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섬 제주도여...
나는 제주도에 세번 갔다.
첫번째는 대학2년 때 합창단 친구 두명과 한라산 등반을 목적으로 갔었고, 두번째는 신혼여행, 세번째는 부산대학교를 홍보하기 위해서 갔다. 세번 모두 기억에 남은 방문이었다.
첫번째 방문: 곽지해수욕장에서의 추억.
1978년 여름 합창단친구 두명과 제주도로 일주일간의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부산 연안부두에서 저녁에 출발하여 아침에 도착하는 카페리를 타고 갈 적엔 ‘우리 갈 땐 카페리를 타고 가지만 올 땐 비행기 타고오자’고 얘기하며 갔다.
저녁에 떠나는 카페리호의 3등실에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갑판으로 올라왔다.
‘칠흙같은 밤바다를 아시는가?’
갑판에서 내려다본 칠흙같은 밤바다가 나를 삼키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제주항에 도착해서 우리는 바로 한라산으로 향했다. 합창단 친구들은 여러가지로 장점이 많은 친구였다. 한라산 중턱쯤에 우리는 어느새 서울에서 온 아가씨 일곱명과 일행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가파른 길엔 서로 손을 잡아주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하산길에 서울아가씨 중 한명이 작은어머니가 곽지해수욕장에 사신다며 곽지로 갈것을 권했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우리는 자연스레 곽지로 향했다.
곽지해수욕장!
맑은 물과 하얀 백사장
민가라곤 서울아가씨의 작은어머니 집밖에는 별로 없었던
자연 그대로의 바닷가였다.
밤에는 멸치잡이 어선에서 뿜어나오는 빛이 새로웠다.
밤에 침상위에 누웠다. 맑은 밤하늘에 수많은 별을 보았다. 나는 밤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운줄 처음 알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내게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어떤 가수가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라는 노래를 불렀는지,
왜 천문학자들이 별에 미치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일찍 나는 화장실을 찾았다. 집 뒤켠에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재래식 화장실에 가서 옷을 내리고 앉아 일을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겠지만 다른 집 화장실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불편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일을 볼 수 있다. 또 수세식 화장실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은 재래식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하다.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이리 저리 움직이는데 갑자기 아래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밑을 보았다. 그순간 나는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옷도 입지 않고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내 엉덩이 밑에, 엉덩이와 10센티도 안되는 거리에 돼지 한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그 ‘똥돼지’였다. 한참 뒤 놀란 가슴 추스리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그래도 명색이 남자인데 이만한 일에...’ 하며 다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인기척에 다시 돼지가 다가왔다. 나는 그 화장실에 다시 앉겠다는 생각은 이내 포기하고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해수욕장 공중화장실로 향했다.
우리는 서울아가씨들의 그 넘어가는 깔깔거리는 소리에 홀려 밥 사주고, 과자 사주고, 차비도 대신 내어주고, 심지어는 맥주도 사주면서 혹시 부산총각들에게 관심을 보이나하고 기대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땐 관심을 보이다가, 어떤 땐 또 냉정하게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닷새 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가버렸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주머니에 남은 돈을 다 털어냈다. 부산가는 배는 고사하고 겨우 목포가는 3등칸 배삯만 나왔다. 별 수 없이 우리는 목포가는 안성호 3등칸에 몸을 싣고 목포에서 부산오는 밤 완행열차를 탔다.
두번째 방문: 잠만 잤던 신혼여행
내가 제주도를 두번째 방문한 날은 1986년 12월 26일이다. 숫자와 날짜 개념이 별로 없는 내가 이 날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가 결혼한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을 참 쉽게 했다. ‘쉽게 했다’는 의미는 내가 한 일은 선을 본 것 외에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석사과정 마치고 7월초에 귀국해서 보니 J는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있었고 학교 다닐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여자들도 모두 ‘창 밖의 여자’들이 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선을 보기 시작했다. 하루에 선을 세 번 본적도 있다. 지금은 없어진 서면 대아호텔에서 12시에 2층 커피숍, 오후 3시 스카이라운지, 오후 6시 지하 양식당....
현재의 아내는 여덟번째 선을 본 여자였다. 나는 여덟번째인지 기억 못하나 아내가 어떤 땐 자신을 쉬운 자리에서는 ‘나는 여덟번째 여자었습니다’라고 소개하곤 한다. 아내와 만난 날이 8월 10일 경이라고 기억하는데 약혼을 8월 25일 했다. 두번째 만남에서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라고 청혼했고 다음 만남에서 승낙을 받았다. 나는 아직도 왜 아내가 나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는지 모른다. 이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혹시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아무 것도 증명된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약혼한 사흘 뒤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박사과정 한 학기를 마치고 12월 23일 일시 귀국해서 26일 결혼식을 치렀다. 23일 골치 아팠던 조사방법론 Term Paper를 제출하고 공항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있다.
제주도에서의 신혼여행은 기억에 남는 거은 잠을 잔 것 외에는 없다. 택시를 대절했는데 2박3일의 신혼여행 동안 아침마다 기사양반이 한참동안 기다려야했는데 기사양반이 웃으면서 ‘도대체 아침에 무얼했길래 이렇게 늦게 나오십니까?’하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나는 마지막으로 제출한 그 paper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결혼해서 아이 둘이 태어나고 나서야 나는 아내가 나와 결혼한 이유를 알았다. 아내 또한 나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었다. 유학병이었다. 유학병은 유학을 가지 않으면 낫지 않는 병이다. 유학은 가고 싶은데 집에서는 결혼하지 않으면 유학을 보내줄 수 없다고 하던 차에 한 유학생이 선을 보자고 하길래 선을 본게 나였다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내가 처음 선본 남자였다고 했다. 어수룩하게 생긴 것이 마음에 들었다나... 어차피 결혼이란 서로 서로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
세번째 제주도 방문: 폭우 속의 제주여고
세번째 제주도를 찾은 것은 2000년 8월이었다. 그 때 나는 부산대학교 교무부처장을 하고 있었다. 교수된지 9년만에 43살 나이에 교무부처장을 했으니 이른 나이에 본부 보직을 맡은 셈이었다. 당시 교무부처장의 주요 업무 중의 하나는 입시업무였다. 나는 그해 8월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학교홍보자료(이 홍보자료는 내가 교무부처장을 그만 두고 나서도 한동안 학교홍보자료로 사용되었다)를 들고 절친하게 지내는 친구 교수 두명과 부산, 경남, 제주도의 고등학교를 돌아다녔다.
2000년 8월 어느날 나는 친구 교수 두명에게 제주도에 가자고 했다. 제주도를 찾은 이유는 어느날 입학관련 서류를 보니 제주도에서 부산대학교에 지원하는 학생이 1년에 열명도 되지 않았다. 내가 학생일 때는 제주도에서 온 학생들이 꽤 되었는데 왜 이렇게 제주도 학생이 오지 않는지 제주도를 직접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미리 렌트해두었던 차를 타고 미리 전화로 약속해 두었던 첫번째 방문 학교인 제주여고로 향했다. 그래도 부산대학교 대표로 고등학교를 방문하는 것이라 세명 모두 더운 여름이지만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었다. 한라산 중턱쯤 갔을까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폭우가 보통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길에 물이 들이차고 차는 움직일 수가 없고... ‘아! 이런걸 게릴라성 폭우라고 하는구나..’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그러나 폭우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어느 순간 우리 세명은 거의 동시에 양말과 넥타이를 벗어 양복주머니에 넣고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렸다. 여차하면 차를 두고 도망갈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동시에 차에서 나왔다. 그리고 물이 없는 곳으로 뛰었다. 생각해보시라. 학교 홍보하러 양복차림으로 제주도를 찾은 부산대 교수 세명이 윗옷은 양복차림, 바지는 가랭이를 반쯤 걷어올리고, 구두를 집어들고 폭우 속에 뛰던 모습을...
아! 환상의 섬 제주도가 아니라 공포의 섬 제주도였다.
제주여고!
평준화되기 이전엔 제주 제일의 명문여고라고 했다. 우리 세명은 이정표를 보며 제주여고를 찾아갔다. 차안에서 에어컨 제일 크게 틀어놓고 젖은 양말과 바지가랭이며 말리며... 제주여고 담벼락을 돌아 정문에 들어서던 무렵 운전을 하던 친구 교수가 ‘참, 이상하네, 제주여고 담벼락에 웬 밤꽃 냄새가 나지...’ 나는 그 말의 의미를 한참 뒤에야 알았다. 제주여고 정문에 가니 무언가 이상했다. 무장경찰이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제주여고는 공부를 많이 시키는갑다. 학생들이 농땡이 치지 못하도록 무장경관이 보초서고 있네’라고 생각할 찰나, 무장경관이 우리에게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조수석에 있는 내가 창문을 반쯤 내리고 ‘부산대학교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무장경찰이 ‘부산대학교에서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묻길래 내가 ‘홍보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순간 그 무장경관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무언가를 더 묻고 싶은 표정을 짓더만 경비실로 가더니 자기 상관을 데리고 왔다. 상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부산대학교에서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때 친구 교수가 재빨리 ‘박교수, 가자 여기는 제주여고가 아니라 삼일공사다 삼일공사!’ 사실 난 그때 삼일 공사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몰랐다. 방위로 소집해제당한 넘이 삼일공사라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있담... 돌아서 나오는데 소총으로 무장하고 철책에서 보초서던 방위가 우리에게 ‘받들어 총!’ 하는 것을 보았다. ‘저 방위가 고참을 알아보는구먼...’ 했지만.. 상관이 나와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급히 돌아가는 것을 봐서는 우리가 상당히 무게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거구먼... 아마 우리 가고 난 뒤에 그 방위는 아마 ‘방위는 역시 방위’라고 기합 많이 받았을거라...
나는 지금도 제주여고에서 그 때 진학담당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을 잊지 못한다.
“부산대학교에 우수한 학생을 보내달라구요? 멀리서 여기까지 오신 정성을 생각해 학생들에게 권고를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안갈걸요. 70년대, 80년대 초반까지는 집안형편은 어렵지만 우수한 학생들이 배를 타고 부산대에 많이 갔지요. 그러나 요즘같이 살만한 시절에는 다 서울로 갑니다. 서울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울 가는 비행기 삯이나 부산가는 비행기 삯이나 비슷하고, 무엇보다 서울김포공항에 내리면 서울 어디든지 갈 수 있지요. 그런데 부산김해공항에 내리면 갈 곳이 없어요. 지하철이 있습니까? 시내버스가 있습니까?“
나는 이 얘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아! 부산대학교가 잘 되려면 먼저 부산이라는 도시가 살기에 매력적이어야 하는구나?
제주도를 다녀온 뒤 교무부처장 사표를 냈다. 총장님이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보직이 나의 학문세계를 망치고 있다고 느껴졌다. 논문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나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강의가 소홀해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문득 강의 시간에 횡설수설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미련없이 교무부처장 사표를 내고 연구실로 올라왔다.
나는 가끔
다음 안식년은 제주도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별이 쏱아지던 곽지해수욕장에도 다시 가보고 싶고
한라산 백록담에서
전복따는 해녀들의 희망가득 굳센 삶
활기찬 숨소리가 백록담을 에워싸면...
월출봉의 뜨는 달 얼굴 내미네...‘
이 매혹적인 멜로디를 멋지게 불러보고 싶다.
(2007년 8월에 쓴 글)
첫댓글 갈수록 기록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교수님... 뵌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마치지못한 논문탓인지 길어질만큼 길어져버린 제 꼬리 끝이 아직 학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가끔 들립니다. 일을 하면서도 기록하지 않으니 비슷한 케이스가 생겨도 항상 찾는다고 볼일을 다 봅니다. 그리고 이 생활 10년을 바라보는 시점 .... 돌아보니 아무것도 남은 것도 없는 것같아 요즘은 부쩍 기록...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과거 이야기들을 쭉 읽어보며 글로 남긴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껴봅니다. ^^
교수님의 하고 많은 글귀 중에 저는 왜, '어차피 결혼이란 서로 서로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 '이란 글에 웃음이 터졌을까요...ㅋㅋ.. 그리고, 교수님 수필집 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