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올해도 절반(折半)이 지나갔다.
나잇값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법사(法師)의 길도 갈팡질팡 걸었다.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을 75년 살다보니
이제 환향(還鄕)하기도 어렵다.
국가유공자는
보훈병원 오가기가 좋아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람은 영토본능이 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덕소(德沼)가 제일 좋은 곳이다.
해마다 7월이 오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이육사 (李陸史)의 시가 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집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가 이 시를 지은 것은 1930년대,
그의 나이 30대 초반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내 고장이라 일컫는 곳이
그가 태어나 16세까지 자랐던 고향 경북 포항(浦項)이다.
푸른 포도가 주저리 주저리 열린 바닷가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하늘과 맞닿은 먼 곳에 수평선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수평선을 넘어 흰 돛단배 하나가 바람을 안고 곱게 밀려온다.
그 배에는 시인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왔던
손님이 타고 있을 것이다.
나는 26세에 POSCO 에 입사하여 10년간 근무를 했다.
이육사 시인을 오직 순수한 서정(抒情)을 추구하는
낭만파 시인으로만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열렬한 행동파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의열단(義烈團)의 열혈 단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가장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맞섰던
독립운동 단체의 행동대원이다.
이육사(1904-1944. 본명 이원록)가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17번이나 감옥을 출입했다.
이육사(264)라는 이름은,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수인번호 264 번에서 따온 것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베이징에 건너갔던 이육사는
베이징 형무소에서 참혹한 고문을 받다가
결국 39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순국(殉國) 즉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죽는 날까지 이육사가 꿈꾸었던 것은 오직 하나,
조국의 독립이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민주당 李氏 는
2024년 4월
24일간 단식투쟁을 하고도
순국(殉國)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다. <쇳송. 3363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