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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코난스토리˚˚ 스크랩 <연재> 24. 내가 만난 장애人...
코난 추천 0 조회 261 15.01.04 21: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평범하게 살다가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전신마비라는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그리고 중증장애인이된 후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방 안 침대에 누워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장애인들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만나러 다녔다.

 

소울음화실 원장, 구족화가 최진섭 선생님

 

내가 처음 만난 중증장애인은 구족화가로 활동하시는 최진섭 선생님이었다. 1999년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수술 후 재활치료를 받고 있을 때 최진섭 선생님이 병원으로 찾아와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자신도 17살이던 1975년 친구들과 계곡에서 수영을 하며 놀다가 다이빙을 했는데, 그만 물속에 있는 바위에 크게 부딪치며 경수 6~7번이 손상되어 전신마비라는 중증의 장애인이 되었다.”고 하셨다. 그 당시에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복지도 재활치료도 전무하다보니 10년 동안 방안에 누워 살아야만했고 그로인해 심한 욕창으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작한 것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고, 현재는 안양에서 소울음화실을 운영하며 많은 장애인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고, 매년 전시회도 열고 있다.

 

처지가 비슷한 선생님은 나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선물로 주시면서 한번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를 하셨다. 그래서 틈틈이 휠체어에 타서 연필을 손에 두른 보조기구에 끼워 스케치북에 선 긋기 연습을 했다. 그런데 경수 4~6번 손상으로 팔 힘이 없어서인지 조금만 팔을 써도 어깨가 너무나도 시리게 아팠다. 그리고 나는 성격상 앉아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연습도 많이 하지 않고 그림 그리는 것은 포기 하고 말았지만 그때 선생님께서 관심 가져 주시고 위로해 주신 덕분에 나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자원봉사단체 사단법인 스파인2000 대표 왕태윤님

 

2001년 4월, 서울 수유리에 있는 국립재활원에 재활치료를 받으러 입원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먼저 입원해 있던 전신마비 장애인 왕태윤씨를 알게 되었다. 왕태윤씨는 군을 제대하고, 24살이었던 1992년 11월 이태원에서 놀다가 새벽에 집으로 귀가 하던 중 택시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인해 경수가 손상되어 중증의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장애가 워낙 심해 방 안 침대에 누워 살다시피 했는데 국립재활원에서 만난 후 함께 장애인의상연구소에서 주최한 장애인패션쇼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주관 장애인인식개선을 위한 초등학교 일일교사 활동을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 이후 왕태윤씨는 다음에 스파인2000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미인가 시설 장애아동을 위한 자원봉사 단체를 만들어 꾸준히 활동하였다. 그 공로로 2008년에는 MBC 사회봉사대상과 척수장애인협회에서 자랑스러운 척수장애인상에 선정 되었다. 스파인2000은 미인가 장애아동시설 뿐만 아니라 탈북청소년, 외국이주노동자, 고려인동포 등을 위한 봉사에도 적극 참여해 활동하였고, 2014년인 올 봄에는 더 많은 이웃들에게 후원과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사단법인 스파인2000을 만들어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박경석 선생님

 

국립재활원에 입원해 있을 때 장애인단체 이곳저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에 장애인이동권운동을 알게 되어 운동에 잠시 참여하게 되면서 박경석 선생님을 만났다. 박경석 선생님은 젊은 시절 해병대를 제대하고 영남대학교에 복학하여 행글라이더 동호회에 들어가 활동 중이던 1983년 8월, 경주시 토함산에서 행글라이더를 타다가 추락사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어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 되었다. 그 후로 5년 동안 방안에서만 지내다가 1991년 숭실대학교에 입학하여 사회복지학을 전공 했고, 1993년 노들장애인야간학교를 설립해 활동하다가 2001년 1월,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동권연대가 결성되어 장애인 인권운동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중증장애인들의 삶과 인권을 알리기 위해 버스를 점거하고, 지하철을 점거하고, 다리를 기어서 건너고, 단식도 하고, 관공서를 점거하기도 했다. 그래서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하고, 많은 벌금형을 받기도 하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장애인시설비리척결 운동,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대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 운동,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운동, 탈시설 운동 등 그동안 이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열악하게 살아가는 중증장애인들을 대변하여 많은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그렇게 힘겹게 투쟁을 해온 박경석 선생님과 노들야학의 장애인들, 그리고 연대로 함께한 많은 사람들 덕분에 나는 문 밖을 나올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고,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찾을 수 있었고, 사회와 단절된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약해지는 몸 때문에 함께 참여하지 못해 항상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다.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대표, 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최용기님

 

현재 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소장을 하고 있는 최용기씨는 2001년 가을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정립회관(소마아비협회)에서 중증장애인을 위한 동료상담 교육을 받으며 만나게 되었다. 최용기씨는 1995년 운전을 하다가 빙판길에 미끄러지는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는 전신마비라는 중증의 장애인이 되었다. 그 이후 5년이라는 시간동안 방에서만 누워 지내다가 정립회관에서 중증장애인을 위한 자립생활 페러다임을 알게 되면서 장애인 인권활동가가 되었고, 그 이후 장애인이동권 운동, 중증장애인자립생활지원 운동, 장애인시설폐지 운동,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운동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폐지 운동 등 현재까지 꾸준히 중증장애인들의 삶과 인권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꿍따리유랑단 대표, 한중대학교 전임교수, KBS 라디오 DJ 강원래님

 

강원래씨는 2000년 11월 강남의 한 사거리에서 불법 유턴하는 자동차사고로 인해 하반신 마비장애인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방안에서 누워 지내면서 인터넷 홈페이지 “하늘빛사랑”이라는 장애인 동호회 게시판을 보며 다른 장애인들이 올린 글도 보고, 가끔 글도 올리곤 하였다. 그렇게 활동하던 중에 2001년 봄에 충주에서 하늘빛사랑 정모를 하였는데 강원래씨도 참석하게 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강원래씨는 봄과 가을마다 하는 정모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많은 장애인들과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내면서 강원래씨의 주선으로 많은 공연과 문화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강원래씨는 사랑의 가족 MC, 라디오 DJ, 대학교수, 꿍따리 유랑단 단장, 클론댄스 스쿨 원장, 방송활동, 대학 공부, 자원봉사 등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 전 검사, 뉴욕시 형사법원 차석 행정재판관 정범진님

 

현재 미국 뉴욕시 형사법원 차석 행정재판관으로 일하고 있는 정범진 판사는 2002년 봄에 KBS에서 방영한 인간극장을 보고 알게 되었고, 2003년 서울 용산에 있는 한벗재단과 2004년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미국 장애인 정책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고자 만나게 되었다. 정범진 판사는 한국에서 태어나 6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조지 워싱턴대학에 재학 중이던 1991년 자동차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중증의 장애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공부를 계속하여 1992년 뉴욕 브루클린 검찰청에서 검사로 일을 하게 되었으며, 2000년에는 최연소 부장판사, 2005년에는 뉴욕주 두 번째의 한인판사로 임명되었다. 정범진 판사가 검사와 판사로 열심히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같은 능력이라면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채용해야 하는 미국의 장애인을 위한 ADA법(미국 장애인 복지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장애인럭비협회 회장, 나사렛대학교 인간재활학과 교수 이일세 선생님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여 유명해진 이일세 선생님은 2003년도에 장애인의 집 앞 문턱을 낮추어주는 것과 문화생활을 지원하는 “사단법인 열린세상 국민운동본부”를 만들면서 만나게 되었다. 이일세 선생님은 군을 제대하고 한 달 만인 1984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용평에서 스키를 타다가 사고로 인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24살 때였다. 그 사고로 3년 5개월 동안 병원 생활을 하였고, 퇴원 후 집안에서만 누워 지내다가 할 수 있는 것이 공부 밖에 없다는 생각에 1992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동휠체어로 일반 문을 열고 다니기가 어려워 자동문과 편의 시설 설치를 요구했는데 하버드 대학은 그 요구를 수용하였고, 그 일이 언론에 알려지며 한순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렇게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민주당 장애인 특위, 환경관리공단 감사, 사단법인 열린세상 국민운동본부 대표,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서울시 생활체육협의회 이사로 활동했으며, 현재에는 대한장애인럭비협회 회장, 나사렛 대학교 교수, 각종 칼럼과 강연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컴퓨터과학과 소프트웨어 응용연구소 연구원 신형진군

 

척추성 근위축증(Spinal Muscular Atrophy: 일명 SMA)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신형진 군은 한국의 스티븐 호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척수성 근위측증은 근육에 힘이 없어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항상 호흡에 위협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더 삶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다. 신형진 군은 2006년도 쯤에 한벗이동봉사대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이후로 형과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신형진 군은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니며 공부를 했고 연세대학교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연세대학교 컴퓨터과학과 소프트웨어 응용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며 각종 강연 활동도 하고 있다.

 

현대모비스 오토몬스 전 농구코치, 한국루게릭협회 루게릭 홍보대사 박승일님 

 

루게릭병과 아이스버킷 챌린지로 잘 알려진 모비스 전 농구코치 박승일 씨는 2006년 MBC토요스페셜로 방영되며 알게 되었고, 얼마 후에 집으로 찾아가서 만나게 되었다. 전신마비라는 나의 장애도 심한 장애라고 할 수 있지만 온몸이 마비되어 눈동자 밖에 움직일 수 없는 박승일 씨에 비하면 “내 장애는 오히려 장애도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 씨, 그러나 박승일 씨는 그에 굴하지 않고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그의 가족들의 어려움을 알리고, 루게릭병 환우 요양소 건립을 위해 끊임없이 홍보하고 노력한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후원을 이끌어 내었다. 2003년부터 현재까지 한국루게릭협회 루게릭 홍보대사를 하고 있다.

 

장애인 정보격차해소 홍보대사,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이상묵 선생님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상묵 선생님은 2006년 7월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자동차사고로 인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상묵 선생님은 전동휠체어와 IT로 중무장을 하고 다시 서울대 교수로 일을 하고 계시며, 40일간의 미국횡단, 장애인 정보격차 홍보대사, 한국보조공학회 이사, 서울대학교 차세대융합기술원 함께사는기술연구소 소장, 대통령직속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위원, 국립재활원 홍보대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각종 강연과 홍보를 통해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참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립재활원 재활과학연구소 전 소장, 연세대학교 재활학과 교수 김종배 선생님  

 

연세대 보건과학대학 작업치료학과 교수님으로 일하고 계시는 김종배 선생님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산업공학과에서 석사 4기 과정을 밟던 중 1985년 9월, 친구 집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그 당시 24살이었던 김종배 선생님은 지금처럼 재활병원도 없다보니 치료만 받고 집에서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그러다가 1990년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컴퓨터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고, 일반인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기도 하고 개인 회사에서 프로그램 개발 일을 담당하기도 하며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한국척수장애인 사이버센터를 만들어 척수장애인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고, 2001년도에 미국 피츠버그 대학 재활공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여 4년만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국립재활원 국립재활연구소에서 일하며 중증의 장애인들에게 보조기구를 개발,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현재에도 중증장애인들의 보조공학기술과 재활치료에 도움을 주고자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배 교수님, 이일세 교수님, 필자, 이상묵 교수님

 

이분들 말고도 나는 많은 중증의 장애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내가 많은 중증의 장애인들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그분들의 삶을 보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찾고 싶어서 였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중증의 장애인들을 만나도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단지 조금이나마 느낀 것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을 위한 복지는 예전 보다는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직업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하는 많은 중증의 장애인들을 보면 정부의 지원 보다는 스스로 노력해서 사회활동을 하는 장애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론에는 일부의 장애인만 “장애극복”이라는 미담으로 포장되어 마치 "장애는 스스로 노력하여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 중증장애인은 대략 6만여명, 중증장애인들의 수년 동안의 투쟁으로 어렵게 만들어진 활동보조서비스 제도로 인해 방 안에서만 지낼 수 밖에 없던 장애인들이 그나마 문 밖을 나설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차별 속에서 인권이 무시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중증의 장애인이더라도 능력만 있다면 꿈과 희망을 펼칠 수 있는 사회, 그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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