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감사 월야선유도> " 옛古조선, 고구려인들의 숨결이 남아있는 땅 '평안도' " 과연 조선 시대에는 어떤 대우를 받았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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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는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와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와 함께 연이어진 작품으로, 평양 감사가 새로 부임하여 베풀어진 환영 연회를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의 서북(평양지역)지역 차별>
정약용은 서북의 인재를 버리는 것은 국력을 목조르는 것이라고 통탄했다. 이익은 예부터 서북에 인재가 많았다고 강조했다. 이중환은 지역적으로 기회의 균등을 이루지 못한 사회적 불일치로 말미암아 있는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한드는 것과 그 능력이 외부로 뻗어 나가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천리 되는 물과 백리되는 들판이 없는 까닭에 거인이 나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주변의 여러 오랑캐는 한차레씩 중국에 들어가 황제 노릇을 하였으나 유독 우리나라는 그러지 못했다. 오직 자기 땅덩이만 조심해 지켜서 뜻을 감히 딴데에 두지 못한다"
조선조는 건국 초기부터 단계적으로 지역차별 정책을 폈다. 함경도, 평안도 지방을 逆鄕이라 하여 인재등용을 억제했고 그 뒤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 전라도 지방 사람을 차별했다. 조선후기에 들어 경상도 지방을 남인의 근거지라 하여 소외시켰다. 서인 또는 노론의 근거지인 경기도, 충청도의 일부 세력이 정권을 독점하여 쥐고 흔들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격으면서 사람들은 각 지역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얕보고 깔보는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지역차별은 대체로 지배세력의 조작에서 나왔다. 지배세력은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지역에 제한을 가하고 민중을 부추겨 지역간의 감정 또는 대결 의식을 유발하였다. 그 배경을 제도와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우리나라는 고려때부터 지방의 행정구역을 팔도로 나누었는데, 예로부터 팔도에 대한 평이 구구했다.
조선초기 정도전 또는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평하였다는 한문구절을 보자.
함경도는 진흙밭에서 싸움질하는개 (泥田鬪狗)
평안도는 수풀에서 나온 사나운 호랑이 (猛虎出林)
황해도는 돌밭에서 갈이하는 소 (石田耕牛)
강원도는 바위아래 해묵은 부처 (岩下老佛)
충청도는 맑은 바람에 밝은 달 (淸風明月)
경상도는 송죽과 같은 큰 절개 (松竹大節)
전라도는 바람앞에 가는 버드나무 (風前細柳)
경기지방은 거울속의 미녀 (鏡中美人) " 이다...............
태조 이성계가 장수로서 왕씨로부터 왕위를 얻었으므로, 그를 도와준 공신들은 서북 방면의 맹장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미 나라를 얻은 다음에는 서북 사람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지 말라고 명멸했다.
그러므로 평안도와 함경도 두 도에는 3백년 동안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고, 간혹 과거에 급제 했다
하더라도 현령 정도였고, 가끔 대간과 시종에 오른 자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 또한 드물 었다. 오직 정평 사람인 김니와 안변 사람 이지온
두사람이 아경에 올랐고, 철산 사람인 정봉수와 경성 사람인 전백록 두사람은 무장으로서 겨우 병사를 지낼 정도 였다.
또 나라 안의 풍습이 문벌을 중하게 여겨 서울의 사대부는 서북 방면의 사람들과 혼인 하거나 평등하게 사귀지 않았다.
서북 사람 역시 감히 서울 사대부와 더불어 평등한 교제를 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서북 두 도에는 드디어 사대부가 없게 되었고, 사대부 역시 그곳에 사는 사람이 없었다.
서북(평안도)지역을 비롯한 동북(함경도)지역은 세종의 4군 6진 개척시절부터 남쪽의 죄인들이 이주되어 산다는 편견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다.
조선말기 안동김씨 풍양조씨일가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어 이러한 상황은 더 심각해 진다.
급기야, 불만을 누적된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 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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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호경래의 농민군이 봉기한 당시의 조선왕조는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세도가문 아래에서 부패한 관료들에 의한 수탈은 가중되어 나갔고,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된 평안도 지역에서는 상대적 박탈감마저 만연해 있었죠.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력은 커졌지만 그혜택은 권력과 결탁한 특권층에 집중되었고 농민들은 부담만을 떠안아야 했습니다.. 홍경래는 이들과 결합하여 오랜 준비 끝에 세도권력에 정면으로 맞섰죠. 비록 지역적인 한계, 전술적인 오류와 지도부 내부의 갈등도 있었지만 홍경래의 지휘와 농민들의 뜨거운 호응이 있었기에 봉기는 4개월 남짓 지속될 수 있었답니다.
당시 평안도는 정치적으로는 불평등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청나라와의 긴장 상태가 약화되면서 상당한 동안 무역이 발전하였고 그동안 군사용으로 묶인 재원들도 활용되어 나갔으며, 정주 납처으이 유기를 비롯한 수공업이 발달하고 국내외 수요의 확대에 따라 광산 개발도 촉진되었죠. 의주와 평양에서는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곳곳에서 장시가 흥성하는 등 평안도는 활기에 넘쳐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을 평안도인들이 전적으로 향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새로운 재원 확보에 골몰하던 중앙의 세도 정치 권력은 상업적 이익에 눈을 돌렸고 그들과 결탁한 특권 상인들을 전면에 내세웠죠.널리 행해지던 밀무역이나 잠채 광업도 이익의 독점을 노리는 이들에 의해 엄격하게 규제되었고, 이에 따라 경제적으로 성장해 나가던 현지 신흥 상공업자들의 불만과 비판의식이 커질수 밖에 없었습니다.(이중 한명이 우군칙입입니다. 뿐만아니라 신흥 부층으로서 양반이 되었지만 인정을 받지못하는 세력(이희저등.), 잔반세력(김사용, 김창시 등), 또한 홍경래의 난에 합세하였지요. 무엇보다 최빈층이었던 농민들의 동조가 있었습니다.
홍경래의난에 대한 한계 지적의 글 입니다. ============================================ 홍경래의 난은 다른 민란과는 확연히 달랐다. 10년 세월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세력을 규합하고 자금을 모으고 병력을 양성했다.
서자 출신의 상인이자 식자 우군칙, 명망 있는 양반가의 선비 김사용 김창시, 역노(驛奴)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부호 이희저, 평민 장사 홍총각, 몰락한 향족 이제초…. 홍경래는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두루 포섭했다.
그러나 이들은 의기(義氣)는 투합하였으나 자발적으로 세(勢)를 불려나갈 ‘민중적 지향점’은 없었다. 혹독하게 말하자면 그들을 묶어놓은 것은 개인사적인 분노와 좌절된 욕망이었다. 이념적 구심점은 부재했다.
홍경래의 유일한 사상적 기반이었던 풍수(風水). 그것은 공간적으로는 관서(關西)라는 지역주의의 한계를 노출했고 시간적으로는 중세의 봉건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다. 당시의 식자층에겐 비켜갈 수 없는 시대의 덫이기도 했다.
거사 당시 돌린 격문(檄文)을 보자. “조정에서는 서북 땅을 버림이 마치 더러운 흙과 같았다. 권문(權門)의 노비들조차 서쪽 땅 사람들을 보면 평안도 놈이라 일컬었다. 서쪽 땅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겠는가….”
극렬한 지역주의는 일시에 평안도 농민들의 공분을 폭발시켰으나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했다. 거사 뒤 불같은 기세가 불과 나흘 만에 수그러든 것은 이 때문이다.
불만의 결집만으로는 ‘새날’을 밝힐 수는 없었다. =================================================
택리지요약본
■팔도총론(八道總論) 팔도의 위치: 조선의 땅은 팔도(八道)로 나뉘어 있는데 함경도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그것이다. 각도의 지리적 위치는 함경도는 여진과 이웃하고 있고, 강원도는 함경도의 남쪽에 계속된다. 평안도는 중국의 심양에 인접하고(淸의 고도 원래의 봉천), 황해도는 ;평안도의 남쪽에 계속하고, 경기도는 강원도·황해도의 남쪽에 위치하고, 경기도 남쪽은 충청도와 전라도가 위치하고 있으며, 전라도의 동쪽이 경상도이다. 경상도는 옛날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땅이다. 함경도·평안도·황해도는 고조선(古朝鮮)과 고구려(高句麗)의 땅이었다. 강원도는 별도로 예맥(濊貊)의 땅이었다.
평안도: 평안도는 압록강(鴨綠江)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이후로 압록강의 이남을 경계로 삼았다. 평안도는 넓은 평야와 아름다운 산의 경치를 가지고 있다. 대동강 유역의 땅은 오곡과 면화의 재배에 적당하나, 둑과 시내가 적어서 오로지 밭곡식을 일삼는다. 하류에는 벽지도가 있어서 원주민들이 여기에 논을 만들어 일무(一畝)에 팔(八)석을 거둘만하였다. 압록강은 백두산의 서남쪽에서 시작하여 삼백 리에 이른다. 평양의 서쪽으로 백리에는 청천강이 흐르고, 과거 고구려 시기 수나라의 군사들이 얕은 개울로 알고 이르다 많은 수가 수몰하였다. 안주의 동쪽에는 영변부가 있는데 지형이 험준하여 철옹(鐵瓮)이라 부른다. 강계부는 수목이 우거지고 매년 춘추에 백성들이 채취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여기에서는 인삼이 많이 나서 삼산지(蔘産地)라 부르게 되었다. 의주는 국경의 중요한 지역으로 압록강과 닿아있다. 압록강에는 위화도라는 하중도가 있는데 태조가 여기서 회군하여 최영을 몰아내고 고려의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아서 조선을 건립하였다. 대체로 청천강이남을 청남이라 하는데 동서로 지형이 좁다. 평지가 적고 논이 없으며 거의가 밭으로 일궈져 있다. 청북은 지형이 높고 추우며 북방과 맞닿아 과실의 수확이 없고, 백성은 게으르고 구차히 산다. 오직 평양과 안주만이 큰 도회를 이루고 중국과의 거래가 많은 관계로 물자가 넉넉하다. 청남은 내지에 가깝고 풍속이 문학을 숭상하나, 청북은 풍속이 미개하고 무(武)를 숭상하지만 오직 정주(定州)에만 등과한 문사가 많다.
함경도: 평안도의 동쪽을 백두산의 대맥이 남하하면서 하늘을 가르는 것 같이 높은 영(嶺)이 되었다. 이 영의 동쪽이 바로 함경도이다. 옛날 옥저의 땅으로, 남쪽은 철령(鐵嶺)이 한계가 되고 동북쪽은 두만강(豆滿江)이 한계가 된다. 본도의 남북의 길이는 이천리가 넘고 바다와 가깝고 동서로는 불과 백리다. 주몽의 점거지가 되었다가 여진인들이 살았으나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여진인을 몰아내고 강의 이북으로 육백리에 있는 선춘령을 경계로 삼게되었다. 이후 육진(六鎭)에 병영을 두어 백두산의 동남에 있던 여진의 근거지를 모두 우리의 판도에 두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강희제는 목극등으로 하여금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나누게 하였다.(백두산 정계비-토문강의 위치가 분쟁의 여지로 작용하게 된다.) 함흥이북으로는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굳세고 사납고 토지가 차고 메말라 곡식이라고는 오직 조와 보리 뿐 이고 메벼가 적고 면화가 전혀 없다. 원주민들의 성질이 마치 여진인과 같아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어 추위를 견딘다. 산에서 얻어지는 담비와 인삼으로 상인과의 교역으로 옷감을 얻는다. 바닷가의 생산은 풍족하나 황해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함흥읍은 문학을 숭상하고 등과를 하는 자도 있었다. 또 평야가 먼 데까지 펼쳐져 있으나 바다에 인접하여 거칠고 평양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함흥에는 태조가 살던 집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아들 태종이 사자를 보내어 모시어 오려 했으나 태조의 심지를 수이(易)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사자 박순(朴淳)의 죽음으로 태조가 마음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안변과의 서북경계로 원산이 있는데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다한다. 동북은 해로로 육진에 통하며 육진 및 여러 읍에는 상선이 모여들어 도회를 이룬다. 조정에서는 여기에 곡식창고를 짓고 흉년이 되면 풀어서 백성을 구제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은 조선건립이후 삼백 년 간 관리의 배출이 극히 드물었다. 대각에 오르는 이가 있다 하여도 극소수였다. 태조가 왕씨의 왕위를 대신하였던 만큼 그 좌명 공신도 또한 서북도의 맹장이 많았다. 이미 나라를 얻은 다음에는 "서북인은 크게 쓰지 말라" 하였다. 이곳의 풍토가 척박하고 성질이 드세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아니한 관계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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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 잘 하고 갑니다 ^^
공부 잘 하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