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서이씨(隴西李氏)가 진짜 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성씨와 본관】의「성씨의 역사」란에《농서(隴西)》로 검색해 보았다.
성씨 |
시조 |
성씨의 역사 |
농서이씨(隴西李氏) |
이장경(李長庚) |
본관 연혁 : 농서(隴西)는 중국 감숙성(甘肅省) 임조부(臨洮府)와 공창부(鞏昌府)의 서쪽에 걸쳐 있었던 진한시대의 군(郡)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성씨의 역사 : 농서이씨(隴西李氏)의 시조 이장경(李長庚)은 성주이씨의 중흥조(中興組)이다. 그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중국의 원나라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까지 오르고, 임금으로부터 본인과 그 조부인 이장경까지도 농서군(隴西君)에 봉하였다. 따라서 그 후손들이 농서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므로 농서이씨는 성주이씨와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성주이씨대동보(星州李氏大同譜)》(甲寅譜)에서 두 종파가 합보 하였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읍 옥수동
인구분포 :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농서이씨는 315가구 총 1,04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성주이씨(星州李氏) |
이순유(李純由) |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명신(名臣)으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에 항복함에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고려조에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겨 숨어살았다고 한다. 비록 벼슬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려 태조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는 아니나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대대로 호족을 이루고 살았다. 호장이란 말하자면 지방통치의 수장으로 향직(鄕職)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포섭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곳에서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며 고려조에 호장(戶長)을 맡아왔다.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성주이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강양군(江陽君) 이약(李若)이 성주수(지금의 군수)로 부임하여 이장경의 인품을 보고 자기 딸과 혼인시켜 살게 하였는데, 슬하에 다섯 아들[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 이천년의 둘째 아들)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웠으므로 원 황제(皇帝)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추봉하였다. 따라서 중흥시조 이장경이 농서군공(隴西郡公)이 되었기에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星州李氏)라고 하게 되었다. |
상산이씨(商山李氏) |
이민도(李敏道) |
상산이씨(商山李氏)의 시조 이민도(李敏道)는 원래 중국 하간부(河間府) 출신으로 원나라 말의 난을 피해 고려 말에 동래하였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이환의 아들 이민도가 조선의 개국 때 공을 세워 좌명개국이등공신(佐命開國二等功臣)으로 녹훈되고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상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서는 시조를 이환으로 하는 반면, 《姓氏의 고향》에서는 시조를 이민도로 적으면서 이지환의 3세손으로 되어 있다. 이민도는 본관이 농서(隴西)로 중국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었다. 태조는 그를 총애하여 친히 직헌(直憲)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그를 조선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태조의 명으로 본관을 농서에서 상주(尙州)로 바꿨다. 상산(尙山)은 상주의 옛 이름으로 상주이씨와 상산이씨는 같은 본관, 성씨이다. |
안성이씨(安城李氏) |
이중선(李仲宣) |
안성이씨(安城李氏)의 시조 이중선(李仲宣)은 고려 때에 경군호장(京軍戶長)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고, 이자의(李資義)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가 되었으며 백하군(白夏君)에 봉해졌다. 백하는 안성의 옛 이름이다. 그 이전의 계보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중선 이후 본관을 안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갑자보(甲子譜)》 세보 연혁편에 보면, 이중선은 중국 농서이씨(隴西李氏) 청륜계(靑倫系)의 이맹선(李孟宣)·이중선·이계선(李季宣) 3형제의 둘째로, 송나라 경력(慶曆) 연간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정착하여 안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영산신씨(靈山辛氏) |
신경(辛鏡) |
신씨(辛氏)의 선계는 중국 농서(隴西: 寧州의 속현) 출신으로 중국의 북송(北宋) 때 8성(張·洪·嚴·郭·慶·李·辛·池)이 의형제를 맺고 이름을 모두 “경(鏡)”으로 정하고 고려에 건너왔다는 8학사(學士)의 한 사람인 신경(辛鏡)이다. 신경의 선대 또한 당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엄시랑(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왔다고 하나, 그 뒤의 세계가 분명하지 않다. 한편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에 따르면 영주(寧州)는 중국에 없고, 우리나라 영변(寧邊)의 옛 지명이라 하며 신씨가 귀화한 성씨가 아니라고 하였다. 신경은 1138년(인종 16)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정의(貞懿)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천축산(天竺山)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창녕 영취산(靈鷲山) 아래에 뿌리를 내려 우리나라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9세손에 와서 영월(寧越)로 분관하였다고 한다.
즉 영산신씨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蕆: 신지화(辛至和)의 장자)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 신지화의 차자)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렬(辛成烈: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갈라졌고,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신온(辛蘊: 신지화의 3자)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府院君派)와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신한(辛: 신지화의 4자)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
장연변씨(長淵邊氏) |
변경(邊鏡) |
《장연변씨세보(長淵邊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변유령(邊有寧)은 중국 농서(隴西) 사람이며 송(宋)나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習秘侯)를 지냈고 신라에 귀화하여 대아찬(大阿餐)을 지낸 변경(邊鏡)의 증손이다. 그는 1138년(인종16) 중문지후(中門祗侯)에 이르렀고 인종 때 연성부원군(淵城府院君: 장연의 옛 지명)에 봉해지고 장연(長淵)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장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구죽산안씨(竹山安氏) |
안방준(安邦俊) |
시조 안방준(安邦俊)은 당나라 종실(宗室) 사람이며 농서(隴西) 사람으로 종실(宗室)인 이원(李瑗)의 아들 중 장남이다. 《병진보(丙辰譜》에 따르면 864년(경문왕 4)의 외환(外患) 때 이지춘(李枝春), 이엽춘(李葉春), 이화춘(李花春) 3형제가 왜구토벌에 큰 공을 세우자, 왕이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는 뜻에서 안씨(安氏) 성을 하사받았다. 시조의 본래 이름은 이지춘으로, 이 때에 안방준으로 개명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 그 뒤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안방준의 장남 안국보(安國輔)가 고려시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차남 안국필(安國弼)이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여 죽산안씨의 중흥을 이루었다. |
태안이씨(泰安李氏) |
이기(李奇) |
태안이씨(泰安李氏)의 시조 이기(李奇)는 자가 방숙(芳叔)으로, 중국 당(唐)나라 사람인 이승남(李昇南)의 후손으로 본래 농서(隴西)지역 출신인데, 고려 광종 때 난을 피해 우리나라 태안(泰安)에 와서 정착 세거하였다. 그 뒤 7세손 이천(李蕆)이 태안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태안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 |
황주변씨(黃州邊氏) |
변여(邊呂) |
시조 변여(邊呂)는 《황주변씨세보(黃州邊氏世譜)》에 의하면 중국 농서(隴西) 사람으로 송(宋)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귀화하여 취성(取城: 황주의 옛 지명)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1232년(고종 19) 몽골군이 송경(松京)을 침입하자 강화(江華)로 피나간 고종을 시종(侍從)하는데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태천백(泰川伯)에 봉해져 식읍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황주(黃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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