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제부터는/고후 5:13~19
밥 버포드 그는 1999년 은퇴할 때까지 미국 최고의 유선 텔레비전 방송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한 사업가였다. 젊었을 때부터 승승장구하여 실패를 몰랐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지만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44세 때 아들이 친구들과 물놀이 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그는 미친 듯이 아들을 찾으려고 강가를 헤매었지만,4개월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사업을 하느라 아들하고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모든 것을 성공에 올인하며 살았왔다.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동안 나는 무얼 위해 살아왔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남은 삶이야말로 의미있는 인생을 살겠노라 결심하게 됩니다. 밥 버포드는 인생의 밑 그림을 다시 그렸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 아니면 돈,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작정했다. 그렇습니다. ‘인생,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까?’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삶의 변화를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였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사람들의 가치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육체적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알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리라고 말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리라
13절과 14절 상반절을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다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멸시와 조롱을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들을 강권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에 미쳐 있는지 질문해 본다. 미쳐도 제대로 미치기만 하면 성령의 역사와 기적이 우리 삶 가운데 펼쳐질 텐데’라는 생각도 한다. 요즘은 말씀의 본질이 왜곡된 시대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인간의 욕심만 좇으면서 양다리 신앙인으로 사는 게 이 시대의 상식처럼 굳어진 것 아닐까요.
국내 최초로 호스피스 제도를 도입한 전 이화여대 간호대학장 김수지 박사의 이야기다. 그녀는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때 총살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남성을 돌봐주던 간호사에게 감동을 받고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이화여대 간호학과에 들어갔고 1978년 미국 유학을 통해 보스턴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람들로부터 왜 간호사가 되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김 박사의 대답은 분명했다. 하나님은 나를 간호사로 부르셨다. 간호사는 돌보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를 돌보셨다. 그 하나님의 돌보심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돌보아야 할 분명한 이유이다.
13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여기의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는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라는 의미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으로 인하여 살게 된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목숨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만난 하나님, 그 분은 돌보시는 분이시다. 나를 돌보셨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돌보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게 성공은 예수처럼 돌보며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둘째로 새로운 피조물로 살리라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기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본성을 지닌 자’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새 생명을 얻은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재창조로 새로운 본성을 지니게 된 존재를 가리킵니다.
김형국 목사는 ‘만남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예전에 선교 단체에서 함께 사역했던 여학생의 이야기를 합니다. 대안 학교 교장이 되었다는 그녀를 오랜만에 만난 그는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다. 목사님, 저 솔직히 마흔 살에 예수를 만났어요. 아니, 전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같이 하며 찬양곡도 만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교회 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게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나이 마흔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지금껏 저 자신을 속이고 꾸며 온 죄를 깨달았죠. 그제서야 제가 하나님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께 인생을 온전히 의탁하게 되었어요.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유혹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외치고 다닌다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더욱 주님을 경외하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하늘의 가치관으로 일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화목의 직분으로 살리라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여기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직책’을 의미한다. 죄로 발생한 하나님과의 불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다시 화목하게 되었다. 복음은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 화해의 복음을 전하도록 우리에게 부탁하셨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을 전하는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십자가 화목의 은혜를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화목하게 되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독일의 경건주의자로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진젠도르프 백작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720년 학업을 마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다. 뒤셀도르프 박물관에서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보았다. 이 말은 총독 빌라도가 재판석에서 예수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박물관에 걸린 그림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초상화였다. 그림 밑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었느냐? 진젠도르프는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사랑해 왔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남은 여생을 예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단하였다. 그 후 모라비안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 경건운동과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모라비안 교도들의 경건은 요한 웨슬리의 회심으로 이어졌으며 감리교 부흥을 이끌어냈다. 28년간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까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번영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진젠도르프가 강조한 말이 있다. 교회의 기초는 신조가 아니라 경건에 있다.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 오직 그 분을 위하는 것뿐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힘이 있고 기회가 있을 때에 헌신해야 합니다. 날이 저물 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저물어 우리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시 84:1~12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있을 때 그와 동행하던 고라 자손이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며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며 노래한 시다. 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여기의 ‘만군의 여호와’는 ‘백성을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어찌할 수 없는 형편에서 인생이 의지할 대상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합니다. 믿음의 선배들도 악한 원수 앞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며 이겼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신뢰하고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의 교제이시기에
2절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여기의 ‘사모하여’는 ‘열망하다’라는 의미다. 시편 기자는 몸이 아플 정도로 하나님의 성소를 사모하고 갈망하였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망함으로 주의 임재가 있는 궁정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경험하였다. 인생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 육체적인 만족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는 결코 영혼의 만족을 누릴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망을 품고 날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며 평안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정착한 곳은 북미가 아니라 남미였다. 지하자원과 물 그리고 기후까지 남미는 결코 북미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북미가 남미보다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남미는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을 구하려 찾아왔고 북미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북미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세운 나라였기에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며 하나님과 교제하여 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다. 반면에 남미는 황금을 찾으러 와서 세운 나라이기에 신앙의 전통도 없고 하나님과 교제가 없었기에 뒤처지게 되었다. 지금도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개인과 국가는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방패이시기에
9절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여기의 ‘방패이신’은 ‘친히 보호하다’라는 의미다. 방패는 창과 칼과 화살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도구다. 방패가 있으면 어떤 무기라도 맞설 수 있다. 무엇이라도 다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면 방패가 되기로 약속하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부르는 자들을 보호하여 주신다. 인생길에 영혼과 생명을 노리는 악한 세력이 많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보호받을 수 없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받자.
셋째로, 우리의 의지이시기에
12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여기의 의지하는’은 ‘순전하게 믿고 기대다’라는 의미다.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복이 임하며 은혜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실하게 믿고 만군의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다윗의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맹한 삶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합니다. 상황이 아무리 불리해 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면 상황은 바뀌어집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선포하는 담대한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