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6월 2일 논산훈련소 23연대 4중대 5소대 입소 1975년 4월17일 34개월 16일 동안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으로서의 병역의무완수.
1981년 1월 미국 육군(US Army)에 직업군인으로 입대 1985년 1월 4년 동안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명예제대.
1985년 4월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재입대(계급과 급료호봉수 인정) 1989년 4월 또 4년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명예제대(Total 8년)
20대 초반에는 한국군으로 3년,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8년은 미국으로 이민가서 직업군인으로 미군에서 근무. 이정도의 군대경력이라면 대한민국의 어떤 청문회에 나가도 병역에 관해서만은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얘기는 미군 생활 중에서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입니다. 남자들에게 군대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라고 하면 하나같이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야화(千一夜話)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때는 1986년 가을입니다. 81년도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4년간의 복무를(직업) 마치고 제대한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3개월만에 재입대한후에 군대내에서의 병과(직업)를 전에하던 Medical Supply에서 조금 낮아진 트럭 드라이버로 변경되어서 동부 뉴저지주에있는 미군 운전학교에서 6주간의 운전교육을(16 wheels 트레일러 트럭 드라이버) 마치고 한국으로 배치되어 당시의 미군으로서는 중동 분쟁이 발발하기 이전이라 휴전중인 한국의 최전방(Front Line)인 미 제2사단 3여단이 소속되어있던 경기도 봉일천에서 1년여의 복무를 끝내고 서울 용산에 있는 8군으로 옮겨와서 근무를 할 때입니다.
미군 병과(MOS-Military Occupation Specialist)가 트럭 드라이버였지만 지난 1년 동안 한국근무 하는 동안에 소속되어있던 지역사령관인 3여단장(미 육군대령)의 군용 Sedan 운전기사로 근무를 하고 용산에 내려와서는 미8군의 수송중대에서 분대장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중대에는 카투사와 미군을 합해서 운전병들만 200여명이 있었는데 저의 하는 일은 소대 선임하사와 함께 아침에 출근하여 당일에 필요한 운전 병력들을 용산의 각 부처별로 배치시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오후 3시쯤 되며 는 눈치만 보다가 집으로 퇴근하는 특과중의 특과였습니다.
그렇게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지내는 어느 날, 중대본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한국계 미군(일명 김치 GI)으로서 미시민권자는 미국 장성의 운전기사를 모집하는 중이니 모두들 가서 인터뷰를 하라는 공문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VIP 운전기사 노릇을 해봐서 잘 알기 때문에 안가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때로는 밤 늦은 시각과, 주말에도 근무를 하기 때문에 주일에는 교회를 가야하는 저는 굳이 지금의 좋은 보직을 놔두고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장군 드라이버를 서로 하려고 한국계 GI들은 머리를 싸매고 경쟁이 치열했던 자리입니다.
장군 운전기사가 되며는 많은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지만 저는 몰라라 하고 세월을 보내는데 또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자격이 되는 자는 한명도 빠지지 말고 가서 인터뷰에 응하라는 지시 공문이...
저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명령에 복종하여 한미연합사(당시에는 용산 미8군내) 건물 내에 있는 장군의 사무실로 인터뷰를 갔습니다. 행정장교인 사무실의 미군 중령이 인터뷰를 하는데 이것저것을 다 물어본 후에 중대로 돌아왔는데 다음날 다시 오라고 하는 연락이 와서 갔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제가 당첨(?)이 된 것입니다. 모든 조건이 저하고 100%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한국계 미군에다 시민권자인데다가 보직도 운전병, 무엇보다도 지난 1년 동안에 이미 3여단에서 여단장이라는 VIP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고 왔으니 사실은 누가 봐도 당연히 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장군 사무실의 행정장교인 미 해병대 중령이 저에게 축하(?)한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주는데 제일먼저 한말이 이것입니다. “Sgt. Yoon You are not General also he is not your’s. You are General’s driver.” 다 아시겠지만 직역하면 "Sgt. 윤, 너는 장군이 아니야 또한 장군은 너의 장군이 아니고 너는 장군의 운전기사야!“ 하는데 아니 누가 그걸 모르나...잘 알겠습니다. 하고 사무실을 나섰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마 전임 운전기사였던 나와 같은 한국계 미군이 장군과 함께 근무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갑질 비슷한 짓을 하였던 것 같다. 장군이 미 육군 Major General(★★)인데 자기가 바로 밑에 별 하나(★)라도 된 것인 양 가끔은 갑질을.. 그래서 사전에 미리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에게 하는 주의사항이었다.
어찌되었든지 제가 모시게 된 장군의 직함은 무지무지하게 길었습니다. 주한 유엔군사령부! 한미연합사! 주한미군! 미8군! 의 최고의 핵심 브레인인 작전참모부장 이었습니다. 요즘 한참하고 있는 한미연합훈련인 을지포커스를 비롯하여 팀스프릿등 모든 작전을 지휘하는 군대 내에서의 요직 중에 요직입니다.
저는 행정장교인 중령과 장군의 스케줄을 담당하는 미군속 백인여자 60이 넘은 할머니 비서와 함께 사무실에서 함께 stand by 하고 있다가 장군이 출타할일이 생기면 바로 차를(8기통짜리 쉐비 Impala 시커먼 Sedan)문 앞에 대기시켰다가 운전하며 보좌관처럼 모시고 다니는 것이 저의 일상입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장군이 나갈 시간이 되어서 차를 준비시키려고 사무실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행정장교인 미 해병대 중령이 책상에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잘 다녀오십시오!” 하고 경례를 하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나는 진짜 내가 General이 된줄알고 뒤를 돌아보니 장군도 함께 사무실을 나서려고 나오는 게 아닌가...아닌 게 아니라 장군이 된줄알고 으시될만 할 것 같은 기분이..ㅎㅎㅎ 이제야 처음에 중령이 나에게 한말이 피부에 실감나게 다가온다. You are not General....
제가 섬기던 장군은 그 후에 미국으로 돌아와서 사단장을 지내고 저도 제대한 후에 얼마 있다가 1995년도인가 TV News에 미 국방성(펜타곤)이 나오고 별 4개(★★★★)를 어깨에 매단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이라는데 얼굴이 눈에 익어서 자세히 보니 바로 제가 모시고 있던 당시의 육군소장 Dennis R Rimer와 그 옆에는 미해병대 별 3개(★★★)를 달 은 군인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별 하나를 더달고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미군 합참의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 친구가 당시에 나에게 “너는 장군이 아니야!”라고 한마디 했지만 매번 내가 사무실을 나설 때마다 일어서서 거수경례를 붙이던 Peter Face 미 해병대 중령이었던 것을 알면 우리 회원님들이 이 살리나스윤을 우습게 보시지는 않겠지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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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 ~~~~ 성 !.
내가 75년 8월 논산훈련소 입대했으니까
사리나스윤님은 51년생 같네요 ㅎ
아닙니다, 53년인데 당시에 71년도부터 육군에 하사관이 아닌 일반 기술행정병 지원병제도가 생겨서 72년도에 육군사병으로 지원해 갔습니다 재미있던것이 첫번째 휴가를 나오니까 구청에서 그때서야 신검통지서(신체검사)가 나오더군요...ㅎㅎㅎ 아니면
수원성님과 거의 같은시기에 입대했을겁니다.^^
53년생 갑장이네요.
반가워요~ㅎ
우리20대초에 카츄사는 대단한 직업였죠?
남자들 누구나 군대애기는 살아가면서 추억의 해악이 넘쳐나더군요. ㅋ
갑장님 반갑습니다!
ㅎ 저는 한국군일때 카츄사 출신은 아니고 나중에 이민가서 미시민권을 가지고있던 미군이었습니다. ㅎㅎ
하긴 제가 근무할 당시에도 8군에 근무하던 카츄사 젊은이들을 보면 대부분 SKY 재학 또는 졸업생 출신이었습니다.
@살리나스윤 아 그렇군요? 그당시 이민가는 가족들은 그래도 형편되어서 이민 보따리 쌓앗지 않았나요?
@이동심 아니죠, 70~80년대는 대부분이 가족초청 이민이 주를 이루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저희도 맨땅에 헤딩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부터는 투자나 취업등으로 경제적으로도 조금 여유가 있는 부류의 이민행렬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
@살리나스윤 저는 우울한 20세때엿어요? 이민가고싶엇요? 팦에 미쳐있엇고? 직장동료는 형님이 미국에서 불러드리는데 부러워 죽을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멋이 있고없고를 떠나서 젊음으로만 돌아갈수 있다면....ㅠㅠ
비현실적인 생각보다는 현재! 지금있는 자리에서 주위에 널려있는 행복을 함께 모아모아서 꿈앤들님께도 날려보내 드립니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미육군으로 살아오신 삶의 이야기.
아주 흥미롭고 맛나게 읽었습니다.
과연..... 가입하셨던 첫날 느낀 첫인상처럼
참 대단한 삶을 살아오셨네요.
저는 평교사로 정년퇴직했습니다.
우리 교사들에겐 떠도는 말이 있습니다.
교육청엔 교육장님 밑에 교육장 운전기사
그리고 국장(장학관 또는장학사)
부장(장학사) 일반 장학사의
권력서열에 대해.
지금은 시대가 달라 점수에 의해 교사발령이 이뤄지지만
과거엔 교육장 운전기사에게 교사들이나 장학사들이
인사문제를 청탁한 일도 비일비재했지요.
호호호.
살리나스윤님께서는 비공식 직함으론
원스타 재너럴이 확실하셨네요.
호호호. 9번 원스타 제너럴께서
가장 핸섬하시고, 멋지시네요.
충성!
맞습니다. 제가 당시에 한국군의 장성급들과(한국 각군의 참모총장 또는 군단장급인 3성 또는 4성 장군들) 미군장성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주 다녔습니다. 한국군 장성의 운전기사들의 공통점을 보니까 대부분 군생활을 오래한 장기 부사관들(중, 상사)이었습니다. 진짜로 그들의 세상말로 끗발은 영관급인 대령들도 쩔쩔매는듯한 비공식 장성급이었던것 같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신기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맛난 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매일매일 들려주셔요.
충성!
매번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처음에 가입하여 글로서 너무 설쳐대는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카페지기님의 허락을 받고보니 마음놓고 자리를 깔아 보겠습니다. 많은 해외여행기도 있고 해외(특히 북미주)생활에 필요한 알찬정보도 가지고 있기에 정보가 필요하신분들에게 나눔을 한다는 마음으로 카페에 활력(?)을...ㅎㅎㅎ
이곳에 정말 다양한 삶이 있네요. 모든 면에서 평준화 되어가
다보니 이곳에서 조우하게 되는 인생, 그 길목...어떤 인생을 또 뵙게될지 기대됩니다^^
우리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사람이 같은 목적(죽음)을 가지고 달려가는길에 어떤인생은 8차선 대로로, 어떤사람은 뒷골목으로 가기도 하지만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면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지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달리는 길목에서 만나게되는 기쁨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저와 리베님도 고~우!^^
참,~재밌다~ㅎㅎㅎ 세상은 알수 없는일~~ㅎㅎㅎㅎ
저는 부산 하라리아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친구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미군부대에 몇번 따라 가봤던 기억속에 ~
게이트 4( 연지쪽 방향) 에서 친구 아버지의 인솔하에 따라들어갔어 장교클럽에 가보니 신기했어요 ㅎㅎㅎㅎ
오락게임 같은것도 설치 해놓았고 ~하여턴 디기 신났는데~~~햄버거도 맛았었고 모든게 신났어요 ( 1974년 )
미국인 막사인지 캠프가 컽으로 보기엔 별거 아닌것 같앗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디기 좋았어요 , 학교 시설도 놀이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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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째 저째~ 대학생이 되어 이젠 정말 우리끼리 카튜사의 에스코트를 받어며 미군부대에 들락 거리며 영어 실습(?) 하는 친구들 틈에
끼어 노닥거리며 갔을때~~~~~ㅎㅎㅎ 가기전에 친구가 얘기 해줬어요 ,,, 절대로 개인행동 하면 안되고 미국넘들은 노~라고 하면 정확하게 안다고 ~~그런데~~내가 큰 실수를 했어요~~~~~~ㅋㅎㅋㅎㅋㅎㅋㅎ
미국인이 자기 소개를 하면서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어요~~~~~
근데~~~저는 그시절 고정관념과 아직은 익숙하지 못한 매너에 깜짝 놀라며 ~~~~~~오~우 노~우 ~~ㅎㅎㅎ 요캤어요
그 미국인인 놀라며~화이~~~~~~`요카는 데 난, 깜짝 놀라며~~~그냥~~~노우~~~~~ㅋㅎㅎㅋㅎㅋㅎㅋㅎ 요캤어요...
ㅋㅎㅎㅋㅎㅋㅎㅋㅎ 주위에 있던 친구들은 모두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어요 ㅋㅎㅋㅎㅋㅎㅋㅎㅋㅎ
그 뒤 나는 한동안 그냥~노우~~로 별명 아닌 별명 처럼 그친구들 사이에서 별칭처럼 불렀어요...........ㅋㅎㅋㅎ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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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미군 부대~~~~`하라리아 캠프 ~~~~~잠시잠깐 이였지만 재밌게 지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55보급창인가~그기서 친구 동생이 카튜사로 근무 할때 함 가봤는데 , 그곳에서 근무하는 친구동생은 괸장히 지겨워했어요
그리고 제 아들들이 초등학교 다닐때 , 하라리아부대 에 근무하는 미국인 한테 영어를 잠시 배웠는데 ㅎㅎㅎㅎ
그당시 아이들에게 이름을 정해라고 했어 제니스 , 데니스 요로콤 정했던 기억도 있고~~~ㅋㅎㅎㅋㅎㅋ
참, 다~~흘러간 추억이 요로콤 기억이 납니다............지금은 하라리아 부대가 부산시민공원으로 재탄생 되었어요 ^^*
저도 용산근무할 당시에 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할때에 서울(대한민국)에서 당시 신축한지 얼마되지않은 최고층 63 빌딩의 고가의 뷔페식당보다도 미8군내의 스넥바에 들어가서 저렴한 후라이드 치킨을 사주는것을 더좋아할 정도로 미군부대라는것은 많은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지요. 삼각지에서 육군본부앞을 지나 이태원쪽으로 올라가는길에 높이세워져서 내부가 보이지않던 미8군의 담벼락을 쳐다보면서 많은사람들이 궁금해하던 미군부대! 누갈다님의 추억담을 통해서 저도 당시의 추억들이 하나둘 더 살아납니다. 미8군내의 골프코스도 지금은 서울시민의 좋은 휴식처로 만들어 졌지요^^
74년에 입대 했어요
23연대 신막사 처음 사용했고 M1소총 마지막 훈련병 입니다
동갑이지만 지원해서
엄청 고참이네요.
이민 2번의 미군 근무를 하셨는데 한국에서 좋은 직장도
가능 하리라 생각됩니다.
많은 생활 이야기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6.25때 사용하던, 저의 키보다도 더 커보이는 M1 소총으로 제식훈련과 영점조준 사격까지....
좋은 직장이라니요? 제가 한국나이로 70 이라고 적혀지니까 직장보다도 저는 재능기부를 해보려고 여러군데 자원봉사를 신청해봐도 한국에서는 아무데서도 관심밖이고 오히려 이상한 노인네 취급을 당하는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포기했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