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2022. 12. 25.)
(요한 1,1-18)
요한복음의 ‘머리글’인 ‘로고스 찬미가’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며,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그것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즉 ‘메시아 강생’은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들 가운데로 오신 일입니다.
그냥 구원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에게서만 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로 ‘하느님이신 분’이 오셨는데,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것만으로 ‘예수님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려고 우리에게로 오셨습니다.
‘구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완성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신 분” 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은, 신앙의 시작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데려가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도
믿어야 하고, 믿는 대로 실천해야만, 즉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만 신앙이 완성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따라가는 예수님은 ‘승천하신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님께서 누워 계시는 구유는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아니라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계신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이고 종착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마르 16,19).
우리도 그곳으로 올라가는 것,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예수님의 희망은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1-5).”
‘한처음’은 창조 이전의 시간, 또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뜻하는
말로서 고정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말씀’은 그리스어 ‘로고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상황이나 문맥에 따라서 ‘말씀’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긴 한데,
‘메시아 강생’과 관련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1절-2절은 표현으로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신 분이다.”,
또는 “하느님은 한처음부터 사랑이신 분이셨다.”
라는 신앙고백이 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하느님의 창조 사업은 사랑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생겨났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예외 없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생겨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똑같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생명력’이다.
우리는 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도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현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기를 원하시지만,
따라가기 싫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을 억지로 데려가시지는 않습니다.
회개도 구원도 모두 인간 스스로 원하고 노력해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생명과 행복을 누릴 자격”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는 말은,
3장에 있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믿음, 회개, 충실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으로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여기서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라는 말은,
“그분의 뒤를 잘 따라가야 한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기 힘든 일을 만날 때도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은 모두 중간 경유지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중간에 겪은 고난들은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