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혼불 하나
박경선
중·고등학생일 때 해마다 내가 쓴 단편소설 한 편씩 교지에 실리면서 내 가슴에는 펄 벅과 박경리가 살았다. 『대지』를 쓴 펄 벅과 『토지』를 쓴 박경리는 농경시대에 생명과 같은 땅을 두고 인간이 연결되어 사는 애환을 대하소설로 쓴 거장이라 나의 우상이었다.
어른이 되어 작가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쓰면서는 내 가슴에 박경리와 최명희가 산다. 박경리는 경남 하동 일대, 최명희는 전라도 일대, 각자 자기가 나서 자란 지방의 삶과 사투리를 썼다. 나는 그런 특색 있는 글의 매력에 빨려들었다. 내가 쓰는 동화에도 경상도 사투리 대화체가 들어가고,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이 일기장에 일상의 사투리를 적어 오면 인정해주었다. 현장에서 글쓰기 지도한 사례를 논문으로 써서 대학 교수님께 조언을 받으러 갔을 때, 일기에 쓴 일상의 사투리를 표준어로 고쳐주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무시하고 전국 현장연구 대회 심사장에서 노명환 교수님을 만나 내 생각을 피력했다. 그분은 ‘그럼요. 각 지방의 방언을 얻으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작가도 있는데요.’하며 내 손을 들어주어 ‘전국 현장연구대회’ 최고상인 ‘푸른 기장’을 받았다. 내 믿음은, 일상에서 사용한 사투리를 살려 글을 쓰면 사실성, 현장감, 향토성을 살리게 되어 작품이 더 진실되게 다가온다는 생각이다. 박경리, 최명희 작가를 가슴에 담고 사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크다.
이번에 ‘영남수필’ 문학 기행으로 남원의 <혼불 문학관>을 찾았을 때 문학관에 재현된 집필실에서 최명희 선생은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를 반겼다.
“또 오셨네요. 우중에도….”
“그럼요. 이번에는 선생님의 혼불 정신을 제대로 담아 가려고요.”
몇 년 전에 전주에 있는 ‘최명희 문학관’도 다녀왔지만, 다녀올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늘, 선생의 작가로서의 고집과 열정이 담겨와 ‘그처럼 살아야 진정한 작가가 되겠다.’는 심지 하나 박혀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신의 불이 혼불이요. 그 혼불을 작품에 담으려면 민족의 혼과 정신이 담긴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선생의 고집이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회원인 나에게 공감으로 와 닿았다. 요즈음 신조어, 외래어를 즐겨 쓰는 세태를 보면 우리 말, 민족정신이 사라져가는 것 같아 불안, 불안하다. ‘감옥에 갇혀도 모국어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말의 씨앗을 뿌려 민족도 지키고 조국도 지킬 수 있다.’는 선생의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정신을 추앙하게 된다. 동아일보 공모전에 『혼불』 1권으로 2천만 원 대상을 받으면서, 90년대 최고 걸작으로 초판 십만 권을 출간했다는 그 화려한 이력 때문에 내가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선생의 향기는 독신으로 살면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마음으로 우리말로 우리의 얼을 ‘수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혼불이었다. 그러기에 문학관에서도 육필원고와 취재 수첩에 유독 마음이 끌렸다. 싸늘한 새벽의 싸한 느낌 하나를 표현하려고 사흘 고민하다가 삭연하다(외롭고 쓸쓸하다)는 단어를 찾아 기뻐한 그 마음이, 선생의 취재 수첩 제목인 <길광편우(吉光片羽>에 딱 맞다. 깃털처럼 나부끼는 상서로운 생각 하나도 잡아 빛 되게 쓰는 것이 참다운 작가 정신이다.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 잘 살다 갑니다.”
문학관을 나올 때, 선생이 산소 호흡기를 끼고 마지막 남긴 ‘혼불 하나’의 의미가 작가로서의 내 매무새를 다시 다져보게 했다.
선생이 우리말과 우리 얼을 담은 장편을 써 내려간 17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17년이라는 숫자에 꽂히자, 내 장편 동화 『신라 할아버지』 의 주인공 고청 윤경렬 선생 기념비가 살아났다. 17년간 경주 박물관 주차장 옆에 놓여 있다가 올해 7월에 고청기념관(경주시 양지길 39-3)이 지어져 그리로 옮겨갔다. 윤경렬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나라 잃은 설움을 맛본 산증인으로, 우리 민족혼과 우리 문화를 지키는 일로 신라 문화를 연구, 후진 양성을 해온 어른이셨다. 그분을 모델로 쓴 내 동화가 1995년에 출간된 이래 어린이 도서연구회 우수 도서로 선정되었고, 16년간 19세 발간되었다. 첫 동화집 『너는 왜 큰 소리로 말하지 않니』 38세 발간에는 못 미쳤지만, 우리말과 우리 정신을 담은 책이기에 더 없이 의미가 있다. 최명희 선생이 <혼불>의 첫 줄을 쓸 당시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본다면 이 길을 끝내 가리라 다짐했다’고 했듯이 나도 그런 마음으로 『신라 할아버지』를 썼다. 자료 조사를 위해 경주 남산 일대와 경주 박물관학교, 고청 윤 선생님 댁을 찾아다녔고, 2년 동안의 겨울방학과 봄방학을 하루 8시간씩 꼬박 앉아 글을 썼다. 무릎 통증과 허리 뒤틀림을 견디며 ‘이 글을 다 쓰고 나서는 죽어도 좋겠다‘ 는 열정과 집념으로 썼으니, 예술혼의 탁월한 경지를 지닌 대작가가 아니어도 원고지를 마주한 작가의 마음이 다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니 윤경렬 선생 기념비라면, 내가 나서서 해야 할 기념 사업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럴 여유도 없이 넋 놓고 살았다. 그간, 잡다한 책 25권을 내었지만 오롯한 정신으로 쓴 책은 『신라 할아버지』 한 권뿐!
교육 타임즈사 <교육과 사색> 월간지에 달마다 한편씩 게재하는 ‘박경선의 인성 수업 동화’를 3년 째 쓰며 거기에만 매달려 있은 시간이 아깝다. 이제부터라도, 최명희, 윤경렬 선생님처럼 우리 말, 우리 문화, 우리 정신을 담는 ’혼불‘ 같은 작품집을 남겨야 하겠다.
우선, 고청기념관으로 『신라 할아버지』 한 권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우편으로 처리하지 말고, 직접 찾아가서 기념관에 봉정하고, 윤경렬 선생님 기념비 앞에 놓고 절이라도 올려야 ’혼불‘을 기리는 작가의 도리가 될 것 같다. (15매.23.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