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하얀 구름 몇 오라기라도 있어야 파란 빛이 돋보일 텐데 그렇지 않으니 순수하게 파란 빛 뿐이라 대비되는 게 없어서 아쉬운 느낌이었다.
우리 일행 7명(월봉 삼정 석당 아석 춘강 월전 인광 등)은 승용차 2대에 나누어 타고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주암 휴게소에서 한 번 쉬고 서순천으로 들어가서 시내를 관통하여 순천만에 도착하였다. 주차료 3,000원을 선불하고 들어갔는데 주차장은 한산하였다. 오늘은 손님이 적으려나?
우리는 경로여서 입장료 없이 들어갔다. 전에 왔을 적보다 조금씩 달라진 점이 있었다. 갈대밭 사이로 난 데크길을 따라 거닐었다. 유치원생들이 오늘 소풍을 와서 눈에 띠었다. 월전에게 들으니 유아의 경우 교사 1인당 3명이고, 유치원생은 교사 1인당 12명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선생님들이 인솔하고 있는 아이들의 수를 세어보니 12명이었다. 그 꼬마들이 작은 몸으로 갈대밭과 뻘밭을 상대로 교감하고 있는 모습들이 너무도 순진무구하여 우리도 저런 시기가 있었을 텐데……. 만감이 교차하였다.
긴 갈대밭을 꼬불꼬불 지나 용산전망대로 가는 등산로로 올라갔다. 소나무 우거진 숲을 지나면서 눈 아래 펼쳐지는 갈대숲이 황금 양탄자를 펴 놓은 사이로 긴 지렁이가 기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용산전망대 아래에는 너른 개펄에 둥글 둥글 원반 모양의 수초들이 다양한 색상으로 바닷물을 적시고 누워있었다. 인증샷을 찍고 내려오니 벌써 시간은 1시 가까워 있었다. 그리고 주차장은 거의 만차 상태였다. 오늘도 이곳에는 많은 사람이 방문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말 수가 적은 월봉이 아침을 대충 먹었는지 배가 고프다고 한 마디 하였다.
밥 먹을 곳을 찾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뒤졌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옆에 있던 춘강이 전화를 걸었는데 그 식당에는 자리가 없는데, 와서 조금 기다리면 된다고 하였단다. 주차장에서 나오면서 보니 주차장 출구 바로 옆에 있는 ‘대대식당’이었다. 춘강이 십오야 회장이었을 때 합동 나들이로 왔던 기억이 났다. 짱뚱어탕 값은 올랐지만 반찬이 다양해서 먹을 만 하였다.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학창시절, 교직생활 시절, 근래 벌어진 일상 들이 화제로 올랐다.
오후 2시가 훨씬 넘어 3시무렵에 식당으로 나왔다. 내가 벌교에 있는 ‘홍암 나철기념관’을 가자고 하였더니 모두 동의하여 그곳으로 갔다. 뒤따라 오던 월전의 차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여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전화하였더니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갔다가 되돌아온다고 하였다. 기념관에 도착하여 다시 전화하였더니 벌교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하였다. 어렵게 다시 길을 물어 30분 정도 늦게 도착하였다.
홍암 나철 기념관은 이곳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그가 태어났고, 그가 순명한지 100년되는 2016년에 국비 90억원 가량을 들여서 한옥 다섯 동으로 지어졌다. 그 안에 많은 자료를 모아 전시해 놓았다. 아직도 유족들이나 관계자들이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이 기념관을 잘 몰라 내 놓지 않고 있으며, 중국 동북삼성에도 유물들이 많이 흩어져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국내에도 독립운동가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유물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정황도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 자료들이 다 모이면 한층 내실 있는 기념관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홍암 나철은 한 마디로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서 이곳 배수관을 덮고 있는 철판에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나철은 구한말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황제의 대한제국 관원으로 재직하였고, 우리의 전래 종교인 단군교를 중광(重光, 거듭 빛나게)시켜 대종교(大倧敎)를 창안하였던 인물이다. 또한 대종교는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정신적 토양으로 삼아 청년들을 규합하고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여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이념적 푯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여기에 와서 우리나라가 걸어왔던 질곡의 시대에 활동했던 선현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학습의 장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근에 있는 태백산맥문확관, 채동선음악관과 함께 연계하면 훌륭한 체험학습의 장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