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다음날 아들 내외와 손녀딸은 제 자리로 돌아갔다. 달력은 여전히 붉은 숫자가 이어지고 단군 이래 가장 긴 휴가가 아직 남아있다. “여보 우리 한번 어디 떠나볼까.” 그래도 막상 집을 나설려 하니 귀성, 귀경으로 도로가 막히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래서 하루 뒷날 2박3일 남도 지방으로 떠났다.
먼저 구례 화엄사 쪽으로 ‘네비’를 고정한다. 진영휴게소 까지 가는데 평소보다 두 배나 걸린다. 가는 도중 인근 도시로 가는 갈림길은 정체가 계속된다. 그러다 도로는 뻥 뚫린다. 늦은 점심을 먹겠다고 화엄사 입구 식당엘 간다. 미처 예상치 못한 사람이 몰려와 식자재가 동이 나서 군데군데 문이 닫혀있다. 메뉴는 ‘산채 비빕밥’인데 나물은 없다. 음식 값을 그대로 두고 주인은 “손님이 이해를 하시어이.”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 된장국에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희한한 점심을 먹고 일어선다.
여러 번 다녀간 화엄사는 늘 동이 트기 전이나 해 질 무렵이다. 희미한 지리산의 큰 자락이 턱 버티어 서있고 넓은 절 마당은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절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놀이터가 있는 유원지같이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그러다 대웅전 오른쪽 아래에 ‘각황전’ 현판이 눈에 띈다. 무거운 기와지붕 끝을 받치고 있는 허연 나무가 휘어진 채 서있다. 네 군데 기둥 중에 오른쪽 앞 기둥이 더 많이 굽어있다. 처음에는 반듯한 나무가 인고의 세월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숙소를 예약한 남원 땅으로 넘어 간다.
호텔 창문 너머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과 광한루 담벼락이 빤히 보인다. 광한루는 이조 초기 유배로 이 곳에 왔던 황희 정승이 지었다. 불빛에 비친 인공호수와 누각은 성춘향과 이몽룡이 놀던 곳이다. 내일 아침 다시 볼 양으로 인근 식당에서 걸쭉한 ‘남원 추어탕’으로 피로를 달랜다. 그러나 남원은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 민간인, 의병 1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죽었다. 일본은 우리가 사는 구석구석 가는 곳마다 분탕질을 한 기록을 남긴다.
애당초 길 떠날 때 누렇게 익은 황금벌판을 실컷 보고 점차 사라지는 정겨운 시골마을을 눈에 담고 오는 것이다. 국도로 접어들어 순창고추장 마을에 들어선다. 온 동네가 고추장 큰 장독을 길가 가게에 늘어놓고 장 팔기에 여념이 없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고추장을 들고 방송국 출현 광고를 찍은 간판이 줄을 섰다. 고추장을 담그는 할머니가 대우 받는 동방예의지국에 온 듯하다. 고추장 몇 개를 사들고 나오는데 젊은 여주인은 여기서 가까운 강천산 군립공원과 ‘정읍 구절초 축제’를 권한다.
권하는 장사 손해 없다. 강천산 황토길 따라 산 중턱까지 올랐다 내려온다. 언제 한번 ‘티비’에서 본 산 허리를 잇은 제법 긴 현수교를 지나면서 출렁거려본다. 우리네 산은 어딜 가나 고즈넉하고 조용하기 그지없다. 전라도 유명한 내장산이 인근에 있다.
집을 떠나 서쪽으로 오다가 이제 전라북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언제부터 인지 가는 곳마다 축제를 한다. 산에 자생적으로 피는 야생화도 축제의 이름을 달고 사람을 끌어드린다. 그러나 정읍엔 오기로 한 것이 잘했다. 보잘 것 없는 꽃이 온 산을 하얗게 물이 들어 가을 하늘을 더 높게 만든다. 도시 가로수 밑에 조끔 자리를 잡은 구절초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전주 한옥마을 보고 싶어도 하루 밤 묵을 숙소가 없다.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여수 ‘항일암’까지 가기로 하고 순천에다 숙소를 잡는다. 오래전부터 전라도는 넓은 곡창지역과 바닷가의 풍부한 해산물로 음식 맛이 좋기로 알려져 있다. 숙소 인근에 있는 맛 집의 식탁에는 해산물과 육류가 가득 올라온다. 이쪽 경상도는 횟 몇 점과 몇 가지 안 되는 밑반찬으로 먹는데 전라도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산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튿날 아침, 가을의 순천만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갯벌 쪽으로 간다. 갈대가 있는 곳은 서순천 쪽이라 낙조가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려 자주 다녀안다. 인근 전망대에서 아침 해를 등지고 몇 장의 사진을 남기고 여수 돌산으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