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園田居1(귀원전거1) - 도잠(陶潛)
전원에 돌아와서
少無適俗韻 (소무적속운) ~ 어려서부터 세속과 운치가 맞지 않고
性本愛丘山 (성본애구산) ~ 타고난 성품이 자연을 좋아했으나
誤落塵網中 (오락진망중) ~ 어쩌다 세속의 그물에 떨어져
一去三十年 (일거삼십년) ~ 어느듯 30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렸네
羈鳥戀舊林 (기조연구림) ~ 떠도는 새 옛 숲을 그리워하고
池魚思故淵 (지어사고연) ~ 연못에 고기가 옛 웅덩이를 생각하듯이
開荒南野際 (개황남야제) ~ 남쪽들 가장자리 황무지 일구며
抱拙歸園田 (포졸귀원전) ~ 본성대로 살려고 전원에 돌아왔네
方宅十餘畝 (방택십여묘) ~ 네모난 텃밭 여남은 이랑에
草屋八九間 (초옥팔구간) ~ 초가집은 여덟 아홉 칸이라
楡柳蔭後檐 (유류음후첨) ~ 느릅나무 버드나무 뒤 처마를 덮고
桃李羅堂前 (도리나당전) ~ 복숭아와 자두나무가 마당 앞에 늘어섰네
曖曖遠人村 (애애원인촌) ~ 아스라이 먼 곳에 인가가 있어
依依墟里煙 (의의허리연) ~ 아련한 마을엔 연기 피어오르고
狗吠深巷中 (구폐심항중) ~ 동네 안 거리에선 개 짖는 소리
鷄鳴桑樹顚 (계명상수전) ~ 뽕나무 위에서는 닭 우는 소리
戶庭無盡雜(호정무진잡) ~ 집안에는 번거로운 일이 없고
虛室有餘閒 (허실유여한) ~ 텅 빈 방안에는 한가함 있어
久在樊籠裏 (구재번롱리) ~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살다가
復得返自然 (부득반자연) ~ 이제야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구나
도연명( 365 ~ 427년)
중국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던 전원시인(田園詩人)이다.
호는 연명(淵明)이고 자는 원량(元亮) 본명은 도잠(陶潛)이다.
오류(五柳) 선생이라고 불리며 시호는 정절(靖節)이다.
장시성 주장시 루산시 사람이며 육조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들 중 한 명이다.
동진 초기의 군벌의 대인물 도간(陶侃)의 증손이라 하는데 부조(父祖)의 이름은 분명치 않다.
하급 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일찍 사망했다.
젊어서부터 입신의 포부를 품고 면학에 전념하여 마침내 29세에 주(州)의 좨주(祭酒) 참군
(參軍)으로서 관직에 임했다. 그 후 13년간 지방 관계에 있었으나 입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팽택령(彭澤令,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을 80일간 지낸 후 향리로 돌아갔다.
“내 5두미(五斗米, 다섯 말)의 녹봉(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향리의 소인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라고 한 말은 현(縣)을 시찰하러 온 군의 관리(郡 아래 縣이 있다)에게 절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현령의 자리를 내동댕이쳤을 때의 명문구이다. 그때 전원으로 돌아갈 심경을
말한 것이 歸去來辭이다.
그 후에는 심양에서 은일(隱逸)의 선비로 처세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곳에서 논밭을 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전원 시인으로 맑고 깨끗한 시를 많이 썼다. 문장도 뛰어나서
이상의 세계를 그린 <도화원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술을 좋아했으며, 국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성격이었다.
쉬운 말로 시를 쓴 것이 특징이며, 유교와 노장 사상을 흡수하여, 인생의 진실한 것을 추구한
시인이었다. 10년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좌저작랑(佐著作郞=당시 隱士에게 주어진 관직)을
수여받았다.
첫댓글 도연명의 생애 잘 새깁니다.
재미로 조선시대의 영의정 녹봉을 현시세로 알아봤는데~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는 생활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이 되네요
정1품 영의정 녹봉 <연봉>
쌀 64석~ 1石= 144kg 64석 x 360,000= 23,040,000원
보리 10석~ 1石= 138kg 10석 x 138,000= 1,380,000
콩 23석~ 1石= 140kg 23석 x 658,000= 15,134,000
면포 21필~ 1필= 쌀4말 21필 x 80,000 = 1,680,000
합 계 41,234,000원
비 합티처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