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카르멜산 전투
1열왕 17,20-39; 마태 5,17-19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2024.6.12.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수많은 이중 개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서로 반대되기도 하고 앞뒤의 순서나 원인과 결과로 서로 연결되기도 하며, 부분과 전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아합 임금 시대에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신의 예언자들과 대결하던 상황에서 백성들은 엘리야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 하에서도 바알신을 누르고 하느님의 신성을 드러내자 놀라서 엎드려 연거푸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1열왕 18,39)
그런가 하면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을 선포하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이를 잘 지키라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율법과 예언서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마태 5,18)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절대적이고도 매우 강경한 표현을 사용하심으로써 당신의 확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 놓인 엘리야가 방어적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매우 공세적인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참 행복을 가져다 줄 사랑의 계명을 스스로 지키고 또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는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 즉 주인공이 됩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을 일상의 삶으로 행하는 경지입니다.
오늘날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려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상적으로 돈과 권력, 스펙과 지위 등 현대판 우상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현혹하는 환상들과 마주칩니다. 그런데 이 우상이 제공하는 세속적인 행복은 치열한 생존경쟁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남을 밟고 일어서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1%의 승자가 나머지 99%의 패자들에게 안기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합니다. 또 그 승자마저도 치열한 경쟁과정이 주는 압박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으며 사실은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길에서는 승자나 패자들 모두 신기루 같은 헛된 행복의 꿈만 꿀 수 있을 뿐, 그들은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는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참된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행복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한 점, 한 획도 어김없이 관철되고야 마는 진리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려는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과 여기서 우러나오는 기운으로 이웃에게 시원스레 베푸는 희생의 고귀한 가치입니다. 선후와 인과관계를 살펴보자면 감사할 수 있어야 희생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희생으로 다가오는 참된 행복의 진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스스로 지키면서 사람들에게도 전하게 될 것인데,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에서 비추이는 빛을 받아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으로 이 주인공들은 “주님께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는 신앙 고백을 일상적으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생각과 말과 행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며, 또한 악을 피하거나 이에 맞서는 삶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공동선을 위한 사랑의 삶으로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백이 먼저이며 증거는 나중입니다. 그러나 증거할 만한 신앙이 아니면 고백은 진실성을 입증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카르멜산 전투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네 현실에 투영되는 시대의 징표를 살펴보겠습니다. 어제가 6.10항쟁 37주년 기념일이었는데, 그 결과로 개정된 헌법이 대통령 직선제만을 실현한 채 특히 국민의 일상적 행복추구권에 직결되는 사회적 기본권(주거, 양육과 교육, 의료, 복지 등)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어야 할 시점에 있는 상황에서 그 동안에 벌어진 사태를 간추려 봅니다.
2012년 이후 케이블 티브이에서 방영한 드라마들 중에서 비교적 높은 시청율을 기록했던 ‘응답하라’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그리 멀지 않은 2,30년 전의 과거인데도 불구하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한 추억을 소환시켜서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시도했던 방식을 빌려서 1987년을 소환해 보려는 까닭은, 어제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87년 6월 민주항쟁은 오늘날까지 이 때 개정된 헌법의 체제로 30년을 지탱해 왔을 정도로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하게 민주화의 여정을 불완전하게나마 걷게 만든 ‘87년 체제’의 전환점이었습니다.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항쟁이었습니다. 전두환의 4·13 호헌발표,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사망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인 항의 시위가 연일 발생하자, 6월 29일에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에로의 개헌이 이루어지긴 했습니다. 이후 양김(兩金. 당시 유력 대통령직 도전자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또 다시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의 정부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군사독재 정치는 더 이상 기승을 부릴 수 없었으며, 삼당합당으로 이 불의한 권력과 손을 잡았다가 1998년에 외환위기를 야기한 김영삼 정부가 끝내 몰락한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로써 1961년에 박정희가 짓밟은 4·19 혁명 이후로 38년, 6·10 민주 항쟁 이후로는 11년 만에 본격적인 민주적 정권교체가 가능했습니다.
제헌 헌법에서 이미 주권재민의 원칙을 천명했으나, 우리의 노력 없이 얻어진 민주주의의 대가를 후불제로 그것도 11년 동안의 저항으로 톡톡히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국민의 정부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민주 정부의 정통성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부 시절 단절되는 듯 했으나, 2016년과 2017년 사이의 한겨울에 연인원 1천 7백만 명이 쏟아져 나온 촛불혁명으로 다시 이어져 현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33년 전의 6월 민주 항쟁의 맥을 이었습니다.
이렇게 후불제로나마 민주주의의 열매가 맺기까지 국민적 저항의 싹은 훨씬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801년부터 무려 백 년 동안 가해진 천주교 박해는 한겨레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피지배계층이 독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도 완전히 평화적인 방식으로 지배계층에 저항한 첫 사태였습니다. 이 저항의 움직임은 1894년의 동학혁명으로 이어졌다가, 나라를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게 강탈당한 뒤 이천만 동포 가운데 이백만 명이 참가한 1910년의 3·1 독립만세 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다가 연합국에 의해 타의로 주어진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에 저항하는 제주 4·3 민중 항쟁이 1947년에 일어났고, 1979년에 부산 마산 시민항쟁과 1980년에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벌어졌던 저항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간헐적으로 일어났었습니다.
마침내 권력을 농단하던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몰아낸 이 2016년의 촛불혁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역사에 있어서도 서양 선진국들을 따라잡은 모범국가가 되었습니다. 1801년부터 시작된 백 년 간의 천주교 박해 이후 2016년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백여 년 이상 동안이나 이런 불의에 저항해 온 역사의 흐름을 되집어보고자 1987년의 민주 항쟁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보았습니다.
1987년 6월,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민주항쟁은 명동성당 들머리 언덕에서 며칠 동안 진행된 농성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때만큼은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명동성당이 국민과 시민의 편이었습니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성당이 자리잡은 이 명동 땅이 민주화의 성지라고 한때 불리울 수도 있었던 데에는, 이 자리를 파수꾼처럼 지키던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항쟁 지도부와 참가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군 부대를 투입해서라도 이 항쟁 열기를 진압해 보려던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중항쟁의 비극을 기억하던 미국의 만류로 포기해야 했고, 또 다시 경찰 병력을 투입해서 명동 성당 들머리 언덕에서 철야 농성하던 시민과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하려고 했었습니다. 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치안 담당자들에게 김 추기경이 한 말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투쟁하고 시위하다가 결국 이곳 성당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내쫓겠는가? 그런 이들이 어떻게 범법자인가? 우리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정부당국이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겠으나 당신들이 여기 들어와 학생들을 집아가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 그렇게 되면 전국의 신부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구속을 각오하고 맞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가서 지시한 사람에게 내 말을 전하라.”
교우 여러분!
성체성혈의 성사에 담긴 사랑의 희생정신은 대단히 고귀한 가치이지만, 이는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의 실천을 전제로 합니다.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훼손하고 파괴할 때, 사랑이라는 최고선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이들이 마땅히 들고 일어나서 일단 정의라는 공동선의 가치부터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정의는 사랑의 보루요, 사랑은 정의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하시는 하느님께서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위해 희생하려는 의인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아 역사를 이끄십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450명의 거짓 예언자들과 목숨을 걸고 대결했던 카르멜 전투의 교훈, 또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하고 강경한 표명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