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번 미국 대선 실시 전후로 하여 세계 각국 언론은 마치 자국의 수반을 선출하는 듯 속보 경쟁에 총력을 경주하였는바, 아마 그것은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대통령으로 칭하여도 부족할 만큼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44대 미국 대통령의 등극을 앞두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국내외 매스컴이 토해낸 부시 일대기 파노라마를 입체 해부한다. <편집자 주>
▽ 초방빅의 대접전 끝 극적인 승리 쟁취
▲제44대 미국 대선은 보수와 진보를 극명하게 양분한데다 지리적 심지어 인구학적까지 분열 양상을 노출시켰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2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부시 대통령은 3일 오전까지 개표 결과 전국 득표수에서 5천860만여표(51%)를 얻어 5천500만여표(48%)를 얻은 존 케리 후보를 제쳤으며 마지막까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오하이오주의 선거인단 20명을 더해 최소 27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도 "부시 대통령이 오하이오에서 '통계적으로 뒤집을 수 없는 확정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고 선언. AP통신 등에 따르면 개표가 97% 진행된 오하이오주에서 부시 대통령은 14만5천 표차로 케리 후보를 앞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부시는 금번 대선에서 핵심 전략지인 빅3주 가운데 플로리다와 오하이오 두 곳에서 승리, 재선을 확정지은 것이다. 폭스 TV와 NBC 방송은 부시가 이겼다고 보도하는 등 미국 대부분 언론은 부시 승리를 기정 사실화했다.
존 에드워즈 민주당 부통령 후보 등 민주당 측은 백악관의 승리 선언에도 '마지막 한 표까지 지켜볼 것'이라며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존 케리 민주당 후보가 3일 오전 11시(한국시간 4일 새벽 1시)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부시 승리에 동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케리와 통화에서 부시 대통령은 "당신은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가치 있는 상대였다"며 케리 후보의 선전을 위로했다.
사실 부시 대통령은 2000년 당시 플로리다주 재개표를 놓고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논란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지난 4년 간 법원이 만들어준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2% 포인트 차로 누름으로써, 4년전 국민 투표에서 패배하고도 선거인단 선거에서 법원의 판결로 당선된 데 따른 정통성 시비를 논란에 휘말렸던 부담도 깨끗이 일소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다 '전시 대통령' 위상과 함께 2일 대선과 함께 동시 실시된 상·하원 선거에서조차 공화당이 모두 승리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어 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통령 반열에 속하게 됐다.
6년 임기의 상원의원 100명중 34명을 선출하는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은 현재 51석보다 2석을 더 확보하게 됐다. 특히 데이비드 비터 공화당 후보는 루이지애나에서 남북전쟁 재건시대이후 공화당원으로선 처음으로 상원의석을 확보하여 의미를 더하고 있다.
▲로라 여사와 두 딸과 함께 승리를 확신하며 백악관에 돌아온 부시 대통령.
435명 전원을 교체하는 하원선거에서도 공화당 후보들은 현재 228석을 확보하고 다른 5곳에서 승세를 굳히고 있어 결국 233석을 차지할 것이 확실시된다. 공화당이 실제 과반인 233석을 최종 확보하게 되면 10여년 동안 계속하여 하원을 장악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1933년 1월 12년만에 하원 장악권을 민주당에 빼앗긴 이래 처음이다.
더욱이 선거 후유증으로 크게 우려된 것으로 4년전인 2000년 대선 이후 보완책으로 도입된 잠정투표 반영 여부가 대선 직후 초미의 관심사로 급부상 했었는바, 케리가 전격 승복 조치를 취함으로써 이 효력 또한 일거에 소멸된 만큼 부시 제2기 출범에 앞서 큰 복병들은 거의 제거된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잠정투표란 유권자 명부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투표하러 나왔을 때 이들에게 임시로 투표용지를 나눠준 뒤 이들의 유권자 신분이 확인된 뒤 개표에 포함되도록 이들의 투표용지만 따로 보관·개표하도록 한 제도다.
미 전역에서 수십만의 잠정투표가 행해질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데다 잠정투표 개표의 집계 시한마저 각 주마다 다르고 투표자들이 자신의 거주지 투표소에서 투표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도 주마다 서로 달라 잠정투표를 둘러싼 법적 분쟁이 줄을 이을 것으로 전망되었었다. 다. 더욱이 이번 선거의 최대 접전주의 하나인 오하이오주의 잠정투표 개표는 선거 후 11일이 지난 후 실시하기에 혼돈 심화가 극히 우려되고 있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 전쟁중 적진에서 장수를 교체할 수 없어
부시 대통령의 재선은 미국인들의 테러 불안감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예시한다 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 전쟁 중인 대통령이고, 전쟁 중에는 장수를 교체하지 말아야 한다는 안보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지난 4년간 16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등 조지 부시 대통령의 경제성적은 내내 부진했다. 특히 부시 재임시 20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어 경제에 대한 불만이 미국 내 50개 주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오하이오에서조차 부시 대통령이 앞선 것은 이번 선거의 쟁점이 경제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미국 유권자들은 이라크 전쟁, 테러와의 전쟁 등에 대해 부시를 사실상 재신임한 것이다. 대선 경쟁 막판에 등장한 오사마 빈 라덴 비디오테이프조차 호재로 작용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따라서 북한을 위시하여 이란 등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으로 지목한 국가들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고 이것이 다시 안보불안을 부추기는 등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을 것이다.
▲금의환향인가. 부시 대통령의 승리를 열렬히 기뻐하는 백악관 직원들
과연 부시의 재선은 한반도 정세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는 대목이다. 부시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평화적이고 외교적으로 해결하되 6자회담을 통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해온 만큼, 북핵 문제는 6자회담을 통한 해결이라는 기존의 구도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부시 대통령은 10월 1일 1차 토론에서 북핵 문제의 더 나은 해결을 위해 여러 나라가 관여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재차 밝혔다. 이에 교착 국면의 6자회담 조속 정상화가우리 정부가 신속히 풀어야할 과제라 할 수 있다.
퇴임 후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한 김대중 전대통령은 2일 "남북관계는 우리가 주인인 만큼 우리가 중심이 돼야 한다"며 "미국에 대해 할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하는 등 미국 설득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며 부시 재선 이후 능동적 대미외교를 적극 주문하고 나섰다.
김 전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개성공단, 철도연결, 도로연결 등 남북간에 많은 일을 했지만 아직 불안한 이유는 북미관계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한반도 문제는 남북, 북미관계가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또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긴밀한 동맹관계, 자주적인 남북문제 해결 등 이 두 가지 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반미는 절대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 그는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대국도 미국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며 "이건 사대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익을 위해 긴요하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한반도전문가인 니콜라스 에버스타트는 한반도 전략 상황 논문에서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팀이 '매파 포용론'과 '정권교체론'의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매파 포용론은 실제는 엄격한 상호주의 적용과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제재(채찍)와 북한과의 적극적 외교 교류(당근)를 통해 북한을 순화시키자는 주장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권교체론 북한 정권의 불안한 행동과 위험한 목표가 지대하기 때문에 외교적 노력을 통해서 개선할 여지가 없고, 결국 정권 자체를 바꾸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주장이다.
불가불 부시 행정부는 당분간 북한에 대해 '당근 철회와 채찍 적용'이라는 접근방식에 입각하여 북한의 대응 여하에 따라 단계적으로 압박 수준을 높여 나가는 전략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시 대통령 출생지는 1946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번
클린턴 행정부에서 북핵 문제를 전담하였던 앤서니 레이크와 로버트 갈루치에 의하면 1994년 6월 북핵 위기시 미국이 선택할 수 있었던 방안과 현재 부시 행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네 가지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첫째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기 위해 북한과 협상하는 것, 둘째 북한의 새로운 핵무기 상황을 기본적으로 수용해 한국과 일본은 물론 국제적인 非핵확산 노력에 대한 피해를 감수하는 것, 셋째 협상을 거부한 채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 제재를 가하고 핵 프로그램을 봉쇄하기 위해 유엔으로 가는 것, 넷째 확인된 핵시설에 대한 군사공격 가능성 등이다.
그러나 현실적 여건으로 볼 때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될 상황은 더욱 희박해지고 있어 한반도 긴장 국면이 더욱 가파르게 전개될 우려를 절대 배제하지 어렵게 되었다.
▽ 부시 대통령 선조는 영국 월리엄왕 후손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부자(父子) 대통령 중 재선에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전통을 무너뜨렸다. 실제 부자 대통령으로는 부시 가문 외에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1797∼1801)와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1825∼1829)가 있었으나 재선에 성공한 사례는 전무하다.
재선에 성공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가문은 미국에서 케네디가(家)와 쌍벽을 이루며 유럽의 왕가에 버금가는 미국 내 대표적인 명문가.
제41대 대통령을 역임한 부친 조지 부시 전(前) 대통령, 조부 되는 프레스콧 부시는 코네티컷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동생인 젭 부시는 플로리다 주지사다. 부시 대통령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 째 미국 명문 예일대 동문.
부시의 증조부 새뮤얼 부시는 철강산업에서 재산을 축적했고 아들 프레스 콧을 세인트루이스 출신의 월가 거물인 조지 허버트 워커의 딸 도로시와 결혼시켜 명문 일가를 이룬다. 부시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는 모두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기반을 쌓은 후 정계로 진출하는데 외가의 도움이 상당했다.
2000년 영국의 권위 있는 '버크 족보명감'(Burke's Peerage)에 부시 가문이 왕가 혈손이라는 기록이 담겨있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관심을 끌었다. 1826년 창간된 이 명감에는 부시 대통령 가문이 영국왕 헨리 3세와 헨리 7세 및 찰스 2세의 직계손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복자 윌리엄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Bush)와 바바라 부시 사이에서 1946년 1946년 7월 6일 코네티컷주 뉴 헤이븐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프리스콧 부시가 상원의원을 지낸 동부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부시가 석유사업을 하는 텍사스주에서 성장했다.
▲1994년 텍사스 주지사에 입성후 연속 재선
부시의 여동생인 로빈은 네 살 되던 1953년 백혈병으로 죽었고, 이때 일곱 살이던 부시에게 부모는 동생의 죽음을 한동안 알리지 않았다. 부시 가족으로서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다.
現 플로리다 주지사인 부시의 첫째 남동생 젭 부시는 로빈이 사망하던 해에 태어났고, 2년 후에는 둘째 남동생 니일이, 3년 후에는 셋째 남동생 마빈이 태어났다. 1959년 부시 집안은 휴스턴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 해에 부시의 여동생 도로시가 태어났다.
▽ 텍사스 주지사 연임 여세몰아 대권가도 노려
부시의 성장 배경지역은 아버지가 석유사업을 하던 텍사스주 미들랜드이다. 아버지의 출신교인 매사추세츠주의 명문 필립앤더버 학교를 나온 후 예일대학교에 진학하였다. 1968년 졸업 후에는 텍사스주로 돌아가, 텍사스주 방위공군 F-102 전투기 조종사(1968∼73년)로 복무하였다.
중위 계급으로 제대한 후 로스쿨 시험에는 낙방하였지만 1975년에는 하버드대학교에서 MBA(경영관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술과 연애로 젊은 세월을 보내는 등 방황기를 거쳐 40세부터 놀라운 사업수완을 보이기 시작했다.
30대 후반의 부시를 묘사하는 단어는 온통 술 냄새 진동하는 것뿐이다. 본인도 이 부분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족, 친구, 동료들조차 부시의 한때 음주벽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이다.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 문턱을 넘지만 않았을 뿐이지, 병원 문고리를 잡을 뻔했다는 것이다. 이 때까지 아무도 그가 전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미들랜드로 돌아간 부시는 석유와 가스 탐색을 주 업무로 하는 '부시 탐색회사'를 설립하였다. 사업이 한창 바쁘게 돌아가던 중 연방의회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무려 44년 의정 경력이라는 당시 최장수 하원이던 민주당 '조지 마헌' 의원의 예상치 못했던 정계 은퇴 선언이 있은 지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부시는 그의 빈자리를 노리고 출마를 선언한다.
그야말로 느닷없는 기습 선언이었다. 빈자리를 노리는 공화당의 정치 지망생들이 줄을 서 있던 판국이었다. 1977년 7월 제19선거구 출마를 굳히고 넉 달 뒤 미 중부출신의 로라 웰치와 결혼해 본격적인 유세에 나섰다.
그러나 부시의 정치입문 시도는 또 다른 전국 규모의 전투, 즉 198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조지 부시-로널드 레이건 간 경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당시 레이건은 공화당 제19지구 하원의원 경선에서 20년 이상 토박이인 짐 리스 전(前) 오디사 시장을 밀었다.
부시는 곡절 끝에 리스를 꺾고 12월 켄트 핸스(Kent Hance) 주 상원의원(민주)과 격돌했으나 결과는 패배. 핸스 민주당 후보는 당시 53%의 득표로 아버지 조지 부시가 기금모금에 동원시킨 당시 윌리엄 포드 모터스 부회장 겸 포드社 사장, 보위 쿤 전 미국 프로야구(MLB) 커미셔너,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 등을 업고 막강한 자금력으로 TV 선거공세를 퍼붓던 부시를 보기 좋게 낙아웃 시켰다.
▲부시의 우상이자 조언자인 부친 조지 부시 前 대통령
그가 다시 사업에 복귀했을 무렵인 1980년대 초반 석유 가격 하락으로 부시 '탐색회사'는 대위기에 직면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배럴당 37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1986년 상반기에 들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더니 부시의 마흔 살 생일이던 1986년 7월6일에 유가는 배럴당 무려 9달러로 떨어졌다. 직원들 봉급은 모두 깎인 상태였고, 회사는 300만 달러의 은행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언제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러나 부시의 인생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1986년 40세 생일파티 다음날 전격적 금주를 선언한 그는 적자 회사를 거대 석유업체 하켄에 팔아치웠다. 부시는 기민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회사를 스펙트럼사와 합병한 후 회사에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에 성공한 것이다.
1986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전을 치르던 아버지의 참모로, 또 연설 초안자로 대통령 선거전에 관여하였다. 그는 이내 아버지의 가장 충실하고 유능한 조언자가 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바로 부시는 댈러스로 가서 동업자와 함께 4,600만 달러에 프로야구단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을 매입하였다.
1994년 텍사스 주지사가 되기 전까지 5년간 부시는 성공한 프로야구 사업가로서 면모를 발휘했고, 백만장자 소리를 듣게 된다. 공식 직함은 텍사스 레인저의 경영 파트너였다. 부시 는 텍사스 레인저스 프로야구단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인기가 급상승한 여세를 몰아 1994년 텍사스 주지사에 출마하여 1994년 민주당 주지사였던 앤 리처드(Ann W. Richards)와 접전을 치른 끝에 35만표차로 누르고 승리하였다.
부시는 민주당 의원이 우세했던 주의회와도 원활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97년 텍사스주 세법을 재조정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함으로써 공화당은 물론 진보주의자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그의 법안은 의회에서 부결되었으며, 이것이 그에게 하나의 시련이었다. 그러나 1998년 11월에 치른 주지사 선거에서 65%의 득표율로 다시 승리함으로써 텍사스주 최초의 재선 주지사가 되었다.
부시가 주지사에 재선되자 공화당은 일찌감치 차기 대선 후보로 점찍었다. 1999년 6월 부시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공식 선언한 가운데 2000년 3월 소위 '슈퍼 화요일'의 승리를 계기로 공화당의 지명을 획득하였다. 드디어 200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앨 고어를 누르고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당선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로라와 결혼한 것은 내 일생의 최대 행운”
부시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면 아버지 행로를 전적으로 답습했음을 알 수 있다. 고등학교(매사추세츠 주의 필립스 앤도우버 아카데미)와 대학교(예일), 대학교의 클럽 활동(해골단원)마저 똑같다. 파일럿으로 군 복무를 한 것도, 텍사스에서 석유 회사를 운영한 것도, 하원의원으로 출마했던 것도 동일하다. 아버지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 부시의 그림자 내조 '로라 여사'
대학 3학년 때 집에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고 예일 기숙사로 돌아온 부시는 난데없이 약혼을 발표한다. 약혼녀는 휴스턴의 캐서린 울프만이라는 여학생이었고, 이듬해 여름에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혼은 연기되었고 결국 울프만과는 결혼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울프만은 부시와는 좋은 분위기에서 헤어졌다고 말했으나 누가 둘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 로라(58) 여사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이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난잡한 생활을 전전하던 청년 부시를 건실한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대통령에 오르게 한 장본인이다. "남편이 내 생활을 흥미롭게 하고, 난 남편의 성격을 통제한다"는 그녀의 말은 두 사람의 관계를 웅변하는 듯 하다.
부시 대통령은 77년에 부인 로라 부시와 결혼했다. 그는 "로라와 결혼한 것은 내 일생의 최대 행운"이라며 부인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거듭 강조했다. 1946년 텍사스주 미들랜드에서 태어난 텍사스 토박이인 그녀는 깔끔한 옷차림과 늘 웃음 짓는 세련된 매너로 미국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오고 있다.
로라 여사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와 시어머니 바바라 부시가 보여 준 전통적 여성상에 힐러리 클린턴의 현대적 여성상을 함께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명문 남부감리교대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하고 텍사스주립대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1968년부터 초등학교 교사와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77년 사서로 일할 때 우연히 도서관에 들른 부시를 만나 3개월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주지사 부인 시절 로라 여사가 힘을 쏟은 분야는 교육문제. 어린이 독서교육에 큰 관심을 지닌 그녀는 전공을 살려 취학전 아동의 독서를 지원하는 법안을 주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문맹자를 위한 교육을 주도해 남편 못지 않은 정치력을 가졌다는 평을 들어왔다. 시어머니와 어머니의 이름을 딴 '바바라'와 '제인' 쌍둥이 딸이 있다.
▽ '새술 새부대에' 부시 제2기 내각 포트폴리오
부시 대통령은 행정부 주요 인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이끌기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내각에 어떤 인물이 포진하느냐에 따라 부시 정부의 정책방향은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두 딸과 아내 로라 여사와 함께 단란한 모습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이라크전쟁 등 미국의 강경 노선을 주도한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재등용 여부가 관심사. 럼즈펠드 장관의 후임으로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이 유력하게 거론. 네오콘의 대표격인 월포위츠 부장관이 장관으로 승진한다면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은 더욱 강경한 노선을 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존 스노 재무장관의 경우 선거결과에 관계없이 물러날 것이라는 게 지배적 전망. 스노 장관은 2002년 취임한 후 강력한 리더십이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재무장관 후보로는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인 스티븐 프리드먼이 가장 유력하다. 프리드먼 위원장은 90년대 초 골드만삭스를 이끌었던 월가 경영자 출신이다.
이밖에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 후임으로는 흑인인 래리 톰슨 전 차관이 거론되고 있고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은 유임되거나 재무장관 또는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오는 2006년 1월 임기가 끝나는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후임으로는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와 글렌 허바드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로버트 죌릭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교체도 기정사실화. 후임자로는 그랜트 알도나스 상무부 국제무역 담당 차관이 거론되고 있다.
▽ 미국사회 극명하게 가른 2004 대선
이번 미국 대선에서 의미심장한 변수들 중 두 요소만을 든다면 기록적인 투표율과 천문학적 소요 경비이다. 그만큼 지지층이 극도로 양분되어 사활을 걸다시피 한 피말리는 대접전이었음을 생생학게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NBC 방송은 투표자가 1억1천750만∼1억2천100만명으로 58∼60%의 투표율을 기록해 지난 1968년 투표율 60.84% 이래 최고 수준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1억500만명의 투표로 51.3%의 투표율을 보였던 4년전보다 1천250만∼1천600만명이나 증가한 수치. 선거 당일 미국 전역의 투표소들에서 유권자들이 이례적으로 길게 줄을 늘어선 모습들이 도처에서 목격됐다.
다음으로 미국에서 선거자금을 감시하는 단체인 CRP는 이번 선거에 39억달러 이상의 자금이 투입되었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에 투입된 자금은 2000년 선거 당시의 30억달러에 비해 무려 30% 가량 늘어난 것. 이번 선거전에서 개인 기부금은 전체 39억달러 중 25억달러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퍼스트 레이디 로라 여사
이는 2000년 선거 당시의 15억달러에 비해 무려 10억달러가 늘어난 것이다. 부시 대통령과 케리 후보간 선거전에만 12억달러가 사용됐다. 미국 대선에서 10억달러 이상의 선거자금이 투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민주국가 선거에서 제1의 의무는 균열된 여론을 봉합하고 국론의 일치를 구현하는 것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미국 대선 결과는 정반대일 것 같다. 여론조사기관인 조그비 인터네셔널의 존 조그비 대표가 지적하였듯 미국 유권자들은 산술적으로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이념적, 정신적, 심지어 인구학적'까지 분열된 양상을 노정시켰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에서 드러난 미국사회는 철저하게 양분되었다. 이라크전쟁, 테러리즘 격퇴, 일자리 창출, 사회복지·감세 등의 이슈를 둘러싸고 전통적 공화당 강세지역과 민주당 강세지역에서 배수진을 치면서 한치 양보도 없이 결사항전 대백병전을 벌였다.
이제 대장정 미 대선 레이스가 마감되면서 케리는 승복을 선언했고 연이어 부시는 승리를 선포했다. "축복은 의무와 함께 온다. 우리는 지금 우리 국가를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 우리는 공통의 대의를 찾아야 하며 분노나 소요 없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케리 승복 연설) "우리 나라는 하나이며 우리의 헌법과 우리를 한데 묶는 미래도 하나다. 우리가 함께 단결할 때 미국의 위대함에 한계는 없다."(부시 승리 선언 연설)
그러나 이들 수사법대로 美 국내외 정세가 순풍을 탈지는 극히 미지수라 하겠다. 미국 지도 위에 그려진 공화(빨간색)·민주(파란색)에다 접전지역 표식을 보면 마치 19세기 후반 남북전쟁 당시의 지도를 다시 펼쳐놓은 것 같다는 통렬한 지적은 제44대 미국 대통령에게 혹독하게 부여된 대과업이라 할 것이다.
◇ 조지 부시(Bush, George Walker) 프로필
직업 - 2004년 現 미국 제43대 대통령 출생 - 1946년 7월 6일 코네티컷주 뉴헤이번 가족 - 아내 로라(58세), 쌍둥이 딸 제나와 바바라 학력 - 예일대 역사전공(1968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석사(1975년) 경력 - 하원의원 출마 낙선(1978년) 조지 부시 부통령·대통령 고문(1987∼1992년). 텍사스州지사 역임(1994년부터 연임) 사업- 석유 가스탐사회사 설립(1975∼86년) 텍사스 레인저스 공동소유주(1989∼1994년) 취미- 낚시, 컨트리 뮤직, 인물전과 미스터리 읽기, 달리기, 역기
DJ가 부시를 오판한 것이 아니라 남북정상회담때 일어난 모든 일을 당시 참여한 실무자 중에서 미국측에 그대로 보고한 스파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DJ가 부시랑 만났을때 DJ의 보따리 속을 다 알고있는 부시에게 DJ가 휘둘릴 수 밖에 없었지요. 만약 그 스파이가 없었다면 부시가 안달이 나서 DJ에게 끌려왔을 겁니다.
첫댓글 역시... 지도자는 그혈통과 가문이 틀리내요...이 세상을 움직이는 인물은 아무나 하는게 아닙다..절대 잡종들이 세상을 못 움직이죠... 가문과 혈통...
외부에서와 달리 그나라 사람들은 부시를 서부텍사스 목장주 정도의 친근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군요.
하일 부시~
한때 부시를 원숭이라고 비하하곤 했죠. DJ가 부시를 엄청 오판하였는데요 알려진것 처럼 부시가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고 두되회전도 비상하다고 합니다.
IQ가 아무리 좋으면 뭐하냐...! 먼저 인간이 돼? 되? 야지...........!
DJ가 부시를 오판한 것이 아니라 남북정상회담때 일어난 모든 일을 당시 참여한 실무자 중에서 미국측에 그대로 보고한 스파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DJ가 부시랑 만났을때 DJ의 보따리 속을 다 알고있는 부시에게 DJ가 휘둘릴 수 밖에 없었지요. 만약 그 스파이가 없었다면 부시가 안달이 나서 DJ에게 끌려왔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