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말씀: 열왕기상 3:23-28】 개역개정
23 왕이 이르되 이 여자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 여자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24 또 이르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25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26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27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하매
28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말씀나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뻔히 거짓말 하는 것 같은 데,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으니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누구처럼 관심법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사기를 당하는 일도 없겠죠?
요즘 20대 청년들이 파산으로 내 몰린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지식도 부족하고 생활비는 부족하고 카드로 돌려막기 하다가 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고 그 마저도 부족하니 비싼 이자를 주고 사용하다가 결국은 파산하는 경우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돈 한 푼이 아쉬워서 어떻게든지 대출을 받아보려는 심리를 이용한 보이스 피싱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서 수많은 청년들이 개인회생절차를 밟게 되는데 20대 청년의 개인회생 비율이 전체의 개인회생의 40%가 넘는다고 합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으니 여기저기 의지하다가 이런 저런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사기는 절박한 사람들이 더 많이 당합니다. 다른 사람의 곤란한 형편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어떠한 인간미도 긍휼의 마음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일반 청년들도 힘든 사회이지만, 매년 2,500명 정도 발생하는 보호 종료 아동들에게 사회는 바람을 막아 줄 그 어떤 보호막도 없이 맨 몸으로 마주하는 한파의 연속입니다. 만 18세가 되어 시설에서 나와야 하는 보호 종료 아동의 60%가 첫해 기초수급자가 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2명 중 1명은 죽고 싶다고 응답합니다.
작년 9월 21일 광주 한 대학 기숙사에서 신입생 한 명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며칠 뒤 24일에는 또 한명이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 되었습니다. 이 두 학생의 공통점은 보호 종료 아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보호 종료 아동들은 경제 개념도 없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이용하여, 보호 종료 후 시설을 떠날 때 손에 쥐어지는 자립 정착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 받을 수 있는 장치는 전무하다 시피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취약 계층에 대한 정부차원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현재는 매우 미비한 상황입니다. 이들의 고충을 들으려 하지 않고, 듣는다 하더라도 공청회와 같은 1회적인 이벤트로 그치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정의는 사회 취약계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며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한 생명’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과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더욱 가까워 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회 취약계층이며 또한 경멸의 대상이었던 두 여인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16절에 보면 창녀 두 사람이 솔로몬 왕을 찾아옵니다. 이 두 여인은 사흘 간격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잠을 자다가 아이를 깔아뭉개서 그 날 밤에 죽었습니다.
죽은 아이의 엄마는 다른 여자가 잠이 든 사이에 살아 있는 아이를 가져다 자신의 품에 두고 죽은 아이를 다른 여자의 품에 두었습니다. 다른 여인이 잠에서 깨어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고 보니 아이는 죽어 있었고 자세히 보니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서 고소하였습니다.
또 다른 여인은 반론을 펴며 살아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이고 죽은 아이가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우겼습니다. 두 여인이지지 않고 서로 살아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왕 앞에서 다투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이 아이가 네 아이냐 내 아이냐를 두고 싸우는 두 창녀에게 율법의 조항을 근거로 판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출애굽 이후로 재판은 지도자, 장로들은 분쟁 당사자들의 주장을 듣고 이 문제를 해결에 도움이 되는 율법을 전달하는 식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왕정 시대에 와서는 왕이 각 성읍에 재판관들을 임명하여 백성의 송사를 판결하고, 어려운 판결은 왕 앞으로 나와서 판결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례를 고려할 때 솔로몬 왕 앞에까지 재판이 올라왔다는 것은 지방 재판관들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솔로몬 왕 앞에서 싸우고 있는 두 여인의 사회적 신분은 창녀입니다. 이들이 솔로몬 왕 앞에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은 솔로몬 왕이 사회 취약계층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차별 없이 재판을 진행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매우 어려운 사안입니다.
목격자가 없고 당사자 두 명과 말 못하는 젖먹이 어린아이 뿐입니다.
그리고 잠을 자는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둘만 있을 때 갓난아이에게 일어난 일로 서로 살아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니라고 말하지만 증명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유전자 검사를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젖먹이 아이라 두 사람 중에 누구를 더 닮았는지 판가름하기도 어렵습니다. 진실은 두 사람이 알고 있지만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솔로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솔로몬은 특단의 대책을 지시합니다.
솔로몬 왕은 먼저 칼을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여인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친모가 들었을 때 솔로몬의 이 명령은 너무나 잔인하고 상상도 할 수 없던 파격적인 것으로 마음이 철렁 내려 않는 청천벽력과 같은 판결입니다.
아이를 찾기 위해 고소한 여인은 살아 있는 아기를 되돌려 받기 위함이지 죽은 아이를 반으로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지금 왕 앞에 서기 까지 최소한 몇 번의 재판을 거쳤을 것이고 이전의 재판에서도 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다가 재판이 끝이 났고 재판을 통해 그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게 되니 친모는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이 절박하여 솔로몬 왕에게 소리칩니다. 제발, 임금님,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 고소했지만 이제는 그 권리를 포기하고 악한 여인에게 양육권이 넘어가더라도 아이를 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여인은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 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왕에게 아이가 죽더라도 공평하게 아이를 갈라 주라고 집행을 채근합니다. 이 가짜 친모는 남의 자식을 죽음으로 내몰려고 합니다. 자신의 친자는 실수로 죽였다지만 이제 남의 아들은 고의로 죽이려 듭니다.
이 여인에게 생명 존중과 긍휼의 마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솔로몬 왕이 내린 잔혹한 명령보다 더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렇게 모성애를 이용한 시험을 하였고 이 잔혹한 명령에 두 여인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즉시 멈추게 하고, 살아 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아이를 양보한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진짜 엄마라면 아이가 죽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죽더라도 아이를 살리려 할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바로 그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이러한 심리적인 요인까지 재판에 끌어들여 확고한 증거로 삼을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신앙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게 되는 모든 일에 적용됩니다.
솔로몬 왕이 두 여인에 대한 판결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창녀는 가장 비천한 사회계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었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해결해 줍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지혜로 이런 비천한 사람들의 일을 해야 하는가? 이보다 더 고상하고 중요한 일들에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두 여인 또한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에게 주신 백성들입니다.
솔로몬 왕의 지혜는 한 생명을 얻기 위해 활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지혜 또한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선용되어야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 왕이 판결하는 것을 듣고 왕을 두려워 하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솔로몬 왕을 두렵게 생각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힘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가 사람들에게 드러나 백성들이 솔로몬의 통치에 순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 사회에서 경멸의 대상이었던 창녀의 아이가 죽었다는 것, 살아남은 아이가 둘 중의 누구의 자녀인지 누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한 생명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생명은 똑같이 귀합니다.
불신자의 생명이나 우리들의 생명이나 하나님은 똑같이 중요하게 보십니다. 우리에게는 먼저 생명을 받은 자로서 책임이 뒤따릅니다.
불신자들을 우리 멋대로 판단하여 정죄하거나 그들을 우리들에게서 격리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에 귀를 기울여 주고, 우리들이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솔로몬 왕 앞에 두 여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들 또한 하나님 앞에는 비천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는 흉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우리의 질고를 보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거짓말을 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가식적으로 선한 척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본 모습은 낱낱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사회적 약자들이라고 해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기피하거나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찾으시는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오늘 솔로몬이 사회적으로 경멸과 지탄을 받는 두 여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을 보았습니다. 단지 솔로몬이 지혜로운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왕 앞에 나가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는 것과 사회적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차별 없이 공평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성도들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 세상에서 어떤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가? 의 기준으로 제한되거나 사회적 계층이 교회 안에 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서로 섬기고, 어려운 지체들이 있을 때 마치 내일처럼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지만 불신자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불신자들과 단절된 삶을 실아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도 냉정하게 살펴보면 거룩한 삶과 흉악하고 비천한 삶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십니다.
동일한 문제이지만 성도가 개입하는 순간 그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따라서 세상일과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새로운 왕이 세워진 이후 백성들은 솔로몬 왕에 의해 생명 존중과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생명 존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창녀의 고소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서로 친자라 우기는 상황에서도 극단적인 판결로 친모를 찾아 줄 수 있었습니다. 가짜 친모의 모습에서는 생명 존중과 하나님의 긍휼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품고, 주님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라면, 생명 존중과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다면 서두에 언급하였던 청년 파산 문제라든지, 보호 종료 아동들이 보호를 받으며 성인으로 온전히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본이 되어서 교회가 생명 존중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증언하는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주의 적인 성향이 갈수록 높아지고, 사회 계층별 갈등이 증가하는 시점에 생명 존중과 긍휼의 마음으로 낮을 곳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그리고 사랑을 이 땅에 충만하게 하는 성도들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 양】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C), 주님 말씀하시면(C),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G),
예수님이 말씀하시니(G), 주만 바라볼지라(G), 주 말씀 향하여(G),
찬송가: 19장 찬송하는 소리 있어// 449장 예수 따라 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