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함께> 2023. 5월호를 타고 <변방의 역사-용산역>로 간다.
변방의 역사
- 용산역
차용국
남산에서 내려와 용산역 광장에서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만났다. ‘기억하는 사람들 〈강제징용노동자상건립추진위원회〉’가 2017년 8월 12일에 세운 조형물이다.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낸 깡마른 남자가 오른손에 곡괭이를 들고 왼손을 눈썹 위 이마쯤에 올린 채 어딘가를 보고 있는 동상이다. 하단 받침석을 살펴보니,
"눈 감아야 보이는 조국의 하늘과 어머니의 미소, 그 환한 빛을 끝내 움켜쥐지 못한 굳은살 배인 두 손에 잊지 않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일제의 강제징용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희생된 노동자들의 한을 풀어주겠다는 염원과 각오가 비장하다. 오욕의 역사를 파헤쳐 숨어있는 진실의 내력을 기억하고,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날 선 언어의 서슬을 바라보며 나는 난감했다. 넘쳐나는 굳은 결의는 억눌린 분노의 감정과 뒤섞여서, 그 언어의 원론에는 흠이 없으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경부선ㆍ호남선ㆍ지하철 1호선ㆍ경의중앙선ㆍ경춘선 ITX 청춘열차가 쉼 없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용산역. 수많은 시민이 바쁜 걸음으로 들락날락 오가는 용산역. 상가와 광장은 온통 인파로 넘쳐나는데, 이 동상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또한 30년 넘게 아침저녁으로 용산에 있는 직장을 다녔지만, 이 동상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뭇사람의 관심은 늘 현실의 문제와 열매에 천착하고 안주하는 것이었다. 오늘 문득 눈앞에 나타난 사내의 손에 들린 곡괭이는 무거워 보였고, 깊이 파인 눈은 애처로웠다. 어쩌자고 그는 이 번잡한 광장 한편에서 저토록 황량한 몰골로 서 있어야 하는가?
나는 그를 바라보며 용산역의 풍경과 상처를 더듬거렸다. 용산이란 안산의 능선이 한강을 향해 구불구불 내려가는 모양새가 용을 닮아서 붙인 지명이다. 지금은 도로에 끊어지고 고층 건물이 치솟아 있어서 옛 지형을 찾기 힘들지만, 효창공원과 원효로 서쪽 일대가 원래 용산의 중심이었다. 남산의 능선이 이태원과 삼각지 일대로 내려온 나지막한 산자락은 둔지산이란 명찰을 따로 달고 있었다.
용산은 한양도성의 남대문과 인접해있으며, 남쪽의 한강과 북쪽의 무악재로 이어지는 교통의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오랫동안 서울의 변방이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한양도성을 경계로 성안을 경성이라 하여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성 밖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도성 안에서 안주했고, 그들의 의식과 안목은 오래도록 도성을 넘지 못했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외면한 채 도성을 경계로 차별과 배척이 권위의 지표인 양 위선을 떨었다.
용산은 늘 국가 존망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일본 정벌을 위한 몽골 병참기지가 있었고, 조선은 군수품 저장·관리 관청인 군자감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 본진이 머물렀고, 병자호란 때 청군이 진을 쳤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들어왔고, 러일전쟁 때 일본군 사령부가 주둔했고,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관저가 들어섰다.
서울의 인구증가와 주거·환경·위생 등에 관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심각했다. 도성이 제아무리 견고해도 문을 걸어 잠그고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도성 문을 열고 성 밖 10리를 한성부에 편입하고 성저십리라 했는데, 이때 용산은 성저십리 한성부 용산방으로 불리는 서울의 변방이 되었다. 근대문명의 급속한 유입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교통로가 확대되면서 용산은 빠르게 변했다. 용산강, 서강, 마포강으로 불리는 한강나루마다 수상 교역이 번성했고, 1900년에 용산역 철도가 개통되면서 상공업이 활발한 시장을 형성했다. 용산은 일제가 이식한 번안의 근대문명이 발아하며 휘청거렸다.
한편, 일제 강점기 용산역은 한국 통치와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광기가 거세지자 일제는 전쟁물자 확보를 위해 한국인 징용을 감행했다. 그들의 집결지요 출발점이 용산역이었다. 그들은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국내외 군수공장, 탄광, 건설 현장 등으로 떠났다. 일본열도, 사할린, 남양군도, 쿠릴열도 등으로 끌려간 그들은, 낯선 곳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고, 착취당했고, 매 맞았고, 병들었고, 죽었다. 그들의 상처받은 영혼은 그들이 떠난 용산역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기에 저 '강제징용노동자상'의 상징성과 함의는 적지 않다.
나는 용산역 출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쉼터 의자에 앉아서 스치는 생각과 언어의 조각들을 만지작거렸다. 1900년 7월 8일 목조로 지은 작은 용산역사는 이제 빛바랜 사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광장 앞은 성매매업소가 즐비한 낙후 지역이었다. 2012년 그 낡은 유락업소 건물들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초현대식 빌딩이 들어섰다. 사통팔달의 교통 이점에 걸맞게 변화를 거듭해온 용산역은 역동적으로 보였다. 역사와 광장으로 통하는 계단 쉼터는 꽤 넓은 계단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체육관이나 공연장처럼 시야가 넓어서 약속과 만남의 장소로도 적격이고, 크고 작은 행사나 공연도 볼 수 있다. 사람만 분주히 오가는 역 광장이 아니라 미래의 문화와 풍경을 견인하는 움직임이 꿈틀거린다.
광장 한쪽에서 연주하던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공연을 마쳤다. 나는 그들의 빠른 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따라 부를 수 없지만, 그들의 소리는 경쾌하고 맑아서 듣는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마땅히 이런 풍경이어야 할 듯싶었다. 과거 오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언술은 갈등과 배척의 소리가 아니라 화해와 협력의 신호로 읽혀야 할 듯싶었다.
공연이 끝나자 계단에 앉았던 사람들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친구 둘이 내 앞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마셨던 음료수병을 그대로 놓아둔 채. 나는 젊은 친구들을 불러 음료수병은 들고 가서 저 앞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했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이 앉았던 의자로 가서 음료수병을 집어 들고, "깜박했어요!"라며 고개를 꾸벅한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들은 다시 나를 향해 꾸벅 목인사를 하고 즐겁게 재잘거리며 광장을 떠났다.
얼마 후 내 오른쪽 앞 계단에 앉았던 사람이 음료수병을 놓고 광장으로 걸어갔다. 내 나이 정도 되어 보였다. 내가 그를 불러 음료수병을 가져가시라고 하니 그는 나를 한참 노려보았다. 지켜보는 사람이 많았다. 주변을 살피던 그는 음료수병을 들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쓰레기통으로 가서 던져 버리고는 힐끗 내 쪽을 바라보더니 이마에 잔뜩 주름을 드러내며 불만스럽게 도로를 건너갔다.
같은 사안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큰 차이를 보였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라는 세상이다. 나는 계단 쉼터에서 일어나 한강 쪽으로 걸어갔다. 한강 둔치의 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주름진 초로의 사내 모습을 강물에 던지고, 그 자리에 즐겁게 재잘거리며 도로를 건너간 젊은 친구들의 맑은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그들의 밝은 미래를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