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상포럼의 꽃
명상 세미나 2부에 이어서 3부를 게재 합니다.
모두 깨달음의 나무에 예쁜 꽃이 활짝 피기를 기원 합니다.
* * *
깨달음의 대토론, 선승과 초기불교 명상세미나 2부
[ 대한민국 명상포럼]
'고, 행복, 내려놓음, 텅빔 공'
대한민국 명상포럼의 꽃 명상 세미나 2부 '깨달음, 그리고 깨달음으로 가는 길'
발제ㅣ전현수 박사(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진행ㅣ각산 스님(한국명상총협회 회장)
패널 | 선법 스님(전국선원수좌회 의장)
정과스님(수좌회 선승),
백성호(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전현수박사 : 지금 말씀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요.
백성호기자 : (말을 이어도 되나요?) 우리가 수행의 길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길이라고 할 때 (우리가 부산을 찍는 순간은) 이 방식(전박사님 방식)을 통해서는 오지 않아요. 이 방식이 서울에서 대전, 서울에서 김천 이 정도까지 가는데는 굉장한 힘을 주고 집중력을 키우고, 관찰력을 키우고, 궁리하는 힘을 키우는 방식은 될 수 있어요 충분히. 그렇지만 결정적인 깨달음의 순간에는 이 방식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올 수가 없어요.
깨달음의 순간은 언제 오냐하면 괴로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잖아요, '나는 괴로움은 피하고 자유로움만 취하고 싶어' 이것은 언제까지 해야돼요? 이것은 죽을 때까지 해야돼요. 왜? 내가 무슨 일을 가지고 살아있는한 괴로움은 끝없이 오니까. 대승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아요.
대승의 깨달음은 괴로움이 있고 자유로움이 있잖아요? 대승은 괴로움의 정체도 뚫어보고 자유로움의 정체도 뚫어보는 거예요. 괴로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뚫어봤더니 애하고 애하고 정체가 똑같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왜? 애는 괴로움이라는 색이고, 애는 자유로움이라는 색이거든요. 겉보기와는 달리 정체를 뚫어봤더니 똑같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육조단경에서 '번뇌가 보리'라고 하는 거예요. 괴로움이 자유로움이다 하는 거예요.
'내가 좋게 생각을 바꿔서 그렇게 생각해'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생각의 정체를 뚫어서 봤더니, 둘 다 똑같다는 거예요. 그것을 '공하다'라고 표현할 뿐인 거예요. 그 정체는 똑같아요. 그 때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그것을 깨달을 때 진정한 깨달음이 오는 것이지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은 오지 않아요.
각산스님 : 예. 거기까지 말씀하시고 전박사님..
전현수박사 : 제가 볼 때는요, 새로운 종교에요, 새롭게 보는 거예요. 지금 말씀하시는 것은 부처님이 보는 방식이 아니예요.
각산스님 : 왜 그런것인지 설명하여 주십시오.
전현수박사 : 왜 그런가하면 제가 볼 때 지금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고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우리가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낄 때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인과의 법칙이 일어나지요. (백기자님은) 그런 것보다는 이것은 이거야 하고 뭘 보는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납득될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이 되어야 돼요.
각산스님 : 이와관련하여 두 스님께서는 여쭤보실 것이 없으십니까?
정과스님 : 어느 쪽에서 보는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 저는 양쪽이 다 맞는 말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택한 쪽은.. 그냥 보는 것. 물론 이것이 남방불교에서도 핵심이지요. 정견을 갖춰서 제대로 봐야지 제대로 보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정견이 무엇인지, 내가 과연 정견을 갖추고 있는지 그런것은 좀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보아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불편함, 괴로움일 수 있겠지만,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데, 백기자님 말씀대로 본래 괴로움은 없지요, 놓아버리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것 보라는 것입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서 그것을 보라는 거지요. 실제 우리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구분해 놓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괴롭게 보아서 괴로운 것이지 그 대상 자체는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거든요. 그것이 저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믿고있습니다. 전박사님 말씀과 백기자님 말씀이 전혀 어긋나거나 충돌이 되지 않는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각산스님 : '남방', '북방' 이라는 명칭을 붙였을 뿐 같은 불교입니다. 전통에 따라서 이렇게 보는 구나 하고 해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다르다, 그럴 수 없다 이것은 좀 그렇구요, 지금 우리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정리를 좀 하고자 합니다.
다시 요점정리하면, 깨달음의 정의가 없으면 초기불교같은 경우는 사성제, 삼법인으로 정리되었다고 봅니다. 우리 대승에서 말하는 확철대오도 아까 사성제 팔정도에 입각한다고 동의하였습니다.
정과스님 : 깨달음에 대해서 간략하게 쉬운 비유를 제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각산스님 : 말씀하신다니 기분좋습니다. 하십시오.(대중 웃음)
정과스님 : 우리가 다 꿈을 꾸잖아요? 꿈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우리가 그 꿈에 있는 동안은 그것을 실제로 인식하잖아요? 누군가를 만나서 좋기도 하고 또 불편한 상황에 빠지기도 하고요. 막 애써 도망갔는데 도망가지지 않아서 진땀이 났는데 깨보니 아무일 없었던 그런 것.
적어도 우리는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은 깨고나서 알잖아요? 꿈에 있는 동안은 우리에게 꿈은 정말로 현실이예요. 그래서 베개가 젖을 정도로 울기도 하고요.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앞에 실제 펼쳐진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인식하는 분명한 이것이 꿈과 같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꿈이 아니고 꿈과 같다. 거기에서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라고 비유하겠습니다.
각산스님 : 다시한번 동의를 구하겠습니다. 깨침은 사성제와 삼법인입니까? 아닙니까?
전체패널 : 예. 동의합니다.
각산스님 : 그럼, 마음에 관하여 설명하여 주십시오.
전현수박사 : 마음은 마음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인과의 법칙상 있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그럼 마음이 없어질 때는 무엇입니까?
전현수박사 : 마음은 순간 순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각산스님 : 예. 그래서 그러한 것을 언어로 다르게 표현하자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전현수박사 : 예?
각산스님 : 이 마음은 조건이 되면 일어나고 조건이 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잖습니까?
전현수박사 : 예. 그렇죠.
각산스님 : 그것을 대승, 선불교에 와서는 (마음이라는 의식은 볼수는 없지만) 줄어들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고(무한하여 현상 개념은 붙을수 없기에) 생겨난 바도 없고 소멸된 바도 없다. '부증불감(不增不減)'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언어를 씁니다.
전현수박사 :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각산스님 : 예. 그렇습니까? 그럼 다시 말씀 드려보죠. 연기(緣起)는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전현수박사 : 예. 그렇습니다.
각산스님 : 대승불교 특히 선불교에 와가지고 '연기'를 '공(空)'으로 표현합니다. 범어로는 Śunya, 빠알리어로는 Suñña.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건되면 발현하기 때문에. 있다라고 하지만 조건이 되면 없어진다. 있다 없다로 보지말고 깨친 눈으로 공(空)이란 언어로 사용하니까 한번 참조하십시오.
전현수박사 : 예. 참조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질문하나 해도될까요? '참나'에 대해서 여기계신 스님들과 기자님 한 말씀하여 주실 수 있습니까?
각산스님 : 예. 좋습니다. 우선 우리가 받아들이는데 기본 가닥을 쳐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공부입니까 마음공부가 아닙니까?
전현수박사 : 마음공부입니다.
각산스님 : 예. 이것을 '바와나(bhavana, 마음계발)' 수행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음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를 선(禪)에서는 '마음이 부처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상·고· 무아'인데 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먼저 설명하고 계속 진행도록 하겠습니다.
* 상락아정(常樂我淨) : 열반에 갖추어져 있는 네 가지 특성,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常),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낙(樂), 진아(眞我)의 경지로서 집착을 떠나 자유 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아(我),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청정의 정(淨)을 말한다.
전현수박사 : 저는 그 말에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각산스님 : 예. 그러면 방금 언급하신 '참나' 부분에 관하여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상·고·무아'를 안 다음에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전현수박사 : 그 다음은 아까 언급한 염오, 이욕, 해탈로 가는 것이지요.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요.
각산스님 : 예. 그것을 우리 전통에서는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 합니다. 이를 '참나'와 관련하여 세 분 중에 말씀하여 주십시오.
정과스님 : 참나에 대하여 들어가기전에, 아까 각산스님이 우리마음은 불생불멸이라고 하셨을 때 전박사님께서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나요?
전현수박사 : 마음은 인과법칙에 따라서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사라지고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아까 어떤 마음을 보고 어떤 수행을 하셨기에 그런 표현을 쓰는지 제가 정말 궁금합니다.
정과스님 : 저의 체험으로 볼 때, 우리가 여기서부터 벗어나야 해요. 이 굴레에 갇혀있으면 (이런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토론일 수 있고, 견해의 차이나 논쟁일 수 있는데, 논쟁은 끝이 없어요. 어디서 벗어나야 되냐면, 있다 없다 유무자체가 우리들이 지어낸 관념이예요. 거기서부터 자유로워됩니다.
실제 제가 체험한 것과 정박사님께서 체험한 것, 또 선법스님, 각산스님, 백기자님의 체험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있다 없다가 들러 붙을 수 없는 그런 인식의 상태가 있잖아요? 전박사님, 있다 없다는 구별자체가 가능하지 않는 어떤 영역이 있잖아요?
정과스님
전현수박사 : 부처님이 5비구에게 너희들이 관찰해 보라고 하셨던 '무상 고 무아' 이 말속에 마음도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이제 '참나'에 대해서 말하여 주십시오.
정과스님 : 나도 없고(무아), 참거짓도 없어요.
각산스님 : 예. 나도 없고 참거짓도 없다는 참나의 정의였고, 백기자님, 참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성호기자 : 제가 보기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정말 살아서 숨쉬는 토론이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께 당부드리자면, 전박사님은 초기불교입장에서 말씀하시고 저희들은 상대적으로 대승불교 입장에서 얘기를 하는데요. 누가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가령 제가 어떤 얘기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대승불교 전체가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라고 바로 직결짓지는 마시라는 점입니다.
각산스님 : 그렇지요.
백성호기자 : 전박사님이 초기불교 이야기를 하신다고 하더라도 초기불교 전체가 이렇다라고 단정짓지는 마시라는 거예요. 참나는 아까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하셨잖아요? 태어나는 것이 왜 고통인가? 태어나면서 아주 갓난아이는 잘 모르지만, 자라면서 나 중심으로 살게 되잖아요?
왜냐하면 나한테는 몸이 있고 생각과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뿐아니라 맛보고 느끼고 온갖 감각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있구나' 하고 자기도 모르게 인정하게 된다는 말이예요.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살아가요? 나를 위해 살아가요.
내가 잘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좋은 것은 선이고, 나한테 안좋은 것은 악이고, 이러면서 살아간단 말이예요. 그런데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이 내 안에 나라는 것이 형성되느냐하면, 나는 이러했으면 좋겠어 저랬으면 좋겠어 하는 이런저런 기둥들이 생겨요. 나를 떠받드는 기둥들이.
그 기둥들에는 내가 살아온 삶의 기억속에서 마련된 것도 있고 지금 생각으로 인한 것들 일 수 있는데, 나를 떠받치는 기둥들이 많이 있어요. 사실은 고집의 기둥인데, 그 기둥들이 딱 뭉쳐서 만들어진 것이 나라는 에고란 말이예요.
백성호 기자
근데 내가 '우리 애는 반드시 서울대 가야돼.'라는 것이 내게는 큰 기둥이예요, 그런데 아이는 서울대 못갔어요, 그런데 내가 이 기둥을 안무너뜨리면 어떻게 되어요? 아이하고 나하고 계속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괴로운 거예요. 그런데 내가 돌아보았더니 아 애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 정도까지밖에 안되고 또 자기가 좋아하는 취향은 다른 것이고, 아이를 완전히 이해를 하게 되었어요.
돌아보았더니 '내가 세운 기둥이 잘못 됐구나'라고 내가 받아들이면 그 기둥이 무너지죠? 그 기둥을 세우고 있을 때 마음과 그 기둥이 무너진 뒤의 마음은 다르지요? 그 기둥이 무너진 뒤의 마음은 더 넓고 더 포용적이고 그 안에 내 아이가 들어와서 살 수 있는 마음이지요.
그 기둥을 세우고 있을 때 마음은 내 아이가 들어와 살 기 힘든 마음이고요. 이런 식으로 나를 떠받드는 기둥들을 하나씩 무너뜨려가는 것이 수행이예요.
그런데 수행을 계속하다보면 마지막으로 부딛히는 것이 있단 말입니다. 내가 절대 죽었다 깨어나도 무너뜨릴 수 없는 기둥이 있단 말이예요. 그것이 무슨 기둥 이어요? (...) '나는 있다'는 기둥이어요. 나라는 에고가 실재하고, 존재하고, 내가 있다라는 '유아'라는 기둥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무어라 하셨지요? 무아라 그러셨잖아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답안지여요. 왜냐하면 무너진 자리에서 얘기하시는 것니까요. 나는 무너뜨리고 싶지만 무너지지 않는 자리에서 보고 있는 것이구요.
나는 '유아'라는 것을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놓치 못하겠는데, 부처님은 무아라는 답안지를 내놓으신 거예요. 수행을 하여 유아라는 것이 무너져야 하는데, 무너지는 방식이 애(유아)를 죽이고 내려놓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유아라 생각했던 이 생각자체가 어마어마한 착각이었구나. 애가 원래부처 무아였구나 라는 것을 깨치는 순간에 그 기둥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무너졌어요. 아까 우리 아이 서울대 갔으면 좋겠어 하는 기둥이 무너지기전의 마음과 무너진 후의 마음이 다른 것 처럼, 유아라는 것이 무너지고 난 뒤에 마음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아가 무너질 때 그 마음이 '참나'가 되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전박사님 견해 말씀해주십시오.
전현수박사 : 일단은 좀 용어 사용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초기불교에서 무아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인데, 백성호기자님은 내가 없는 것을 무아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유아와 무아는 용어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들어보면 무언가 많이 다릅니다.
각산스님 : 예. 선법스님 간단하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선법스님 : 참 어렵습니다.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에 비중을 많이 두시는 분은 당연히 그와 같은 질문이 나옵니다. 제가 아는 모스님의 경우도 진아? 참나가 있어? 말도 안돼. 어떻게 무아인데 참나가 있나? 이것은 힌두이즘 사상이다 그렇게 비판을 합니다.
그것은 백번 이해를 합니다만 대승불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승불교에는 언뜻 위험해보이는 단어들이 많아요. 번뇌가 보리다? 생사가 둘이 아니다? 이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태어나서 듣고 보고 인지한 사고로는 뜬구름잡는 말처럼 보입니다.
저는 그 부분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봅니다. 대승에서는 우리가 본래 부처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표현을 한것이지 연기법상으로 보았을 때 '본래'라는 단어가 어떻게 성립합니까? 조건에 의해서 작용만 있을 뿐이지 어찌 번뇌가 따로 있고, 보리가 따로 있고, 청정함이 따로 있고 진아가 따로 있습니까?
대승불교 수행은 긍정으로 표현을 합니다. 참나가 실체가 있어서 진아라는 것이 아니고. 소소영령(昭昭靈靈, 마음이 맑디 맑게 깨어 있어 신령스러운) 한 놈이 있다 그렇게도 표현하지요. 소소영영 한 놈이 있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고 방편상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육조단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지식들이여, 세상사람들 성품은 본래로 청정하여 만가지 성품이 갖추어 있나니 모든 악한 일을 생각하면 바로 악을 행하게 되고 모든 착한 일을 생각하면 바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니 이와같이 모든 법이 다 자성가운데 있으며 자성은 항상 청정함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으로는 '본래 부처다, 본래 청정이다' 그러면, 더러운 것은 없고 그냥 원래 청정하다고 생각하지만, 육조단경 글귀를 보면 선과 악이 존재하는 거예요.
기신론에 일심이문, 염정이 있듯이, 좋은 부분만 표현해서 긍정적으로 여러분에 방편을 써서 그곳으로 나아가도록 믿음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진아? 있다 없다로 논할 수 없는 것이라 표현상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전박사님 이에 대하여 한 말씀하여 주시죠.
전현수박사 :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우리가 용어를 잘 못 쓰면 혼란을 가져옵니다. 제가 가끔 대승불교나 선불교 이런 쪽분들을 만나면 부처님보다는 조사분들을 더 믿는 것 같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예요.
각산스님 : ㅎㅎ~ (부처님) 대단하신 것 다 압니다. (좌중 웃음)
전현수박사 : 아 죄송합니다. 저는 초기경전을 보면서 부처님께서 혼란을 주는 말은 하나도 하신 적이 없어요. 우리가 무언가 좀 모호하게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하지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스승이 정말 부처님이면 부처님이 쓰시는 용어대로 하면 되는데, 거기서 왜 다른 것이 나왔는지.. 저는 초기불교 공부를 하여보니 거기에 더하고 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각산스님 : 이제부터는 단답형으로 제가 좀 질의응답하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대중 : 예
각산스님 : 전박사님, 무상 고 무아를 보면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현수박사 : 무상 고 무아를 본다는 것은 우리를 정확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나오는 것이지요. 집착이 없어지는 것이고요.
각산스님 : 예. 그렇게도 말할 수 있고요. 그냥 열반을 얻으면 얻는 '열반락(涅槃樂)'이 있잖습니까? 니르바나.
전현수박사 : '락'이라는 것이 그게 좀 조심해서 써야됩니다.
각산스님 : 불을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어린애가 다루는 것과 만물의 영장인 어른이 다루는 것 하고. 그래서 언어를 조심해서 쓰는 것은 좋은데,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것을 어떤 때에 용처로 쓰고 있느냐를 보셔야 되거든요.
전현수박사 : 불교에서 '즐겁냐, 괴롭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느냐' 세가지 표현인데 요약하면 하나라고 그랬어요. 궁극에 들어가 보면 즐겁고, 괴롭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것은 전부 다 사실은 괴로움입니다. 왜냐. 우리가 우리를 통제하지 못하면서 온갖 것들을 조건에 따라 다 느껴야 돼요.
각산스님 : 우리는 왜 수행 합니까?
전현수박사 : 내가 원하는대로 살기위해서. 나한테 도움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그러면 그것을 욕망적인 의미가 아닌 행복함을 위해서 수행을 한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되겠습니까?
전현수박사 : 그런 말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우리를 정확하게 알 때 행복이란 말 쓰지 않습니다.
각산스님 : 그럼 행복은 어느 때 써야 됩니까?
전현수박사 : 행복은 세속적인 데서 잘 모를 때 쓰는 말이라고 저는 봅니다.
각산스님 : 예. 그래서 문자적 의미로 다가가는 것하고 일상 용어로 사용 할 때 행복이라는 언어... 가령 전박사님께서 불법을 만나기 전의 의식과 불법을 알고 수행을 통해서 나온 의식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전현수박사 : 그것은 완전히 차이가 있습니다. 보는 것이 다르니까요.
각산스님 : 그렇지요?
전현수박사 : 예.
각산스님 : 그것을 이름하여 흔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이지만 깨어있을 때 있는 의식이 흔히 제대로 된 앎의 의식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그 앎의 의미를 어떤 식으로 전달 할 것인가에 있어서 궁극적 실체를 빠알리어로 무어라 하지요?
전현수박사 : '빠라맛타' 말씀입니까?
각산스님 : 예. <나는 누구인가?>(라마나 마하리쉬 역저)를 지산스님이 출가전 이호준 이란 속명으로 번역했을 때, 그 빠라맛타는 산스크릿어로는 '빠라마뜨마'입니다.
빠라마뜨마는 수행을 통하여 아뜨만(자아)이 브라흐마(조물주)와 (우주의) 합일 되었을 때를 경지를 말하는데요, (불교의 무아가 아닌 내가 있다는 힌두교의) 자아와 브라흐마와 일체가 되면 우주의 근원으로 돌아갔다하여 그것을 해탈이라고 한다고 하더군요.
그 해탈을 자아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무아와는 다르게 빠라마뜨마를 영원불멸하다고 하여 빠라마뜨마의 번역을 '진아여여'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면 번역한 분이 진아라고 번역을 했지, 빠라마뜨마(빠라맛타)를 영원불멸한 진아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번역된 언어에 자꾸 걸려있거든요. 수행을 하면 무엇이 있는가? 저는 행복이라고 표현을 여러분에 드렸습니다. 전박사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보면서 내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표현의 차이일 뿐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그 마음으로 사람들은 언제든지 바뀌고 다르다는 것을 알면 비로소 인간관계가 틀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 이때 항상하다는 '상(常)'자를 쓰게 됩니다.
수행을 왜하는가? 단절된 인생은 모든 것이 끝나지만, 이제부터는 인간관계와 세상과 단절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상'자를 넣어줍니다. 그래서 열반을 얻으면 네가지의 덕이 있다해서, 무상함을 알면 그 무상함을 벗어났기 때문에 '상'자를 넣어줍니다.
깨달음을 통해서 고통을 벗어난 사람을 무엇이라고 해야합니까? '고'의 반대말은 '락(즐거움)'을 쓰든지 '행복'을 쓰든지 무언가 썼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 수행을 통해서 니르바나(열반)을 증득한 자는 고해의 바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고'라 아니고 '락'이다. 결과치를 이렇게 말을 해 주는 것입니다.
전현수박사 : 그런데 스님. 죄송한데요, 그리 안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요. 그것을 쓰면서 자꾸 문제가 생긴다니까요.
각산스님 : 예. 그것은 100% 동의합니다. 그래서 다르다가 아니고 대승불교는 이런 용어를 쓴다는 것을 좀 참조하시면서, 언어적인 방법이 다름은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함을 위해서 이 수행을 한다. 그래서 열반을 얻으면 네가지를 증득합니다.
모든 단절되고 없어지는 것이 일시적이 아니라 생사를 초월하는 아라한만이 죽음이 끝나는(윤회를 종식하는) 그 세계에 간다는 것을 '상'으로 표현합니다. 무상을 '항상'으로 표현하고, 고를 벗어난 것을 우리는 '락'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상락아정 할 때 '아(我)', 이때 이제 '참나'라는 부분이 혼동이 일어나거든요. 무아인데 왜 나가 있는 것인가 하고.
전현수박사 : 스님. 죄송한데요. 스님의 개인 의견입니까? 대승불교 전반적인 의견입니까?
각산스님 : 그것은 화엄경에 나온 말입니다.
전현수박사 : 아~ 화엄경..
각산스님 : 그리고 선사들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있는 용어면 합리적으로 쓰자해서, 가령 상담하실 때 내담자가 괴로움이 있을 때 긍정적이고 위안을 주는 언어를 어떻게 쓰십니까?
전현수박사 : 예.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겠지요.
각산스님 : 예 그러면 지금 현재는 괴롭지만 원래는 괴롭지 않은 (무한한 보배를 가진) 사람이 '나'라는 이런 방법도 그런 긍정적 류대로도..
전현수박사 : 그런데 스님, 잘 생각해보면 제가 스님말씀 100%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치환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경전이 다 있고 이를 요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또 이를 요렇게 응용해서 쓴다 하는. 스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 같은 뜻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필요한데, 나중에 결과적으론 이것만 하고있고, 이것은 소홀히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아 예. 그렇군요. 100% 동의합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가 없습니다. 아까는 근본이 다르다고 하시기여 제가 이렇게...
전현수박사 : 그런데 근본을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볼때는.
각산스님 : 그것은 남의 문제고 지금 이자리에서 근본이 다르다고 한 것만 대론을.. 저는 (남방불교든 대승불교든) 근본이 하나도 다르지 않더라구요.
대화를 통하여 하나 하나 실타래를 풀다보면 처음엔 각도가 다르더라도, 완전히 깨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삼매체험과 통찰이 일어난 분들은 이렇게 이해가 되잖습니까. 다만 오해를 줄 수 있는 용어는 좀 지양하는 게 좋지 않느냐는 (동의합니다)...
전현수박사 : 그러면 스님, 제가 평소에 가진 생각이 무엇이냐면, 불교에 지금 수식어가 붙거든요. 이것이 상당히 문제입니다. 제가 볼 때 대승불교나 선불교가 정확한 자리매김을 해야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부처님 말씀하신 것 하나도 안틀리고 똑같고 그대로 있고, 예를 들면 청정도론같은 주석서가 있잖습니까? 불교가 있고, 주석서가 있고, 대승론이 있고.. 이렇게 자리잡으면 좋은 데, 이것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그래서 이자리에 온 것이 깨달음은 무엇인가? 초기경전류 나오는 니까야와 아함경 그리고 큰스님들도 압축해가면 다양한 언어속에서 '공'으로 했는데 그 공이 무상,무아,연기의 다른 사상적 용어로 나왔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주시고요.
그래서 그것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깨침의 정의가 내려졌습니다. 무엇을 깨치는가? 무상 고 무아를 깨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참나'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아까 상락까지는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락아정에서 '아'가 나와요.
화엄경에 깨치고 난 다음에 무엇일 것인가? 열반사덕으로 상락아정을 말하거든요. 여기 (세상은) 오탁악세고 힘들다고 부정하고 있었는데, 아니다. 연꽃이라는 것은 사바세계 오염된 속에서 피어오른다. 여기가 극락이지 다른 곳에서 극락을 찾지마라고 해서, 상락아정의 '정(淨)'자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아(我)'자는 예전 불법을 만나기 전 의식과 불법을 만나고 난 다름 의식이 달라진 것은 원래 한마음인데 의식이 달라졌지요? 이것을 빠알리어로 '아말라식(amala viññāṇa)'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백정식(白淨識)'으로 번역된 '깨달은 의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 보실 때는 나라고 여길 만한 실체가 하나도 없는데, 육조단경에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은 바로 '수처작주'(隨處作主, 머무는 곳마다 주재자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본 자리가 나라고 여길 것은 없지만 내가 깨친 의식으로 본다면 이제 남의 견해에 끌려가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참면목이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기본 바탕에 두고 모든 사물을 있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주관적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봄)으로 본다. 이 의미로 어른 스님들이 오랫동안 '참나'를 쓰셨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 금강경의 유명한 구절. 응하되 머무는 바가 없는 마음을 내어라. 즉 무심을 말한다.
그리고 힌두교적으로 이야기하는 영혼불멸한 것을 참나, 아트만(ātman, 자아)와 일치되는 참나, 그것을 '빠라맛타(paramattha, 궁극적 실재)'라고 말을 한다면,
아니다. 그런 의미의 영원불멸한 의식은 있지않다. 무아를 바탕에 둔 참나를, 만약 환자가 왔다. 괴로움이 있고 힘들어하면 저는 "보살님, 우리의 참모습은 이런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 참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참나'를 차용하여 쓰고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전현수박사 : 예. 100% 동의합니다.
각산스님 : 이런 의미로 참나라는 것을 보아야하는데, 번역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무엇이 있다라고 고정불변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참나라고 해버리니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까 전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중에 무상 무아를 깨쳤다는 것을 연기적 방법으로 보지않으셨습니까? 지금 실재는 존재합니까?
전현수박사 : 존재합니다.
각산스님 : 그런데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해요. 무릇 보이는 모든 것은 허상이라 하거든. 실재합니다. 그런데 왜 실재하는 이것을 아지랭이와 같고, 꿈과 같다고 합니까?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 (금강경에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한 말씀) "특징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모든 특징을 특징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다." [출처 - 금강경, 살림출판사, 2010]
전현수박사 :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딱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꾸 바뀌고 또 통제도 안되고 이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산스님 : 그렇지요. 영원불멸하리라고 변하지 않으리라고 내가 관점을 그리 가져서 그렇습니다. 요런 점에서 이런 것을 연기적으로 현재 일어난다는 의미를 '순냐(Suñña 空)'라는 의미를 넣고, 초기경전에 나온 공의 의미는 용처가 달리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토론은 여기까지 정리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해서 발표하셨기 때문에, 선정을 흔히 말하면 선정의 다섯 요소라고 하시지요?
전현수박사 : 초선에 5요소가 있지요.
각산스님 : 실제적으로 선정은 6요소로 되어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전현수박사 : 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각산스님 : 초선은 5선을 말하기 전에 선정의 요소는 6가지입니다.
전현수박사 : 무엇입니까 그것이?
각산스님 : (아나빠나사띠 수행에서) 선정의 5요소*는 위딱까(vitakka, 尋 찾을 심)-위짜라(vicāra, 伺 엿볼 사)-삐띠(pīti, 喜 기쁨)-수카(sukha, 樂 즐거움/행복)- 그리고 에깍가따(ekaggatā, 心一境性)이지요?
전현수박사 : 예.
각산스님 : 우뻭카(upekkhā 평정심, 평온심 equanamity)는 어디갔습니까?
전현수박사 : 우뻭카는 없지요. 삐띠가 있으면 우뻭카는 같이 존재할 수가 없어요.
각산스님 : 4선정의 정의는 무엇이라 합니까?
전현수박사 : 사선정은 에깍가따와 우뻭카가 있는 상태지요.
각산스님 : 우뻭카 나왔지요?
전현수박사 : 그것은 삐띠, 숙카가 없기때문에 그자리에 우뻭카가 있는 것입니다. 우뻭카하고 삐띠, 수카는 공존할 수가 없어요.
각산스님 : 네 맞습니다.... 그래서 4선정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4선정에서 평온심(우뻭카)는 삐디(기쁨), 수카가 사라진 자리에 나오고, 3선정일 때 삐띠는 없고 수카가 있으면서 그때 우뻭카(평온심, 평정심)가 드러납니다.
4선정은 체험 안했어요 저는. 인가는 받았지만.... 아잔 브람, 아잔 간하를 만나뵈니 (파욱의 선정은 실제 선정) 아니더라구요. 제 관념적 체험이었어요.
어쨌든 선정의 5요소 다음에 4선정 들어가면 에깍가따(심일경)은 계속 초선부터 계속 이어져 오면서 위따까, 위짜라, 삐티, 수카는 사라지고 평온심(우뻭카)만 나타납니다. 그러면 선정의 요소는 초기경전 용어적으로 6요소로 드러났지 않습니까?
전현수박사 : 예. 초선에는 5요소가 있고, 2선에는 3요소가 이런 것이 아니라 선정에 등장하는 요소가 6개다는 말씀이군요? 100% 동의합니다.
각산스님 : 이런식으로 청정도론에서는 나름대로 주석을 했지만 경전을 보는 제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팔정도에서 선정, 삼마 사마디에 대한 것으로, 미얀마 불교수행센터 '파욱'에서는 근접삼매와 본삼매를 '삼마 사마디(samma samadhi)'라고 말을 합니다. 파욱의 전통이지요.
그러나 사문과경 등 초기경전에서는 삼마 사마디인 정정(正定)은 (근접삼매가 아닌) 네가지 선정(禪定)이다 못을 박았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전현수박사 : 그렇죠.
각산스님 : 같은 미얀마이지만 양곤 등의 위빠사나 전통쪽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찰나삼매(까니까 사마디)도 바른 삼매다라고 가르칩니다.
(이제는 실제 체험의 토론으로 들어갑니다) 전박사님,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는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까? 선정의 입장에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전현수박사 : 각묵스님 번역이 잘 된것 같습니다.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각산스님 : 이런 경우 동의하지 않는다라기 보다는 틀렸다라고 외람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뒤에 계속 이어집니다) 전박사님, 위딱까(vitakka)를 '일으킨 생각'이라 한다면 대상은 무엇입니까?
전현수박사 : 우리가 앉아서 아나빠나사띠(anapanassati)를 한다 할 때 호흡은 없어지고 빛이 생겼다, 이 때 '위딱까'는 마음이 어쨌든 그 쪽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위짜라'는 거기에 계속 가 있는 것입니다. 100% 가 있는 것이 선정입니다. 보통은 하다가 딴 생각도 하고 이러는데..
각산스님 : 그 선정의 대상의 무엇입니까?
전현수박사 : 선정의 대상은 아니빠나사티같으면 '빠디바가 니밋따(paṭibhāga-nimitta)' 한마디로 '환한 빛'이죠.
각산스님 : 한마디로 말한다면 선정의 입장에서는 '니밋따(nimitta)'*에 대상이 가있다 이 의미잖습니까?
전현수박사 : 그렇죠.
각산스님 : '위딱까'면 '일으킨 생각'이잖습니까?
전현수박사 : 그렇죠.
각산스님 : (니밋따가 나타나면) 니밋따에 생각을 일으킵니까?
전현수박사 :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 '위딱까'가 무엇이냐면 우리마음은 어딘가를 가야되잖습니까? 그때 내가 아나빠나사띠(anapanassati)를 하기때문에 내가 요 대상에 갔다고 고 마음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 다음 '위짜라'라는 것은 계속 (마음이) 거기에 가는 것입니다. 스님의 번역 한번 이야기 해보십시오.
각산스님 : 선정을 여러가지 중에서 압축하면 부동(不動 움직임이 없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하지않습니까?
전현수박사 :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괜찮습니까? (좌중 예~ 박수)
각산스님 : 이런 대화를 자유롭게 나눌 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대중을) 살피면서 잘 몰입하고 계시는지 보면서 합니다. 아니면 진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위딱까'라는 용처가 금방 설명하신것이 호흡을 볼 때에 '위딱까 위짜라(심사 숙고)'를 하고 고찰을 한다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부동(不動)이란 의미는 몸이고 마음이고 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이 되지요?
전현수박사 : 예 포함되지요. 아 마음은 계속 움직이지요. 몸도 생명활동은 계속 하겠지요.
각산스님 : 이 때 몸은 가지고 있지만 감각기능이 사라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아픈 줄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심일경 (心一境), 에깍가따(ekkagatā)라고 하지 않습니까?
방금 위딱까(vitakka)는 일으킨다 라는 생각 쪽에, 몸은 사라졌기 때문에 생각 마저도 일으킨다 라고 하면은, 동(動). 움직였잖습니까 용어가. 일으켰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하면 부동(不動하고는 다른 의미의 번역이란 이 말입니다.
니밋따도 3종류가 있습니다. 처음에 빛의 일어났을 때의 심천(深淺), 깊고 얕은 차이가 있었을 때 그 니밋따를 '위딱까 위짜라' 라고한다 라고 언어를 쓰는데. 실제 니밋따가 나타나면 (일으킨 생각을 하고 지속적 고찰을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마음이) 가 붙어 있습니다. 동의합니까?
전현수박사 : 저 처음의 '부동'에는 동의 안합니다. 스님 말씀하신 부동은 상수멸 (想受滅)*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상수멸(想受滅) : 문자 그대로의 뜻은 상(想)과 수(受)의 마음작용이 소멸되었다는 것으로, 이 두 마음작용은 5온에서 각각 상온과 수온에 해당한다. 멸진정(滅盡定)을 상수멸정(想受滅定) 또는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는데, 멸진정은 상수멸(무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출처 : 위키백과]
각산스님 : 하여 다른 분들도 (저의 체험을) 멸진정(滅盡定, 범어: nirodha-samāpatti)*수준이라고 하는 데, 제가 지금 멸진정 그 상태 들어갔으면 지금 불환(不還)과 경지인데...
*멸진정(滅盡定) : ①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선정(禪定). ② 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약어 - 멸정(滅定). 동의어 - 상수멸정(想受滅定), 멸수상정(滅受想定) [출처: 시공불교사전, 2003]
전현수박사 : 몸만 멸진정(滅盡定)상태 같아요. 부동이란 말을 엄격하게 쓰려면 멸진정상태가 돼야됩니다.
각산스님 : 아 그것은 (경전의 근거에 말씀하신다면) 제가 배웁니다. 저는 멸진정은 '아라한'이나 '불환과'다. 이 개념인데 몸만 멸진정이라.. 이해가 됩니다.
전현수박사 : 그리고 아잔브람이 이야기하는 선정은 멸진정 상태입니다. 아잔브람이 이야기 하는 것이 초선, 2선, 3선, 4선이 아니예요.
각산스님 : 그래서 그것은 '다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구요. 저는 그것이 선정 수준이다, 멸진정 수준은 그렇게 논해서는 안된다고 저는 그렇게 보거든요.
전현수박사 : 제가 항상 아잔 수행처에 갔다온 사람들 한테 물어 본 것이 있습니다. 선정된 사람이 있습니까? 아잔 브람이 이야기하는 선정은 단계적인 초선 2선 3선이 아니에요. 아니고 거의 멸진정 수준이예요. 그래서 선정은 굉장히 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물어봐요 그 어떤 사람이 있냐 없냐고.
각산스님 : 예 그래서 제가 여러나라 세계 불교전통을 공부하면서 선정도 (증득하지 못했는데 선정을 성취했다고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바라이죄(이 생에서는 스님의 칭호를 듣지 못하는 네가지 중죄 중에 하나)에 해당되는 것이 이래서 말하는구나, (선정은 참으로) 너무 귀하디 귀하구나... 그래서 이것은 '다르다'는 의미에서 표현되어야 겠습니다.
전현수박사 : 예. 예.
각산스님 : 미얀마 파욱수행처에서 저는 5년에 거쳐서 수행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미얀마 방식의 수행을 보낸 세월은 10년이 걸렸지만은요. 그 전통에서 이론도 오랫동안 공부했습니다. 행동은 완벽하지 않을지라도요. 자 그때 나온 선정이 실제 내 삶을 바꾸어 주는 통찰을 일으킨 측면에서 통찰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삼매 수준 아까 멸진정 수준이든 아니든 삼매만 얻어도 아까 말씀하신 선정수준이 아닌 근접삼매만 가더라도 통찰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 그러면 모든 것이 출가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전박사님처럼 또는 우리 백기자님처럼 여러분처럼 '생활 속에서 삼매를 얻을 수 있다'라는 희망적 언어, 실제적 언어로 설명드리려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위딱까 위짜라'가 (전박사님의 경험과 저의 경험상의 체험이) 다르기 때문에 (또 다시 여쭈고자 합니다)...
전현수박사 : 부동(不動)은 취소합니다. 제가.
각산스님 : 예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은 이제 그런 의미라면 됩니다. 저의 위딱까 위짜라는 다른 입장에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전현수박사 : 이제 제가 선정을 닦은 입장에서 선정 아닌 상태에서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자세하게 말씀하시지만은 선정 요소 중에 어떤 것이 그렇기 때문에 요걸 버리고 또 2선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초선에서 그 다음에 숙고를 통해서 2선 들어가고 3선들어가고 4선 (이렇게요). 과연 아잔브람 문중에서 초선 2선 3선 4선을 부처님말씀 대로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까?
각산스님 : 자 이 이상은 (선정의 체험은) 승가에서 다뤄야 될 이야기이기에 제가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아잔브람께 (전박사님과)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래서 잭 콘필드의 번역들, 아잔 차스님이 스님들에게 전하는 것과 재가자에게 전하는 것이 다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아잔 간하 스님도 그러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별개로 나누기로 하고, 본 주제로 다시 돌아와 제가 바라본 선정의 5요소를, '위딱까 위짜라'의 번역은,
실제적으로 니밋따만 나타나도, 제가 파욱에서 경험한 니밋따말고, 그냥 진짜 니밋따를 체험한, 파욱방식이 아닌, 체험을 말씀드리면 그것을 일으킨 생각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다가가는 구나 그래서 '위딱까'의 언어가 선정에서 쓰여진다는 말이에요.
전현수박사 : 그래서 스님 말씀은 '위짜라'에 해당 되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예. 그래서 다시 설명하면 위딱따 뒤에 '위짜라'가 있습니다. 위짜라는 무의식적으로 움켜쥠입 니다. 그래서 니밋따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맞구나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니밋따란 대상을 보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삐띠와 수카의 대상 때문에 삐띠, 수카 쪽으로 자동적으로 다가가고 삐띠 수카라는 기쁨과 행복을 움켜줘 버렸습니다. 이게 초선이 현상입니다 .
2년전인가 3년전에 "스님하고 저하고 견해차이가 안맞아 질 것인데요.." 박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에) "전박사님과 저하고 견해가 안맞아진다면 이것은 수행한 사람으로서 큰 일납니다. 때가 되면 한번 조율해 봅시다." 하고 이야기 나눈 것이 오늘 이렇게 드러난 것입니다.
전현수박사 : 물론 스님 말씀도 저는 맞다고 봅니다. 삐띠, 수카가 있으니까 그것을 탁 움켜쥘 수 있다. 그것도 일리는 있지만, 제가 오랜 수행과 제 자신을 관찰하고 과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마음을 한 대상에 계속 갑니다. 처음에는 다른 곳에 갑니다. 그러면 내려놓고 또 갑니다. 계속하게 되면 어느쪽으로 길이 쫙 나게 되면서, 조건이 구비되면 자동집중상태가 있을 때입니다. 자동집중.
각산스님 : 예.
전현수박사 : 그래서 이 수행을 하다보면 저도 2009년도에 말레이시아 타이핑(Taiping)에서 수행할 때 제가 세상에 태어나고 처음 경험했어요. 뭐냐면 이 '니밋따' 환한 빛을 보는 데 그 빛이 저를 잡아 잡아당겨요. 아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거여요. 그래서 파욱사야도께 가서 "오늘 아침 이상한 현상이 있습니다. 잡아 당깁니다"하니까
그 때 하시는 말씀이 "it's absorption(이것은 선정이다)"이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그 전에 파욱사야도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냐면은, 파욱사야도는 어쨌든 길이 없는 길을 가신 분이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말을 하셔요.
그전에 말씀이 "우리가 자꾸 집중하면 자석처럼 당길 것이다." 이 말을 하셨어요. 그래서 돌이켜보면 우리가 많이 (집중)하게되면, 우리 마음속에서 그쪽으로 조건이 형성되면서 그 쪽으로 길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마음이 다른 데를 갈 수 없어요.
각산스님 : 그것이 위딱까(vitakka)-위짜라(vicāra)의 자동 속성입니다.
전현수박사 : 그게 아무리 자동이라도 마음은 순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집중하는 마음도 일어났다 사라져요.
각산스님 : 심일경(心一境)상태에서는 아닙니다.
전현수박사 : 그게 아닙니다. 스님하고 저하고 차이가 있습니다. '위딱까'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내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집중을 하는 거예요. 많이해서 자동이 되든 머든. 그 다음에 마음이 가서 계속 하는 겁니다. 이게 순간순간 일어나서.
각산스님 : 그런 의미는 동의합니다.
전현수박사 : 예. 그리고 그 가있는 상태를 에깍가따라고 저는 표현한다고 봅니다.
각산스님 : 정확한 표현입니다. 제가 계속간다 하는 것은 연속선상에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고 계속적으로 가는 것. 그런데 (저는) 마음의 실체를 완전히 못깨쳤기 때문에 에깍가따(심일경)는 마음의 한 대상으로 쭉 계속 가 있다. 충분히 동의합니다.
전박사님, 질문하겠습니다. 위딱까(vitakka)-위짜라(vicāra)가 니밋따가 대상입니까? 삐띠-수카 대상입니까?
전현수박사 : 삐띠-수카는 니밋따 대상이지요. 삐띠는 제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번뇌가 없어지면서 그냥 기분이 싹 좋아지는 상태입니다. 그 다음에 잔잔한 행복. 그것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지 거기에 가 있으면 그건 좀 곤란 하죠.
각산스님 : 심일경(心一境)의 대상은 어떤 것입니까?
전현수박사 : 심일경(心一境)의 대상은 예를들어 선정상태같으면 굉장히 밝은 빛에 가있는 것입니다.
각산스님 : 전박사님이 이렇게 하시는구나 하고 저도 똑같이 그 남방불교 파욱수행을 했고, 과학이라 말을 안해도 부처님법은 과학이기때문에 저도 아주 과학적으로 했습니다. 불교자체가 과학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금방 심일경(心一境)의 대상은 그 이전까지는 호흡을 통해서, 호흡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니밋따가 나옵니다. 니밋따가 결정체가 삐띠-수카가 들어가 있습니다. 니밋따는 선정의 삐띠-수카로 전환이 되면서 (위딱까와 위짜라는 니밋따가 아닌 삐띠 수카로 자동으로 다가가고 움켜쥐면서) 황홀성에 빠집니다.
똑같이 심일경도 황홀했기 때문에 그 시간가는 것을 차이가 없이 나도 모르게 한 시간 두 시간 다섯 시간 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정도로 정의를 내리고, 전박사님 말씀하신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고, 다음에 시간되면 더 토론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명상 대토론은 존중하되 믿지 마십시오. 다섯 분을 다. 정과스님은 어제 밤새도록 (수행)담론을 나눴는데 당신은 화두를 들면 아는 놈이 그대로 행주좌와에 함께 쭉 이어지신다고 하십니다. 선법스님은 일거수 일투족 일어나는 마음 계속 알아차리면서 되돌려쓰고 계십니다.
백기자님은 선어록의 이치, 궁리, 이것이 무엇인 것인가, 슬로우 싱킹, 묻고 묻고 물어서 참 저보다도 더 멋진 해설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저는 전박사님의 초기불교만을 유일하게 인정합니다. 지금 대화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초기불교를 나름대로 통람하시고 있는 그대로 행동까지 하시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모셔서 (세미나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분들 네 분의 선지식을 모시고 부족한 제가 진행을 했습니다. 여러분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토론 삼매에 들어 (12시에 마쳐야 되는데) 지금 1시 10분입니다. 자 크게 네 분에 큰 박수바랍니다. (좌중 박수) 예. 감사합니다.
글정리:, 한국참선지도자협회 사무차장 김영희
출처 : 참불선원 까페
첫댓글 감사합니다
신청시기를 놓쳐 참석 못하여 아쉬움이 있었는데 좋은 내용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았습니다
구모나 토각에 목을 메고 자살해 보면 다 알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