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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1)-북한 사회주의와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의 의의
북한 지도집단과 항일무장투쟁
책이름 : 해방전후사의 인식 5편
펴낸곳 : ㈜도서출판 한길사
펴낸날 : 개정 제7판 발행 - 1990년3월5일
글쓴이 : 이종석(성균관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글순서
1부 : 북한 사회주의와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의 의의
2부 : 기존 연구의 시각문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
3부 : '가짜 김일성론'과 '피의 숙청론'에 대한 문제의식 제기
4부 : 만주사변 후 항일유격대의 조직과 유격근거지 건설
5부 : 일제관헌자료에 따른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설립
6부 :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조선인 최고지도자로 부상한 김일성
7부 : 일제의 대토벌과 유격근거지의 해체
8부 :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임무
9부 : 김일성주도아래 조국광복회의 창립과 장백근거지 건설
10부 : 국내진공전투의 감행과 만주 상황의 악화
11부 : 소, 만 국경으로의 이동과 소부대 활동으로의 전환
12부 동북항일연군교도려와 항일유격대의 대일전 참전
13부 : 유격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
14부 : 조국광복회의 10대 강령의 내용과 진위 논란
15부 : 조선공산당 창건을 위한 조국광복회의 조직과 활동내용
16부 :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북한정권 수립과정에 미친 영향
17부 :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민족통일전선 운동에 미친 영향
1부 : 북한 사회주의와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의 의의
1. 항일무장투쟁 연구의 의의
1) 북한 사회주의와 항일무장투쟁
▷ 1930년대의 공산주의 운동을 논할 때 우리는 흔히 이 운동의 주류를 당시 국내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던 몇 가지 운동들
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나 혁명적 농, 노조운동 등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주류를 찾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의 역사적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1930년대와 1940년대 초(해방 직전)
까지의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 나아가서 민족해방운동의 흐름을 제대로 논하려면 무엇보다도 만주와 조선 북부지방에서 전개
되었던 항일무장투쟁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그 이유는 제국주의자들에게 국토를 강점당하고 국가의 주권을 유린당한 식민지 민중에게 있어 주권을 찾기 위한 저항의
최고의 형태는 '무장투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 오늘날 북한은 해방 후 그들이 이룩한 인민정권의 건설과 개혁의 추진이 "항일혁명투쟁시기에 내놓은 인민정권건설노선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에서 얻은 귀중한 경험"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지도집단의 핵심을 이루어 온 항일유격대 출신들이 겪은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 수많은 항일유격대 출신들이 자신들의 투쟁 경험을 회상기 형식으로 발간해낸 '항일 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1∼12,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1∼4 등이 단순한 역사교재로서가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생활의 전범이 담긴 학습교재로서
수십 년 동안이나 광범하게 읽히고 있다.
- 그 결과 "생산도, 학습도 항일유격대 식으로!"라는 구호가 오늘날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채 북한 주민들의 생활 속에
침투해 들어가고 있다. 또한 해방 이후 지금까지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유격대 출신들이 북한 지도집단의 중핵을 이루어왔으며
최근에 와서는 그들의 후예들에 의해서 이른바 '항일혁명 전통'의 사상적, 혈통적 계승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북한 사회에서 유일 사상으로 자리를 잡은 주체사상 역시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을 빼놓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 문헌들의 입장이기도 한다.
- 한마디로 북한 사회는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던 지도자들을 매개로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해방 이후 북한 사회이 건설과 밀접히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논리대로라면 해방 후 혁명건설과정을 이끌어온 항일무장투쟁시기는
이른바 '혁명전통'이 근원이며 북한 사회주의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다.
▷ 물론 북한이 주장하는 이러한 항일무장투쟁이 '역사적 경험'이란 앞의 서술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단순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무력투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은 단순한 항일무력투쟁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유격근거지에서이 개혁들,
조국광복회 활동 그리고 항일무장투쟁 전기간에 걸쳐 견지되었던
반일민족통일전선에서 얻은 경험들을 총체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집단의 총체적 의미에서의 '역사적 경험'은 고사하고
항일무장투쟁의 사실조차도 강력히 부인하는 흐름이 또 한편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의 흐름이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북한 연구의 주류를 이루어왔다.
뿐만 아니라 한국 근, 현대사의 기술에서도
이러한 부정의 원칙이 철저히 관철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 예컨대 국내의 대표적인 국사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한국사신론(일조각, 1985)'이나
'한국통사(을유문화사, 1979)' 등에는
1930년 이후 만주에서 전개되었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고
'한국민중사 Ⅱ(풀빛, 1986)'의 경우도 겨우 2, 3쪽을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조선전사(과학백과사전출판산, 1979∼82)'는 전 33권 중 7권(제16권∼제22권)을
여기에 할애하고 있다.
▷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가?
- 만약 이 물음에 대해서 누군가 올바른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미결상태로 남아 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북한 역사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집단의 초기 정통성 문제' '북한 사회주의 발전의 역사성 문제'
'올바른 민족해방운동사의 정립 문제' , '주체사상의 역사성 문제' 등
아직까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못한 문제들을 해명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 물론 이 글이 이러한 거대한 작업을 완전무결하게 해낼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규명작업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미숙하게나마 초보적인 발걸음을 대디딜 뿐이다.
-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명을 위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면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아직까지도 끊임없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궤적을 실증적으로 규명해보겠다.
둘째, 위의 사실에 기초하여 북한 지도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경험
(유적근거지에서의 개혁, 조국광복회 활동 등)을 고찰해보겠다.
셋째, 항일무장투쟁의 경험들이 해방 직후 북한 사회에서 진행된
'인민정권의 수립과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겠다.
2) 항일무장투쟁과 동만(간도지방)
▷ 이 글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집단의 무장투쟁, 유격근거지에서의 민주개혁,
조국광복회의 조직과 활동, 반일민족통일전선의 전개 등 이른바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 따라서 시간적 범위는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항일투쟁이 본격화되는
1931년 말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의 기간으로 한다.
단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이 해방 직후 북한의 인민정권수립과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서 1945년 8월 15일에서 1947년 2월까지의 기간에 대한
부분적인 검토가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항일무장투쟁의 활동배경으로 삼았던 동만과
장백현을 중심으로 한 남만에 한정한다.
특히 이 연구의 중심적 공간범위가 될 동만과 장백지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조선민족해방운동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 여기서 동만(東滿)이란 주로 오늘날의 연변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 첫째, 이 지역에는 표1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인구구성상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인구의 절대적 우세의 당연한 결과로
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유격대의 성원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표2 참조)
표1 : 간도지방 지역별 인구표(1930년 12월 현재)
표1 : 간도지방 지역별 인구표(1930년 12월 현재) | |||||
국적별 | 연길현 | 화룡현 | 왕청현 | 훈춘현 | 계 |
조선인 | 196,242 | 102,674 | 40,101 | 50,349 | 388,366 |
중국인 | 50,770 | 5,984 | 22,853 | 38,295 | 117,903 |
계 | 247,285 | 108,731 | 63,108 | 88,989 | 508,613 |
조선인비율(%) | 78.7 | 94.4 | 63.5 | 56.6 | 76.4 |
표2 : 간도지방 중국공산당 직접행동원의 민족별 현황(1931년 2월) | |||||
지역 | 조선인 | 중국인 | 계 | ||
연길현 | 220 | 20 | 240 | ||
화룡현 | 130 | 10 | 140 | ||
왕청현 | 150 | 20 | 170 | ||
훈춘현 | 20 | 20 | |||
계 | 520 | 50 | 570 |
- 따라서1934년 3월에 이 지방에 근간을 두고 조직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 수차례 조직형태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 둘째, 간도지방과 장백현은 각각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를 끼고
지리적으로 조선과 인접해 있다.
비록 만주땅이기는 하나 이 지방의 경제, 문화적 사회관계는
거의 조선과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1933년도 간도지방의 나라별 무역액을 살펴보면
조선과의 무역이 전체 수출의 약 99.6%, 전체 수입액의 67.2%를 차지한 반면
일본과이 무역은 전체 수출의 0.4%, 전체 수입액의 33.3%에 불과할 정도로
이 지방은 사회경제적으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 셋째,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사회적 관계의 열악성으로 말미암아
농민이 절대 다수인 이 지역의 조선인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민족적, 계급적 각성이 높은 수준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조선농민의 사회적 관계의 열악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민족별 토지소유 및
토지소유관계 현황은 표 3, 4 참조)
- 넷째, 장백현의 경우 1936년 5월 5일 창건되어 백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국광복회의 만주 쪽 근거지였다.
장백현의 최남단인 압록강 상류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던 조선인 부락들이
조국광복회의 최초 조직작업의 대상지였으며,
조국광복회를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 6사의 병력충원의 주요 공급지였다.
- 참고로 당시 장백현 일대에서 조국광복회 조직을 통해 6사에 입대한 사람 가운데
최근까지도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김용연(1937년 여름 입대, 현 군상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성국(1936년 가을 입대, 전대사, 현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전문욱(1937년 4월 입대, 현 강건종합군관학교 교장, 군상장),
조명선(1937년 여름 입대, 현 노동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두익(현 노동당 군사위원, 군대장) 등이 있다.
▷ 이상의 조건을 갖춘 동만(간도)지방은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 발발)이래
- 조선인의 자치문제와 중국공산당 소속이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위상을 놓고 중국공산당과 끊임없이 내연시켜온 갈등의 발원지였다.
이러한 갈등의 내연은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조국광복회가 창건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 그러나 만주에서의 조선인들의 사회적 관계의 열악성,
일제의 집요한 민족내부분열공작,
중국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중국인들의 민족배타주의 등은
항상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문제를 생각하게 했으며
그때마다 동만의 조선 민족이 그들의 사고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라 할 것이다.
- 이렇듯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줄곧 이 지방을 중심으로 항전해온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동만지방은 비록 일국일당주의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투쟁하고 있으나
그들의 투쟁이 곧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정신적 결의를 다지는
확실한 물적 담보물이었던 것이다.
3) 분석관점과 자료의 문제
▷ 이 글은 특정한 이론적 자원을 동원한 분석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파악과 연대기적 서술에 중점을 두면서 전개될 것이다.
- 다만 공산주의 운동은 어느 상황에서나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에
유념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투 중심의 단순한 무력투쟁이 아닌
통일전선을 꾸려나가고 유격근거지에서 개혁을 실시하는 '정권 건설'의 측면을
보다 중요하게 부각시키는 이른바 '총체적인 조망'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북한 사회주의의 자기발전과정(이 속에 보편적 발전 메커니즘과
그 특수성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해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필수적인 연구방법이라고 본다.
- 자료활용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일제 관헌자료와 북한의 공식 간행물들,
그리고 중국에서 간행된 출판물들을 1차자료로 이용하고,
국내외의 각종 논문과 단행본들을 2차자료로 참고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활용할 1차자료의 종류별 장단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일제 관헌자료
- 이 자료들은 당시 만주지방과 조선의 지배자였던 일제가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 출판한 것들로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는다.
첫째, 사건의 경우 피검자들이 죄를 덜기 위하여 사실을 위장 진술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둘째, 이 자료들에는 당시 항일유격대 토벌에 나섰던 일본인들과 유격대에서 흘린
거짓 정보가 걸러지지 않고 사실과 혼재되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일제 관헌자료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한, 중국의 문헌들과 비교, 검토하고 이 자료들을 정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 북한의 공식 간행물들
-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무장투쟁의 주체였던 북한의 간행물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 문헌들이 시기마다
항일무장투쟁의 내용을 조금씩 달리 기술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이유는 북한의 문헌들의 '사대'와 '파벌'로 얼룩졌던 과거와 단절하면서
'자주성'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해석해온 데 기인한다.
- 이러한 역사의 재해석은 결과적으로 북한 문헌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게 하였으며
초기 간행물들과 최근 간행물들 사이에 나타나는 일부 내용과 문구의 차이들은
'가짜 김일성론'을 주장하는 국내외 연구자들의 좋은 표적이 되어왔다.
따라서 북한 문헌들을 참고할 때는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대한
초기 문헌에서부터 최근의 문헌까지 비교해가면서 검토해보아야 한다.
- 그러나 북한 문헌들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사실에 대한 '과대포장'은 빈번하게 있어도
근본적인 '허위 날조'는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북한 문헌들과 북한 문헌의 허위를 주장하는 연구자들 사이에 쟁점이 되는
역사적 사실들은 대부분 근본적으로 그 사실 여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사해석의 문제(=사관의 차이)인 것들이 더 많다.
- 이 문제에 관한 대표적인 예로는
1934년 3월에 창건되었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조선인민혁명군 문제를 들 수 있다.
1934년 3월 중국공산당 동만특위가 동만 각 현의 반일유격대를 통일적으로 편성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창건한 것은
일제 관헌자료뿐만 아니라 모든 중국 문헌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 북한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공식 역사서에서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리나영 저)'에서부터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 부르고 있다.
임춘추의 회상기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당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동만반일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개편된 것으로서 그 구성이 전부 조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조선인민혁명군 혹은 조선홍군 등으로 불렀다.
우리는 그 후 동북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인민혁명군이라고 하였고,
조선에 나와서 활동할 때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여기에 대해서 이정식, 스칼라피노는
그 구성이 전부 조선 사람으로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임춘추의 허위기술이라기보다는 착오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임춘추는 같은 책 다른 부분에서는
이 부대가 조선과 중국 두 인민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조선인민혁명군론'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
예컨대 '조선로동당력사교재(1964년판)'에는 인민혁명군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1968년판 백봉의 책에도
1936년 2월 남호두회의 이후 조선 북부 국경지대로 진출하면서부터
김일성의 항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부르게 하였다고 기술함으로써
1936년 이전의 조선인민혁명군 명칭의 사용을 간접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1934년 3월의 조선인민혁명군 창설론은 정착되었다.
-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34년 3월에 동만에서 창설된 것은 분명히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였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은 결코 이 부대를 창설할 수 있는 최고 지도자도 아니었다.
(김일성은 주요 간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제2군 독립사 3단 정치위원이 된 것은 1934년 9월부터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였다는 것은
명백히 사실의 왜곡이다.
- 그러나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적 사실의 날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부대는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의 지도아래 조직되었고,
공식 명칭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였음에 틀림없으나
근본적으로 조선인이 절대 다수인 간도땅에서 절대 다수이 조선인 성원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에 의해서 구성된 인민혁명군이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오히려 임춘추의 설명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즉 북한이 조선인 중심의 이른바 주체적인 항일무장투쟁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의 창건을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으로 바꿔 부르는 것는
사실왜곡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해석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중국 문헌들
- 1980년대 중국의 역사학 르네상스는 동북에서의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여러 권의 연구서적들을 출판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비록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주체사관의 입장에서 부정하는 북한측의 공식 견해를 배려해서
김일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거의 관철되고 있으나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의 항일무장투쟁의 궤적을 그려보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
- 이 문헌들은 일제의 관헌자료를 이용함과 아울러
항일무장투쟁 참가자들의 증언과 당문서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 문헌들이야말로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북한 문헌들의 주장과 일제관헌자료 사이의 불일치성,
국내외 김일성 비판자들의 주장의 진위 여부를 가려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높은 수준의 객관성 유지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헌들은 기본적으로 동북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중국공산당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즉 중국 문헌들은 동만에서의 조선인 항일무장투쟁을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중국문헌들에서는 배제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중국 문헌들 역시 일본 문헌들과 비교, 검토 속에서 다루어져야지
그 자체로서 자기완결성을 갖는 완전한 자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이상에서 살펴본 문헌들을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나서
필자는 당시 만주상황에서 중요한 변수들,
즉 중국공산당의 만주정책, 코민테른의 대만주관계,
특히 간도문제에 대한 관심, 만주국의 성립과 관동군의 증강 추이,
소련의 대항일유격대 관계 등의 객관적 조건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을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 요컨대 이 글에서 택할 분석방법이란
이데올로기적 편향에서 벗어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각종 1차자료들을 정확하게 비교, 검토하되
단순한 문헌 중심의 해석에서 벗어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결합하여 분석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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