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척리(金尺里) 지명유래에 대하여......
금척(金尺)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금자(金尺)를 주었는데, 꿈을 깨 보니 손에 금자가 쥐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꿈에 가르쳐준 신인의 말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唐)의 황재가 사신을 보내어 이 신기한 금자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이를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38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후 이 금척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금척'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웃말 : 곡산한씨(谷山韓氏)가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금척의 위쪽에 있으므로 '상리(上里)' 혹은 '웃말'이라고 한다.
아랫말 : 영천이씨 집성촌으로 금척의 아래쪽에 있으며, '하리(下里)' 혹은 '아랫말' 이라고 한다.
새각단 : 순흥안씨(順興安氏)가 모여사는 마을로, 아랫말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신리(新里)' 혹은 '새각단' 이라고 한다.
위치 :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111-2
건천읍과 맞붙어 있는 고도 경주시에 가면 숱한 고분과 봉황대(鳳凰臺)가 시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신라 서울 경주는 지리적으로 새 봉황(鳳凰)의 형국이라고 하였다.
이 새가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면 장안의 여기저기에 봉황알을 만들어 놓아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어 떠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봉황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가 망하자 경주는 봉황의 형국이 아니라 배의 형국인데 이 무거운 산더미 같은 짐을 배에 가득 실었으니 배가 물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가 망했다고 한다.
금척리(金尺里)는 경주에서 국도를 따라 광명과 모량(毛良)을 지나 건천읍을 향하는 10Km지점에 있다. 도로변 양편에 작은 산같은 고분이 40여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까운 건천읍에서는 반대로 내려오는 오릿길 지점에 마을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금척리이다.
금척(金尺)이란 글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든 자(尺)라고 하는 뜻이다. 그 옛날 신라 진평왕이 정사(政事)를 보다가 낮에 깜빡 졸고 있었다. 눈앞에 일곱 무지개가 곱게 나타나더니 금으로 된 황금자 하나를 건네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졸음에서 번뜩 깨어났다. 그런데 그때 꿈속에서 신선으로 부터 받은 그 황금자가 거짓말처럼 바로 눈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도 그 자로 재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소원대로 이루어 진다고 하는 그런 자였다. 나라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그 자를 갖은 사람에게만 한한다고 하는 보물이다. 그 덕택인지 신라는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진평왕대에 이르러 신라에서는 하늘에서 내린 황금의 자가 있어서 날로 국력이 부강해진다고 하는 소문이 당나라 황제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는 이것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하였다.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이 거절을 하고, 갖다 바치지 아니하면 당장 많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처부수고 말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한가지 계책을 세웠다. 백성들을 충동하여 여기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가짜 왕릉과 같은 고분을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금자가 묻혀있는 금척이다.
왕릉같기도 하고 봉황대 같기도 한 큰 무덤이다. 왕은 이 어느 고분 속에 자신만 알고, 혼자 이 금자를 묻어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당나라 신하들과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평왕은 급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황금의 자를 묻은 고분은 진평왕밖에 모르는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일제시대 때의 이야기다. 고증(考證)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황금자가 탐이 나 발굴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우왕탕탕하며 뇌성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노한 것이다.
사방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밤낮 1주일간 빗줄기가 끊일 줄 모르게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대홍수(大洪水)가 났다. 일본인 발굴단은 부득이 철수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누구도 이 금척 고분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해방(解放)과 6.25사변을 거쳐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 금척리 고분은 말없이 그대로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래서 이 근방의 동네 이름을 금척이라고 불렀다 한다. 지금의 기차선로를 중간에 두고 서쪽 단석산편은 곡산 한씨(韓氏)네가 많이 살고, 동쪽편은 영천 이씨(永川李氏)와 순홍 안씨(順興安氏)가 산다. 그래서 그런지 한씨와 이씨 사이는 연비연사간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