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의 효자 이야기
충청 효교육 원장
시인 최 기 복
공자께서 하신 말씀 중에 친구를 사귀려면 효자를 사귀어라!
오늘 (2013년 10월 4일) 친구 녀석이 서울에서 축하예배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의 믿음이 시원치 않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한국 예수교 장로회 부총회장에 당선이 되었는데 그 임직 축하예배라는 것이었다.
총회장도 아닌 무슨 부총회장 당선 축하예배!
워낙 친한 친구 사이니 가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예배 장소에 도착한 것이고, 예배 진행 중에도 나는 심드렁했다. 스크린 자막에 선거 이야기가 동영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약간 긴장하기 시작했지만 선거란 으레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의 당선을 위해 수십 명의 목사들이 선거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그보다 더 많은 장로들께서 그의 선거캠프에서 그를 도와 1500여 명의 유권자 가운데 1200여 명의 압도적 표를 얻어 당선의 영예를 얻었다는 요지였다.
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과 옆에 앉아서 눈시울을 붉히는 그이 어머니는 그를 안고 이북에서 월남을 하였다는 것이다. 픽픽 쓰러지는 피난 현장에서 눈에 밟히는 것이 죽음이요 살아도 살아갈 희망 자체가 없는 극한 상황 속에 어차피 살기도 힘들고 살릴 수도 없으니 길에 버리자는 의견을 반대한 어머니의 사즉생 각오가 오늘의 그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함께 죽을 수 있는 것도 사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생각. 그리고 어머니는 그를 포대기에 안고 월남했고 그는 그 어머니 손에서 오늘의 빛나는 영광을 어머니에게 드린 것이다.
귀신을 잡는다는 해병학교 시절 그를 만났다. 장교후보생 과정의 교육은 사병보다 4배 힘들고 하사관 보다 두 배 힘들다는 것이니 그 과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 동료 간에도 자칫하면 감정적인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편법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항상 위트와 여유가 있었다. 초등 군사반에서 필자는 명예 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있는 상황 이어서 동기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장교단의 명예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에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동기생 99명의 출신 학교 태어난 고향 등을 꿰뚫고 있었는데 그가 이북에서 월남하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전역 후 그와 부산에서 어울리기 시작했다. 매양 즐거웠다. 그의 재담은 순간적인 재치와 어울려서 주변을 밝게 해주는 것이었다.
6.25의 쓰라림 속에서 월남은 사투였고. 종전 이후에도 사투였다. 그런 사투의 와중에서 어머니는 그를 대학에 보냈고 밝게 키워냈다.
내가 삼성에 입사하여 어깨를 으쓱거릴 때 그는 국도화학이라는 군소 회사에서 첫 봉급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부산에서 우리 집과 그의 집을 왕래하며 굳이 우정이라는 이름이 필요 없는 동기라는 이름으로 만난 것 자체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그가 회사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사업을 시작한 후 몇 년이 지났다. 함께 충북 옥천에 가자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뵈러 가자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6세 때 생모를 잃은 후 어머니 사랑에 걸신이 들려 있을 정도여서 눈에 보이게 부러워하지는 않았지만 속내로는 어머니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부러워했다. 그가 어머니 이야기를 간헐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자가용에는 어머니가 필요로 하는 것 등속이 쌓여 있었고 자주 어머니가 계시는 곳을 왕래하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옥천 읍내에서 멀지 않은 야산에 기도원을 마련하여 준 성직자 생활을 하였고 그것이 어머니의 꿈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꿈을 이룩하여 드렸고 어머니는 그를 위해 끝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그를 위한 기도를 하였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 신라의 고도 경주 아래 양산에 가자고 한다. 양산에 기도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부산이라는 지역과 충북이라는 지역의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옥천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박달못이라는 연못과 7만 5천 평의 평지 같은 야산에 성전과 생활관과 주차장과 창고가 달려 있었다. 조깅 코스도 개발되어 있는 듯했다. 어머니가 웃고 계셨다. 무엇인가를 해 먹이려는 마음이 눈에 선하다. 그는 어머니를 위한 성전을 지은 것이다. 그의 사업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는 정직했고 주변을 밝게 하는 힘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의 효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나는 그와 통화할 때 보통 장난으로 시작하여 장난으로 끝난다. 다만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만은 그렇지 않다. 그 연세가 되면 치매가 온다든지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진지하게 묻는다.
어머님은? 괜찮으셔? 그래. 세배 문안을 드려야 하는데. 마음이 찡해온다. 불편하신 데는? 없어? 잘 모셔 임마. 어제도 다녀왔다.
내가 제법 형처럼 굴지만 정신연령도 마음 씀씀이도 형 같다. 전국을 누비는 사업가로서 그의 일상은 휴식이 없다.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축성한 기도원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피난길에서 버려질 뻔했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마나 많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까.
어머니의 소원 중 큰 것은 그가 목자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목자가 되지 못했지만 가장 열악한 조건으로 부총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소속 교회는 교단에서 개척교회 수준을 조금 넘은 것이고 소속 노회도 군소 노회였다. 그래서 그의 당선이 더 값진 것이리라. 대한민국 예수교 장로회 평신도 회장이 되기 위한 그의 공약은. 가장 낮은 자세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섬기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어머니를 섬기고 병든 자들을 섬기는 효심이 살아 숨 쉬고 있었으리라.
그의 효심이 오늘을 있게 한 것이다. 그는 2남 1녀를 둔 행복한 아버지이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예쁜 아내가 있다. 이제는 자산가치로도 상당하게 축적된 기도원이 있고. 못났지만 바쁜 와중에 조건 따지지 않고 축하해주러 서울에 가기도 하고 과장 없이 이런 글을 올려 주는 친구가 있다. 아직 정정하신 구순의 어머니와 그의 기도가 있다.
오늘 행사장에서 넌지시 올려 다 보시는 어머니에게 나는 곁으로 다가갔다. 지난번 철모에게 어머니 세배드리러 간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왜 안 왔어? 철모가 어머니 모시고 다른 데로 바람 쐬러 간다고 해서요. 그러면 같이 가면 되지. 철모 부인이 나를 싫어하거든요.,,
오래오래 사셔서 효도하는 아들 더 큰일 하도록 기도 해주세요. 돌아오는 열차의 차창에 비치는 가을 햇살이 눈이 부신 이유를 모르겠다. 며칠 전 어머니와 형을 죽인 패륜아 기사가 한국의 참모습은 아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효심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나라가 살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