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들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괴한 모습이 적사도의 마인들임을 대변하고 있었으므로.
물론, 청목사승은 백팔십년 전에 고해동에 투옥된 인물이라, 그 이후의 인물들인 적사도의 마인들을 확실하게는 알 수가 없었지만 직감으로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저럴 수가...]
푸른 염주를 굴리는 그의 손 끝이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흐흐... 적사도의 인물이라면 같은 천마교에 몸을 담고 있는 신세이거늘... 오히려 적을 돕다니...]
도대체가 미친놈들이다. 그러나 그는 경악하고 있었다. 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만한 마공이학들. 그것은 그가 전에는 일찌기 본적이 없는 전율스러운 것들이었던 것이다.
(흐흐.. 놈들이 존재하는 한. 본 청목사승이 천마교의 교주가 되기엔 힘이 들겠구나. 그러나...)
그는 메마른 웃음이 흘렸다. 무려 백팔십년의 세월동안 고해동에서 무공에만 전념해 온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저들 앞에서 두려워해야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는 다만 무심한 시선으로 적사칠혼의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헌데, 적사칠혼은 고해동의 마인들을 제압한 후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대로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이에 어리둥절해 진 청목사승.
(흐흐흐... 이것은 분명히 시위로군. 적사도가 고해동의 위에 있음을 보이려는 시위... 그러나 너희들은 곧 보게 되리라. 이 청목사승의 위대함을... 흐흐흐)
야망자 청목사승. 그의 얼굴에 죽음의 회색빛이 진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한편, 철혈무제는 더욱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소흑자와 소백자가 전후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상대가 오히려 자신들을 도왔다는 불가사의한 사실에 대해 못내 미덥지가 않았다.
[헛허허... 사람을 오래 살고 봐야 한다더니... 우리가 적사도의 마인들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되다니...]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참으로 오랫동안 적사칠혼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저들의 가공할 무공이다. 저런 정도의 무공이라면 능히 군협칠대무황에 버금가는 것. 과연 저들을 군협칠대무황이 아닌 군협천 서열 칠위 몽중선로가 상대할 수 있을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 서열 육위인 내가 고해동의 인물을 상대하는 것도 그렇고. 더욱 무서운 인물들인 적사도의 인물들을 서열 칠위인 몽중선로가 상대하라는 명이 내려진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의 눈빛은 담담했다.
[만약... 군협천의 일천 산하지부에 내려진 명이 이런 식이라면... 군협천은 이번 일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의 시선이 소백자와 소흑자에게로 향했다.
[한데 너희들은 누구이냐? 보아하니 개방의 인물인 것 같은데...]
소백자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개방의 흑백소화자입니다.]
[오...]
철혈무제와 군협천의 인물들은 가볍게 놀라는 눈빛으로 두 비렁뱅이를 주
시했다.
흑백소화자, 개방은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소식통과 조직을 동시에 지닌 문파이다. 대소림사와 함께 구파일방에 소속이 되어 있었으며 비렁뱅이의 집단으로써 더욱 무림에 잘 알려진 문파이다.
한데, 이 문파의 명물이 하나 있으니 아니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들이 바로 흑백소화자이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이들은 각종 소식을 얻어내고 전하는 대신 귀신도 곡을 할 정도로 신출귀몰했다. 특히 소백자의 지혜는 개방의 인물 가운데 최고라 할만큼 뛰어나다 했으니... 기실 이 두 사람은 개방이 아끼는 촉망받는 신인인 것이다.
이번에는 문득 소흑자가 입을 열었다.
[대장로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로라면?]
철혈무제의 얼굴에 가벼운 의혹의 빛이 서렸다. 소백자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만박대선개이십니다.]
[오오...만박대선개...]
폐장.
온통 부서지고 깨어져 흉가나 다름없는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리 만무했지만 그런대로 규모는 큰 편이었다.
특히, 적막한 밤 이곳의 분위기는 실로 을씨년스러웠다. 한데 이 폐장에 어둠이 깔리는 무렵 찾아든 불청객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이 폐장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인물들. 바로 적사칠혼 일행이었다.
이 가운데 장산은 바빴다. 우선 모닥불을 피워야 했고 단엽의 잠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점에서 사온 만두로 이날 저녁을 간단히 때웠다.
화르르... 타닥...탁...
모닥불은 소리 내며 타오르고 있었고 적사칠혼과 장산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문득, 지옥겁이 말을 씹어뱉듯이 내뱉었다.
[흐흐흐... 무림칠대뇌옥이 동시에 파괴되고... 천마대회합이 누구에겐가로부터 선언되었다면 누군가 이미 오래전부터 천마교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는 말인데...]
은사혼이 치렁한 은발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누군가가 천마교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는 냄새가 난다.]
마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누굴까? 누군데 무림칠대뇌옥을 파괴한 것이며, 천마대회합을 선언한 것일까?]
흑접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그거야 복잡하게 생각하 것 까지는 없지.]
[그렇다면?]
나머지 인물들의 시선이 일제히 흑접에게 집중이 되었다. 흑접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천마교의 부활 따위를 정파무림에서 할리는 없는 것이 아니겠어.]
[물론 그거야 그렇지.]
[호호. 그렇다면 간단하지. 정파무림이 아니면 우리 사파무림에서 천마교의 부활을 외치고 나왔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천마교의 부활을 외칠 인물은 사도무림인들 가운데서 누구이겠어? 오직 한 부류가 아니겠어. 바로 천마교의 후예들. 그러니까 전대 천마교주라는 적용사우의 직계후인들일거야.]
[적용사우의 직계후인들?]
나머지 인물들은 일리가 있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다. 빙후가 무심한 음성을 흘렸다.
[그것은 단지 가능성으로 봐야 한다.]
단엽을 제외한 적사오혼의 시선이 의혹을 담고 빙후에게로 향했다. 빙후는 그들을 주시하며 느릿하게 말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제삼의 인물이 천마교의 힘을 이용해 천하를 제패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제삼의 인물에 의해 이용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혹시 존재할 제삼의 인물에 대한 경계를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인지라 적사오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 적사칠혼이 적사도를 떠나 중원에 첫발을 내민지 불과 삼일.
그동안 그들은 무림정세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한 듯했다. 이때, 단엽은 빙후의 말을 들으며 내심 적지않이 놀라고 있었다.
(빙후... 이 여인의 지혜가 보통이 아니로군. 분명히 가능성은 빙후의 말쪽이 높다. 적어도 이 단엽이 아는 견지에서는...)
단엽은 생각했다.
(군협천주 철군무의 말에 의하면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는 인물은 분명 제삼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 일을 이백년 전서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며 군협천의 모든 문서와 명령서 등을 조작하여 군협천을 실질적으로 움직일 정도로 가공할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바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천마교의 부활은 바로 대소림사를 백년봉문케 한 그들 제삼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것도 확신은 아니었으며 가능성일 뿐이었다. 아직은 그 어떤 확증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 애초에 입을 열었던 지옥겁이 다시 씹어뱉듯 내뱉었다.
[어쨌든 기분 나쁘다. 그 누구가 천마교의 부활을 선언했든지 그들은 우리 적사칠혼이 중원에 도착했을 것을 이미 알았을 터인데... 흐흐.. 전혀 그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단 말씀이야...]
그러자, 은사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서운 살기를 뿜어냈다.
[흐흐흐... 말이야 바른 말이다. 놈들은 우리를 대대적으로 환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있으니... 죽어도 골백번은 더 죽어야 마땅할 놈들이로다.]
이것은 단지 그들 두 사람만의 불만은 아니었다. 적사칠혼 모두의 불만이라면 불만인 것이다.
수십여 년의 세월동안 오직 유아독존적인 자아도취에 취해 살아온 그들이다. 헌데 누군가가 자신들을 푸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단엽이 빙그레 웃었다.
[모두들 진정해라.]
그는 적사육혼을 차례로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각 시대를 대표할 만큼 강했다. 잔인했고 무심했으며... 그래서 적사도에 투옥이 될 만큼... 각 시대의 천마교주라 해도 우리들은 무시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일 뿐이다. 우리가 적사도에 투옥이 되면서 어찌됐든 우리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진 것이며 지금에 와서 그 떨어진 권위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적사육혼은 입맛만을 쩝쩝 다실뿐이었다.
단엽은 그런 그들을 쓸어보며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적사도에서 수십여 년의 세월동안 세상을 뒤엎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의 무공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들만의 생각일 뿐이다.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나머지 육대뇌옥의 인물들 역시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천마교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는 인물 역시 우리의 확실한 능력을 모르고 있음이 확실한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적사육혼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성질급한 지옥겁이 참지못하고 물었다.
[주인, 그 일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단엽은 희미한 미소를입가에 띄웠다.
[떨어진 권위를 되찾는 것이다. 우리의 힘 그것이면 가능하다. 천마대회합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강한 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이며...]
[크핫하하. 그렇군요. 천마교주의 권좌를 주인께서 차지하신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대접을 받을 수가 있겠군요.]
지옥겁은 그제서야 할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납득했다는 듯 앙천대소를 토했다. 나머지 인물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다만, 그들의 대화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장산만이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이었다.
[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나?]
지옥겁이 문득 핏빛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동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헤헤...사람이 아니라...쥐새끼들이다.]
흑접이 차갑게 웃었다.
[그것도 먹이를 노리는 생쥐들이겠지?]
은사혼이 습관처럼 은발을 쓸어내리며 무심한 음성을 흘렸다.
[정확히 일백하고도 팔십 마리나 되는군. 흐흐...]
[냄새를 짐작컨대 군협천에서 온 쥐새끼들 같은데...]
사목이 무표정히 중얼거렸다. 장산이 퍼뜩 놀라며 물었다.
[쥐...쥐새끼들이라고요? 이 장산이 다 쫓아 버렸는데...]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단엽은 장산을 자신의 곁에 당겨 앉히며 말했다.
[장산, 그들은 쥐새끼가 아니라 인간들이다.]
[예에?]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나쁜 사람들인가요?]
[아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주인님을?]
[후후... 그것은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그럴리가...]
[장산, 처음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결코 좋은 사람들은 아니다. 후회된다면 지금이라도 떠나라.]
[그럴리가 없어요. 장산은 떠나지 않겠습니다.]
장산은 완강히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 장산이 말하겠어요. 주인님은 좋은 사람이라고..]
[되었다.]
단엽은 빙긋 웃으며 그를 잡아 끌어 앉혔다. 그리고,
[살인을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적당히 처리하도록 하라.]
그는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말했다. 순간,
[이번에도 살인을 하면 아니 됩니까?]
마동이 다분히 불만 어린 투로 말했다. 단엽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빙후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표정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한차례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신형을 날렸다.
어둠... 적막한 그 공간 위로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헉! 음!]
그리고 신음에 이어 폐장의 지붕과 담 위로부터 무더기로 떨어져 내리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군협천의 고수들이리라. 참으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최초의 신음이 터지고 마지막으로 신음이 터진 그 시간적 공간은... 그리고, 모닥불 주위로 근 이백여 명에 가까운 군협천의 고수들이 썩은 짚단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찰나적인 순간에 모두 혈도가 제압되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흐...이거 영 싱거운데? 몸을 풀기도 전에 끝나 버리다니...]
지옥겁은 손을 비비적거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그들 적사오혼은 단엽의 곁에 내려와 있었다.
마동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죽여도 성이 차지 않을 판인데... 적당히 몸을 쓸어주기만 했으니...]
한데 그의 말이 미처 끝을 맺기도 전이었다.
돌연, 슈우우... 환상인가?
어둠을 가르며 단엽을 향해 밀려드는 한줄기 인영이 있었다. 흐르는 달빛처럼... 마치 꿈꾸는 몽야에 밀려드는 꿈처럼...
그 인영은 황홀한 아름다움마저 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이는 순간, 이미 그는 단엽의 십대사혈을 노리고 짓쳐들고 있었다.
검. 투명한 검빛이 찰나적인 순간 단엽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대단한데?)
단엽은 흠칫 놀랐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도 할 여유가 없는지라 그의 몸은 그 절박한 상황에서 수십 번의 방위이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듯 했으나 수십 번의 방위이동 끝에 단지 그 자리로 돌아왔을 뿐인 것이다. 그 순간, 단엽의 문사건. 검은 문사건 즉 천마건은 풀어졌고, 그것은 신비의 인영을 향해 수십 줄기의 도기를 뿌렸다.
파아아~
[헉!]
파공성과 신음. 그리고 모든 것은 끝이나 있었다.
단엽은 본래 그 자리에 단아하게 머물러 있었으며 그 앞에 한사람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단엽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검은 문사건을 느릿하게 머리에 둘렀다. 그리고 상대를 살폈다.
상대는 여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십팔구세 가량. 일신에는 설백의 궁장을 단아하게 걸치고 있었고 희고 매끄러운 피부에 세공품처럼 또렷한 이목구비, 시선을 살포시 내리 깔은 그녀의 모습은 약간 차갑고 고고한 미태가 발산되었다.
이때, 그녀의 우아한 눈썹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설백의 궁장에는 실로 미세하게 수십 줄기의 도흔이 나 있었는데 만약 상대가 그녀를 죽이려는 마음만 먹었다면 그녀는 골백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불신과 경악과 절망의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는데...)
그러나 그녀는 오늘 뼈저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무서운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을 아버님께서 직접 나서서 상대하셨다 해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단엽을 주시했다.
(뭔가 철저히 잘못되었다. 이런 가공할 고수들을 군협천 서열 칠 위에 불과한 아버님으로 하여금 상대하게 하다니...)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탄식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으로 목을 그어가는 것이었다.
(이들 악마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피... 한 줄기의 선혈이 그녀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캉!
단엽은 한 자루의 천마비도를 날려 그녀의 검을 퉁겨버렸다. 그것은 눈이 부시도록 빠른 동작. 적사육혼의 얼굴에도 은은히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어리석은 낭자로군.]
단엽은 신비의 소녀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소녀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엽은 그녀를 직시하며 물었다.
[낭자는 누구인가?]
[군협천의 인물인가?]
[몽종선로와는 어떤 사이인가?]
소녀는 한마디의 대답도 없었다. 그녀는 냉혹하게 말을 끊었다.
[죽여라.]
그리고 눈을 감는다. 적사도의 악마들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투였다.
[흐흐흐. 죽일까요?]
지옥겁이 모처럼의 기회라는 듯 음침하게 웃으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단엽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은 그때였고 그것을 보며 지옥겁은 흠칫하여 제자리로 돌아갔다.
단엽은 잠시 소녀를 주시한 후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도록 하여라. 더 이상의 볼일이 없다면.]
소녀는 이 말이 의외라는 듯 두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대들의 동료들 역시 돌아가게 해주겠다.]
단엽은 이렇게 말한 후 눈을 감았다. 소녀는 굳어졌다.
(돌아가라니... 이럴 수가... 이럴 수도 있단 말인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들을 상대하여선 오직 죽음뿐일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 그것이 철저히 빗나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때였다.
[어서 돌아가요. 우리 주인은 좋은 사람은 절대 죽이지 않아요.]
장산이 어깨를 자랑스럽게 으쓱거리며 순박하게 웃어 보였다.
(좋은 사람은 죽이지 않아?)
더욱 어리둥절해지는 소녀.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단엽을 한동안 주시했다.
몽중화. 이것이 여인의 이름이었으며, 바로 군협천의 서열 칠위의 엄청난 고수인 몽중선로의 무남독녀이기도 했다.
그녀는 우연히 몽중선로에게 내려진 군협천주의 명령서를 받았고, 그것이 또한 죽음의 명령서라는 것을 알았기에 명령서의 내용을 부친에게 비밀로 하고 자신이 직접 군협천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 자리에 나선 것이었다.
상대는 적사도의 대마인들. 그들을 상대로 살아남으려는 생각 따윈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한데, 상대는 군협천의 고수들을 죽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죽이지 않았다.
이것을 좋게 해석애야 하는가 아니면 나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아미타불...]
느닷없이 폐장을 울리는 불호성이 있었다.
그 소리는 무려 백팔방위에서 동시에 들려왔으며 동시에, 흐릿한 인영들이 군협천의 고수들 몸을 스쳐가는 순간 일어나고 있었다.
순간, 적사칠혼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온 경악성이었다.
[소림백팔나한진.]
그렇다. 어둠속에서 고요히 서 있는 사람은 정확히 백팔인. 그들은 머리를 깎은 노승들이었다.
실로 이들 백팔승인들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깊고 무한한 기도는 불도의 극치를 보여주는듯 했다. 단언컨대 이런 기도를 뿌릴 수 있는 승인들이란 소림백팔나한들 뿐인 것이다.
순식간에 장내는 터질 듯한 중압감이 감돌았다.
이어, 스스스...
네 사람이 소리 없이 장내로 떨어져 내렸다. 일승 삼개. 그들 중에는 소흑자와 소백자의 모습도 보였다. 한명은 누더기와 같은 적삼을 걸치고 있는 노개였다. 나이는 어림잡아도 백여 살은 넘어 보였는데 눈빛만큼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선명했고 깨끗했다.
허리에 매어진 매듭은 열 개.
이것은 개방의 신분을 나타내는 독문표시로 열개의 매듭이라면 현개방의 방주보다도 한 단계 높은 배분의 소유자인 것이다. 만박 대선개. 이 노개가 바로 천하의 일은 모르는 것이 없다는 개방의 살아 있는 전설 그 자체인 만박대선개였던 것이다.
나이는 소림의 천엽성승과 동년배
이니... 적어도 백 삼십 살은 넘었으리라. 한편, 만박대선개의 곁에 고요히 서 있는 약관의 청년승인. 그를 보는 순간 이곳의 여인들의 눈빛은 그대로 굳어지고 있었다.
흑접의 눈빛은 꿈결처럼 몽롱하게 변했으며 빙심의 여인이라는 빙후의 눈빛마저 흔들림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몽중화의 눈빛 역시 기이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청년승인, 흐릿한 달빛 아래 창백하게 드러난 청년승인의 용모는 너무나 절륜했던 것이다. 백설같이 흰 피부. 그 위에 그린 듯 선명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이목구비. 고요한 가운데 은은히 감도는 신선한 매혹이 두 눈에 있었고 얼굴 한 부분을 또렷이 특징 지우면서도 높지 않고 섬려한 콧날, 누구라도 한번 쳐다보면 목이 타는 듯한 갈증과 뜨거운 정열을 느끼게 만드는 붉은 입술.
(아...아름답다!)
단지 여인들뿐만이 아니라 보는 누구나 느끼는 감정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이때 문득, 단엽의 눈빛이 한차례 격렬한 흔들림을 보였다.
(아버님!)
지금 청년승인의 모습은 완벽하게 단엽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바로 천엽성승 뿐이다.
과거에 천엽성승과 단엽은 서로 모습을 바꾸어 변신하였었다.
지금 단엽은 소수천마로 변해 있었지만 천엽성승은 여전히 단엽의 모습으로 변신한 채로 있었던 것이다. 단엽은 잠시 떨리는 시선으로 천엽성승을 주시하다가 이내 본래의 차분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행여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솟구치는 격동을 좀처럼 누르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직 늦지는 않은 것 같군요.]
천엽성승은 주위를 돌아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박대선개는 그를 향해 가볍게 웃어보였다. 소백자와 소흑자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귀에다 입을 대고 무어라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던데 그때마다 만박대선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엽을 바라보곤 했다.
(저 마인은 소수천마인데... 그가 어찌 철혈무제를 비롯한 군협천의 고수들을 구하라는 명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거기다가 상대는 고해동의 마인들이었거늘... 같은 동료를 상대로 군협천의 고수들을 구했다니...)
그는 기이한 눈빛으로 단엽을 주시하고 또 주시한다.
단엽의 모습을 한 천엽성승은 이때 몽중화를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몽중화의 몸이 거대한 잠력에 휘말려 천엽성승의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며 적사육혼은 적잖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상대가 자신들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아미타불... 부친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로 뛰어들다니... 그대의 용기는 가상하다.]
[아미타불...]
몽중화는 상대의 눈부신 위엄에 자신도 모르게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천엽성승은 그런 그녀를 온화한 눈길로 쓸어주며 말했다.
[그대는 우리와 함께 가야한다. 갈 수가 있겠는가?]
[어디로?]
[아미타불... 풍운회의 총단이다. 물론 군협천의 고수들 역시 대동하고.]
몽중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풍운회란 어떤 집단을 가리킴이 분명한데 그녀로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문파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만박대선개가 앞으로 나서며 빙그레 웃었다.
[아이야. 단엽옥승의 말대로 따라라. 그리하면 너에게 무한한 복록이 주어질 것이다.]
몽중화는 잠시 생각했다. 만박대선개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과 군협천의 고수들이 이들을 따라야 한다는 기이한 숙명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아미타불...]
천엽성승은 잘 생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화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대하자 몽중화는 숨이 막히는 듯한 전율을 느낀다.
(아아... 저 웃음... 너무도 아름답다.)
그녀는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치는 것을 느끼며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이때, 천엽성승은 적사칠혼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다가서자 적사육혼은 경계의 빛을 띠었으며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단엽만이 무표정하게 허공만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엽성승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상대는 적사도의 대마인, 그들을 앞에 두고 어찌 긴장하기 장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긴장을 억누른 채 자신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질문을 던졌다.
[아미타불... 당신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침묵을 줄곧 지키던 빙후가 말했다.
[묻기 전에 그대가 누구인가를 말해라.]
[아미타불... 소승은 단엽옥승이라 하오.]
빙후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좋다. 이제 물어라.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천엽성승은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시대의 인물 빙후임을 알아보고 조심스
럽게 물었다.
[한 사람에 대해 묻고 싶소.]
[한 사람이라면...]
[대소림사의 천엽성승이시오.]
빙후는 가벼운 탄성을 토했다. 그녀는 기이한 눈빛으로 천엽성승을 주시했다.
[그와 그대는 어떤 관계인가?]
[아미타불... 그 분은 소승의 사부이시오.]
[사부?]
빙후를 비롯한 적사오혼은 흠칫 놀란다. 다음순간, 지옥겁은 앙천광소를 토하며 말했다.
[크핫하하... 누구신가 했더니 그놈의 제자였군. 놈은 자결했다.
천엽성승의 몸이 무섭게 경직이 되었다. 이번에는 마동이 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놈은 삼년의 세월동안 우리의 수십 년 고통을 대신하다가는 끝내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았다.]
[아미타불...]
천엽성승의 전신이 무섭게 떨린다. 흑접이 차갑게 말을 던졌다.
[놈은 죽어 마땅했지. 우리에게 수십 년의 고통을 주었으니. 죽음으로 대
가를 치루기엔 너무도 값싼 것이었어.]
[아미타불...]
천엽성승의 몸은 쓰러질 듯 휘청거린다. 만박대선개가 황급히 그를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만박대선개 역시 분노하고 있었다.
천엽성승은 그의 절친한 고우이다. 그가 자결했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죽일놈들. 알만하다. 네놈들이 성승에게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만박대선개는 이빨을 갈았다.
단엽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엽성승의 앞으로 다가섰다.
[자네가 천엽의 제자라니... 당연히 복수를 하려들겠군.]
[아미타불...]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자네와 일전을 치루는 것을 원하지 않아. 왜인줄 아는가?]
[아미타불...]
천엽성승은 다만 불호만을 외울 뿐이었다. 그런 그의 안면근육은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는데 바람도 없건만 그의 승포는 팽팽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노화가 극에 이르도록 치밀어 올랐다는 것.
(아들아... 네가 이 아비를 대신하여 죽다니... 내 너의 복수를 해주마.)
수양 깊은 천엽성승. 그러나 그는 단엽이 자결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듣고서도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단엽은 그런 그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직은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야. 만약 이 자리에서 우리가 일전을 겨룬다면... 그것은 제 삼의 음모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
[제 삼의 음모자...?]
천엽성승과 만박대선개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 비슷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경악했다.
(어찌 이 자가 제 삼의 음모자를 알고 있단 말인가?)
대소림사를 철저히 몰락의 구렁터이로 몰아넣고 무림에 천마교의 부활을 이루어 천하를 제패하려는 야망자들, 그리고 군협천의 모든 힘을 마음대로 조작 이용하고 있는 음모자들에 대한 것은 기실 무림의 몇몇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이제 적사도에서 출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소수천마가 어찌 그것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단엽은 담담히 웃어 보였다.
[제 삼의 음모자들은 어쩌면 우리의 공동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군협천의 힘을 이용하듯 천마교의 힘도 이용할 수가 있으니...]
[아미타불...]
천엽성승과 만박대선개는 아예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이다. 이 순간이었다. 천엽성승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한 것은.
동시에 파아아... 그는 느닷없이 단엽을 향해 일수를 내뻗는 것이었다.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천 불영. 그것은 불문 최고의 무공이라는 단엽천불수였다. 적사육혼의 안색이 대변했다. 순간,
[후후후...]
단엽은 가벼운 냉소를 토하며 역시 일수를 가볍게 뻗어냈다. 동시에 두 사람의 손은 허공에서 마주쳤고, 쾅! 실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격렬한 폭음을 일으켰다.
휘청... 천엽성승의 몸이 뒤로 기우뚱했고 단엽의 어깨가 출렁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크핫하하... 그럼 훗날 다시 보세.]
단엽은 적사육혼과 나머지 장산을 이끌고 신형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소림백팔나한들은 돌발적인 그들의 이러한 행동에 멍청해지고 만다.
만박대선개가 다급히 외쳤다.
[막아야 하네. 저들이 천마대회합에 참석치 못하도록.]
순간, 소림백팔나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날리려 했다. 천엽성승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을 저지했다.
[아미타불...]
그는 막연히 단엽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손... 소수천마의 손. 거기에 단엽인이 분명하게 찍혀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아이가 단엽이란 말인가? 소수천마가 단엽이란 말인가?)
그의 몸은 격동으로 인해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그렇다. 그 아이는 단엽이 분명했다. 그 아이는 소수천마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오...아들아.)
단엽, 그는 떠나기 전 바로 자신이 단엽임을 천엽성승에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언뜻 천엽성승의 눈가에 투명한 물기가 젖어들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리고 또,
[아미타불...]
그는 하염없이 단엽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돌변한 태도에 만박대선개와 몽중화, 그리고 소흑자와 소백자는 만면 가득 의혹의 빛만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만박대선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단엽옥승... 아니 부회주... 저들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저들을 막는다면 천마교의 힘은 반으로 줄어들 텐데...]
[아닙니다.]
천엽성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니?]
만박대선개는 크게 의혹의 빛을 발했다. 그러나 천엽성승은 빙긋 웃는다.
[그들이 살인을 하지 않는다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군. 그런일이... 아미타불... 그 아이가 그들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니... 과연... 과연... 아미타불...]
한바탕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천엽성승이었다.
주위의 사람이 어찌 됐든,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으로 밀려오는 격동을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는가.
[핫하하...]
결국 그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고 만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만박대선개의 표정은 멍청해져 가기만 했고 소흑자와 소백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 때가 되었는가. 수년의 세월 오직 천엽성승이 아닌 단엽으로 살아 온 노납. 이제 나의 모든 것을 그 아이에게 물려줄 때다 되었도다. 삼년의 세월. 노납이 변한 것 이상으로 그 아이 또한 변한 것 같으니... 일수의 대결로 미루어 그 아이의 능력이 이미 노납의 이상임을 알 수가 있었도다. 이제 그 아이는 풍운회의 부회주로서 이 땅의 음모를 거두어 가는 위대한 단엽옥승이 될지니 나의 모든 것, 내가 그동안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되리라.
은밀했다. 풍운회라는 신비문파의 등장은. 회주가 누구이며 도대체 어떤 인물로 조직이 된 것인지. 모든 것이 철저히 비로 시작되고 비로 끝나는 문파. 그들에 의해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있던 군협천이 그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사실, 그것조차도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군협천의 거대한 힘이 그 풍운회라는 조직 속으로 서서히 흡수되고 있음도 철저한 비밀이었다.
풍운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무림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한 문파.
과연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은...
배.
한척의 거대한 선박이 닻을 올렸다.
그리고 바람에 찢어질 듯 닻을 나부끼며 서서히 태호의 한 선창가를 미끄러져 갔다. 바로, 천마교가 있는 천마도로 향하고 있는 배였다.
단엽은 갑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망망한 호수 끝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황혼녘의 하늘 밑, 호수는 황혼의 불길이 내려붙은 듯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불길이 번지는가. 이른 저녁 바람이 호면을 쓸어갈 때마다 물결이 부서지며 붉은 빛이 더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배는 황혼의 하늘 밑으로 유유히 항해를 계속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라... 가히 바다라 해도 과언은 아니로다.)
단엽은 마의자락을 나부끼고 선 채 내심 중얼거렸다. 이때 그의 어깨에 기대어 서는 한 여인이 있었다. 설매화처럼 차가운 귀품의 여인. 그녀는 바로 빙후였다.
[당신은 현재의 천마교주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궁금한 듯 물었다. 단엽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소. 아직은...]
빙후는 당연할 것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십여 년의 세월 강호정세를 모르고 지내온 그들이고 보면 현재의 천마교주가 누구인지 알리가 만무한 것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지난 열흘 동안 그들은 각 방면으로 천마교주에 대해 조사를 해보았지만 얻은 소득은 전무했다.
천하무림인 역시 천마교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천마교주가 천마대회합을 개최하고 있을 뿐이라고 알고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