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대지가 이야기를 품고 품어 고이 갈무리하는 시기라면, 봄은 대지가 이야기를 한 자락 한 자락 풀어 전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드디어 대지가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등대 옆의 산자고 군락이 수줍게 하얀 보따리를 열어젖히더니 뒤이어 정원의 수선화가 샛노란 꽃망울을, 히아신스가 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려 갯바위의 분홍빛 진달래를 불러냈다. 진달래의 손짓에 길가의 개나리와 여염집의 목련도 터져 나와 언저리를 환하게 밝히다가 벚꽃의 이야기 주머니를 열고, 벚꽃은 또 다시 (하늘)매발톱꽃에게 이야기의 길을 터주었다. 지금은 배꽃과 복숭아꽃이 한창이다. 끝없이 이야기를 교체하며 임은 그렇게 봄 길을 걸어오셨다.
한 차례
봄비 퍼붓자
속속들이 비칠 듯
거울은 말끔하다.
그 속에
진달래 개나리
수선화 노루귀
배꽃 벚꽃 목련화
베일처럼 두른
당신 모습 비칩니다.
그렇게
당신 오시면
거울은 더욱 눈부십니다.
곱 낀 눈마저
황홀히 부시게 하는
대지,
당신.
지난겨울, 남녘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참혹한 일이 빚어졌다. 후박나무가 얼어 죽고, 협죽도(유도화)가 추위에 몸살을 앓거나 얼어 죽었다. 지독한 추위에 함께 몸을 떨어대며 마른 뼈처럼 누워 파릇한 생기 한 모금을 간절히 원하던 내게 저 봄의 이야기꾼들은 어서 오라고 손짓에 손짓을 거듭했다. 덩달아 갯가에서는 우주의 맥박소리가 규칙적으로 내 가슴을 둥둥 울려대며 이렇게 말했다. "봄의 대지로 나아가라. 사물을 들여다보라. 산에 들어가 보고, 바다에 뛰어들어 보고, 모든 살아 있는 것, 모든 파릇한 것에게 다가가서 귀를 기울여라." 겨우내 내 차지였던 밀폐된 기도실, 서책으로 가득한 서재는 한동안 내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틀어박히는 삶은 한동안 내 곁에 얼씬거리지 못할 것이다. 두문불출이라는 말도 작별의 키스를 해야 할 것이다. 저리도 파릇한 사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그 속에 녹색으로 인쇄된 온갖 문장이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으니…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소.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계절이
이 땅에 돌아왔소.…
나의 사랑, 멋있어라.
나를 이렇게 황홀하게 하시는 그대!
우리의 침실은 푸른 풀밭이라오.
우리 집 들보는 백향목,
우리 집 서까래는 전나무라오.
―아가 2:10-12; 1:16-17
대지를 마주하면 겸손해지지 않는 때가 없지만, 봄의 대지를 마주하면, 마음은 자꾸만 낮아진다. 대지의 존재들이 드러내는 신비를 마주하면 허리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실 꾸러미에서 한 올 한 올 실이 풀어져 나오듯 대지에서 풀어져 나오는 가르침이 크고 깊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서면 그들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나를 제자로 받아들여 주세요. 설익은 나를 깨우쳐 주세요. 당신이 간직한 출산과 창조의 비밀을 일러주세요. 당신이 갈무리한 말씀을 한 마디 들려주세요."
설교가 본업이라지만 나는 설교하지 않고 살았으면 싶다. 빈 젖을 짜내는 일이 많고, 그런 젖을 빠는 교우들에게 배탈과 설사를 안겨준 일이 많은 까닭이다. 두레우물 가에 있지 못하고, 박우물 가에 있는 때도 많다. 물맛이 시원치 않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바가지로 찰박거리며 떠올린 흙탕물이 아니라, 찰방찰방 두레박을 깊고 깊은 곳에 던져 퍼 올린 물은 얼마나 시원하고 달콤하던가. 얼마나 개운하던가! 설교단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무겁고, 설교단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은 언제나 천근만근이다. 배움의 길에 있는 자가 무언가를 전하겠다고 설교단에 오르는 것은 참말이지 화끈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설교는 내게 위태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듣는 일을 많이 하고, 듣는 일을 잘 해야 한다. 설교자의 본업은 듣는 일이고 설교는 부업이어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이지 싶다. 천국에는 목사들의 몸은 없고 목사들의 입만 동동 떠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국도 시끄럽기는 지상이나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목사의 입들이 동동 떠다니며 나불거리는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엽기적인 광경이 아닌가. 설교자는 입의 사람이기 이전에 먼저 귀의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에게 귀가 두 개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얇은 귀가 아니라, 제대로 알아듣는 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밝은 귀로 잘 알아듣고 몸으로 실천하고 입으로 전하면 더 바랄 일이 없겠다. 이는 남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게 하는 말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듣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은 자연이 아닐까 싶다. 자연이야말로 임의 말씀이 끊임없이 발설되는 사원 중의 사원인 까닭이다. "우주는 하느님의 일차적 계시이자 일차적 성서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사귀는 첫 번째 자리이다."(토머스 베리) 읊조리면 읊조릴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명언이다. 하느님은 영혼에게 다가오실 때 베일을 두르고 오신다. 그 베일은 자연이고, 꽃이고 나무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고 모든 푸릇한 것들이다. 책갈피를 넘기듯 그 베일을 하나하나씩 들춰가며 읽는 일은 가죽으로 장정된 성서를 읽는 일만큼이나 성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들을 도외시한 채 하느님을 읽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의 극치가 아닐는지?
잘 새겨듣고자 하는 결의를 다지고 봄빛 완연한 저 파릇한 사원 속으로 들어선다. 발길은 계동의 울창한 뒷산으로 들어선다. 녹색 계열의 식물들과 갓 움을 틔우려는 나뭇가지들이 바짓가랑이와 소맷부리를 붙잡는다. 한 말씀 듣고 가라는 신호인 셈이다. 그들이 풀어내는 녹색 문장을 갈무리하다보면 걸음은 무한정 느려진다. 산마루에 오르리라 작정하고 나선 길인데 아무래도 산마루에 닿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면 어떤가? 마음이 연둣빛으로 물들고, 영혼이 갈데없이 푸릇해지면 그만이지 않은가…
참꽃은 끝물이라 너저분하고 개꽃이 한창이다. 개꽃이라. 개가 들어도 기분 나쁠 것이고, 꽃이 들어도 억울할 이름을 어이하여 붙였을까? 토종 철쭉을 개꽃이라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꽃과 먹을 수 없는 꽃으로 구분하다보니 참꽃(진달래)이라는 이름과 개꽃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리라. 옛적에 진달래가 춘궁기의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구황식물 역할을 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쓰임새를 따지는 인간중심주의가 꽃 이름에도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개운치 않다. 꼭 먹어야 맛인가? 있는 그대로 두고 보는 맛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세상의 모든 꽃이 다 참꽃일 텐데. 아니, 세상의 모든 꽃은 다 참꽃이다. 쓰임새를 따져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태도가 잘못된 것일 따름이다. 세상의 모든 꽃은 쓰임새를 따지는 눈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읽어줄 눈을 기다린다.
산을 조금 더 타자니 바다가 시원히 내려다보이는, 자란(紫蘭) 군락이 있는 곳에 닿았다. 다 자라면 기다란 타원형이 될 잎들이 삐죽삐죽 대지를 뚫고 올라와 촘촘했고, 꽃줄기에서는 분홍빛 꽃망울이 터지고 있었다. 집 정원에 사다 심은 자란은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는데 산중턱의 자란은 이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해수면과 산중턱의 기온 차이 때문이리라. 그 모습이 조촐하고 말쑥했다. 보아주는 이 없어도 자란은 그 자리에 그렇게 자리하여 제 속에 품부된 창조력을 맘껏 발산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 다시 찾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는데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자란을 마주하여 무릎을 구부렸다. 자란을 들여다보며 묵상에 들었다.
"고마워요!"
"뭐가요?"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아주어서."
"그런 거라면 내가 더 고마워해야지요. 당신을 바라봄으로 인해 내 눈이 맑아졌으니까요."
"아니에요. 내가 더 고마워해야 해요. 당신이 나를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당신 눈망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거든요. 내 모습이 어떠한지, 나의 빛깔이 어떠한지, 내가 얼마나 아리따운지를…당신의 눈망울은 내 모습을 비쳐주는 거울과 같아요."
"그렇다면 당신을 자주 찾아올 게요. 그때마다 내 눈을 더욱 맑게 닦아주세요."
영혼을 울리는 한 마디 설교를 들은 듯 가슴이 시원해졌다. 피조물 형제자매를 들여다보는 일은 내 눈을 맑게 닦는 길일 뿐 아니라 내 눈을 그들에게 거울로 선사하는 길임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들꽃이든, 들풀이든, 나무이든, 돌멩이이든, 살아 움직이는 것이든, 사물은 내가 그 사물을 보는 그 눈으로 나를 보고, 하느님도 내가 하느님을 보는 그 눈으로 나를 보신다고. 큰 가르침을 품고 하산하는 길이 그저 가뿐하고 즐거웠다.
정원에 심겨진 나무들이 제법 푸름을 자랑하며 부활의 신비를 열어 보이고 있다. 철쭉들이 담녹색 잎사귀들 사이로 연분홍 꽃봉을 열어 바람에 일렁이고, 소나무가 녹갈색 순을 터뜨리더니 하루가 다르게 제 키를 더하며 황금빛 송홧가루를 흩날리고, 단풍나무가 새순을 틔우더니 수줍게 오므린 손바닥을 서서히 펼쳐 보이고, 매화나무가 온통 연녹색 잎으로 제 몸뚱어리를 두른 채 여린 가지를 새로이 뻗고, 배나무가 하얀 꽃잎을 떨어뜨리더니 녹황색 잎사귀와 줄기를 밖으로 밀어내고, 이에 뒤질세라 감나무도 맑게 비치는 연둣빛 잎사귀와 줄기를 다투어 벋고 있다. 딱딱한 나무껍질을 뚫고 파릇하니 돋은 새순들을 보고 있노라면, 캄캄한 무덤을 뚫고 나와 누리에 환한 빛을 지으시는 부활의 주님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섬으로 불어 드는 갯바람에 정원의 나무들이 옅은 녹색의 물결을 일렁이며 부활의 춤을 추고 있다.
눈을 들어 주위의 산야를 둘러본다. 어느덧 짙은 녹색의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사이로 엷은 신록의 물결이 산기슭을 타고 등성이로 번져 산마루까지 물들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산야 전체가 짙은 초록으로 물들 것이다. 갖가지 옅은 녹색계열의 빛깔로 물들어 싱싱한 생장의 축제를 벌이는 대자연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의 영혼도 물이 올라 푸릇푸릇해짐을 느낀다. 사람을 악하게 만들려면 몇 주 내내 녹색식물을 보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고, 기운이 달리면 숲 속으로 들어가 기운을 얻는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야기도 있다. 이는 모두 갖가지 녹색으로 아롱진 대자연 속에 사람의 영혼을 푸르게 하는 힘이 들어 있음을 알리는 말들이리라.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28.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XDW6%26fldid%3D3YE%26dataid%3D311%26fileid%3D1%26regdt%3D20060414113310%26disk%3D35%26grpcode%3Dpathofsoul%26dncnt%3DN%26.bmp) 자신의 몸을 녹색으로 물들여 치장하고, 푸르고 싱싱한 생장과 생산의 축제를 벌이며 신비를 드러내는 자연, 바라보는 이의 영혼까지 푸르게 물들이는 우주를 보면서, 이런 우주를 지으신 하느님의 빛깔은 녹색에 가깝다, 아니 신의 빛깔은 녹색이다, 라는 확신이 요즘 나의 내면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 나의 확신이 확실하다면, 녹색으로 물든 대자연은 하느님께서 거니시는 신의 정원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신학자 숀 맥도나휴가 말한 대로, 연인의 모습을 하고서 자연에게로 다가가 입 맞추고 포옹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인강 유역에서 꽃피어난 창조 영성의 대가인 빙겐의 힐데가르트는 창조주께서 자신의 정원을 얼마나 공들여 가꾸시는지, 창조주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자신의 정원에 다가가시는지를 풍부한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창조주의 능력에서 대지의 성분들이 지닌 생명력이 나오고, 이 활력은 이 세계를 껴안아 따뜻하게 하고, 촉촉하게 하고, 단단하게 하고, 녹색으로 물들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사랑으로 꾸며지고, 창조주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창조주의 사랑을 타고났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 세계가 이 입맞춤으로 감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영적 전통에 속하는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만물을 싱그럽게 하시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싱싱하고 영원한 녹색 청춘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하느님은 영원하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하느님은 영원히 젊으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늘 푸르시고, 언제나 싱그러우시며, 언제나 꽃을 피우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모든 행위는 새롭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니 말입니다.
날마다 새로움을 지어내어 경이를 자아내는 만물을 보면서 창창한 하느님의 청춘을 엿보고, 하느님의 빛깔을 청록으로 그려내다니, 이들 모두 대단한 통찰력과 상상력을 소유한 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하느님이 여시는 우주의 신비를 맑게 닦인 영혼의 창을 통해 내다보고, 문을 활짝 열어 그 신비에 뛰어드는 사람만이 푸르고 창창한 하느님의 빛깔에 젖어들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불같은 성령," "불 받아라!"를 외치면서 하느님의 빛깔을 적색으로, 하느님의 이미지를 불의 이미지로 그려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붉게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에 후끈 달아올라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작용과 폐해도 적잖이 드러나고 있으니,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의 이미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교회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심심찮게 터지는 대형비리 사건마다 기독교인들이 연루되고, 교단의 장을 선출하는 시기마다 거액의 돈이 뿌려지고, 교회 안에서 이는 불편한 잡음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이는 모두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린 탐욕과 허영을 살라버리지 못한 일부의 사람들이 불의 이미지를 잘못 휘둘러 사람들의 영혼을 온통 황무지처럼 메마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가 정말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너희의 왕으로 삼으려느냐? 그렇다면,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사사 9,14-15).
저마다 자기 안에 자리한 하느님의 부르심(聖召)에 응하여 하느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기름내는 일, 달고 맛있는 과일 맺는 일, 포도주 내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하면서 한사코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기를 만류하는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뒤로하고,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찾아가서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청하자, 가시나무가 내뱉은 무섭고도 섬뜩한 말이다. 잘못 다루어진 불은 산불을 일으켜 회복하기 힘든 황폐화를 몰고 오고, 잘못 다뤄진 불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영혼을 불모지로 만들어버린다. 불의 이미지는 제대로 써야 한다. 불의 이미지는 사람이 자기를 사르는 일에 써야 한다. 탐욕과 허영은 사람의 영혼을 잡아당겨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끈끈한 점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저마다 제 안에서 끈적거리는 탐욕과 허영을 사르는 데에 불의 이미지를 써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적색의 이미지에서 울창한 녹색의 이미지로 옮겨가는 목회,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사막의 이미지에서 숲의 이미지로 옮겨가는 목회를 실천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거친 풀만이 간간이 자라는 노르께한 사막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적황색의 불꽃으로 떠올렸다면, 갖가지 녹색으로 치장한 숲에 둘러싸인 우리는 하느님의 빛깔을 녹색으로, 하느님의 이미지를 녹색 정원의 창조자로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신의 녹색 정원을 거니시면서 입맞춤으로 만물을 감싸시고 포옹하시는 하느님을 영혼 속에 아로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성서는 자신의 정원을 푸르게 가꾸시는 하느님, 자신의 녹색 정원을 바라보시면서 "참 좋구나!" 하고 감탄하시는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그려 보이고 있다.
하느님께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거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11-13).
대지에서 푸른 움이 돋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온갖 풀과 과일나무들이 움터 올라 푸짐한 생산의 잔치를 벌이기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의 빛깔은 정녕 녹색일 것이고, 그런 하느님은 영원한 젊음의 하느님이실 것이다.
얼마 전에 창세기의 첫 장을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적황색 불꽃의 이미지를 지닌 태양을 온갖 녹색식물보다 하루 늦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참조. 창세 1,11-18). 이것은 하느님께서 적황색보다는 녹색을, 불꽃의 이미지보다는 울창한 숲의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녹색으로 아롱진 신의 정원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이다. 신의 정원에서는 불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조심스럽게 다루어진 불은 대우주에 깃들인 식물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여 생장과 결실을 도울 것이고, 잘 다루어진 불꽃의 이미지는 소우주인 사람의 영혼에 온기를 주어 푸르고 싱싱한 성장과 성숙을 도울 것이다.
우리는 녹색 빛깔로 자기를 두르신 하느님께 둥지를 틀고, 자기의 영혼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영혼을 푸르게 녹화하고, 교회와 우주를 푸르게 녹화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신의 정원인 우주를 파괴하는 짓을 자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개발과 소비에 떠밀려 가까스로 숨을 부지하고 있는 지구의 녹지를 보존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숲을 일구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정원이든, 황무지든, 민둥산이든,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한 그루의 나무라도 심어 가꾸고, 심은 나무에서 싱그러운 움이 돋기를 기대하여 하느님처럼 나무의 상태를 살피고, 대우주인 신의 정원을 자주 찾아가 울창한 녹음 속에 안겨 뛰놀고, 신의 또 다른 정원인 자기의 영혼과 사람들의 영혼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푸른 싹을 틔우는 영혼의 정원사가 그립다.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알프스 고지대에 깃들여 양을 치면서 고독과 침묵을 동무 삼고, 전쟁 같은 세상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저녁때가 되면 그저 묵묵히 굵고 튼실한 도토리를 100개씩 고르고, 다음 날 아침이면 양떼를 몰고 황무지로 나가 지팡이 같은 쇠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내고, 간밤에 정성껏 골라놓은 도토리를 한 개씩 그 구멍 속에 넣은 다음 흙으로 덮고, 어떤 때에는 자작나무를 심고, 어떤 때에는 너도밤나무를 심고, 어떤 때에는 보리수나무를 심고, 어떤 때에는 단풍나무를 심고 가꾸기를 34년 간 지속하여 상상도 하지 못할 넓이의 울창한 밀림을 이루어내고, 그 속에 온갖 새들이 깃들여 지저귀게 하고, 시내에 물이 콸콸 흐르게 하고, 사람들의 영혼 속에 푸른 희망을 심어주어 그 밀림에 둥지를 틀게 하고,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속에 축제의 기쁨을 가득 안겨준 엘제아르 부피에(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처럼 자신과 사람들의 영혼을 하느님의 녹색 빛깔로 물들이고, 교회와 우주를 녹화하는 정원사야말로 신의 빛깔을 짓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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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샬롬!좋은 글 보고 힘을 얻습니다. 승리하세요.
고맙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얼굴 뵌지 무척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이웃하신 전목사님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완연한 봄입니다. 나무 심고, 고추 모종 심고, 하여튼 땅과 대지를 읽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책상에 오래 앉지 못해도 즐겁습니다. 자연도 또 하나의 책이니까요
목사님께서 풀어 놓으시는 말씀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의 영혼도 물이 올라 신의 빛깔인 녹색이 됩니다. 읽고 다음날 또 읽고 그 그 다음날 또 읽다보면 그제사 깊은 물을 마시게 됩니다. 언젠가 올려놓으셨던 영상물..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주인공이 뇌리 깊은 곳에 박혀 있습니다. 황량한 곳
에 오로지 신만이 하실 수 있을 것같은 시간 활용법을 아는 성실하고 선한 한 사람의 실천과 노력이 ....영혼의 정원사가 되는 길... 순간뿐인 찰나가 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녹수님! 영혼을 파릇하게 물들이기에 더없이 좋은 신록의 계절입니다. 오늘도 정원에서 오전 시간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파릇한 생명들이 제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군요. 녹색 문장들이 잡아끄는 대로 따라가는 삶, 영혼을 싱그럽게 하는 길이자 마음 가득 파릇하니 물드는 길이기도 하지요. 함께 산핵하심에 감사!
참 좋은 게시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