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5:13-17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이 세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가장 많이 갈구하는 것은 사랑과 우정입니다. 즉, 좋은 친구를 참으로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이기주의와 쾌락주의에 사로잡히면서
인간들은 사람을 이용해 먹고 쓸모 없으면 차 버리는 무서운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참된 친구를 얻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정이
메마른 사회와 오해와 불신이 가득한 이 세대 사람들은 늘 외로움 가운데 어디선가 참된 친구를 얻기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승리한 인생, 성공한 인생은 물질, 명예, 권력, 인기 같은 것들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친구를 많이 얻은 자들을 성공한
인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친구들은 복음을 통해 얻은 자들이거나 또는 함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친구를 얻을 때 그 기쁨과 보람은 무한합니다. 더욱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동역한다면 그 우정은 이 땅을 사는 동안 가장 보람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교회 내에서 친구를 얻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리의 친구
다섯만 있으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절대 신앙 및 삶에 있어서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친구로 인하여
함께 깊어지는 것을 예찬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들은 그 얼굴이 빛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흠집투성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정’만큼은 온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정말로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고 싶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친구들을 얻기
바랍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면류관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빌 4:1).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인생을 성공했다고 봅니다. 결코 온갖 권모 술수를 사용하여 황제가 된 네로를 성공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삶이
성공적이라고 인정합니다.
[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라고 선포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3-14)
또한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4).
예수님은 우리를 내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로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정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구로서 부탁한 것은 주께서 명하신 대로 너희가 서로 친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위하시는
주님의 의리를 보여주신 것이며, 그분의 친구된 우리의 책임은 그분의 계명대로 우리 역시 다른 성도들에게 의리 있는 친구가 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리의 척도는 십자가입니다. 진정한 우정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메시지가 담긴 희생적인
사랑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에 참된 의리는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날 때 친구 간의 참된 사랑인 필레오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친구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필레오의 사랑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언약입니다. 의리입니다. 서로를
위하여 생명까지 내어 놓는 사랑입니다. 의리는 각각의 성별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는 남녀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물론 남녀 관계의
의리는 결혼입니다. 남녀 관계의 의리는 순결이며 정절입니다. 변함 없이 언약 속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최고의 관계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의미하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친구 사이의 의리나 결혼이나 똑같이 언약적인 면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 비겁이
무엇입니까? 어려운 때에 언약, 곧 의리를 져버리는 것입니다. 간신배가 무엇입니까? 위험이 다가올 때 자기 하나 잘 살자고 친구와 우정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배신자로는 가롯유다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의리의 사나이가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의리는 신기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예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물멧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넘어 뜨렸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나라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기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에게 큰 호감을 갖게 되고
그 둘은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친구가 됩니까?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에 의해 친구가 됩니다.
[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 18:1, 3-4)
이후 이들의 언약은 한번도 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리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향한 사랑과 우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언약에 의한 의리 때문에 단 한번도 다윗이 왕이 되는 것에 대하여 질투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에게 알려주어 도망하게 합니다. 이 일 때문에 다윗대신 요나단은 사울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 하고 온갖 욕설을 듣게 됩니다.
[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32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34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삼상 20:30-34)
그 후 몇 년 뒤에 요나단이 블레셋 군사와의
전쟁에서 죽게 되고 다윗이 왕이 됩니다. 그때 왕이 된 다윗은 요나단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지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 1:26).
심지어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을 생각하면서 요나단의 가족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결국 간신히 살아남은 두 발 절룩발이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냅니다.
[
1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4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5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6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9 왕이… 이르되 …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
(이에)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삼하 9:1, 2-8, 9).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며 의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왕자 대접을 해주며 크게 후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 속에서 평생 깨지지 않았던 다윗과
요나단의 의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골리앗을 이긴 후에 이스라엘을 살려내었지만, 그러나 백성들이 마음이 다윗에게
향하자 사울 왕이 다윗을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울 왕은 평생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이 살아 있는 동안 그
한심한 왕의 질투로 인하여 도망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서 갈 곳이 없어 방황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매우
비참하였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아둘람 굴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곳은 캄캄하고 어두운
동굴이었습니다. 다윗이 그곳에 있을 때는 버림 받은 자로 있었습니다. 아내 미갈을 잃었고 가정을 잃었으며 직업도 잃었습니다. 자기를 좇았던
충성된 사람들과 친구들, 특히 친구 요나단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만이 그를 죽이려고 찾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오직 혼자 외로이
굴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이 그곳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약 400명의 사람들이 굴로 모이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환란 당한 자들,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즉, 세상에서 유린당하는 약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이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한결같이 다윗이 위대한 충신들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다윗과 그들 사이에는 의리와 충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 약한 자들이었지만 의리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들의
의리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사무엘하 23장을 보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이름들은 다윗을 향하여 온전한 의리를 지켰던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특히 다윗의 세 용사가 나오는데 그들이 보여주는 충성과 의리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에 있을 때에 같은 시간에 불레셋 군사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용사들의 사건이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13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더라.
](삼하 23:13-15)
이 사건 기록의 배경은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600명의 용사들과 함께 있었던 때입니다. 오랜 굴속 생활로 인하여 다윗은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고달팠겠습니까? 끝도 없는 오랜 굴속 생활로 다윗은 좌절하고 낙망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유를 그리워하며 외칩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그러자 다윗의 소원을 들은 세 용사가 800명의 적군 용사들을 죽이고 물을 구해온 것입니다.
[
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삼하
23:16-17)
다윗은 그들이 가져온 물을 보면서 고백합니다. “이 물은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면서 가져온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피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그 물을 부어 드립니다.
이것이 좌절과 고통 속에서
자신들을 길러준 다윗의 사랑과 배려에 대한 부하들의 충성과 의리였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언약을 하신 후, 언제나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주를 망각하고 방황하여도 주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자가 곧 나의 친구들이라.”
주께서는 이러한 언약 및 의리적인 사랑으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예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인 사랑,곧
의리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이제 의리의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이는 예수님을 친구로 삼는 자는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의 충성과 의리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1:33-38)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의리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로마 네로의 핍박 시절에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의리 공동체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로마 군병에게 끌려가서 고문을
받으며 죽게 되어도 절대로 카타콤의 비밀 예배 장소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서로 물고기의 사인으로 그리스도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진리를 향한 의리의 공동체를 보는 자들마다,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고 서로 존귀히 여기며 보호하였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의 의리였고 주를 향한
충성이었습니다.
교우들 중에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다 함께 난리를 치며 돕는 것입니다. 누가 경사를 맞으면 다같이 경사가 납니다.
누가 불치의 병에 걸리면 다함께 기도회에 몰려와서 힘있게 기도합니다. 그러며서 계속 전화해 주고, 위로의 선물도 가져다 줍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면 너무 신나고 감격스럽고 기쁘지 않겠습니까? 누구 잘되면 배가 아파서 아곳 저곳 다니며 비방이나 하고 뒤에서
방해나 하는 자라면 그가 어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버드 셜버그라는 그리스도인은 “당신이 친구에 대해 험담한다면 결코
당신은 의리의 친구를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사에서 위대한 인물 중에 하나였던 찰스 스퍼전 목사님이
말합니다.
“우정은 인생의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의리의 친구가 없는 사람은 고독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국
일제 신사 참배 때에도 우리 성도들은 대단한 의리를 보입니다. 안이숙 여사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읽어보면 목회자와 성도들의 의리가
대단하였습니다.
일본 군을 피하여 숨어 있는 목회자를 그리스도인들이 몇 년 동안 숨겨서 먹인 일들이 흔하였습니다.
일제 신사 참배를 생각하니까 재미난 실화가 생각납니다.
일본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건설업자들이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 된 개인집을 사서 헐게 되었답니다. 이때 인부들이 지붕을 뜯다가 몸 안쪽에 못이 박힌채 벽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살아 있는
도마뱀을 발견하였습니다. 집 주인을 불러 이 못을 언제 박았느냐 물었더니 당연히 집을 지을 때 만 3년 전에 박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대답을 듣고 너무 신기해서 이 도마뱀이 몸에 못이 박힌 채 3년을 살았다는 말이 되는데 어떻게 살았을까
하며 궁금해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신기해서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그 도마뱀을 지켜 보았습니다. 조용히 몇시간 기다리고 보고 있으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와서 그 도마뱀에게 먹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년 전에 못에 박힌 이 도마뱀을 위하여 친구 도마뱀이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먹이를 구해서 물어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리가 우리 일제 신사 참배 때 교회에 가득하였던 의리였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옥중 성도로 잘 알려진 분이십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한번은 한상동 목사님께서 일제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들이 가하는 고문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피를
흘리며 인두로 데이고 또한 뼈를 깍는 고문의 고통을 당한 한상동 목사님은 그 날 밤에 더러운 감옥에 누워 있으면서 마음이 약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그래, 내일은 내가 항복해야겠다. 하나님도 나를 이해하실 것이다. 너무 고통스럽다. 그 누군들 이러한 고문의 고통을
감당하며 이기겠는가?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것이고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
그러면서 항복하려는 순간 성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뀝니다.
‘내가 목사인데 내가 항복하면 나를 믿고 바라보던 형제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심한
고문을 받으며 끝까지 이겨냅니다. 왜 그렇게 이길 수 있습니까? 형제들의 기대를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리입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주 예수님을 향한 충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죽더라고 성도들에게 실망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의리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 옥중 성도들이 보여준 믿음이요 의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곧, 너희는 나의 친구이니 나처럼 의리의 사람들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아가페의 사랑이 어떻게 필레오의 사랑으로 나타났는지 경험하게 하였으니 너희도 의리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한번 언약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오해가 있어도,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손해 보더라고 언약을 파기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의리의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친구의 의리를 기뻐하시는지, 주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도 가만히 보면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친구를 위한 의리의 기도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은 주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예화입니다.
[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눅 11:5-8).
즉,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다른 친구로 예표되는 주님께 와서 강청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친구에게 사랑과 우정을 나타내기 위해 주께 나아가 강청하는 것이 중보기도인데 이러한 기도를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있을 때 북군에서는 전쟁에 나갈 군인을 징용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모아서는 제비를 뽑게 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가족도 많고 부모도 계시고 전쟁에 나가면 그 가족을 전혀 부양할 사람이 없는 그러한 젊은이가 그만 제비에 뽑혀서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보고 제비에 걸리지 않은 친구들 중에 하나가 자신은 부모도 안 계시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 대신에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자원합니다.
그때 전쟁에 나간다는 것은 죽을 확률이 너무 많은 것인데,
이러한 용감하고 의리있는 젊은이가 자원하자 그 징집하는 책임자가 감격을 하면서 그 젊은이로 하여금 전쟁터에 대신 나가도록 허락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전쟁터에 나가서 북군을 위해서 싸웁니다. 한편 동네에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남게 된 젊은이은 자기 대신
전쟁터에 나간 친구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깊고 큰 감격이 있었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었읍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문을 보면 얼른
전쟁 뉴스부터 먼저 보고 특별히 어떤 곳에 격전이 있다고 하면 거기 혹 자기 친구가 들지 않았는가 해서 먼저 그것부터 살펴보고, 또 이따금 죽은
사람의 명단이 나게 되면 행여 자기 친구가 전사하지 않았나 하고 제일 먼저 그것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은 큰 격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 친구가 그 격전 가운데서 싸울 수 밖에 없었고, 그 다음에 신문에 나는 것을 보니까 죽은 사람의 명단 가운데, 그
친구의 이름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때 그 신문을 들고 있던 이 청년은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그 친구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당장 그 싸움터에 나가서 자기 대신 죽은 그 친구의 시체를 친히 가져다가 자기 가족의 공동 묘지에 그 시체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는 간단히 "나의 영원한 John Smith! 그는 나를 위하여 죽다." 라는 묘비를 세웠습니다.
"그는 나를
위하여 죽다."
이 친구의 의리의 이야기는 그 당시 북군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친구로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읍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바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며 언제나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도 예수님의 의리를 기억하면서 그분을 감사하고: 또한 이제는 예수님을 닮아
의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의리있는 참된 우정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들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너무나 간교하고 쉽게 변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입장이 바뀌면 가롯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리를 지키려면 내 힘으로는
되지 않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의리의
친구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기도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제자이자 친구는 디모데였는데 그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 디모데와의 우정에 언제나 감사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딤후 1:3).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 간에 서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우정에 대해서, 성도들의 의리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바랍니다. 잠깐 시간을 내어 우리 주위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을 가져보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는 앞으로 복음의 말씀을 먹으면서 주의 언약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공동체는 다름 아닌 의리의 공동체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예수님께서 아가페적 필레오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할수록 아가페적 필레오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와도 의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존경하고 따를 만한 목회자를 마음 속에 두시고 그 목회자와 평생 의리를 지키며 신앙 생활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도들에게는 가장 큰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간의 의리에 있어서도 내 자신이 먼저 의리의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이는 주께서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먼저 우리에게 주님의 의리를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가지셨던 그러한 자세를 가진다면 우리의 인생과 공동체는
엄청난 사랑의 역사로, 복음의 역사로 가장 행복하고 위대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내 친구 예수님을 기억하시면서 이 시간 다함께
우리의 이기심과 변덕을 회개하고 더욱 주께 충성할 것을 다짐하기 바랍니다. 호흡이 마치는 그날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과 의리를
다 하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 영광에 이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