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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나라(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진리 벧후1:1-3절) ①보배로운 믿음 38 우리에게 너무 좋은 일들이 있을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잘 사는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느라고 바쁠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 엄청난 세상의 복을 받아 부(富)를 누리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미처럼 한평생 열심히 일 해서 조금씩, 조금씩. 부(富)를 쌓아가 나중에는 그 모든 부(富)를 가지고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한 순간의 행운으로 엄청난 부(富)를 손에 거머쥐게 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은 한평생 죽도록 일 해도 절대로 벌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행운을 잡는 방법이 주로 금광(金鑛)을 캐든지 아니면, 배(船)에 물건을 싣고 무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금광을 팠는데, 그 안에서 엄청난 노다지가 쏟아져 나왔다면, 그 사람은 한 순간에 필자를 고치고도 남는 부(富)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같이 잘 사는 세상에서는 이 세상 안에서도 얼마든지 행운을 잘만 잡으면,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해서 수십억의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래를 잘 불러 음반이 많이 팔려서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버는 사람도 있습니다.
<해리포터>라는 책을 쓴 조앤 롤링이라는 영국 여자는 <해리 포터>가 세계적으로 수백만 권이 팔리는 바람에 한 순간에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유명해지거나, 한꺼번에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진정으로 복(福)을 받은 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으로 복(福)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우리들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장차 불에 타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유명하고, 잘 살아도 이 세상 자체가 불에 타서 없어지면, 그 명성(名聲)이나, 부(富)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만 주어지는 행운을 놓치지 않고, 움켜쥐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행운일까? 그것은 돈을 많이 버는 행운도 아니고, 유명해지는 행운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행운은 멸망(滅亡)으로 가는 자신의 운명을 영원한 축복(祝福)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복음(福音)을 듣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運命)을 바꾸는 사람이 가장 복(福)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이 세상에서 유명하고, 돈을 많이 벌었다 해도 그것은 멸망(滅亡)할 운명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福)은 멸망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복(福)은 그 뒤에 진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부(富)나 명성(名聲)과는 비교되지 않는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부(富)와 존귀(尊貴)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는 주로 거짓 선생들의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악(惡)한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복 받은 것을 시기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물리적 핍박을 통해 우리의 축복을 빼앗으려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거짓된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축복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물리적 핍박보다 거짓된 가르침이 훨씬 더 위험한 이유는 거짓된 가르침이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전염성(傳染性)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닭들이 있는 양계장 안에 족제비가 한 마리 들어오면, 닭을 한두 마리 죽이지만, 조류 독감이 퍼지면, 수십만 마리의 닭들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악한 마귀는 거짓된 가르침을 퍼트릴 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도록 가짓말을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영지주의입니다.“영지주의”라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상인데,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영혼과 육체를 나누고, 영혼은 고상하지만, 육체는 추하고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육체를 벗어 버리는 것이 완전해지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靈智主義*Gnosticism)는 인간의 육체를 죄악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온 것을 믿지 않고, 육체로 부활한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열심히 결혼생활도 하고 직장 생활도 해야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윤리가 없고 믿음 생활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잘못된 엉터리 믿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에는 놀라운 신비(神祕)가 있고,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은혜와 체험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몸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는 이 부분을 올바로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 전서와 문체(文體)나 용어(用語)면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저자 문제에 논란이 많았던 서신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후서는 내용면에서 유다서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둘 중의 하나는 다른 것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로 유다서가 베드로 후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봅니다.
베드로 후서는 서두(序頭)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소개하고 있고, 특히 예수님이 높은 산에서 변화되신 것을 친히 목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글을 썼는데, 어떤 사람들이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렀다면서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Ⅰ.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 1:1절)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람의 진정한 복(福)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의 복(福)을 땅 속에 들어 있는 금(金)이나, 은(銀)이나, 석유(石油)같은 것을 파내어 부자(富者)가 되든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성공해 명성과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복(福)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진정한 복(福)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은 유한(有限)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멸망(滅亡)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 바그다드 시민들의 표정을 기자가 소개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그다드 사람들은 놀랍게도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전혀 전쟁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술집에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심지어는 축구 경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이 국민들을 세뇌(洗腦)시키기를 절대로 미국이 공격하지 못한다고 믿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라크는 석유가 아주 많은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사담 후세인을 믿고, 석유를 믿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이라크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나라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이라크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곧 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審判)하신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심판(審判)하시기 바로 직전까지도 자기가 갖고 있는 부(富)를 의지하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편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한번 심판하시면, 아무것도 남게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한 수치와 비참함과 저주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은 이 세상은 진정한 복에 대하여 1절)...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적대(敵對)관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영원한 저주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 적대(敵對)관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義)롭다 하시고, 영원한 저주의 심판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相續者)가 되어서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재산과 신분과 존귀를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진짜 복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모두 동일(同一)한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 복을 더 받는 사람이 있거나, 덜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여 믿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복에 똑같이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복(福)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복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굶어죽거나, 맞아죽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비상식량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큰 산(山)을 등산하는 사람들의 배낭 속에는 그들이 혹시 길을 잃었을 때, 먹을 수 있는 건빵이나, 초콜릿과 같은 비상식량이나, 구급약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상식량들은 조난당한 사람들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진정으로 그들을 살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상식량은 부족하더라도 구조 본부(本部)와 연락이 닿아서 그들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듣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의 처지가 곧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조난(遭難)을 당해서 방황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모두 멸망(滅亡)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상식량이 자기를 살려줄 줄 믿고, 절대로 마지막 영원한 멸망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진정한 복(福)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치명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적대(敵對)관계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말만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마음에 든다든지, 들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말만 듣고, 그대로 하기만 하면, 한 사람도 멸망당하지 않고, 모두 다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 중요한 일이며, 꼭 할 일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모래와 같은 이 세상의 복(福)을 가지고 만족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모래를 가지고 멋진 성(城)을 만들어도 파도가 한번 쓸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축복(祝福)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축복의 관(關)이 연결되게 됩니다.
진정한 복은 이 세상에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은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존귀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가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정도로 당당하려고 하면, 한평생 돈을 모아야 하고, 한평생 비굴하게 아부(阿附)해서 정치적 명성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순간에 천사보다 더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의 문제를 너무나 과소평가를 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든 부분이 아주 정교(精巧)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나 마음이 한번 고장에 나면, 이 세상의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만으로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세상의 지식(知識)이나, 돈이나, 명예(名譽)로 고장 난 자신의 영혼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보혈(寶血)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주입시킵니다. 그래서 한 순간에 존귀함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慾心)은 인간에게서 믿음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믿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의심하니까 결국 정신마저 황폐하게 되어서 정신병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모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을 누가 책임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가치가 있는 일을 하려고 하면,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하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도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고, 오히려 남을 해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선(善)한 일을 하는데,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곧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사랑과 기쁨을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축복(祝福)입니다.
Ⅱ.하나님을 아는 지식 2절)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운명(運命)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하나님을 아는 것”과“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하나님에 대하여 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知識的)으로 또 관적(客觀的)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진정으로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俳優)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그의 많은 사진들을 모으고, 그에 대한 신문기사나, 취미나, 가족 관계를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우(俳優)는 그 팬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 대하여 아는 것이지,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이 곧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일 뿐만 아니라, 적대(敵對)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나를 아시고, 나와 하나님이 한 가족이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2절)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은 우리의 손을 잡아 하나님 집 안으로 데리고 가셔서 하나님께 소개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생각의 틀로는 인간의 육체는 더럽고 추한데,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서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 인간의 몸입니다.
물론 인간의 몸이라고 할 때, 예술가들은 육체의 아름다움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조각이나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이라고 할 때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모두 다 포함하는 것이지, 육체의 아름다움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몸을 고장 난 바이올린처럼 제대로 사용 할 줄 몰랐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 비싼 육체를 가지고 술을 마시거나, 성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거나, 남을 미워해서 욕하는 것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비싼 바이올린의 가치를 모르고, 그것으로 사람을 때리고 해치는데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고장 난 인간의 육체를 치료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들어오게 해서 고장 난 생각을 고치고, 고장이 나서 상처 난 감정을 치료하고, 죄에 길들여진 우리의 행동을 고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여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곧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기적(奇績)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안에 보물(寶物)이 있는 줄 모르고, 엉뚱하게 다른데서 보물(寶物)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찾았던 보물(寶物)은 돈이고, 명성(名聲)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보물(寶物)은 나의 영혼(靈魂)이요, 육체(肉體)입니다. 우리 안에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살아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려 들리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인간을 만드셨을 때부터 정하신 영원한 법칙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조물주(造物主)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교만(驕慢)하게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영원히 멸망(滅亡)을 받아야 할 죄(罪)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천사인 사탄(루시퍼)도 저주하셔서 영원히 지옥(地獄)의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생(永生)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줄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해야 할 최선의 일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산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 생각이나 감정이나 몸이 제대로 사용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에너지 공급이 되지 않아서 녹슨 채로 세워두었던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야만 진정한 믿는 자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과정은 잘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캄캄한 방에 갑자기 환하게 불이 들어오듯,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정도는 다 다르지만 그때 강하게 느끼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엄청나게 교만(驕慢)하게 살아온 죄인(罪人)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몸부림을 치면서 회개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청교도들은 이 체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런 체험을“성령의 세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회개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온힘을 다하여“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영(靈)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진짜 내 아버지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이 세상의 풀리지 않던 모든 의문(疑問)들이 다 풀리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방황하면서 살아왔는데,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진짜 복(福)은 모두 하나님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Ⅲ.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이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모든 것들이 다 부패(腐敗)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전에 공항을 가기 위하여 차를 타고 한강 변을 달라다 보면, 서울에 있는 모든 쓰레기들을 모아 놓은“난지도”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분량의 쓰레기가 쌓여서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에 가장 아름다운 공원(公園)으로 변했습니다. 가정주부들은 음식을 아끼려고 냉장고에 넣었다가 상해서 버린 경험들이 여러 차례 있을 것입니다. 공휴일이 되어 가족들과 함께 유원지 같은 곳에 가보면,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오물들의 썩는 악취(惡臭)때문에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먹다 남은 음식만 썩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같은 것도 썩습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은 썩어 들어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몸도 낡아집니다. 우리의 정신(精神)도 썩습니다. 우리의 감정(感情)도 너무나 빨리 부패(腐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급격하게 썩어 들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썩는 냄새도 나지 않고, 모양도 낡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멋있게 변하고, 더 화려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 썩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부패(腐敗)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사회의 정신적 부패(腐敗)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썩으면 썩을수록 더욱더 화려하게 자신의 외모(外貌)를 꾸미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사회가 썩으면 썩을수록 더욱 화려하고, 더욱 찬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회가 썩었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다”고 칭송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부패(腐敗)는 급속한 전염성(傳染性)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사람의 마음이 부패(腐敗)하면, 다른 사람들도 질세라 그렇게 하기 때문에 전 사회적 현상이 되어 그 사회 전체가 멸망당하기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이나 사회가 부패하는 속도가 너무나도 빠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썩어 들어가는데 있어서 두려움을 모릅니다. 참으로 과감하고 용기 있게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썩은 것들입니다.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려야 하는데,오히려 혀를 놀릴 때마다 자기가 잘났다며 썩은 냄새가 나오니까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로 주둥이를 틀어 막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개인이나 사회가 썩었기 때문에 전쟁(戰爭)이 오고, 심판(審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썩지 않도록 신선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3절)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은“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입니다. 생명(生命)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죽은 것의 반대 존비입니다. 엡2:1절)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무엇이든지 생명(生命)이 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완견(愛玩犬)을 좋아하는 사람도 개가 살아서 재롱을 부릴 때, 귀엽고, 예뿐 것이지, 죽으면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이 죽으면 딱딱해지고, 표정의 변화가 없고,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악취(惡臭)가 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福音)을 듣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자기가 죽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롬7:24절)...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죽어서 온 몸에 썩은 악취(惡臭)를 풍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 모든 썩은 고름과 더러운 오물들을 깨끗이 닦아 가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더러운 고름을 빨아가는 진공청소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딱딱하게 죽어서 악취만 내는 시체가 아니라, 체온이 있고, 움직이기도 하는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지만, 워낙 우리의 육체(肉體)가 죄에 길들여져 있어서 순식간에 죄(罪)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고, 지속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썩는 것을 막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철학(哲學)이나, 도덕(道德)은 썩은 것을 막거나, 치우지 못하고 신문지로 덮어 놓는 일밖에 하지 못합니다. 즉 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구석으로 밀어놓는 것이지, 진정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안에 이미 죄(罪)를 거부하는 본능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짓기는 하지만, 절대로 죄가 옛날 같이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죄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죄가 기쁨이 되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에 죄가 들어오면 음식을 잘못 먹으면 체하듯 죄에 체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은 죄를 토(吐)해 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마음에 평화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고백하라고 하지 않는데도 자기 스스로가 죄를 자백(自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곧 썩는 것을 막는데 있습니다. 즉 소금은 못생겼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짠 맛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죄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것만 해도 세상을 엄청 돕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의인 열 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썩은 도시도 살릴 수”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입니다. 성전(聖殿)에서는 죄(罪)를 씻는 물이 소방호스처럼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더러운 죄와 오물도 다 씻어서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이 사회가 뿌리까지 썩었기 때문입니다. 썩은 사회는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개혁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고, 썩은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해보았지만, 자기들도 썩었기 때문에 똑같은 문제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성전(聖殿)의 소방호수와 같은 물입니다. 이것으로 온 세상 구석구석을 씻어서 썩은 악취(惡臭)를 없앨 때,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광(榮光)은 썩은 영광(榮光)이요, 화려한 명성(名聲)은 악취(惡臭)가 나는 명성(名聲)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한 유명한 사람들의 사생활이 시체가 썩은 악취를 내고 있는데도, 그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생명(生命)과 경건(敬虔)에 속한 모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해도 썩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썩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썩은 냄새를 풍겨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께 간절하게 기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썩은 것들을 씻어 내려서 다시 한 번 이 나라가 살아날 수 있도록 함께 간구합시다.아-멘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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