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식물의 생태계인 산허리를 동강내 인공적인 길을 만든다는 점에서 환경의 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운전자가 꿈에 그리는 독일의 아우토반처럼 도로는 삭막한 일상의 도시인들에게 유일한 스트레스 분출구일지 모른다. 속도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빛의 빠르기에 도전하고 있는 지금 낭만의 먼지를 들이 마시며 비포장길을 달리기 보다는 시속 200㎞ 이상의 아우토반을 더 동경할 것이다.
따라서 최근 전주시 평화동을 지나 임실 운암까지 새로난 국도(27번)는 전주시민들에게 반가운 존재이다. 잘 닦여진 왕복 4차선 도로에 시속 80㎞ 정도의 적당한 속도, 삭막한 도심풍경과는 차원이 다른 정경은 일상에 지친 운전자들에게 일종의 청량제.
봄을 재촉하는 마지막 겨울비가 내리던 지난 3월 2일 오전 27번 국도를 달렸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도로 위는 한산하다. 귀청을 때리는 경적소음이나 끼어들기같은 도심속 스트레스는 없다. 여유를 갖고 규정속도에 훨씬 못 미치게 차를 몰아도 왜 느리게 가냐고 타박하거나 위협하는 이도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풍경과 차창을 적시는 겨울비만이 유일한 길동무가 돼준다. 잠시 비를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터널도 오늘은 반갑다.
터널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한 전북도립미술관 안내표지판이 간만에 여유를 찾은 운전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미술관 너머로 보이는 모악산도 잠시 쉬어 가라며 손짓하는 듯 하다. 도심을 벗어나 20여분을 달렸을까. 왕복 4차선으로 시원하게 뻗어 나가던 도로가 막달은 지점에 도달했다. 지난 2003년 전주시 평화동∼구이간 8.7㎞구간이 완공됐고 구이∼임실 운암간 9㎞ 구간도 거의 완성됐지만 소음피해를 주장한 토끼농장주의 반대로 도로는 더이상 뻗지 못하고 편도 2차로로 준 것이다. 길은 어느새 구이·순창 방면중 한 곳을 선택하라고 종용한다.
완주군·임실군의 경계에 놓인 오봉산(513m) 국사봉(475m)과 아침 물안개가 일품인 옥정호가 있는 순창방면으로 차는 자연스럽게 회전해 간다. 신작로에 비해 갑갑하긴 하지만 좁은 1차선 도로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10여분을 달린 후 운암삼거리에서 임실 운암방면 지방도(749번)로 방향을 바꿨다. 삼거리에 늘어선 온갖 음식점의 유혹을 뿌리치면 이제 오르막길과 커브길이 운전자를 맞이 한다. 왕래가 뜸해서인지 드문 드문 눈이 쌓여 있지만 간만에 여행에 나선 드라이버의 기분까지 망칠 정도는 아니다.
조심스레 오르막길을 오르기 무섭게 오른편에 옥정호(운암·산내·섬진저수지)의 푸른 물빛이 펼쳐진다. 푸르다 못해 초록빛을 띄는 늦겨을 물빛이 매력인 옥정호의 장관을 훔쳐 보며 길을 재촉한다. 정상에 가까워서인지 귀가 먹먹해 진다. 호수를 애감고 도는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는가 싶더니 옥정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장관이다. 근처에 3층 높이로 만들어진 전망대에 오르면 전망은 더 좋아진다. 호수를 감싸 안으며 굽이굽이 뻗어 있는 호반도로가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뒤로 보이는 몇 가구 안되는 농촌마을의 풍경도 정겹다. 호수 안의 섬마을인 입석리의 모습도 이색적이다. 운이 좋다면 마을로 들어가고 나오는 배의 모습도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귓볼을 건드리는 바람이 시원한 봄날 저녁, 세상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저녁놀이 옥정호 안에 드리울때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매서운 동장군의 계절이 가고 맞는 봄의 길목에서 흔치 않은 정취가 느껴지는 환상적 드라이브 코스로 훌쩍 떠나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전북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