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성수 못하는 것과 제사때 절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셔서 평양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예수를 영접하신 아버지에 의해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다. 주일학교에서 분반공부를 하던 일, 크리스마스 때 인형을 안고 예수님 탄생 연극을 하던 일, 성경 암송대회 등 아직도 기억 이 생생하다. 두루두루 친구들을 많이 사귀 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내 친구들은 모두 교회 친구들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은 뒤로는 주일학교 교사로, 성가대로 섬기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 때까지 한 번도 교회 밖의 세상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성년이 되어 결혼한 내 남 편은 고등학교 동창이며 친구로 지냈다가 가까이 있는 대학에 같이 다니면서 8년 동안을 교제한 사람이었다. 교제하면서 취미나 습관, 인간성 같은 건 궁금해야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 당시엔 왜 그걸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이상한 건 나 뿐만 아니라 친정 부모님이나 시부모님도 신앙문제를 크게 문제 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당시 짐작조차 못한 채 결혼을 한 나는 어마 어마한 현실과 부딪치게 되었다. 무남독녀로 단촐히 살던 내가 시조부모님, 시부모님, 시동생 하나, 시누이가 둘 있는 집에 들어가 아홉 식구가 되었다. 갑자기 많은 식구들과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장남으로만 알았던 남편이 종가 집의 종손이 라는 것이었다. 일 년이면 제사를 열 번 정도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불교와 유교에다 샤머니즘까지 가미된 복합적인 신앙을 갖고 계셨다. 매일 새벽마다 나무로 깎은 조그만 부처 앞에 촛불을 켜시고 절을 하셨으며 설날에도 떡국을 끓이기 전에 시루에 떡을 해서 고사를 먼저 지내는 분이셨 다. 이사, 여행 또는 집을 고칠 때라든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변화가 있을 때는 점쟁이한테 가서 날짜를 받아 오셨다. 그리고 수시로 부적도 받아다가 수첩에 넣어주시고 베개 속에 까지 넣으시곤 했다.
지켜야 할 일 또한 엄청나게 많았다. 장례식에 갔다 오면 문 밖에서 어떤 행동을 먼저 하고 나서 현관에 들어올 때도 어느 쪽 발을 먼저 들여 놓아야 한다든지, 장례식에 가서도 무슨 띠인 사람은 관을 보면 안 된다든지 이사하는 날은 내가 밥솥을 먼저 들여놓지 않았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다. 결혼하고 나자 어머니는 주일날마다 집안에 행사를 만들어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물론이고 먼 친척 분의 육순 잔치, 아기 돌잔치, 개업식 등 빠지지 않고 꼭 나를 데리고 다녔다.
몇 년 후 분가를 했지만 토요일이면 시댁에 가서 자고 주일 날 저녁이나 되어야 돌아왔기 때문에 더 더욱 교회에 나갈 수 없었다. 어쩌다 시댁에 가지 않는 날은 주일 날 아침에 전화를 하셔서 내가 집에 있나 확인하곤 하셨다. 그리고 부녀회에 아무개 여사는 교회에 빠져서 집도 아이들도 돌보지 않는 며 느리를 내 쫓았다는 이야기 또 누구는 불교를 믿다가 교회를 다녔는데 사업도 망하고 자식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 것들은 그냥 듣고 흘릴 수 있었는데 제일 고통스러웠던 건 주일을 지키지 못했던 것과 제사를 지낼 때 절을 시키시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집에서는 여자들은 절을 안 한다는데 어머니는 나한테 일부러 절을 시키신 것이었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불렀어도, 안하겠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우상 앞에 절을 했다는 사실에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고 죄 의식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10여 년 동안 이런 생활을 계속하면서 그제서야 나는 교회를 떠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깨닫게 되었다. 교회를 다닐 수 없어도 마음 속 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말씀을 보면서 기도 생활하면 되겠지 하던 내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 이끄시는 대로 덫에 매 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걸 알게 되면서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안일하게 예수를 믿어왔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모든 걸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이 생겼고 생활은 궁핍 하지는 않았으나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그 10년 동안 나는 영적으로 점점 피폐해져 갔다. 내 마음은 기쁨이 없이 텅 비어지고 그 빈자리에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찼다. 직장 동료들과 트러블도 잦았고 모든 일에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아직 나를 잊지 않으셨을꺼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 저를 용서 하시고 다시금 저를 회복 시켜주옵소서. 이 집안과 남편을 구원하는 일에 저를 도구로 써 주옵소서. 저 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고, 제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옵소서”
결혼한 지 10여 년이 지난 93년 여름, 나는 외국에 장기간 출장 나가 있는 남편에게 전화로 통고를 했다. “나는 이번 주일부터 교회를 나갈 겁니다. 어머니가 하시는 다른 모든 일에는 최선을 다해서 순종할 테니까 내가 교회 다니는 거 묵인해 주고 어머니가 모르시게 도와주시오” 이렇게 선언을 하고는 시어머니 몰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전화의 수화기를 모두 내려놓고 가기도 했고 교회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에 오시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되돌아 가서 시장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007 작전을 하듯 아슬아슬하게 다녔지만 교회 다니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교회에 가서 정말 내 온 맘을 다해 예배를 드렸다. 비록 주일날 한 번 밖에 나갈 수 없었지만 교회에서는 나의 사정을 들으시고 목사님과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해주었고 공동체 안에서 다정한 교제를 통해 위로도 받았다, 나를 위한 뜨거운 중보기도로 인해 점차 회복되어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 권사님들이 친정엄마를 통해 내 사정을 아시고 얼마 전부터 기도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나의 가장 큰 기도제목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남편의 영혼 구원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이 기도를 들어주셨다.
한국에 두면 더 늦어질까 싶으셨든지 우리 가족을 캐나다를 거쳐 2000년에는 미국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지혜를 주셨다. 착하고 성실하지만 고집스런 면이 있던 남편인지라 나는 한가지 한가지 요구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에는 교회에 데려다주고 끝날 때 다시 데리러 왔었는데 얼마간 지난 후에 나는 “왔다 갔다 하려면 개스비도 많이 드는데 그냥 들어와 앉아만 있으라고, 내가 무슨 말씀을 듣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고 나름대로 애교도 부 리고 콧소리도 섞어가며 살살 달랬다.
남편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교회에 들어가서 앉는 순간, 아니 그보다 몇 년 전 외국 출장가 있을 때 내가 교회에 다니겠다는 말에 OK 한 그 순간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대로 믿음이 좋은 친구와 성도님들을 통해서 차츰 남편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셨다. 드디어 결혼한 지 18년 만에 남편은 세례를 받았다. 그 후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하신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알게 하셨고, 얼마 후에는 다니던 회사가 파산하는 큰 시련도 또한 주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셨다. 기도하게 하신 후에는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고 시련 속에는 반드시 축복이 숨어 있다는 진리도 또한 깨닫게 하셨다.
남편이 성실한 자기의 성격대로 주일을 잘 지키면서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잘 했지만 마음 한구석 항상 아쉬운 것이 있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 우리 딱 한 달만 해 보자. 굶어 죽을지 어떻게 될지 딱 한 번만 해보자니까”하며 아무리 아양을 떨어도 반응이 없었다.
그러던 2002년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고 난 그 다음 달에 남편은 나에게 정말 기쁜 선물을 주었다. 퇴근해 들어온 남편이 “우리 회사는 이미 파산을 했으니까 지금부터 버는 돈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내게 주시는 거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회사 파산은 안중에도 없고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말만 귀에 들렸다. 불신자가 보면 참 철도 없고 딱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기쁘기만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금전적으로 가장 어 렵고 불안한 때에 하나님께 바치고자 결단 한 남편이 고마울 뿐이었다. 1년 넘게 끌던 재판이 끝나고 난 뒤 회사는 다시 정상화 되었으며 우리 가족의 생활은 물론 회사도 부족함 없이 하나님께서는 늘 채워 주셨다.
십일조도 드리고 성경공부와 여러가지 훈련도 받으며 남편은 장로로 임직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아직 한 가지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일이다. 며느리야 어찌됐 건 맏아들이 예수쟁이인 것을 아시게 됐을 때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우리 부 부는 짐작할 수가 없어서 선뜻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서울로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드디어 어머님께 복음을 전한 것이다. 오십이 넘은 아들이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밤새도록 우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당장 그 자리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마음 밭을 부드럽게 해 놓으셨는지 “늙으면 다 자식 따라 간다는데 나도 차차 예수 믿게 되겠지”라고 답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대하면서 중보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 가를 알았다.
언젠가 <예수에 뿅간 우리 마누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 내 남편이야말로 예수에 뿅가서 새벽부터 밤중까지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이렇게 남편을 구원해 주시고 변화시키시는 일에 다른 사람 아닌 저를 도구로 써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요즘 변화된 남편을 보며 기적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교회를 다니지 못했던 10여 년 동안도 나는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앙의 공동체를 떠난 혼자만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기쁨이 없으며 사랑이 메말라 버린 삶인지 충분히 경험했고, 그 때에는 어머니가 밉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마음마저도 하나님께서 고쳐 주셔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머니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이제 나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던 지난 십여 년의 삶에서 벗어나 참된 삶을 찾은 것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의 지체로서 주님이 명령하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순종하며 살 기로 다짐한다.
기사입력: 2015/04/30 [04:42] 최종편집: ⓒ 크리스찬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