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강동진 목사님이 중1때 부터 이렇게 성숙되었네요. 놀라워요!
중1이 청년같이 살았어요
예수님을 그렇게 간절히 만나시고 연륜이 더해갈수록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커져가신 것 같애요
페북에서 옮겨온 글들인데 감동이 아주 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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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 들어가서 내 눈에 보인 것들이 몇가지 있었다. 같은 반에 너무 가난한 친구들이 보였다. 도시락도 못싸오고 학용품도 준비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참고서 한권 못사고 선생님께서 출판사에서 받으신 것을 수업 끝나고 몰래 나누어 주시는 문제집으로 공부를 했다. 그래서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도시락을 먹을 때 책상을 모아서 같이 먹게 친구들을 모으고 수저만 더 준비해서 같이 먹게 했다. 그리고 같은 반 친구들에게 얼마씩 돈을 내게 하고 그 돈을 모아 친구들 학용품을 학기 시작할 때마다 구해 주었다.
또 한가지는 공부 못한다고 숙제 안해왔다고 선생님들께 무자비하게 체벌 당하는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을 수업 마치고 남게 했다. 그리고 숙제도 같이 하고 모르는 것들은 같이 풀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도움도 받아 성적을 올라가게 했다. 적어도 숙제 안해서 체벌 당하는 아이는 우리 반에는 없게 되었다.
그 때는 교회를 안다닐 때였다. 주일 새벽에 일어나 내가 살던 도시에 있던 공원으로 가서 청소를 했다.많은 주민들이 이용하는 곳인데 쓰레기가 너무 많았다. 주일 새벽마다 자루 들고 가서 쓰레기들을 주었다. 그런데 이 일은 오래 할 수가 없었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운동 나오신 어르신들이 어느 학교 다니냐 부모님이 누구냐 누가 시켰냐 꼬치꼬치 캐 물으시는데 도저히 청소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 일은 두달 가량 하다가 결국 그만 두었다.
하지만 내 깊은 마음 속에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닥치는 대로 수많은 책을 보았지만 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중학생 나이에 두세번 자살을 시도하다가 들켜 실패했다.
선함도 헛되고 지식도 헛되고 모든 것이 허무했다.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내게는 의미가 없었고 내 자신도 무가치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 삶을 의미있게 하시는 이유와 목적이셨다.
(고1때 거듭난 체험이 있었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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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내를 처음 본 곳은 김포공항이었다. 의료선교팀이 꾸려져서 필리핀을 가게 되었는데, 우리 팀 의사선생님이 공중보건의 남자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걸프전으로 비상이 걸려서 못오시게 되었고 대타로 오신 UBF출신의 여의사 선생이 있었다. 사역지에 도착한 새벽부터 난 이른 새벽 먼저 일어나 기도하는 것으로 우리 팀을 깨웠고 사람들은 새벽마다 내 기도소리를 듣고 깼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매일 먼 사역지로 지프니를 타고 나가는데 갈 때도 딴짓 못하게 하면서 오로지 찬송하고 그 땅을 축복하도록 표독하게 몰아붙였다. 이것은 영적전쟁이라고 말하면서.
의사는 진료하고, 약사는 약을 조제하시고 간호사님들도 열심히 움직였고, 일반인들은 전도팀으로 꾸려져 정말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나는 뭘할까 고민하다가 이튿날부터 의사선생님께 병명을 모르겠거나 위중한 경우에 약봉투에 사인을 해서 주시면 약을 나누어 주면서 기도를 쎄게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한사람 한사람 약봉지를 받아들고 기도를 해드리고 약을 나누어 주면서 먹는 법을 설명해 드리는데 둘쨋날 오후부터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질병이 치유되고 귀신이 떠나갔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떴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계속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난 성경에 있는 약속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사도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건 자매님 생각이고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자매는 틈만 나면 내게 성경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내 마음에 이상한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와서 그때마다 예수이름으로 대적하고 마음에서 몰아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저 자매가 나와 계속적으로 사역을 하게 될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사역 마지막날 주님께 만약 이 느낌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을 받아들었을 때 두 사람만 앉는 자리에 나란이 앉게 하십시오. 라고 요청드렸다. 그런데 비행기 가장 뒷자리 둘 만 앉는 자리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앉게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 말하지 않았고, 공항에서 우리는 그렇게 아무런 기약도 없이 헤어졌다. 아내와의 만남은 그렇게 선교지에서 주님의 강한 역사하심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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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이날도 눈이 내렸었지
결혼식 하라고 부모님이 주셨던 돈을 지리산 학생 수련회에 다 써버리고 맨 몸으로 혼례를 치뤘다.
신혼집으로 짐을 옮기던 날 내 손에는 보던 책 몇권과 작은 옷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두벌도 챙기지 말라신 주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지키고 싶었다.
혼례를 치르고 제자들이 준비해 주신 신혼여행 덕분에 제주도를 갔다.
첫날밤을 치르고 아내를 앞에 앉으라고 하고는 두가지를 말했다.
김치와 밥만 줘도 잘 먹을테니 염려하지 마시라. 대신에 밥은 자네가 하는 일이다. 내게 밥하라는 말을 마시라.
그리고 내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얼마 받는지 또 그걸 어디에 사용하는지 궁금해 하지 마시라. 집에 안가지고 올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배짱으로 그리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고개를 숙이고 네 라고 대답했다.
돈 한푼 안가져다 주는 사람을
일년에 반 이상을 나가 다니는 사람을 남편이라고 믿어주고 기도해 주는
이 여인을 통해 나는 주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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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보은에서 실패했을까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를 잃으면 길이 보이지 않고 길이 보이지 않으면 존재는 가치를 잃어버린다.
공동체 식구들이 농업을 통해 자립한다는 믿음을 잃어버린다. 수년 동안의 실패가 원인이었다. 땅도 돈도 장비도 없이 무엇이 제대로 되랴
계속된 실패와 그로 인한 가난이 우리를 힘들게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삽을 들고 내가 밭으로 나가는 모습이 형제들을 너무 힘들게 했다.
현실적인 어려움들과 가난이 지속되면서 공동체는 말과 표정으로 서로를 힘들게 했다.
결국 공동체는 둘로 쪼개졌고 희년적 공동체로 사유와 공유의 조화를 이루자는 팀과 완전공유를 주장하는 팀으로 나누어져 격렬한 사상투쟁이 벌어졌다.
그렇게 일년을 싸우면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둘로 쪼갤 것인지 해체할 것인지를 놓고 이틀간의 격렬한 논쟁과 투쟁의 마지막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 위에 찾아오셨다.
모두가 그 시간 통회하며 자복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기도하자는 말도 없이 모두가 땅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 긴 회개의 시간 방언이 터지고 환상을 보고 병고침이 일어났다.
성령님의 임하심으로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고 예배가 회복되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었고
우리의 실패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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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셔서 오늘 주일 설교도 잘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손님도 만나서 상담과 기도도 해드리고 공항으로 올라왔습니다. 심야 비행기를 타고 22시간 가량을 날아갈 것입니다.
사실 기억을 해보면 저는 늘 이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고1때 교회를 처음 나가 두 달 만에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제일 먼저 제 마음을 가득채운 생각은 제가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부르심을 받은 일군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성경읽고 조금 더 많이 기도하고 조금 더 달려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보시고 옛날 지리산 사역할 때는 당시 원지교회를 담임하시던 노우호 목사님이 선교는 사명이지만 안식은 계명이라며 계명이 더 중하다고 몇 번이나 제게 충고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모습은 고질병이 되어 잘 고쳐지지가 않았습니다.
온누리교회를 섬길 때 1년 사역을 하고난 후에 하목사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너 이렇게 일하면 쓰러진다 조정하자고 먼저 제안을 하셨습니다. 결국 제가 하던 일을 분산하여 세 분이 일을 맡았습니다.
보은으로 내려와서도 목사랍시고 말로 다한다는 소리를 정말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도 할줄 모르고 경험도 없었던지라 형제들 보조역할을 자처하고 열심히 뒤치닥거리를 하였습니다.
너무 무리해서 엘보가 나가고 엄지손가락이 비틀어지기도 하고 어깨뼈가 으스러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밭에서 혹은 양계장에서 혹은 건축현장에서 늦은 밤까지 고단하게 일하다 숙소로 돌아오면 죽음처럼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던 나날들, 함께 하는 형제들이 우리 공동체를 '노가다공동체' 혹은 '아오지공동체'라고 우스개소리로 말할 정도였습니다. 저도 우리 형제들도 누구하나 예외없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하셨겠지요.
아시아 사역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어질 무렵부터 주님께서는 아프리카를 보게하시고 나가게 하십니다. 저는 스스로를 정의하기를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주님의 종이라는 말이 아니라 선교사님들의 종, 현지 사역자들의 종, 복음을 들고 현장에 서 계신 분들을 더 잘 사역하시도록 돕는 일이 저의 역할이고 부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농업을 연구하고 에너지를 실험하고 물을 연구합니다. 종은 아무리 밭에서 땀흘리며 일하고 들어왔더라도 주인이 밥을 차리라고 하시면 '네'라고 말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무익한 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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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선교사님들과 말씀을 나누기 위해 먼길을 올라와 강단에 서려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감기증상까지 겹쳐 콧물이 마를 줄을 모른다. 원장님의 소개에 이어 앞으로 나가야되는데 몸이 일어나지질 않는다 책상을 잡고 겨우 일어나 앞으로 나간다. 다들 나를 쳐다보신다. 환한 미소로 웃어드리고 강의를 시작한다. 처음엔 두서너 문장이 입에서 엉기는 느낌이었지만 곧 혀가 풀리고 강의가 진행될수록 성령께서 나를 잡으시고 회중들 사이를 운행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늦은 저녁 계단을 올라 숙소로 들어오니 바람빠진 풍선처럼 쓰러진다.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갔을 때 병든 원주민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기도하던 둘째날부터 내 등 위로 사람들을 만지던 내 손등 위로 느껴지던 따뜻하고 한없이 부드럽던 그 느낌. 내게 나아오던 사람마다 치유가 일어나고 귀신이 떠나갔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먹은 아이의 귀가 열렸다. 일주일간의 집회를 마치던 날도 오늘처럼 파김치가 되었었는데 나를 덮고 있던 그 기운이 떠나가는 것이 느껴지는데 어찌 그리 아쉽고 그리운지 하늘을 보며 자꾸만 울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주의 것이고 주의 종. 무익한 종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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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산에 가서 길을 따라 한시간 가량 풀을 베면서 기도의 시간, 주님과의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내려온다.
많은 경우에는 내가 주님께 여쭈고 아뢰지만 때로는 주님께서 종에게 물으신다.
어제는 주님 앞에서 한참을 하소연을 했다.
주님, 큰 교회 목사님들이야 매주 나오는 큰 헌금이라도 있죠. 저희는 사람도 없고 헌금도 없는데 제게 연락 하시는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은 몫돈을 보내달라고 하십니다. 북한 일은 또 어떤지 주님이 더 잘 아시지요. 게다가 돈 없이 시작한 예배당 건축에 이제 시작하는 대안학교는 또 어떻습니까.
옆에서 지켜 보는 공동체 식구들 마음은 얼마나 조마조마 하겠습니까.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묵묵히 그저 고개만 끄덕이시며 그렇지 그렇지 라고만 하신다. 말씀은 안하셨지만 미안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온 산에 가득하였다.
(페이스 북에서)
강동진목사님 간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