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캐빈의 마지막을 기록하느라
새벽 두 시 가까운 시간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전 내가 쓴 글을 한 번 더 훑어보려 했는데
웬 광고쟁이한테 서로이웃 신청이 와 있었다.
새 글 조회수는 아직 0인데.. 뭘 보고 찾아온 사람이지?
내 글을 읽어주지도 않은 이는 필요 없다.
뒤로가기.. 뒤로가기!!
방에 아직 남아 있는 캐빈의 물건들
바닥에서 침대까지의 높이가 캐빈에겐 너무 높아서 산
미끄럼 방지 돌기가 거의 다 떨어져 나간 아이보리색의 삼각형 계단
그 옆엔 회색 마약 방석
그리고 엄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거실 쇼파에서 주워온
내 방에서는 필요 없던 검고 작은 삼각형 계단
이 셋 중 캐빈의 흔적이 가장 짙게 묻어 있는 것은 단연 마약 방석일 것이다.
그가 종종 이곳에 누워 잠을 자거나 휴식을 했으니
그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을 거라는 걸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혹여 벌써 캐빈의 냄새가 사라진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걱정도 들었지만
냄새가 안 나도 상관은 없다. 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해서 그가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방석의 정가운데부터 코를 대 본다.
오.. 찾았다
캐빈이 풍기던 꼬순내와 가장 가까운 냄새가 그리 멀지 않은 여기에 있었다.
온기는 없지만 이 정도면 됐다.
그 움푹 패인 가운데 쿠션을 둘러싼 주위 부분에도 옅게나마 그의 꼬순내가 남아 있었다.
오늘은 이 방석을 끼고 자면 되겠다.
방석에 코를 대고 킁킁대느라 잠깐 잊은 듯 했던 재채기와 콧물이 강하게 세 번 내뿜어져 나왔다.
내 평생을 함께 붙어 지낼 지긋지긋한 영혼의 숙적.. 알러지성 비염
어쩌면 앞으로는 곧 희미해질 과거 병력이 될 수도 있겠다.
네가 있어서 이 비염이 심해졌던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콧물과 재채기가 잦아들수록 진정 네가 멀어지는 걸까 걱정하게 생겼다.
자기 전 내 옆에 놓은 방석을 살짝 안아봤다.
캐빈을 안던 느낌과는 확연히 달라도
마치 캐빈을 안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내 이불 반쪽을 방석에게 내어주고 그대로 잠을 청한다.
이렇게 하면 네가 꿈에 나올까
널 힘껏 안아주고 싶었는데 네가 터져버릴까봐 그럴 수 없었지
둘이 나란히 누워 네 등 위에 팔을 올리고 싶을 때도
내가 너한테 너무 무거울까봐 겨우 손바닥만을 올리는 걸로 말았어
같이 잘 땐 아예 손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내 몸통을 너한테 바짝 붙여
네 체온과 살결을 마음에 옮겨 담다가 잠에 들었어
이런 기분 좋은 아쉬움들로 너를 대하다가
지금은 비록 네가 아니지만 널 닮은 방석이라도 내 마음껏 꽉 안아보고 만지며 잘 수가 있다.
핸드폰에 저장한 알람대로 오전 7시 30분에 눈이 떠진다.
다행인 건지 아쉬운 건지 너는 꿈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예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다섯 시간을 잤다.
얼마 못 잔 탓에 아직도 너무 졸리다.
딱 30분만 더 자자.. 그래도 안 늦어
내가 블로그에 쓴 글에 세 명의 유저가 반응을 남겼다.
맨 위에는 여전히 광고쟁이
두 번째는 오랜만에 블로그 구경을 온 듯한 작은누나의 힘내자는 이모티콘 하나
세 번째는 마음이 아프다고 공감을 하더니 별안간 어느 여성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미성년 남학생으로 보이는 유저의 댓글
십수 년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게 감사할 정도로
연 평균 방문자 수가 0에 수렴하는 이런 블로그에 글을 써 올리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뭐가 어쨌든 딱히 대단한 반응을 바라고 쓴 글이 아니었기에
이 세 개의 깜짝 댓글들을 시작으로 오늘 하루에 작은 흥미를 머금은 채 침대에서 일어난다.
작은누나의 방과 그 옆 화장실을 이어서
캐빈이 그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쳐 놓은 접이식 플라스틱 울타리.
분명 거실 끝 창가 쪽에 배변패드를 두었건만 그건 그의 여러 화장실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꼭 거실이나 다른 곳 벽 곳곳에까지 오줌을 지려대길래 그에 대한 방지책으로 마련한 것인데
여기에 갇힌 캐빈은 작은누나 방에서 작은누나와 같이 자다가 화장실에 일을 보곤 했다.
그러다 답답했는지 종종 지가 이 울타리를 젖히고 나와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그의 의지에 따라 필요하기도 했고 쓸데없기도 했던
딱 절반 만큼의 효용성을 가진 이 울타리는 자정 즈음부터 엄마가 깨어날 오전 9시 전후까지 자리를 지켰다.
잠에서 깨어난 지 두세 시간은 되어 보이는 엄마가 거실 탁자용 의자에 앉아 있다.
흠 엄마 벌써 일어났네
이 시간이면 아빠는 아직 안방에서 자고 있겠지
엄마는 한쪽 다리를 접어 의자에 수직으로 올리고 그 무릎에 그쪽 팔꿈치를 받쳐
손으로 턱을 괸 채 앉아서 온화한 얼굴빛을 띠며
울타리 너머 활짝 문이 열린 누나의 방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엔 털이 적당히 풍성해진 캐빈이가
작업용 의자에 앉은 작은누나의 다리 위에서 어허둥둥 예쁨을 받고 있다.
평소처럼 그를 인지하고 살짝 웃으며
내 종아리 만큼의 높이로 세워진 울타리를 가볍게 넘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왔더니
그새 화장실 앞에 샛노란 오줌을 널따랗게 싸놓은 캐빈
그 때문에 손에 오줌을 적셔가며 닦아내야 했지만
이 성가신 오줌이 웬일인지 반갑다.
캐빈의 반가운 오줌을 닦는 나와 그 옆에 서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는 캐빈
그런 우리를 보는 작은누나와 엄마.
그 누구도 과하게 들떠 있지 않았고
그저 평소처럼 얕고 긴 웃음을 내비치며 행복한 현재를 음미했다.
8시가 되었는데 아직 집안이 캄캄하다.
흠 아무도 안 일어났나 보네
블로그 조회수는 1명. 댓글은 없음.
이럴 때가 아니지. 늑장으로 출발 시간이 30분 미뤄졌으니
빨리 머리 감고 나가야겠구만.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화장실로 향한다.
누나의 방은 약간의 틈을 남기고 거의 닫혀 있다.
머리를 감는 동안 거실 쪽에서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난다.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나셨군
아 오늘 비 온다 했지
이틀 전 차 앞부분에 새똥이 묻어서 세차 하려다 말았는데 마침 잘 됐네
캐빈아 네가 가져온 빗줄기로 새똥 자국 좀 지워주렴.
고마워
난 널 그리면서 불현듯 눈물이 터져 흐르지만
너 때문에 아파서 우는 건 절대로 아니야
그러니까 또 놀러 와
매일 너를 보며 웃던 지난 날들처럼 맨날 놀러 와
기다릴게
첫댓글 캐빈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