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천마교의 십칠 대 교주인 적용사우가 대과헌에서 자결한 그 이후 무림인들은 천마교가 완전히 붕괴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잔당들이 남아 천마교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적용사우의 후예인 쌍둥이 남매가 죽음을 당했기에 천마교주의 자리를 이을 인물이 없을 것이라 나름대로 단정했다.
그러나, 천마교의 대부활이 열리고 있는 지금 천하무림인들은 천마교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다.
천마교의 부활이 천마교주가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빙후는 의혹의 표정을 짓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대로 천마교주는 적용가문이 뒤를 이어 왔습니다. 초대 천마교주로부터 시작해 적용사우에 이르기까지.]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현재의 천마교주 역시 적용일맥일 가능성이 큰 것이오.]
[하지만 적용가문의 대는 적용사우의 두 후인의 죽음을 끝으로 완전히 단맥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모르는 일이오. 두 후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이상 적용가문이 단맥된 것이라는 확신은 할 수가 없는 것이며 무림에 알려진 바에 달리 적용가문의 후예가 존속하고 있다면 현재의 천마교주는 역시 적용가문의 후예일 것이오.]
빙후는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단엽을 주시했다.
[만에 하나 당신의 짐작대로 적용가문의 후예가 천마교주의 권좌를 지키고 있다면 당신은 그래도 천마교주의 권좌를 노릴 생각이신가요?]
단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무림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진리로써 수천 년을 이어져왔소. 그것은 불멸의 진리이며 무림인들에게는 숙명과 같은 것이오.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는 살아남는 이 비정한 무림의 철칙... 천마교는 적용가문에 의해 한때 최고의 성세기를 구가했지만, 그들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어온 것 또한 사실이오. 과거엔 적용가문이 강자였지만 지금은 강자일 수가 없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무림칠대뇌옥의 모든 인물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은 무림칠대뇌옥의 모든 인물이 천마교주의 자리를 노릴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빙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단엽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적용가문을 더 이상 강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오. 여기엔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자신만이 강자일 것이며 자신만이 천마교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오. 적어도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최강자 일곱 명 정도는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을 것이며 이번 천마대회합에서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마교주가 되려 전력을 다할 것이오. 물론 나 역시 그 가운데 일인이오. 더 이상 이인자 자리에 있고 싶지는 않소. 비록 현재 천마교주가 존재하고 있다 해도 그가 약자라면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 현명할 것이오.]
[하지만 대대로 적용가문은 강했어요.]
빙후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단엽은 빙그레 웃었다.
[물론 그들은 강하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전 천마교도들에게 안겨 준 점이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강함은 실추가 되었고 그들보다 강자가 나타나면 천마교도는 언제나 그 강자를 따를 것이오.]
[무서운 일이로군요.]
빙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단엽 역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무서운 일이오.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이 순조로이 화합을 한다면 천마교는 부활과 동시에 천마교 사상 최강의 힘을 보유하게 될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천마교는 부활이 아니라 이것으로 파멸이 될 수도 있는 것이오. 그러나 제 삼의 음모자들이 천마교주와 관련이 있다면... 그들의 엄청난 능력을 배후에 지니고 있다면 누구도 감히 천마교주의 자리를 넘볼 수가 없을 것이오.]
빙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궁금한 듯 물었다.
[대체 제 삼의 음모자란 누구를 말함이지요? 당신은 소림의 단엽옥승이라는 인물 앞에서도 제삼의 음모자에 대해 거론을 한 것 같은데...]
단엽은 황혼을 보며 신비롭게 웃었다.
[차후 당신도 알게 될 것이오. 지금은 나로서는 그들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입장이오.]
[대체 당신은...?]
빙후는 단엽에 대하여 무한한 신비를 느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는 더해갔다. 어디를 봐도 상대는 소수천마일 뿐이다. 그러나 은연중 그녀는 상대가 어딘가 모르게 소수천마와는 다른 감을 느끼고 있었으니... 그것은 여인의 직감으로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함구하고 있었던 이유는 소수천마는 분명 소수천마라는 확신 때문인 것이다. 적사도에서 존재하던 인물은 오직 팔 인, 그 가운데 천엽성승은 자결을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 생활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상대는 소수천마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라는 상상을 할 만한 여지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나 그녀는 소수천마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그녀의 의심 자체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산은 눈이 휘둥그레져 마냥 선상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선상, 이곳에는 장산과 적사칠혼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다 대단한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는 그들 모두가 중원의 이름 있는 고수들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과연 중원 땅은 넓고도 넓다 하더니... 사람도 많고 대단한 사람들도 많구나.)
보이는 사람들마다 태양혈이 불끈불끈 치솟아 올라 있었고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하기만 하다. 다만, 그들 대부분이 장산의 눈에는 그리 좋은 사람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자신의 주인인 단엽 외에는...
(한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주인님은 왜 인상 나쁜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까?)
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장산에게는 단엽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다. 그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에게는 못마땅한 것이다. 한데 문득
(윽!)
장산의 눈빛이 돌연 바짝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한곳, 실로 거대한 거녀가 장산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양쪽으로 보기 흉하게 찢어진 입을 헤벌쭉 벌린 채.
나이는 어림잡아 이십 여세 정도. 일신에는 헐렁한 흑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엉덩이가 그야말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키는 거의 구척에 달하여 장산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으으...저렇게 큰 계집이 있다니...)
장산은 새삼 거녀를 살폈다.
(그러나 못생겨도 너무 못 생겼다. 그 얼굴로 나에게 추파를 보내다니.)
장산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황급히 다른 데로 돌렸다. 한데 그때였다.
거녀는 여전히 헤벌쭉 웃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은근히 장산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산의 곁에 바짝 서니 그야말로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진다. 거녀는 다짜고짜 장산의 손을 잡으며 히죽 웃었다.
[너... 마음에 들었다.]
[이...이거 왜 이래...]
장산은 기겁하며 손을 빼내려 했으나 이게 웬일인지 사력을 다해 손을 빼내려 했으나 천만근의 바위에 짓눌린 듯 그의 손은 전혀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니...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헤헤..너..굉장히 잘생겼어... 마음에 들었다. 정말.]
거녀는 이번에는 장산의 이마에 그 거대한 입술마저 대는 것이었다. 아마도 중원인은 아닌 듯 그녀는 한어에 서툴렀다.
[어어...]
장산은 입만을 쩍 벌릴 뿐이었다. 힐끔힐끔 단엽을 보며 도움을 청하는 눈치를 보냈으나 단엽은 그런 두 사람을 재미있다는 듯 주시하며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후후...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한 쌍이로다.)
단엽은 거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편, 거녀가 본래 있던 자리 쪽에 있던 한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노인 역시 구척의 거한이었다. 나이는 칠십세 정도. 반백의 머리에 구레나룻이 무성한 노인의 전신에서도 뭇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기도가 뿌려지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번갯불 같은 형형한 안광이 쏟아져 나오고 어깨에는 실로 천근의 무게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철장을 메고 있었다.
[허허...이제야 저 눈 높은 아이가 제 짝을 찾은 듯 싶은데... 잘만 다듬으면 대단한 재목이 될 상이로다.]
거구의 노인은 장산과 거녀를 보며 연신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장산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거놔! 제발...]
[헤헤...이 거화는 너에게 시집을 갈 거다.]
[시집?]
[그래 점 찍었어.]
(맙소사!)
장산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아...아이고 이 장산은 망했다.)
그는 단엽을 향해 울상을 지어 보였다. 단엽은 그런 장산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생각했다. 저 거녀와의 인연은 장산에게 무한한 복을 줄 것이라고. 그것은 직감이었다.
(그것은 운명인 게야. 거역할 수 없는...)
고요한 수면 위로 황금 노을이 짙게 퍼져 흐르는 이곳. 이곳은 바로 태호였다.
파아아...
태호의 수면위를 마치 평지처럼 걷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정확히 십팔인. 그들의 발끝이 수면을 찰때마다 오색의 물보라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일어나고 그들의 일신에서 풍겨지는 사기와 마기는 가히 전율스럽기만 하다.
일신에 걸친 옷은 검은 장포. 파도처럼 출렁이는 백발은 발 끝에 채이고 있었다. 인간이 수면 위를 마치 평지처럼 걷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들의 몸에서 풍겨지는 사악함은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이는 어림잡아도 모두 백여세는 넘어 보였다.
눈빛은 깊고 깊어 마치 늪과도 같아 한 점의 감정이라도 거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선두의 인물, 백발을 지녔으나 그의 얼굴만은 중년의 그것이었다. 완숙한 기품에 단아한 오관, 휘날리는 검은 유삼이 멋들어진 운치마저 자아냈다.
그는 만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검은 섭선을 느릿하게 휘젓고 있었는데
[좋은 날씨로군.]
그는 황혼을 향해 기이한 웃음을 흘린다.
[만겁뇌에서의 고통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것일 뿐... 우리는 오직 이 날을 위해 살아왔다. 핫하하... 지난 세월의 모든 보상은 천마대회합에서 받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사뇌의 앞에서 천마교주를 자처할 것인가.]
사뇌. 일백 오십년 전 사도제일뇌였던 이 인물은 결코 천마교의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두 번째인 만겁뇌에 투옥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귀계. 그리고 천하무림을 마음대로 농락하였던 무서운 지혜는 천마교와 군협천에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낄만 했던 것이다.
만약, 당시 군협천과 천마교가 수백 년의 기반속에서 나름대로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지 않았던들 이땅은 오히려 사뇌의 천하가 되었을 것이라
는 후세 사가들의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흠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와도 화합하지 않는 독선적인 성품
이다. 당시 천마교에서는 사뇌를 포섭하기 위해 수많은 대가를 치루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사뇌는 천마교주의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지혜가 뛰어났던 만큼 야망이 컸던 인물, 그에겐 오직 일인자의 권좌만이 필요했을 뿐 이인자의 자리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군협천의 인물들에게 요주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은 만겁뇌에 투옥되는 비운의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제일의 사뇌라는 인물이 일백오십 년 만에 다시 무림에 나타난 것이다. 십칠 인의 무서운 고수들을 이끈 채.
[크핫하하.. 백오십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노부가 원하는 것은 천마교주의 자리일뿐이다. 이 시대는 오직 사뇌의 시대일 뿐이다. 그 누구도 이것을 거역하면 죽음뿐이다. 핫하하...]
그의 몸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주위의 수면은 무섭게 허공으로 치솟으며 광란하고 있었다.
삼십삼인. 일신에 희디흰 백포를 치렁하게 걸치고 있는 이 사람들. 그들은 해변가의 한 거암을 중심으로 우뚝 서 있었다.
수십여 년 간 햇빛을 한 점이라도 받아 보지 못한 듯 백납처럼 창백한 얼굴. 거기에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단 일점도 숨쉬고 있지가 않았다. 오직 얼음처럼 싸늘한 하기만을 풀풀 날리고 있는 인물들. 희디흰 백발에 창백한 안색. 거기다가 일신에 걸친 옷마저 백색이니 그들은 마치 백색인간처럼 느껴졌다.
나이는 대부분이 백여 세가 넘어보였다. 한데 그 가운데 단 한명의 여인. 삼십 이인의 중앙에 놓여져 있는 거암에 석상처럼 앉아 있다.
디디—딩~
여인은 시선을 내리깐 채 금을 뜯고 있었다. 맑고 은은한 금음이 저녁의 고요를 타고 태호 주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왠지 쓸쓸하고 처량한 음률이었다.
그녀는 흰 비단의 차림이었지만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았다. 단지 흰옷 탓이었을까. 지그시 내리감은 긴 속눈썹 아래 엷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긴 듯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눈부시게 흰 손가락을 움직여 비파만을 뜯고 있었다. 심금을 울리는 낮은 선율이 저녁 호수면에 흐르듯 깔린다.
그러나 문득 딩... 그녀의 손이 거칠게 줄을 뜯는가 싶더니 돌연 금은이 딱 멈추었다.
이어 그녀는 시선을 들어 거대한 섬을 주시했다. 무심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곳이 천마도인가? 이곳이 이 철금마후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천마도인가?]
여인은 무섭도록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이곳이 천마도이다. 십팔 년 적용사우의 죽음과 함께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그 비극의 땅덩어리.]
여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후후...믿었어...철저히 믿었어. 적어도 나와 남편과 자식에게는 적용사우가 절대의 신이었기에 그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행복은 영원할 것이라 믿고 또 믿었다. 그런데 우리의 신 적용사우는 그 치욕의 대과헌에서 자결을 하고 말았다. 아아... 그것은 믿었던 사람에 대한 철저한 배신. 결국 그것을 끝으로 군협천에 의해 천마교는 철저히 무너졌고...나는 자식과 남편을 잃어야 했다. 후후...이제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오직 나 자신만을 믿을 것이다. 내 스스로 천마교주의 자리에 올라 내가 당한 한을 풀 것이다.]
여인은 웃고 있었다. 미친 듯이.
[홋호호...그리하여 나의 남편과 자식을 죽인 군협칠대무황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홋호호... 지옥굉에서의 생활 십팔 년... 그 고통의 세월은 과거에는 없었던 힘을 나에게 주었다. 이제 그 누구도 나의 적수가 될 수 없다. 그 누구도... 홋호호호..]
그녀는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비롯한 지옥갱의 삼십삼인, 이 힘을 합친다면 능히 천하를 지배하고도 남음이 있을 거라고.
또 다른 방향에서 천마도에 첫발을 내딛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정확히 육십이인. 그들의 피부는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 철립을 쓰고 있었고 피풍의를 전신에 휘감고 있었다. 일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잿빛 죽음의 내음. 지옥에서 나오기라도 한듯하다. 그 가운데 유독 어린 듯한 한명의 청년이 있다.
구릿빛 피부에 오관이 조각품처럼 섬세하다. 나이는 약관 정도. 그는 해변의 모래를 손으로 한줌 들어올리며 싱긋 웃는다.
[이 모래...백사지대의 모래와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백사지대의 모래는 불처럼 뜨겁고 백사지대의 바람은, 그리고 모래는 살아 있는 모든 생물체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 뿐. 그 백사지대에서 우리는 생명을 부지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해. 아주 강하다. 이 백사혼은 그곳에서 태어났고 십팔 년을 그곳에서 생활해 왔다. 그래서 이 백사혼은 가장 끊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백사혼은 손에 담긴 모래를 허공에 뿌렸다.
[나..나 백사혼은 천마교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나의 모친이 비록 천마교에 한때 몸을 담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지금 내게 있어 관심은 천마교주의 자리일 뿐이야. 백사지대에서의 고통. 달랠 수 있는 길은 바로 천마교주가 되는 것뿐이라 생각해.]
웃는다. 그 비릿한 웃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라지고 있었다. 흡사 모래바람처럼 그의 신형은 아스라이 갈라지며 흔적 없이 소멸되고 있었다.
나머지 육십일인의 철립인 역시... 이곳은 천마도. 또 한명의 야망자가 도착한 운명의 날이다.
바람. 천마의 한쪽 해변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검은 바람. 그 바람에 닿은 것은 무엇이든지 한 줌의 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무든 바위든 그 무엇이든지. 그 바람을 몰고 다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정확히 구십구인.
그들의 눈빛은 푸르다. 그것은 그들이 가공할 독공을 일신에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독풍림에서 온 것이다.
사시사철 가공할 절독이 함유된 독의 바람이 분다는 그 죽음의 땅에서.
[홋호호... 이 땅은 이제 누구의 것이 될 수가 없어. 그렇다면 누구의 것이지. 누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일까?]
실로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음성이 사내의 입
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비대한 노인에게서. 검은 바람 속에서 유유히 걷고 있는 이 아름다운 음성의 엄청나게 비대한 노인은 장정 세 명이 팔을 벌려 간신히 안을 수 있을 정도의 배와 허리, 살이 넘쳐 부풀다 못해 서너 겹으로 흘러내렸다.
얼굴은 너무나 살이 쪄서 오관을 구분하기 힘들었고 목은 턱 밑 살집에 짓눌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호호호... 누구일까? 누가 천마교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한사람뿐이야. 이 하늘에 물어봐도. 이 땅에 물어봐도. 오직 한사람을 말할 뿐이야. 홋호호... 바로 이 만독노조 뿐이라고. 만독노조 뿐이라고... 홋호호...]
만독노조.
이백년 전 독풍림에 투옥이 된 인물.
바람... 죽음의 바람은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모든 생물체를 녹여버리는 가공할 독풍과 함께 구십팔인의 가공할 독인을 거느린 만독노조. 이 인물 역시 야망자였다.
투명했다. 살결이 얼음처럼 투명했으며 눈빛 또한 시리도록 투명하다. 정확히 일백칠인.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무섭도록 싸늘한 한기. 표정은 무섭도록 냉막하다. 이들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천마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천마교의 총단을 향해 얼음처럼 미끄러져 갈 뿐이었다. 선두의 인물은 여인. 대략 이십 여세 정도로 보이는 얼음의 요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머리는 눈처럼 흰 은발. 살결은 하얗다 못해 푸르렀고, 푸르다 못해 투명하다.
만빙담. 이들은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만빙담의 죄인들인 것이다.
소녀는 백빙. 백사지대의 백사혼처럼 역시 만빙담에서 태어난 여인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만년빙정을 마시고 자란 여인. 그녀의 몸 자체가 실로 극랭한 얼음덩이와 같다. 그녀의 살결에 닿는 무엇이든 그대로 빙결이 되어 버리고 결국 죽어야 하는 것이다.
말이 없는 일백 칠인. 그들에게 야망은 있을진대 그 야망이 너무 크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인가.
풍운. 이렇게 하여 천마도의 풍운은 갈수록 심화되어 간다.
과연 누가 이들 야망자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모두가 다 한 시대를 독패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가공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 누가 이들을 하나로 규합할 수가 있을까.
천마도. 이곳의 중앙엔 거대한 분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분지에 우뚝 솟은 거대한 성.
푸른 이끼가 마치 융단처럼 깔려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고성이었다.
이름하여 천마성이라. 바로 이 천마성이야말로 천마교의 총단인 것이다. 천마교 오백년 역사의 산실. 지금으로부터 십팔 년 전 이 천마성은 군협천의 인물들에 의해 군데군데 부서지고 파괴되었지만 지금의 천마성은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오백년 사마의 하늘답게 웅장하고 거대하다. 수백채의 그림 같은 고루거각들이 기이한 균형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고 성벽은 없었다. 아니 존재할 필욕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침입자라 해도 퇴치할 수 있다는 천마교인의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성벽은 없었고 대신 천마성을 감싸고 있는 것은 울창한 매화림이었다.
이 아름다운 고성이 이 땅에 수백 년 동안이나 난세를 불러일으켰던 천마교의 총단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러나 저러나 이 아름다운 고성은 지금 팽팽한 긴장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무림칠대뇌옥의 고수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더불어 군협천의 힘에 밀려 어둠속에서 전전긍긍하던 근 십만에 달하는 마인들이 몰려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그들은 모두 한 길을 걷는 마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화합할 수 없는 거대한 시간적 공간을 두고 있었다.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이 특히 그렇다. 무려 이백년의 세월 동안 각기 무림칠대뇌옥에 흩어져 있던 마인들. 그들의 신분은 실로 애매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단지, 배분만으로 신분의 고저를 정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시대를 달리하여 존재했었던 인물들이 대부분인데 당시 지니고 있던 신분으로 등급을 정하기란 난해한 일이었다. 어쨌든 한 자리에 모인 수많은 마인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위치를 높이기 위한 암투를 벌써부터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수만 개의 도화선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것처럼.
만약, 그 누군가가 도화선 가운데 한 줄기에 불을 당기면 아마도 이 천마성은 당장 시산혈해의 참혹한 광장으로 돌변하고 말 것이다. 미처 천마대회합이 열리기도 전에.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천마성은 고요했다. 이것은 단지 폭풍전야의 고요만은 아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무질서를 이루고 있는 천마성의 수많은 마인들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은 실로 완벽한 조직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현재 천마교주로 알려진 신비의 인물과 그 인물 사이에 이어져 있는 조직은 그야말로 철저히 이 무질서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감히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이 천마교주를 경시할 수 없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천마교주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천마교주를 암중 돕고 있는 거대한 조직체, 그것이 있기에 폭발 직전에 있는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을 각기 완벽히 차단한 상태에서 격돌을 금하게 하고 있었으며 이미 수만의 마인들이 천마교주의 앞에 충성을 다짐하는 선을 하게끔 하니 이것은 확실히 충격이었다.
적어도 무림칠대노옥의 인물들에게는 특히, 무림칠대뇌옥의 수뇌들에게는... 그리하여 무림칠대뇌옥의 수뇌들은 천마교주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체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경거망동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것이 천마성의 고요를 낳게 하고 실로 피가 튀고 죽음이 튀는 충돌을 막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있었다.
천마성의 중심처.
하나의 거대한 백색대리석 누각이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 그 모습을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저 수많은 누각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누각. 천마성의 인물이라면 누구든 이곳을 지나칠 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곳은 천마성의 성지이며 또한 천마교주의 거처이기에.
사위는 적막했다. 간간이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 천마교주의 거처인 천마루의 내전에 마주앉은 두 사람이 있었다. 은은한 황촉불빛.
거대한 태사의에 몸을 묻고 있는 면사 여인.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단정히한 명의 흑의소녀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면사여인. 그의 모든 것은 희었다. 일신에 걸친 옷도 눈부시게 흰 백색이으며 얼굴을 가린 면사 또한 흰색이었다. 그리고 두 무릎에 단정히 놓인 손 역시 조각품처럼 희고 섬세했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 또한 빛깔로 치면 시린 흰색이라고나 할 수 있다. 다만, 면사에 드러난 그녀의 동공만은 검은 색이었다. 동공은 검은 늪처럼 깊고 적막해 보였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마치 그 동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충격마저 느끼게 했다. 여인의 가슴에 핏빛으로 수놓은 두 글자, 그것은 천마였다. 바로 이 여인이 신비의 천마교주였다.
섬세한 몸매로 보아하니 그 나이를 아무리 많이 잡아야 삼십 안쪽으로 보였는데 이토록 어린 나이의 여인이 천마교주로 군림하고 있었다니 실로 천하무림인이 경악할만한 사실이었다.
한데, 이 천마교주의 면전에서 아주 여유 있고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흑의소녀, 그녀의 외쪽 소매가 헐렁한 것으로 보아 외팔이가 분명했다.
나이는 대략 십팔구세 가량. 전체적으로 싸늘하면서 고결한 분위기를 풍겨내는 모습이었다. 특이한 것은 소녀의 눈이었다.
인간에게는 한 쌍의 눈만이 있을 뿐인데 이 소녀에게는 세 개의 눈이 있다. 미심을 보면 거기에 거대한 검은 반점처럼 박혀 있는 또 하나의 눈.
감으면 그것은 하나의 검은 반점일 뿐이었으나 분명히 깜박이고 있었고 깜박일 때마다 형용이 불가한 신비로운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은 보는 이의 심혼을 아득히 마비시킬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안이었다.
이때, 흑의소녀는 한 권의 두툼한 책자를 품에서 꺼내 면사여인의 앞에 내밀었다.
[여기에 우리 북궁세가가 지난 삼년의 세월 동안 비밀리에 조사한 그 모든 것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면사여인은 가벼운 탄성을 발하며 책자를 받아들었다. 흑의 소녀는 면사여인을 지그시 올려다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리 북궁세가가 교주와 인연을 맺은지 어언 삼년. 이제서야 대과헌을 만들고 무림칠대뇌옥을 만들어 천마교의 힘을 이백년 세월이나 응축했던 그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음모자들을 파악하게 된 것은 그들의 힘이 상상외로 엄청났기 때문이었지요. 실질적으로 그들이 천마교의 패망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천마교의 힘을 이백년의 세월에 걸쳐 응축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천마교는 그들의 목적으로 인해 희생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자를 움켜쥔 면사여인의 손이 무섭게 떨린다. 분노인가 아니면 격동으로 인한 것인가.
그녀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군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무려 이백년의 세월을 투자한 것도 그렇지만 천마교에서 전혀 그러한 기미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전율스럽군요.]
흑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천마교 뿐이 아니었지요. 지난 이백여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의 그런 음모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물은 단 한명도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천마교의 패망은 실질적으로 군협천에 의해 이루어진 것 같지만 기실은 바로 그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음모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면사여인은 이 새로운 사실에 크게 흔들리는 듯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흑의 소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사실은 그들 음모자에 의해 군협천이 완벽하게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럴리가...]
면사여인 즉 천마교주는 경악했다. 흑의소녀는 탄식했다.
[물론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으셔야 합니다. 그들 음모자들은 바로 군협천 내의 한 조직으로 수백 년의 세월동안이나 뿌리박고 있었음으로... 그들은 그야말로 철저하고 완벽하게 군협천의 모든 명령서와 문서를 조작했고 거기에 따라 군협천의 거대한 힘을 움직여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대과헌은 그런 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천마교의 인물들은 그들의 조작된 자료에 의해서 무림칠대뇌옥에 투옥이 된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의 목적대로 이백여 년의 세월동안 천마교의 힘을 집약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제와서 천마교의 부활을 서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흑의소녀의 음성은 물이 흐르듯 가볍고 분명했다.
이마에 있는 그녀의 또 하나의 눈은 쉼 없이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광채가 발해질 때마다 그녀의 입에서는 실로 충격적인 무림의 비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무림칠대뇌옥을 파괴한 장본인은 우리 북궁세가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그들이 하려했던 일을 대신해 주었던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의 존재까지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한편으론 이용하고 있었다는 결론이지요.]
[무섭군.]
천마교주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무섭도록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체 그들의 최후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림제패입니까?]
흑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분명한 것은 천하제패는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군협천의 파멸이지요. 군협천의 잠재력은 실로 대단합니다. 그 잠재력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은 천마교의 이백년 응축된 힘이 필요했던 것이며...]
[짐작이 가는군요...]
천마교주는 그제서야 전후사정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천마교의 부활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결국은 군협천을 패망시키기 위한 이용물이 되는 셈이로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흑의소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그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 군협천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미 팔 년 전 군협천주 철군무란 인물은 암살을 가장하여 군협천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철군무의 딸인 철류향이 실질적인 군협천주직을 행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군협천의 내분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을 불러일으켰으며 급기야 철류향은 내분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협천 사상 최강의 무공이라는 군협삼대금학을 연성하려 군협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녀가 군협동에 들어간 것은 삼년전의 일이고 아직까지도 그녀는 군협동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상태에서 군협천의 내분은 극에 달했고 음모자들은 무림칠대뇌옥의 파괴와 더불어 군협천의 전고수로 하여금 무림칠대뇌옥의 인물들을 죽이라는... 그리하여 천마대회합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지요. 그것은 죽음의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음모자들은 여기에서 군협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려했던 것입니다. 그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는 듯 했습니다. 그 과정을 조사하던 우리 북궁세가 역시 군협천이 회복키 힘든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거라 확신했는데 돌연 변수가 등장했지요.]
[변수라니?]
[풍운회의 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천마교주는 의아한 눈빛을 발했다. 그녀로서는 풍운회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흑의소녀는 도대체 무림의 대소사를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 줄줄이 털어놓는 것이었다.
[군협천주 철군무가 대소림사를 위시한 구파일방을 끌어들여 조직한 비밀문파입니다. 그 풍운회가 위기에 몰린 군협천의 고수들을 구한 것이며 비밀리에 군협천의 고수들을 풍운회로 끌어들인 것이니... 이렇게 되고 보면 군협천이 풍운회로 일대 변신을 이룬 셈인가요. 다시 말해 군협천주 철군무는 군협천의 거의 모든 힘을 풍운회로 끌어들인 것이지요.]
[으음...]
천마교주는 침음성을 흘렸다.
[대단하군요. 군협천주 철군무 역시...]
천마교주의 이 말에 흑의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합니다. 군협천 사상 최고의 기인답게. 아무튼 이번 일에 음모자들 역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러나...]
흑의 소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녀의 짐작인데 풍운회의 이번 일을 이미 그들 음모자가 계산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짐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그들 음모자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무림에 나타날 것입니다. 지난 이백여 년의 세월동안 군협천의 힘을 그들이 이용했듯이 이제는 천마교의 힘을 이용하려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풍운회를 서서히 침식해 들어가려는...]
[대체 그 음모자들은 누구입니까?]
도저히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천마교주가 물었다. 흑의소녀는 그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군협천의 일개 조직체입니다.]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려 오백여년 동안이나 군협천 내에서 모든 군협천의 비밀문서와 명령서들을 관리관장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왔습니다. 군협천의 일개 조직체이면서도 그들은 무려 일천년의 역사를 지닌 가문이며 그들의 지혜는 하늘을 덮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뛰어났기에 무려 오백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군협천 내에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문은 우리 북궁세가와는 일천년 전부터 초지자의 가문으로 쌍벽을 이루어 왔으며 알게 모르게 천하제일의 가문이라는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여 왔지요. 그들 가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모두 그 책자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차후 교주께서 시간을 내어 그 책자를 탐독하신다면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운명처럼 그들 가문과 우리 북궁세가가 천마교의 부활을 놓고 마주쳤다는 것입니다. 우리 북궁세가는 삼년전부터 교주와 우연히 인연을 맺음으로써 무림칠대뇌옥을 파괴하여 천마교의 부활을 시도했고 그들 가문은 무려 이백년 전부터 천마교의 이런 거대한 부활을 위해 음모를 꾸며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마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교주의 혈육인 적용운과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그들은 적용운에게 완벽한 천마교의 부활이라는 조건으로 일년동안 천마교의 힘을 자신들의 가문 아래에 둘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물론 적용운은 그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적용운은 교주의 오라버니입니다. 다시 말해 또 한사람의 천마교주라는 것이지요. 그런 그가 그들 가문의 조건을 수락한 이상... 교주와 우리 가문은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입니다.]
천마교주의 눈빛은 어두웠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결정이라면 어떤 결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흑의소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선택입니다. 교주의 오라버니인 적용운이 그들 가문을 선택했으니 교주께서도 오라버니의 뜻에 따라 그들 가문을 선택하시든지 아니면 우리 가문을 선택하시든지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만약 교주께서 우리 가문을 선택하신다면 천마교는 양분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원치 않습니다. 삼년 전 교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우연이고 그 이후 교주를 도와 천마교의 부활을 시도한 것은 단지 우리 가문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 뿐...
그 어떤 야망이 있어서는 결코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주께서도 그들 가문을 선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백여 년의 세월동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해 온 그들 가문의 힘은 확실히 우리 북궁세가보다 뛰어납니다. 결단을 내리세요. 우리 가문은 미련 없이 여기에서 손을 털고 무림을 떠나겠습니다.]
[아닙니다.]
천마교주는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적용화의 오늘은 당신들 가문이 있었끼에 가능한 일인데... 어찌 이제와서 본인이 당신들을 외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인은 당신들을 선택하겠습니다. 설령 천마교가 양분이 되는 한이 있어도.]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후회할 겁니다.]
[절대로...]
[할 수 없군요.]
흑의소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 역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교주의 뜻이 정히 그러하시다면... 이 북궁추림은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마교주 적용화는 북궁추림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황촉불빛 아래 그렇게 서 있었다. 한데 문득, 북궁추림은 천마교주 적용화의 눈빛을 보며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교주께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고민?]
[아...소녀가 묻는 고민이란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호호...교주께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신듯한데...]
[사...사랑...?]
[소녀의 눈은 속일수가 없습니다. 분명 교주는 사랑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것도 삼 년 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