나?
과찬의 말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한 발자국씩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배워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꾸벅
아자음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