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선생 문현록 2권/ 김윤안(金允安)[Ⅰ]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김윤사(金允思)의 아우이다. 화천서원(花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행장(行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정(嘉靖) 경신년(1560, 명종15)에 공이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자질과 성품이 밖으로 밝게 드러났다. 일찍이 형 찰방(察訪) 공을 따라 소고(嘯臯) 박승임(朴承任)에게 배웠으며, 백담 구봉령·학봉 김성일·서애 류성룡 등을 섬겼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임진년(1592) 왜란이 일어났을 때 내한(內翰) 김해(金垓) 공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강좌(江左)의 모든 의병이 다 그에게 귀속되었다. 공이 김공의 막하에 있으면서 모든 장부와 격문(檄文) 등의 문서를 맡아보았는데, 상황에 맞게 민첩하게 처리하여 대부분 일에 적합하게 하였다.
갑진년(1604)에 중앙과 지방의 유생들이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다.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갔으나 선조(宣祖) 임금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또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을사년(1545)에 한 일이 나라를 바로잡은 적이 없다고 의심하여 비답을 내려 배척하였다. 영남의 선비들이 공동으로 상소할 적에, 공이 소수(疏首)가 되어 직접 상소문을 지었는데, 그 당시 사실에 대해 조목별로 거듭 증거를 들어 변론하였다. 상은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선유(先儒)의 도덕을 밝히기 위하여 먼 곳에서 온 것을 어질게 여겨 위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비답을 내리고 특명으로 정시(庭試)를 보였는데, 공이 제일로 발탁되었다. 이 일로 공의 명성은 한 시대에 드날려 조정의 학사들이 혹 시를 지어 칭송하기도 하였고, 류성룡(柳成龍) 선생도 편지를 보내 치하하였다.
을사년(1605)에 추천으로 소촌도(召村道) 찰방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611)에 내섬시 직장으로 천거되었는데, 정인홍(鄭仁弘)이 때를 틈타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의 학문을 헐뜯는 차자를 올렸다. 공이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직분에 벗어나는 일이라고 여겨 끝내 올리지 않았다.
임자년(1612)에 갑과에 급제하였다. 사재감(司宰監) 직장(直長)에 제수되었는데, 으레 자궁(資窮)의 관례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계축년(1613) 여름에 대구 부사(大丘副使)에 제수되었다. 그 정사가 관대하였고, 조정의 권세가들에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떤 고을 백성이 정인홍의 권세를 믿고 마을을 침탈해도 관리들이 겁이 나서 감히 문책하지 못하였다. 공이 그를 잡아 조사하여 강제로 침탈한 것을 환수해서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간혹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사수(泗水) 가로 찾아가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여쭈었다. 또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 갈 때 벗들도 화를 입을까 두려워서 감히 찾아 문후하는 자가 없었는데, 공이 사람을 보내 길에서 위문하고 시를 주어 전별하였다. 동계가 감탄하면서 “유독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왔는데 털끝만큼도 사사롭게 가져온 것이 없었으며, 마침내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집안의 살림살이는 구애받지 않고 선비들과 함께 강산을 유람하며 술을 마시고 시 짓기를 즐겼다.
임술년(1622) 5월 25일에 죽었으니, 향년 63세였다. 다음 해인 계해년(1623)에 헌문왕(憲文王 인조)이 반정하여 폐단을 바로잡고 공을 승정원에서 발탁하려 했는데, 공이 먼저 작고한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용모가 수려하고 행실이 순박하였으며, 어버이와 여러 형을 섬길 때는 옛적 효성스러운 자식과 공손한 아우의 법도가 있었다. 공은 책 읽기를 좋아하여, 편안하고 어지러운 때를 따지지 않고 강송(講誦)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특별히 주자서(朱子書)를 좋아하였다. 기국과 도량이 매우 넓어, 구차하게 남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바다를 읊조리다[詠海]>라는 시를 지었는데 흥에 따라 뜻을 붙였으니, 그 기상과 흥취는 편협한 선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타 시문(詩文)들도 조리가 넓고 밝아 의취(義趣)가 있었으며, 자잘한 말로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다.
백담 구봉령이 매양 공을 칭찬하면서 그 자제들에게 권면하기를, “너희들의 스승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대개 영남에서 한 시대의 걸출한 선비였는데, 수명을 다 누리지도 못하였고 벼슬도 현달한 지위에 이르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구담촌(九潭村) 뒤에 장사지냈다가, 49년이 지난 경술년(1670)에 일직현(一直縣) 광연(廣淵) 고개 묘향의 언덕에 천장(遷葬)하였다.
명문(銘文)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뜻은 크고 행실은 청렴하였으며 志弘而行淸
재주는 뛰어났고 식견은 분명했네 材儁而識明
어디에 간들 통하지 않겠는가 其何徃而不徹
혼탁한 길에서도 정도를 지켰네 曀路而秉正
맑은 세상이 되자 운명하였으니 淸宮而遭命
누가 그 결정체를 드러내겠는가 孰崖其所結
이미 그 얻은 것으로써 于所已得
하지 못한 것도 알 수 있으니 可知其所未得
명을 지어 이 비갈에 드러내네 銘著之碣
이유장(李惟樟)이 지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