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六 章 女道觀의 戀風
며칠을 두고 내린 눈은 대지를 뒤덮어 온 세계를 이루었다. 마을의 눈 덮인 길 위를 뜸뜸이 몇 사람의 행객이 팔짱을 찌르고 추위를 참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서북쪽의 초봄은 버들이 늘어지고 꾀꼬리가 우는 강남(江南)에 비하면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다.
운학은 눈에 덮인 관도 위를 마차를 몰아 달려가고 있었다.
얼마 전 회천현(會川縣)에서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였으나 그의 옷에는 때 묻은 기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모습과 달리 초조하고 평정을 잃고 있다.
그것은 그가 회천현을 떠난 뒤에 그의 머릿속에서 아직도 나이 어린 처녀 사여명(查汝明)의 생각이 깊은 연정으로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의 운학은 사여명이란 석 자의 주인공을 찾아내기에만 급급하였다.
그것은 사여명이란 석 자가 자기와 깊은 운명적인 연관을 믿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를 하루 빨리 만나야 하겠다는 욕망 속에 나날을 보낸 자신――
하면서도 한편으로 운학은 그를 만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구름같이 포근한 그의 머릿결! 앵두와 같이 여문 그의 입술! 밉지 않게 오똑 솟은 코, 추운 겨울 하늘에 반짝이는 별같은 눈!
어느 한 군데 선녀(仙女)에 비겨 나무랄 곳이 없는 미인이었다.
운학이 화산(華山)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아름다움에 얼마나 현혹되었었고 또한 불과 같이 타오르기 시작하던 첫사랑의 불꽃은 아직도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으니 첫사랑이란 이렇게도 영원불멸의 신비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운학은 그에게 한 가닥 미안한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천리 밖의 복파보 중에서는 요화 같은 한 소녀가 자기에게 무서운 치정(癡情)의 추파를 보내어 숨진다고 충후(忠厚)한 자기의 마음을 뒤흔들며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사여명과 오래 있는다는 것이 몹시 양심에 가책이 되어지기도 하였다.
참지 못하도록 죄책감과 미안스러운 마음을 안고서 그는 사여명의 곁을 슬그머니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떠나서 어디로 갈까?
갈 곳이 막연하였고 그의 곁을 떠난다는 자체가 무엇인가 존귀한 보물을 놓쳐 버리는 것 같은 아쉬움이 가슴을 메웠다.
마차에 앉은 운학은 가슴을 헤쳐 모진 풍상(風霜)에 시달린 늠름한 살덩이를 드러냈었다.
초봄의 차가운 바람이 그의 가슴을 때렸으나 그는 오히려 무엇인가 간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오른손을 번쩍 날리면서 채찍으로 말을 후려치니 놀란 말은 눈 위를 미친 듯이 달려간다.
얼마를 달려가자 길 앞에는 작은 마을이 보이고 그리 크지 않은 초가집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는 것이 보이자 말도 연기가 반가웠는지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 때, 마차 뒤에서 요란스러운 말굽소리가 들리더니 번개같이 두 필의 말이 마차 곁을 지나서 달려간다.
말 위에 탔던 한 사나이가 마차 위의 운학을 바라보더니 앞에 달려가는 말 위의 사나이를 부르면서
『노대(老大), 정말 쇠로 만든 신을 신고 온 세상을 찾아도 찾지 못할 놈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이곳에서 찾았소이다. 저놈이 누군지 아시오?』
말 위의 사나이가 이야기 하는 소리는 운학에게도 들려왔으나 무척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운학은 자세히 앞을 바라보니 바로 철필수사(鐵筆秀士) 정작(程綽)과 추운비(追雲狒) 나적우(羅廸宇)였다.
무림삼영(武林三英) 중의 신권금강(神拳金剛)이 운학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강호에 퍼지자 지난날 위풍이 당당했던 위명에는 그늘이 져 있었으니 운학은 그들이 분명히 자기에게 도전하리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될 수만 있다면 그들과의 싸움을 피하여 무서운 살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운학은 틈만 있으면 도망칠 곳을 찾으려 했다.
철필수사가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면서
『운형! 근래 무양하시오?』
뒤미처 추운비도 말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형! 객스러운 말은 집어치고 요점만 먼저 말합시다.』
운학은 두 사람의 말투가 대단히 호의적인 데에 의심이 갔다.
지난날을 생각한들 그들은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한편 이 우호적인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옳은지를 몰라서 그저 두 사람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운학은 천성이 말이 없는 사람이라 대인(對人) 관계에 있어서는 남에게 많은 오해도 받고 미움도 샀던 그였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비로소 운학은 하삼제(何三弟)가 있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있어 주었으면 이렇게 어설픈 자리를 얼마든지 메꾸어 줄 수가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무림이영(武林二英)은 강호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라 금시에 운학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 그가 시비를 걸지 않는 바에야 더 이상 그를 괴롭히고 싶지가 않았다.
또한 화산의 일전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오해가 풀렸었고 그들의 기풍과 기개가 운학의 그것에 상통되는 점이 있어 다정스럽게,
『사형령주가 도전장(挑戰狀)을 화산파의 노무사(老武士)의 쌍룡검(雙龍劍) 왕진비(王振飛)에게 보내어 결투의 시기가 임박한 모양인데 운형도 우리와 함께 구경이나 갑시다.』
사 개월 전의 운학이라면 가지 말라고 뜯어말려도 쫓아 갈 그였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렇게 무림의 중대사요, 사형령주를 눈이 빨개서 찾던 그가 호기심을 잊게끔 한 것이 과연 무엇이냐?
운학의 머리에는 지금도 사여명이 자기와 헤어지는 것을 애처롭게 흐느끼며 눈물까지 흘렸던 작별의 일막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운학은 심지어 하마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영원히 세상을 떠나 버리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또한 자기를 그렇게까지 못 견디게 애모(愛慕)하던 요원(姚畹)에게도 알리지 않고――
운학은 무림이영에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보고 있던 무림이영은 운학이 자기들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을 보자 천만 뜻밖이라는 것을 느끼고서는 나이 어린 추운비는 참지 못 하겠다는 듯이 채찍으로 허공을 내리치면서
『큰형, 갑시다. 저 분은 천하제일의 고수이시니 우리 말을 들으시겠소――』
운학은 비로소 그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마음이 괴로워 변명을 하려고 하자 두 사람은 채찍질을 하며 말을 앞으로 몰아 질풍과 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운학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자기의 심정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오해를 풀어줄 날이 올 것이라고 자위(自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위(自慰)를 위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 생각이다.
가령 얼마 뒤에라도 운학이 무림이영을 다시 만났다고 가정한다면, 어찌 그 때 나는 한 소녀와의 사랑 때문에 당신들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고 떳떳이 말할 수가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가령 운학이 이런 변명을 했을 때 천하 사람들이 전진문하의 자기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운학은 자신이 몹시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하여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몰아 정처 없는 여정을 재촉하였다.
무림이영은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운학은 말을 몰아 마을에 들었다.
앞길이 바쁘지 않았던 그는 이 마을에서 가장 작고 값이 싼 객잔을 찾아 하룻밤을 머물기로 하였다.
또한 노상에서라도 또 다시 무림이영을 만난다는 것이 쑥스러운 것 같아서 그들을 멀리 보내기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하룻밤 편히 묵고 싶었던 까닭에 아직도 해가 높았으나 객잔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운학은 괴롭고 외로운 하룻밤을 객잔에서 보냈다.
다음 날 아침 객잔을 나오는 운학의 모습은 몹시 피곤하여 보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수레를 찾아 말의 배에 띠를 조이면서 그 날의 여정(旅程)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객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사나이가 칼끝으로 땅바닥에다 칼 모양을 새기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나이의 수법은 바로 하삼제(何三弟)와 자기 사이의 구급신호로 정하여 둔 암호였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위기에 빠져 있을 하마(何摩)를 구하러 가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었으니 이것도 첫 사랑의 번뇌가 그로 하여금 의리 없는 사나이로 만들었던 것이나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 뒤에 드디어 그의 이지(理智)가 정감(情感)을 이기게 하니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그의 마음에 이지가 되살아나자 그는 번개같이 마차에 올라 칼끝을 향하여 마차를 질풍같이 몰기 시작하였다.
마차를 몰고 가는 도중 조그마한 돌다리를 건너다가, 돌다리 난간에 쌓인 눈 위에서 또 하나의 구급신호를 발견하고서는 하마가 무서운 천하 고수와 겨루면서 위기일발에 처하여 있을 것이라고 추측이 머리를 스치니, 지나간 날 자기의 철없는 생각이 하마에게 무한히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그의 마음은 차츰 초조하고 다급하여지기 시작하였다.
눈에 덮인 산길을 뛰는 말과 마차는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하면서 몇 번인가 뒷걸음질 치자, 운학은 더 참지 못하고 나는 듯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말을 풀어 잡고서는
『내가 마음에 없어 이 눈에 덮인 산속에서 너를 버리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사정이 급해 그러니 혼자 산을 내려가거라!』
혼자 중얼거리며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후려치니, 말은 미친 듯이 오던 길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이번에는 마차를 산골짜기 속으로 밀어 던지니 바퀴 하나가 허공을 날아 골짜기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바로 뒤에서 육중한 차체가 눈사태를 일으키며 골짜기 밑으로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굴러 떨어져 갔다.
그는 자기 몸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어지자, 온 몸에 경공을 운행시켜 한 마디 기합(氣合) 소리와 함께 몸을 솟구치니 주위에는 경천동지의 요란한 소리가 나고 눈보라가 공중을 뒤엎었다.
운학의 기합소리는 정통파의 정수(精髓)한 호흡이 깃들어 있어 수천 리 심산대택(深山大澤)을 놀라 깨우치게 하여 주었다.
산허리 수렴(樹林)을 지나니 몇 그루 상록수가 하늘에 치솟아 있는 바로 밑에서 눈을 방석 삼아 두 사람의 여도사(女道士)가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여도사는 운학의 기합소리며 경공술에 의한 몸의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으련만 못들은 척하고 바둑판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다.
운학은 가까이 가서 여도사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오른쪽에는 나이 먹어 보이는 꽤 늙은이었고 왼쪽에 앉은 여도사는 아주 젊어 보였다. 그런데 특히 이상한 것은 그들이 쓰고 있는 바둑판과 바둑알이 모두 강철로 만든 것이 놀라웠다.
그 때 나이 젊은 여도사가 바둑알을 들고 수를 생각하지 못하여 주저하고 있는 것을 본 노도사가 젊은 여도사를 노려보니 그녀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기(精氣)는 가히 사람으로 하여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볼 수 없게 하였다.
나이 젊은 여도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사숙(師叔), 누가 온 것 같아요!』
그러나 늙은 여도사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고 오직 냉혹(冷酷)한 태도로 인기척이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때 그의 사질(師姪)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바둑알을 바둑판에 놓으면서
『어멋!』
그러나 늙은 여도사는 바둑판은 쳐다보지도 않고 침착한 어조로,
『진아(眞兒)야! 무공을 더 연마해야 한다. 내일 아침――』
진아라고 불린 젊은 여도사는 그녀의 사숙의 엄한 꾸짖음을 듣고 매우 황공해 하였다.
그녀는 입을 열어
『사숙! 사숙께선――』
그러나 늙은 여도사는 그보다 먼저 사질 진아가 다가오는 인기척 때문에 뒷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눈치 채고서는
『뭐 관계할 것 없어.』
그러자 진아의 얼굴은 한 번 파래졌다가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진아는 땅에 무릎을 꿇어앉으면서
『사숙! 그 인기척은 이 길을 지나갈 따름인데 어찌 이상하게만 생각을 하십니까?』
늙은 여도사는 두 발을 쿵쿵 구르면서
『너는 저 인기척이 전번의 그 공동파의 나이 어린 놈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사숙, 노모께서는 그 청년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여 화가 나신 모양인데 사실 그 서생(書生)이 말버릇이 나빠서 사숙을 충격시켜 놓기는 하였습니다마는――』
진아의 이 말을 들은 늙은 여도사는 번뇌와 부끄러움이 노여움으로 변하였다.
손에 들고 있던 용두장(龍頭杖)으로 땅바닥을 한 번 치고서
『누가 너더러 우리 무당파를 그렇게 낮추어서 말하라더냐. 너희 사부 장문사형이 와도 나 역시 면목이 서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나이 많은 늙은 것이 애송이 같은 놈에게 모욕을 당하다니――』
진아는 이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번쩍 들면서
『사부께서 제자로 하여금 사숙을 모시고 산을 내려오게 한 바에야 백석사백(白石師伯)의 생사나 행방을 공동으로 찾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은 우리 무당파 단독의 일이 아니라, 무림 각파의 수십 년에 걸친 의문이니 반드시 각 대파가 힘을 합해서 처리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사숙! 우리가 기왕에 공동파와 원수를 맺었다 하더라도 꼭 지금 싸우셔야만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하물며 사숙께선 지금 천전교와 암계(暗契)를 맺고 있어 양쪽으로 불편하실 터인데――』
사리를 따져가며 조리 있게 하는 사제의 말에 늙은 여도사는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이 늙은 여도사는 천성이 까다롭고 성미가 괴벽스럽기로 유명하던 무당파(武當派) 장문(掌門) 백백도장(白栢道長)의 사매(師妹) 정석진인(靜石眞人)이었다.
사제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괴팍스러운 성격을 발작하려던 그녀는 억지로 참고
『너는 왜 나를 부축하여 여도관(女道觀)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느냐?』
진아는 급히 바둑알을 주워 정리하며 생각에 잠긴다.
――그 공동파의 젊은이가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아는 운학이 하마의 구급신호를 따라서 온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였고, 자기로 하여금 번민에 빠지게 한 공동파의 제자 하마가 아님을 알 까닭이 없었다.
바둑알을 깨끗이 정리한 진아는 일어서면서 손을 뻗쳐 소나무 한 가지를 꺾어 눈 속으로
『훽――』
하고 던졌다.
그는 늙은 여도사를 부축하여 숲을 지나 관(觀)으로 돌아가니 눈 위에는 한 송이 꽃과 같은 발자국이 찍혀 아름답기 이를 데가 없다.
젊은 여도사의 미모가 그의 발자국에 그대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이 때 운학은 넓은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그만 길을 잘못 들어 이곳에 이른 것이나, 불행이도 이곳에는 한 자나 넘게 눈이 쌓여 있었다.
하삼제의 흔적도 눈에 파묻혀 보일 까닭이 없었다.
운학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의 경지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눈 위에 꽂혀 있는 소나무 가지를 발견하고 그 가지를 빼어 들어보니 칼로 깎아낸 것이 틀림없었다.
나뭇가지의 굵기는 사람의 팔뚝만 하였으며, 잘려진 자리 위에는 시원치 않은 글씨가 무질서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글씨의 필적으로 하삼제의 글씨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였으나, 운학의 눈에 익어 보이는 글씨체임에 틀림없었다.
소나무 가지에는
『이(二)형, 늙은 여도파(女道婆)를 십분 경계하시오.』
운학은 비로소 그 글씨의 임자가 하마(何摩)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운학은 비로소 정신이 들은 사람 모양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노도파(老道婆)를 찾았으나 그림자는커녕 발자국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또한 하마가 지나간 것 같은 흔적도 없는 것을 보고서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리저리 궁리를 돌려보았으나 의문을 풀을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운학은 길가에서 한 그루 백년 묵은 고송을 발견하고서는 몸의 진기를 돋우어 나무 위로 가볍게 몸을 날렸다.
나무에 올라선 운학은 사방을 바라보니 서쪽에 서 있는 산허리에 희미하게 도관(道觀)이 서 있음을 발견하고서는 마음속에 기쁨을 참지 못하였다.
하마는 분명히 저 도관에 있을 것이며 그곳에서 심한 위기(危機)에 봉착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다시 몸을 나무 아래로 날려 번개같이 도관을 향하여 달려갔다.
달려가면서도 그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였다. 마음속으로 제발 하마가 그 노파도사와 소동을 벌려 놓지 않기를 바랬다.
또한 이번에 하삼제의 위기를 구해 주기만 하면 멀고먼 여정(旅程)에 올라서 세상일을 잊고 말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명년 봄으로 약속한 마교오웅과의 혈전(血戰)을 잊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혈전 때까지는 강호에서 소란을 떨고 싶은 생각이 전연 없었다.
그 까닭은――
첫째, 좀 더 정심(精深)한 무공을 연마하고 싶었고, 둘째, 청목도장이 새북(塞北)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지금 자기 머리에 도사리고 있는 번뇌를 털어놓고 의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운학 자신의 번뇌――
그것은 배고픔도 아니고 무림의 제일고수가 되겠다는 꿈도 물론 아니었다.
요화와 같은 요원의 끈질긴 짝사랑과 자기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아리따운 사여명에 대한 자기의 불같은 사랑이었다.
도관을 향하여 달려가는 그의 머리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문득 그는 자신을 모질게 힐책한다.
『딴 일을 생각하자!』
혼자 중얼거리고 그는 소나무 가지에 새겨졌던 필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정말 눈에 익은 글씨체였다.
갑자기 그의 머리에는 지난날 복파보에서 소란을 피우던 생각이 떠올랐다.
운학은 자기 품속에서 누렇게 색이 변한 두루마리 종이 뭉치를 꺼내었다.
그것은 운학이 처음으로 강호에 발을 들여 놓고 하마로 행세하여 군웅(群雄)들과 어울려 복파보에 몰려갔을 당시 복면의 한 사나이가 남몰래 자기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그 종이에는 복파보의 암호가 적혀 있었고 이것을 운학에게 전해 준 흑의괴인(黑衣怪人)이 바로 하마(何摩)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소나무 가지에 새겨진 절(切)자가 종이말이 속에 쓴 절(切)자와 그대로 닮아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운학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하마! 하삼제, 자넨 용하게 나를 속였네그려!』
그는 발의 경공을 배가(倍加)하면서 도관을 향하여 달려갔다.
이윽고 도간에 이른 운학은 육중한 대문 앞에 서서
『펑! 펑!』
하고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대문은 소리도 없이 스스로 열리고, 그때 도관 안을 들여다 본 운학은 눈이 부신 것을 느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응당 키가 육척 같고 턱에 수염이 시꺼멓게 난 험상궂은 사나이일 것이라 생각하던 운학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묘령(妙齡)의 미모의 여도사(女道士)였기 때문이었다.
운학의 눈에 비친 여도사의 모습은 너무나 요염하게 비쳤다.
무엇보다도 호수와 같이 맑은 눈동자가 운학을 바라보았을 때 처음에는 차가운 느낌을 받았으나 차츰 일찍이 어디선가 그를 만난 것 같은 친근함을 느끼게 하였다.
운학은 멀거니 정신을 잃고 그를 바라보고 서 있자, 그 여도사 역시 아무 말 없이 멀거니 운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만에야 안에서
『진아야, 그 나이 어린 아이냐?』
여도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지나던 나그네올시다.』
안에서 들려오는 늙은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들려온다.
『진아야! 나그네에게 말해라. 우리 도관에는 남자는 쉬어 갈 곳이 못 되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고 하여라.』
여도사는 이 말을 듣고서는 미안하다는 듯이 눈을 가볍게 돌리면서 온유하게
『손님, 가십시오. 정말 죄송하오이다.』
자세한 설명은 안에서 했으니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는 듯이 여도사의 말은 간단하였다.
운학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곳을 떠나려고 하였으나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말을 해야겠다고 느끼다가는 곧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이었다.
운학은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안하다는 듯이 그곳을 물러났다.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발길을 옮길 때마다 무엇인가 마음속에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았다.
그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는 끝내 발을 멈추고서는
――이 도관은 별로 다른 곳은 없으나, 아마도 하삼제가 이곳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생각하던 그는 몸을 돌이키고 죽림(竹林) 사이로 반쯤 보이는 지붕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 지붕 꼭대기에 뛰어 올랐다가 홀연히 도관 안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운학의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서는 두려움과 함께
――웬 놈이 청천백일하에 담을 넘어 여도관으로 들어간담! 혹시 강도가 아닐까?
그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운학은 바로 자기가 그 도관(道觀)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 같아서
――만약 강도가 그 여도사를 겁탈하러 도관에 잠입했다면 내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운학이 몸을 날려 도관의 대문 앞에 섰을 때 관내에서는 늙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아야! 나를 부축해 다오! 그 풋내기 도적이 얼마나 도행(道行)이 이루어졌는가 알아보아 주마.』
『사숙! 사숙께선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맡아서 처리하오리다!』
대답이 끝이 나자 거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까짓 비린내 나는 여도사가 대야(大爺)를 감히 상대하겠다니 믿어지지 않는걸!』
운학은 이 사나이의 능청맞은 소리를 듣고서는 문득 열화와 같은 의문이 솟아났다.
그는 온 몸의 진기를 돋구어 담을 뛰어 넘어 관내로 몸을 날렸다.
마침 관내의 대청마루에서는 나이가 칠순(七旬)이 넘어 보이는 여노도파가 젊은 여도사의 어깨를 짚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고 일어나고 있었다.
노도파는 안마당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대한을 노려본다.
『그날 저녁에 너는 안에 있었나?』
대한은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나는 그때 우리 백호법(白護法)이 당신의 공손혈(公孫穴)을 찌르는 것을 분명히 봤어 당신, 이런 걸 물어 뭘 하지! 설마 나하고 친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 노도파는 억지로 분기를 참으면서
『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너 혼자 또 왜 왔어?』
그 대한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저기 저 소녀도사(小女道士)에게 물으면 알 것이오. 나는 그녀와 오늘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소.』
젊은 소녀는 몹시 화가 치밀었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여
『퇘!』
하고 침을 뱉었다.
그러나 역시 여자의 몸이어서 그랬는지 욕은 하지를 않았다.
약이 오른 진아를 보자 대한은 점점 능청을 떨면서
『노도파! 당신은 우리를 흉악무도한 무리로 보지 말아요! 나는 정말 곱게 자란 사나이랍니다.』
『그래? 대청 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를 않는군. 좀 가까이 와 봐라!』
그 대한은 히죽거리면서 상이라도 타러 나가는 사람 모양 대청 앞으로 가자 노파는 슬그머니 온 몸에 공력을 운행시켜 대한의 머리 정수리를 향해 일 장을 쳐 내렸다.
노파는 비록 두 다리는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이었으나 그 일 장의 공력은 극히 심후(深厚)한 것이었다.
대한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급히 자신도 일 장을 쳐 내었다.
대청 위에 있는 노파는
『으악!』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 거꾸러지고 말았다.
대한은 껄껄거리고 웃으며
『어르신네 앞에 늙은 것이 주책없이 서투른 수작을 부리다니! 내 이 어여쁜 여도사만 아니었다면 그저 저 늙은 것을 황천으로 보내는 것인데, 예쁜 여도사의 체면을 봐서 목숨만은 살려 준거야, 하아……하아.』
대한은 젊은 여도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동정을 살피다가
『이리와, 너의 솜씨를 한 번 보자!』
말을 들은 여도사는 갑자기 땅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기도라도 하는 듯이 중얼거린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제 신세가 비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는 모두 잃었으나 한 분 오라버니가 세상에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또한 사부님께서는 제가 길상(吉相)이 아니라서 일생에 꼭 남자와 칼을 맞대고 싸움질을 면하기 어려우나 남과 싸우다가 불리하여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게 되는 때가 그 오라버니를 만날 수 있는 날이라 하셨습니다. 지금 나는 어찌할 수가 없어 칼을 뽑아 들게 되었습니다. 사부님! 저에게 자비를――』
말이 끝이 나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키니
『쨍――』
하는 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뒤흔들며 그의 손에는 긴 칼이 들려 있었다.
이때 갑자기
『휑!』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서쪽에서 들리며 뽀오얀 흙먼지가 앞마당을 뒤엎었다.
바로 서쪽의 담이 무너지면서 운학의 몸이 번개같이 대한의 앞에 와서 우뚝 서자, 호통을 친다.
『이놈! 천전교의 폐물이 감히!』
대한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넌 또 웬 놈이냐!』
『천전교의 네놈들은 한 놈 한 놈 모조리 꼬챙이로 꿰어 죽어야 마땅한 놈들이다!』
대한은 갑자기 칼을 휘둘러 운학에게 들어왔다.
운학은 그 자리에 선 채로 팔을 뻗히면서 대한의 팔뚝의 맥문(脈門)을 쳤다.
운학이 껄껄거리며 웃으니 대한이 잡고 있던 칼은
『덩그렁!』
하며 쇳소리를 내고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사나이는 그래도 굴복하지를 않고 이번에는 왼손을 들어 장풍을 일으켜 운학에게 쳐 들어오니 운학은 두 손을 번쩍 들어 그 장풍을 막아 놓고서는 대한을 노려보고 있으려니까 대청에 쓰러져 있던 노파가 일어나면서 소리를 지른다.
『그의 손에는 무서운 독침이 있어요. 절대로 그 독침을 맞아서는 안 돼요.』
노도파는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내력은 대단하였다. 노파의 목소리는 대단히 위력이 있어 관내 구석구석에서 메아리 쳐 나오고 대들보가 들먹이는 것 같았다.
운학은 허공을 바라보면서 장심(掌心)을 세차게 쏟아내면서 대한을 노려보고 있으니 갑자기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대한은
『으악!』
하며 비명을 지르기에 젊은 여도사가 그를 바라보니 대한의 오른팔이 동강이가 나서 마당에 곤두박혀 있었다.
그러나 운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한을 노려보면서
『너 목숨은 살려줄 것이니 빨리 돌아가서 너희들 교주에게 전해라! 전진파의 운학이 며칠 사이에 꼭 대결하러 가겠다고!』
대한은 전진파의 제자 운학(鄆鶴)이란 말을 듣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팔이 잘린 고통도 잊고 급히 담을 넘어 도망가 버렸다.
그 아름다운 젊은 여도사도 운학이란 말을 듣고 벼락을 맞은 사람 모양 쥐었던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희고 어여쁜 뺨에 갑자기 눈물이 쫙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을 하고
『사부님, 당신의 예언이 적중했습니다. 오라버님! 그립던 오라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