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문화 칼럼
황광해의 한식읽기] 32. 김치
“연합뉴스” 2013년 12월 5일의 기사다.
한국의 ‘김장문화(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가 5일 오후(한국시간)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인류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됐다.
흔히, “김치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고 말하는 근거다. 정확하게는 김치, 김장이 아니라 ‘김장 문화’가 유네스코의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김장 문화’가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이다.
김치, 김장의 세계는 넓다. 김치에 대한 찬사는 많다. 불행히도, 김치, 김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드물다.
김치는 혼란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지금도,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김치는 오리무중이다. 오주 이규경(1788~1856년)의 “오주연문장전산고”_주례(周禮)의 일부분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19세기 초중반의 저작물이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김치, 김장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전략) 조정의 행사 때 나무 그릇에 담는 음식은, 구저(韭葅 부추김치)ㆍ육장[醓醢]ㆍ창본(昌本)ㆍ균니(麇臡 순록의 고기를 저민 것)ㆍ청저(菁葅)ㆍ녹니(鹿臡)ㆍ묘저(茆葅)ㆍ미니(穈臡)이다./주에, “葅의 음(音)은 장어 절(莊魚切)이다.” 하였고, 《설문》에는, “초채(酢菜)다.” 하였는데, 바로 지금 세속의 채반(菜盤) 위에 오르는 지채(漬菜)로서, 모두 저(葅)의 유법(遺法)이다. (후략)
김치는 저(菹), 저(葅), 지(漬), 지채(漬菜), 초채(醋菜) 등으로 표기했다. 윗글 중, “설문”은 중국 한나라 때 작성된 사전 “설문해자(說文解字)”다. 중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믿을 만한 사전이라 여긴다. 이 책에서 저(菹) 혹은 저(葅)가 곧 초채라고 이야기했다. 초채는 식초 맛이 나는, 삭힌 채소라는 뜻이다. 삭힌 채소, 신맛이 나는 채소, 곧 삭은 김치다. 이미 2천년 전 중국의 김치다.
저(菹)는 저(葅)와 같은 뜻을 지닌 글자다. 왜 이렇게 나누어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구저(부추김치), 청저(무청김치)도 모두 김치다. 저(葅)라고 표기했지만, 저(菹)와 같다. 한자의 뜻도 모두 ‘김치’다.
지채(漬菜)는 ‘세속의 채반’ 곧 일반 민중들의 밥상에 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지(漬)’는 오늘날 장아찌와 같은 것이다. 장아찌는 채소를 소금물 등에 담근 다음 삭히는 것이다. 소금물 대신 간장, 된장, 고추장에 채소를 넣기도 한다. 장아찌는, 별도의 양념이 없는 채소 절임이다. 장아찌도 김치의 한 종류다. 일본의 츠케모노[漬物, 지물]가 곧 우리 장아찌와 닮았다. 오이, 무 등 여러 채소를 이용한다. 서양의 피클과 다를 바 없다. 지, 지물, 서양의 피클이 곧 우리의 장아찌고 역시 넓은 의미에서 김치의 한 종류다.
침채(沈菜)는 채소를 절인 것이다. 채소를 양념한 액체 혹은 소금물 등에 담가서 삭힌 것이다. 장아찌와 닮았고, 역시 김치다. 김치라는 이름도 침채, 딤채 등에서 발전했다, 초채(酢菜)는 삭힌, 신맛이 나는 채소이니 결국, 지채, 저(菹), 저(葅), 초채, 침채, 지 등은 모두 김치다.
홍석모(1781∼1857년)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10월 편(음력)에서 “서울 풍속에 만청(蔓菁), 숭(菘), 산(蒜), 초(椒), 염(鹽)으로 옹기에 저를 담근다. 여름의 장과 겨울의 저는 곧 민간에서 일 년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겨울철 김장김치는 큰 행사다. 만청은 순무다. 숭은 배추, 산은 마늘, 초는 산초다. “서울 풍속에 순무, 배추, 마늘, 산초, 소금을 옹기에 김치를 담근다”는 뜻이다. 저는 김치다. 주재료는 순무와 배추, 양념은 마늘, 산초, 소금 등이다. 산초는 매운맛을 낸다. 고추가 한반도에 전해진 지 250년을 넘겼지만, 여전히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매운맛은 산초가 담당했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김치는 오이지다. 공자의 김치는 ‘지(漬)’ 그중에서도 오이지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저는 초채(酢菜)이다. 과저(瓜菹)를 부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초채’는 신맛이 강한 채소다. ‘과저’는 오이지다. 초채, 지, 과저, 오이지 모두 김치다.
공자의 멘토는 주나라 문왕(文王)이다. 문왕이 오이지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공자도 따라 한다. 신맛은 콧등을 찌푸리게 한다. 공자는 “문왕이 오이지를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콧등을 찡그리면서 오이지를 먹는다. 그 후 3년 만에야 그 맛을 즐겼다고 전해진다(여씨춘추). ‘과저(瓜菹)’ ‘오이지(漬)’ 모두 침채(沈菜), 김치다.
김치의 힘은 ‘변화’ ‘발전’ ‘다양함’이다. 김치는, 변화하면서 다양하게 발전한다. 작년 김치 다르고, 올해 김치 다르다. 집집마다 자기들만의 김장법이 따로 있고, 세월이 흐르면 그 내용마저 달라진다.
김치를 생각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고추도 불과 150년 전에는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고춧가루가 들어간 김치가 흔하지만, 고춧가루가 없는 동치미도 여전히 남아 있다. “동국세시기”의 홍석모 시대에는 널리 사용되었던 순무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지는 않는다. 순무 대신 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순무, 순무 김치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변화, 발전하면서 다양함을 지닌다. 한식의 특질이고, 김치의 ‘힘’이다.
김치는 배추, 무 등을 삭힌 것이다. 여기에 양념을 넣고 온도를 조정하여 발효, 숙성시킨다. 그뿐이다. 단순, 간단하지만 김치의 세계는 간단치 않다. 넓고 깊다.
오늘날 김치의 주요 재료는 배추, 무지만 모든 채소를 아우른다. 갓, 쪽파, 순무, 부추 등도 김치의 재료로 널리 쓰인다. 여름철에는 미나리 등으로 만드는 김치도 있다. 김치는 배추, 무를 위주로 담그는 것이지만 다른 채소로 담근 것도 물론 김치다.
양념도 마찬가지다. “동국세시기”에는 산초, 마늘, 소금이 주 양념 재료이지만 오늘날은 고춧가루가 주 양념 재료다. 고추가 산초를 대신한 것이다. 더하여, 생강을 넣는 이도 있고, 과일을 갈아 넣거나 썰어 넣는다.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여전히 산초 가루도 흔하게 쓴다.
젓갈에 이르면 너무 많아서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멸치, 새우젓갈부터, 생새우, 갈치, 꽁치 등 여러 해산물을 골고루 쓴다. 생굴을 넣는 이들도 있고, 가자미, 명태의 살을 넣는 이들도 있다. 조개를 김치에 넣기도 한다. 청각, 파래 등 해조류를 사용하는 이도 있다.
같은 젓갈이라도 곱게 내린 것과 거친 것을 나눈다. 젓갈에 따라 김치의 맛은 확연히 다르다. 김치 담글 때 쓰는 액젓도 여러 가지다. 조미료, 감미료, 설탕 등도 마찬가지다. 설탕 사용량도 다르고, 계절별로 감미료를 쓰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어느 것을 전통, 정통, 고유라고 주장하기 힘들다.
김치의 힘은, 다양함, 변화에서 온다. 그해의 기후, 농수산물의 작황, 식구들의 기호 등에 따라서 김치는 달라진다. 서양 채소인 비트로 색깔을 내는 김치도 유행한다. 일상적으로 비트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최근에 김치 그중에서도 동치미 등을 만들 때, 비트로 색감을 내는 이도 많다.
굳이 외국에서 들여온 채소를 내칠 일도 아니다.
배추의 시작은 백채(白菜)다. 백채가 변해서 배추가 된 것이다. 조선 말기까지도 “중국 배추가 크고 맛있다”고 했다. 사신단으로 중국을 갔던 조선의 선비들은 흔히 배추 씨앗을 사 왔다. 중국 배추 품종이 좋았기 때문이다. 한겨울 움을 파고, 무, 배추를 저장하는 방식 역시 중국 만주 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월동하는 무, 배추를 움에 묻고 신선한 상태로 먹는 모습을 보고 남긴 기록도 있다. 고추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뜨거운 열대지방에서 일본을 거쳐 들여온 것이다. 마늘도 마찬가지다. 마늘은, 소산(小蒜), 대산(大蒜)으로 나눴다. 소산은 달래 등으로 추정한다. 우리 고유의 것이다. 대산은 오늘날의 마늘이다. 조선 시대 이후,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외국에서 들여온 것, 우리 고유, 전통의 것을 굳이 나눌 필요는 없다. 모든 식재료가 한반도에 들어오면 우리는 적절히 변화, 발전시켰다.
김치의 힘은 변화, 발전, 다양함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남미라고 하지만 오늘날 ‘채소+고추’로 가장 맛있는 채소 절임을 만드는 곳은 한반도다. 이제 한반도의 김치, 한식에서 고추를 뺄 수는 없다. 배추도 고추도 외국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공자가 오이지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오이를 재료로 오이소박이를 만든 것은 한민족이다.
김치를 좁게 보는 이들은 김치를 ‘채소 보관 방법’으로 설명한다.
“한겨울에는 채소를 구하기 힘들다. 늦가을에 김치를 담가서 겨우내 채소를 먹는, 지혜로운 방식이다”라고 설명한다. 지혜롭지 못한 설명이다. 김치의 의미를 오히려 좁히는 설명이다.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를 구할 수 있는 시대다. 한겨울에도 시장에 가면 싱싱한 채소가 지천이다.
우리는 늦가을, 초겨울에는, 여전히, 김장을 걱정한다. 김치를 직접 담그거나 절임 배추를 구해서 김치를 담근다. 친정, 시가 혹은 친척 집에서 김장김치를 얻어오는 이도 있고, ‘공장제 김치’를 사는 이도 있다. 모두 김장을 ‘걱정’한다. 냉장, 냉동시설도 흔하다. 잎 푸른 채소를 갈무리한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여전히 김장, 김치에 마음을 둔다. 싱싱한 채소를 저장할 필요가 없는데 여전히 김장, 김치를 준비한다. 왜일까?
싱싱한 채소가 흔한 여름에도 우리는 김치를 담근다. 열무김치, 물김치를 담근다. 장아찌도 여름철에 흔히 먹는다.
한식의 특질은 다양함이다. 싱싱한 열무를 날것으로 먹는다. 생채(生菜)다. 데쳐서 된장에 조물조물해 숙채(熟菜)로 먹는다. 열무김치는 신맛이 나는 김치다. 초채(醋菜)다. 조선 시대 제사상에 등장하는 생채, 숙채, 초채를 지금도 찾는다.
김치는 한식의 특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끊임없이 변하는 다양함이다. 국가 대표 김치 명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누구나 나만의 김치를 담그고, 구하고, 먹는다. 한민족은 누구나 ‘나만의 김치’를 담그는 명인이다.
필자 황광해는,
경향신문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현재 음식 칼럼니스트로 활약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 <한국맛집 57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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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의 한식읽기] 22. 쇠고기 이야기
“우리는 부여, 고구려의 ‘맥적(貊炙)’을 물려받아 쇠고기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다수설이다. 근거 없는 엉터리다.
시작은 육당 최남선(1890~1957년)의 ‘맥적 이야기’다. 내용은 간단하다. “우리 선조인 부여, 고구려 민족은 ‘맥적’ 방식으로 고기를 먹었다” 이 표현은 맞다. 문제는 쇠고기 문화와 맥적을 연관시킨 것이다. 엉터리다.
엉터리는 힘이 세다.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우리의 쇠고기 문화는 뿌리가 깊고, 전통이 깊다”고 여긴다. ‘우리 민족’까지 버무리니 은근히 자부심도 생긴다. 많은 이들이 육당의 맥적’을 여기저기 인용한다. “불고기의 시작이 바로 맥적”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내용은 점점 더 ‘풍부’해진다. 어느 순간 맥적과 설하멱적(雪下覓炙)이 뒤섞인다.
‘설하멱적’은 조선 후기의 음식이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관계없는 음식이다. 맥적과 설하멱적은 15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눈 아래서 찾는 고기’라고 하니 낭만적이다. 맥적=설하멱적? 그럴듯하지만 아무런 연관이 없다.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지나며 1500년이 흐른다. 그동안 쇠고기 문화는 그리 발달하지 않는다. 먹긴 먹되, 찜, 수육 정도다. 불로 굽는 설하멱적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설하멱적은 청나라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청나라 기록에 “10월 초순(음력)에 쇠고기를 마련하여 숯불에 구워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 난로회(煖爐會)다. 마침 한반도도 쇠고기가 비교적 흔해지면서 중국 측의 이런 풍습을 따라 한다. 우리의 쇠고기 문화가 풍부해진다. 눈 내리는 초겨울, 쇠고기를 연하게 구워 먹는 방식이 나타난다. ‘설하멱적’이다. 맥적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음식이 느닷없이 끌려 나왔다. 코미디다.
‘맥적’은 어떤 음식일까? 중국 백과사전 ‘바이두[百度]’에서 “수신기(搜神記)”를 인용하여 맥적을 설명한다. “수신기”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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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 평론가 “조선초 김치는 金치… 최고위층만 맛볼 수 있었다”
동아일보 입력 2013-11-06 03:00수정 2013-11-06 16:33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논문
김장철에 배추 값이 오르면 ‘김치가 아니라 금치’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조선시대부터 김치는 중국 황제에게 진상할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이런 김치가 서민적 반찬이 된 것은 비싸고 귀한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대중적 열망의 산물이었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55)는 5일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심포지엄 ‘김치, 김장문화의 인문학적 이해’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세계김치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윤 평론가는 “조선 초기 최고급 중국산 배추를 수입해 만든 김치는 왕실이나 최고위층 양반만 맛볼 수 있는 요리였다”고 설명했다.
세종실록에는 중국 사신이 새우젓으로 담근 김치 두 항아리를 요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겨우 김치 두 단지가 황제 진상품 목록에 오를 정도로 진귀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치의 주 재료인 배추는 종자 한 되가 하인의 몇 달치 월급과 맞먹을 만큼 비쌌다. 왕실에서도 국가 제사에 쓰기 위해 배추밭을 따로 관리할 정도였다.
또 다른 재료인 젓갈도 비슷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젓갈로 담근 김치처럼 호화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고 질타했다. 18세기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먹었던 ‘젓갈 김치’는 전국적으로 유명했지만, 워낙 비싸고 수급이 어려워 내륙에서는 웬만한 집안이 아니면 김치 재료로 쓸 엄두도 못 냈다.
출처와 기사로 가서 보기 :윤덕노 평론가 “조선초 김치는 金치… 최고위층만 맛볼 수 있었다”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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