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0월, 산사에서 생긴 일, 어느날 새벽 절에서 한 스님(이광용 아나代役)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하품~ 잠이 덜 깬 상황), 고요한 산사에 목탁 소리 들림, 이때 우당탕 쿵쾅, 산사에 들이닥친 수상한 군인들, (군인들이 스님들의 새벽 염불하는 사찰을 군화발로 짓밟고 지나갔다),
군인: 당신이 여기 주지야?!
주지: 그렇소만?
군인: 끌어내!
-갑자기 이게 무슨 일,
이광용/KBS 아나운서: 당황 하셨습니까? 비질하다 끌려나간 저보다 더 놀라셨습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시죠? 1980년 10월 27일, 전국 곳곳의 사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153명의 승려와 관계자들이 강제로 연행됐죠. 사흘 뒤에 10월 30일에는 수색규모가 더욱 확대됐습니다. 군경확대 병력 32,076명이 동원되어서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 곳을 집중 수색해 무려 1,776명을 검거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입니다.
해설: (1979.10.26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1979.10.26 오후 7시 50분께 서거했습니다. 정식 지휘체계의 명령을 위반하고 (1979.12.12 신군부 쿠데타), 중앙청, 국방부, 육본 등을 점령하고 상급 지휘관들을 체포한 것은 명백한 군형법상의 반란죄에 해당합니다. (1980.5.17. 24:00 비상계엄 전국 확대), 행정과 사법을 장악합니다,
해설: 1980.5.17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신군부 (탱크가 서울 시내로 진입), 그리고 (1980.5.18) 1980.05.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서울 삼청동 중앙교육원 청사에 현판을 달고 정식 업무에 들어 갔습니다. (1980.09.01 마침내 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9월 1일 전두환은 제11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이광용: 1979년 가을부터 이듬해인 1980년 9월까지 있었던 파란만장한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해설: 1980년 10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제5공화국 헌법 공포식이 거행됐습니다.
이광용: 대통령의 임기는 7년 단임제로 하고 선출방식은 간접선거제도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제5공화국 헌법 공포식이 정말 화려하게 열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행사 몇 시간 전인 당일 새벽에 아까 보셨던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었던 거죠. 이른바 10.27 불교 법난(法難), 오늘의 주제입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오늘부터 새로 옮겨서 인사 드립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 9시 40분), 9시 뉴스로 오늘을 확인하시고 저희 프로그램을 통해서 어제의 의미, 그날의 의미를 함께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불기(佛紀) 2566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 10.27 불교 법난을 다룹니다.
이시원/배우: 10.27 이것도 낯설고요, 법난~? 단어 모르는 거 저만 있는 거 아니죠.
최원정: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허준/방송인: 우리가 봐서 그렇지 저는 법난해서 스님들이 무슨 난을 일으켰나?
최원정: 법난이 불교 교단이나 포교하는 사람이 받는 박해를 일컫는 말인데, 사실 불자가 아니어도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이기 때문에 꼭 알아두셔야 될 그런 부분이 아닌가 싶어서 오늘 주제로 다루게 되었는데요. 우리 시원씨는 천주교, 오 교수님이란 최 선생님은 개신교, 허준 씨는?
허준: 저는 다신교~ 누구든지 도와 주는 분이 내 편이죠. 도움을 주신다면 누구든 믿습니다.
안석환/배우: (허준 옆에서) 저랑 비슷합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못되고 그냥 절에 가면 절하고,교회에 가면 기도하고, 성당에 가면 미사 드리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1980년도 하면 굉장히 저도 20대 초반이었던 때라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80년 당시에는 불교 정화 사건으로 저희가 알고 있고 사실은 피해자를 범법자로 만드는 그런 용어를 사용했었는데 이건 정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만행입니다. (과거사 진실규명조사 위원회에서 국가 권력 남용사례의 하나로 2007년에 ‘법난 사건’으로 규정), 정말 욕 나왔습니다.
이시원: (안석환을 향해) 다 아시네요, 이걸 공감을 하시네요,
안석환: 나만큼 살아봐~
오제연/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사실 10.27 불교 법난 이라고 하면 낯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2005년에 발족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잘 보여 주고 있어요. 이 위원회에서 과거에 정치 비판 군인들이 진행한 여러가지 인권침해사례들을 8개를 골라서 그 진상을 조사했는데 ’12.12, 5.17, 5.18’ 사건, 실미도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등 8개 사건, 이런 굵직한 사건들이 있고 그것과 더불어서 바로 10.27 법난, 불교법난 사건도 있는 거죠.
최태성/한국사 강사: 실미도 사건하고 같이 들어가는 거예요.
최원정: 삼청교육대도 있고, 왜 몰랐지~
허준: 쿠데타 세력이 하두 저지른 잘못이나 난리가 많아 가지고 몇 대 사건이라고 한다면 정말 큰 거잖아요.
최태성: 일단 이들이 내세웠던 명분은 27일 그때는 비리승려 색출, 그리고 10.30에는 좀 더 나아갑니다. 사찰에 들어와 있는 간첩-운동권-반체제 인사 색출, 이런 식으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군경에게 실탄을 지급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총소리를 들었다는 증언까지 있어요. 너무 의아하죠.
이시원: 산사하면 고요하고 정숙하고 평온한 장소잖아요. 그런데 총소리 라니~
허준: 이게 워낙 무식해 가지고 소림사랑 헷갈린 거 아냐? 스님들이 맞서 싸울 줄 알고~
안석환: 제가 아는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하두 우악스럽고 무법적이어서 공비가 쳐들어왔나? 한데 한국군이어서 더욱 더 충격적이었다 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십니다.
오제연: 무장한 군경들에게 연행된 스님이나 불교 관계자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 또 경찰청 특수부대 또 각 지역에 있는 보안부대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근데 이 조사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어요. 무조건 혐의를 인정해라, 모든 직책에서 다 물러나라, 이런 것들을 강요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시원: 죄를 수사하는 곳이 아니라 죄를 만드는 곳이잖아요.
안석환: 대공수사를 주도하는 곳이죠.
최태성: 근데 주리를 틀어가지고 자백을 받는 방식이거든요(혐의인정 안하면 죽인다니까 다 포기).
오제연: 군경들은 다짜 고짜 스님들을 잡아다가 승복을 벗기고 대신 수의(囚衣)나 군복을 입혔다고 합니다. 근데 스님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행위는 그 자체로 성직자의 정체성을 허물어 버리는 큰 충격이었다고 그래요. 그것뿐만 아니라 구타, 허벅지에다 각목을 넣고 밟기, 그 다음에는 전기 고문, 고추가루 물고문, 잠 안재우기 이런 숱한 가혹행위를 통해서 스님들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 강요했다고 합니다. 당시 오대산 월정사 재무국장이었던 원행 스님이 그때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십니다.
최원정: (안석환씨에게 종이를 넘깁니다), 이걸, 큰 목소리로 읽어 주세요,
안석환: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듯 까마득 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낭독자가 울컥함) 옆에 다가와 함께 (중단)~
최태성: 원행 스님이 고문을 엄청 받으셨다고 그래요, 그 과정에서 발목이 부러졌고 앞니가 부러졌고 엉치뼈 수술을 두번이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안석환: 그러다가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버리면 양동이 물을 냅다 끼얹는 바람에 정신이 들곤했다. 정신이 들은가 싶으면 다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볼펜과 메모 용지를 밀쳐 넣으면서 다그쳤다. “야~ 이 중놈아~ 이 큰 절에서 재무를 10년이나 봤는데 숨겨둔 재산이 하나도 없다는게 말이 돼? 누굴 바보로 아냐 이 새끼야~ 비밀 아파트와 여자는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빨리 적어, 북한 간첩과는 몇번 만났는지 실토해?” 그렇게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면서 고문은 계속되었다.
최원정: 너무나 속상하고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을 어떻게든 돈과 여자 빨갱이로 엮어서~
허준: 인간의 수준은 자기의 수준에서 사람을 바라본다고 하잖아요. 그런 거악을 저질렀던 파렴치한 인간들의 눈에는 아니 어떻게 10년 동안 돈을 다루면서 비리 한 번 없어 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건 자기 눈의 시선에서~
오제연: 당국은 이렇게 성직자나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특히나 치명적인 죄목들을 덮어 씌웠구요, 그리고 수사개시 불과 2주만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최태성: 국민들은 잘못된 기사들을 보면서 이건 정말 스님들이 심각한 거 아냐 이런 인식을 가지니까 국민에게 낙인이 찍혀 버린거죠.
최태성: 실제로 이 당시 불교 신도 100만여 명이 이탈했다는 추정도 나오고 있어요.
오제연: 그런데 여기서 소위 부정 축재액이라고 하는 것이 사찰이나 재단법인이 갖고 있는 재산까지 승려 개인의 재산으로 억지 산정을 해가지고 강요한 것들이 많이 있구요. 또 여자와 놀아났다고 하는 것은 사진 한 장 같이 찍은 걸 가지고 이 여자 도대체 누구냐 이렇게 추궁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몰아 갔다는 것이죠. 사실 이렇게 대대적인 검거작전도 벌이고 또 인권유린을 자행하면서 엄청나게 취조도 하고 가혹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은 무혐의로 풀려납니다. 그리고 형사입건 및 기소가 된 경우에도 결국에는 무죄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시원: 아무리 털고 털어도 안 나왔다는 거잖아요.
안석환: 무죄 판결이 나왔던 것은 언론에 나오지도 않았어요.
최원정: 피의 사실만 공표로 일단 낙인 찍어놓고~
최태성: 국민들은 불교 이거 나쁜 사람들이네, 이거 왜들 이래~(신군부가 조성한 분위기에 불교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으로 변화),
이시원: 진짜 불교 이미지가 땅 바닥에 쳐박혀 버린 거에요.
최원정: 당시 신군부 입장에서는 허위사실을 유포해서라도 불교계 인사를 소탕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데~ 정말 이건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거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불교계를 뒤흔들려고 했던 걸까요?
최태성: 이게 어디서 출발하냐면 10.26 사태 아시죠? (10.26 사태-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
해설: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의 중흥을 위해 일하고 또 일했던 故박정희 대통령,
최태성: 바로 그 다음날에 계엄령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쭉 이어지다가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아시죠, 그 전날 (1980.5.17), 5.17일날 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가 됩니다.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이 일(불교법난)을 밀어 부친 건데,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노태우, 군통수권자 전두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거예요.
이시원: 사회정화, 삼청교육대 설치에 많이 얘기했던 거잖아요.
오제연: 실제로 불교법난 과정에서 일부 승려들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갑니다. 12.12와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우리가 흔히 국보위라고 부르는 조직을 만들고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유신정권 붕괴후 등장한 신군부가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초법적 임시행정조직), 정의 사회구현이란 것을 강조하면서 이제 확실히 권력을 자기 것으로 잡을려고 그래요. 그들이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사회정화운동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또 추진된 것이 소위 삼청계획이란 거예요. 우선은 김종필이나 이후락 같은 구여권 인사들을 부정축재로 몰아가지고 그들을 다 축출하고 이런 것이 첫번째 단계고요. 악질적인 폭력배를 잡아다가 교화시켜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라는 명분을 내걸고 소위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인권유린을 자행하게 되는 거죠.
이시원: 정화라는 게 좋은 단어잖아요.
최태성: 제가 태어나 가지고 처음으로 정부정책에 대한 어떤 사기를 처음 느꼈던 게 정의 사회구현 이 단어였어요. 이 정의사회 구현을 외친 사람들이 가장 부정하고 가장 비리의 온상이었어. 이걸로 되게 웃겼던 기억이 나는데~
이시원: 말만 번지르르했던 것 같애요. 부패없앤다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걸 없앤다는 가면을 쓰고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거 장말 쇼 아닌가요.
최원정: 1981년 혼란의 중심에 있던 신군부가 창당한 정당 이름이 민주정의당,
최태성: 거기에 또 정의가 나왔네요. (정의란 단어를 마구잡이로 갔다 쓴),
오제연: 신군부가 창의력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이미 참고할만한 좋은 전례가 있었어요. 5.16 쿠데타 당시에 군사정권이 했던 소위 사회악 소탕작전, 그것이 바로 하나의 전례가 되는 것입니다 (5대 사회악 소탕작전-박정희 대통령이 지적한 밀수-마약-탈세-폭력-도박 등 5대 사회악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 폭력배, 부정 정치인, 또는 부정 축재자, 부정 공직자 이런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속하고 해임시켜 버리고,
안석환: 5.16 때는 드라마 야인시대에 많이 등장했던 이정재, 임화수 깡패 이런 사람들을 거리행진 시켜서 사형시켜버리죠. (깡패들 거리행진 사진-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한때는 세상을 들었다 놨던 정치깡패들의 최후),
허준: 사실은 국민들 입장에선 저 사람들이 깡패래 못된 깡패래 하면 한편 잘 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시원: 사회가 깨끗해 지고 있나?
허준: 저런 깡패들도 저렇게 잡혀가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한 순간이겠네~ 겁도 날 것 같애.
최태성: 저런 방식이 사실 명분없이 권력을 장악했는데 어떻게 보면 늘 쓰던 상투적 수법이에요.
오제연: 5.16 쿠데타를 했을 때 썼던 여러가지들을 고스란히 아니 그 이상으로~ 청출어람격으로(박정희 정권의 수법을 벤치마킹한 신군부), 즉 사회안정과 비리척결에 성역은 없다. 종교계도 정화의 대상이 된다 라고 이미 전두환은 천명을 했고 실제로 자신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불교정화계획에 따라서 1980년 10월에 실제로 실행을 하게 되는 것이죠.
안석환: 근데 이게 공교롭게도 신군부의 불교계 수사계획 명칭이 (佛敎界 淨化搜査計劃 45計劃), 45계획인데 1980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 주소 자체가 종로구 견지동 45번지 예요.
일동: 아~ 그래요 그래서 45계획
이시원: 우연이 아니라~
허준: 4~5명 단위로 잡아들이라는 그런 의미네요.
최태성: 섬뜻하다.
최원정: 예부터 종교공간은 죄인들도 품어주고 소도 같은 신성한 곳인데~ (소도(蘇塗)-삼한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죄인이 숨어도 잡아가거나 벌하지 않는 특수한 성지를 의미), 성직자를 손을 봐! 그것도 정치군인들이!
최태성: 그러니까요,
오제연: 천주교와 개신교의 종교행사들은 당시에 민주화 운동의 하나의 수단으로서 많이 활용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한국 기독교교회 협의회 같은 곳은 직접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군부도 이들 종교인들을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8월 19일, 전국 검사장 회의가 열리는데 그 회의록을 보면은 반체제 종교인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속에서 정작 불교계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겁니다.
이시원: 정말 때리고 싶은 사람은 막판에 때리잖아요. 그러니까 크게 한 방 먹이겠다 벼르고 있었던 거예요 뭐예요?
안석환: 제 생각에는 만약에 천주교나 개신교도 건드리고 싶었겠지만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거야,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라 세계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면 종교탄압이라고 하여 정당성에 인정을 못받으니까 네트워크가 약한 불교계를 쳐야겠다.
최태성: 굉장히 비겁하지 않아요? 아니 실제로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천주교, 개신교이랑 이 친구들 잡아들여야 될 것 같이 하다가 뒤에는 교황청이랑 세계 기독교 네트워크는 건드렸다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면 그렇잖아~
이시원: 만만한 국내파 네트워크를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거 어때? 굉장히 비겁한 모습이네요.
최태성: (천주교 개신교가 아닌 불교계를 신군부가 탄압한 역사적 배경은?) 배경을 우리가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애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가 전통불교, 옛날부터 우리 불교는 네 글자로 정리가 됩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바 바로 호국불교 (護國佛敎)~ (호국불교-불교 신앙으로 나라와 외세를 진압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킨다는 불교사상),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 이게 불교의 특징이었잖아요. 예를 들면 고려시대에는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 그들을 막겠다. 그래서 만든 게 뭐예요? 팔만대장경~ 바로 바로 대답하셔야 돼요, 조선시대로 왔습니다. 임진왜란 그리고 병자호란 때 그들이 만들어서 싸웠던 게 뭐였죠?
허준: 승병~
최태성: 일제 강점기에 민족대표 33인 중에 불교대표로 한 분이 계셨죠?
이시원: 한용운
최태성: 그렇죠, 한용운 그리고 당시 일제 강점기 때 불교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진관사, 진관사 태극기 혹시 아시나요?
최원정: 알죠, 일장기에다 태극권과 4궤를 그렸던 것 그거잖아요. (진관사 태극기-일장기 위에 태극과 4궤의 형상을 덧칠해 항일의지를 드러냄),
최태성: 맞습니다, 항상 나라가 어려울 때 불교가 말 그대로 호국을 위해서 앞장을 섰던 그런 것이잖아요.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 침묵을 해야 되는 불교계도 물론 있었지요. 근데 광복되고 나서 이제 불교계가 조금 색다른 모습으로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들어온 게 미군정이었죠. (美軍政-광복후 38선 이남지역에 미군이 진주해 시행한 군사통치), 미군정은 불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 이후에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의 종교는 기독교였거든요. 이러니까 불교에 대해서 이해가 잘 안되는 상황 속에서 불교계의 문제점을 들춰냈단 말이죠. 대통령 스스로가, 대표적인 게 바로 대처승이에요 (帶妻僧-결혼해 가정을 꾸린 승려), 대처승이 뭐냐하면 아이를 낳고 사찰에서 일하는 스님들~
최원정: 학교 다닐 때 아버지 직업란에 스님이라고 쓴 친구들이 가끔 기억이 나거든요. 그게 저는 이해가 안갔어요. 그게 대처승이구나.
최태성: 맞아요, 이 문제가 그 당시에는 많이 있었거든요. (1950년대 당시에는 불교계에 대처승이 꽤 많이 있었거든요),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들추고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종교교단 내에서 알아서 해결할 문제지~
안석환: 그런데 대처승 문제를 대통령께서~
최태성: 문제를 제기를 한 거에요.
이시원: 처지를 바꿔보자면 불교신자인 대통령이 개신교단에 왜 목사들은 결혼을 하냐 지적하는거나 똑 같은 거예요.
최원정; 사실 우리나라 헌법에 종교와 정치는 분리가 되어 있다 라고 명시가 되어 있거든요. 대통령이 그런 얘기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는 거에요.
최태성: 당연하죠, 실제로 이 당시에도 불교계 내부에서 비구와 대처에 대한 논쟁이 자체적으로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정치인이 들어와서 이거 잘못된 거 아니냐고 해버리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시원: 근데 선생님, 아까 대처승 비구라고 말씀하셨는데 비구니를 짧게 줄여서 비구라고 하는 건가요?
최태성: 아녜요, 비구(比丘)는 출가한 남자 승려를 말하죠,
최원정: 저희가 사실 불교 용어에 대해서 낯설은 게 많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시간입니다.
이광용: 불교에 대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불교 대중화를 위해 애쓰시는 성진 스님을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성진 스님, 다 여쭤 봐도 되는 거죠?
성진/대한 불교조계종 남양주 성관사 주지: 제가 모르는 게 많을텐데 걱정이 되네요.
이광용: 일단 소개를 먼저 해주시죠.
성진: (법복에 두손을 모우고)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저는 대한 불교조계종 남양주 성관사 선사로서 주지입니다.
이광용: 제가 먼저 질문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인사 하실 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사’ 하셨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스님?
성진: 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거는 사실은 아미타불 (극락에 계신 부처)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이 관세음보살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고 아미타불에게로 이끄는 보살) 님께 제가 믿고 의지하고 따르겠습니다 하는 불교에서 귀의합니다 라고 하는 표현인데 나무(南無) (namas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귀의, 믿고 의지) 한다는 의미이지 서 있는 식물 나무가 아니고, 관세음보살님은 자비의 상징~
최태성: 소원도 많이 들어주시잖아요!
성진: 그렇죠, 손도 천 개고~
이시원: 성진 스님, 질문 있는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할 때 뒤에 똑~똑~ 또르르~ 이런 예쁜 소리가 나잖아요. 그게 불교의 악기인가요? 왜 두드리는 건가요?
성진: 그냥 제가 직접 보여 드리면 훨씬 이해가 쉽지 않겠나~목탁을 제가 가지고 왔어요.
최태성: 본인 것인가요?
성진: 네, 제 것입니다. (목탁을 두드리면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소리를 조금 높여)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딱딱 딱딱~ 또르르~보살
이광용: 목탁 소리에 뭔가 청정하고 평온해지는 마음이 드네요.
성진: 말씀하신 대로 이게 악기의 의미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염불이라고 해서 선율을 맞추기 위해서 악기 같이 여러 사람이 있는데 이걸로 하나의 신호와도 같고~
이시원: 지휘자와 같은~
성진: 지휘와 같기도 하고요.
이시원: 스님, 그러면 스님 마다 비트도 다르고 어딘 빠르게 어딘 느리고~
성진: 맞습니다.
이광용: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진: 왜냐면 호남쪽 영남쪽 염불의 리듬이 달라요.
안석환: 서편제, 동편제 처럼~
이광용: 외람되지만 경상도 스님 리듬으로~, 요청하면 시범을 보여주실 수 있는 건가요?
성진: 제가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광용: 그럼 먼저 전라도로요.
성진: (반야심경(般若心經)-위대한 지혜와 이를 통한 해탈에 이르는 길을 설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 마하반야바라미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蜜多時)~이게 호남~
이광용: 경상도요!
성진: (빠르게)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이광용: 개인적으로 제일 궁금해요, 충청도요
성진: (망설임) 충청도는 너무 느린데~ (경상도의 0.5배속) 마하반야 바라밀다심경~
일동: 박수
이시원: 역사저널 그날을 보고 뮤지션들이 목탁으로 노래할 것 같애요.
최태성: 질문 좀 언제 출가하셨어요?
성진: 한 29년 되어 가네요
최태성; 대학생 때 출가하셨나요?
성진: 네, 대학교 때, 불교학과를 가긴 갔는데, 2지망에 가는 바람에~
최태성: 그럼 1지망은 뭐 였는데요?
성진: 1지망은 경찰행정학과였어요. 천만 다행이죠, 2지망 붙은게~
이시원: 스님, 궁금한게 있습니다.
안석환: 부처님께서 살생을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파리를 안 죽일려고 노력을 합니다만 모기는 안 되겠어요. 모기는 잠을 자기 위해서 잡거든요. 스님께서는 모기를 잡으세요?
성진: 저도 모기가 자주 무는 바람에 피가 나서~ 예전에도 모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모기도 생명인데~ 굉장히 모기로 논쟁이 있었어요. 신도분이 뿌리면 연기나는 (스프레이) 것을 주겠다 해서 스님들이 그걸 가지고 우리가 사용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최태성: 그런 논쟁이 있었구나
성진: 이런 사소한 것 까지도 전 스님들이 모여 가지고 회의를 했어요. 결론적으로는 살충제는 사용하지 말자 우리 편하자고 이걸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하면서 방법을 찾았죠. 대안으로 모기가 싫어하는 허브 나무를 활용하기로
최태성; 자연 친화적 방법으로
성진: 그리고 그러면 방충망을 설치하자. 요즘은 뿌리면 안오는 모기 기피제가 있어서 괜찮습니다.
최원정: 질문이 넘쳐나는데 하나만 더 받고~
허준: 스님들, 삭발을 하시잖아요, 이게 의무 사항인가요?
성진: 이런 질문은 처음 이시네~ 네, 이것은 사분율이라고 (사분율(四分律)-출가한 승려가 불법(佛法)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계율을 자세히 기록한 불교의 율전(律典)으로 총60권으로 구성) 하는 계율이 있어요. 보름에 한 번 14일, 29일 그믐에 다들 모여 가지고 함께 삭발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상징적인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왕궁을 나서서 출가를 하실 때 자기가 가지고 계시던 장신구를 따라 온 시종에게 주고 당신의 칼로 머리카락을 잘라요. “이제부터 나는 출가 수행자의 길을 가겠다.” 그래서 그런 상징적인 면이고 자꾸 내가 번뇌를 덜어 내야지 하는 수행적 의미도 있어서 의무입니다.
최태성: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성진: 요즘은 기계가 좋아서~ 혼자 할 수는 있는데 그렇지만 여러 스님들이 함께 모여 있는 큰 처소에서는 반드시 정해진 날에 상대방이 깎아 줍니다.
허준: 손재주가 없는 스님들이 있으시잖아요?
성진: 인연법에 맡겨 야지요.
이광용: 조금 전에 생소한 단어가 나왔습니다. 비구(比丘), 그 단어는 어떻게 유래된 건가요.
성진: 비구란 단어는 인도 중부지방 언어인 팔라어인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데 비쿠 bhikkhu 라고 하는 음역 그대로 따 온 겁니다. 뭐냐면 불교의 독신 남성 수행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한국 불교는 독신 수행자 뿐만 아니라 가정을 꾸린 대처승도 있어요. 한국불교가 워낙 개방되어 있다 보니까 조계종 같은 경우는 독신수행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 내에 250여 개 종파가 있는 만큼 다양한 수행 형태가 있습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통해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며 각자의 계율에 맞추어서 지켜나가고 있고~
안석환: 그것을 국가에서 아니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문제입니다.
성진: 특정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국민의 인권문제이죠. 10.27 법난은 불교라는 하나의 대표적인 종교가 겼었던 아픔의 상처이지만 우리 국민이 당연히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며 그걸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권이 침해가 되었다는 것이죠. 두번째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요.
이광용: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불교에 무엇이든 답해 주신 성진 스님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원정: 불교에 대한 궁금증을 잠시 해결해봤는데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불교의 근현대사와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할게요. 아까 이승만 정권 때 까지 이야기 했죠.
최태성: 이어가죠, 박정희 정부에서 불교는 선풍(禪風) 바람이 붑니다. 선풍이 뭐냐면 참선, 세속에서 벗어나 가지고 자기 수양을 쌓는 참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시게 돼죠. 그럼 이렇게 되면 세속에서 벗어나서 보니까 현실과 괴리되는 고립되는 이런 모습이 있는 거예요. 그러다가 70년대 당시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이잖아요. 70년대 후반에 오면서 억압받고 있는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활동하는 사람들을 드디어 불교계가 품어주기 시작합니다.
오제연: 신군부가 이런 불교계의 움직임을 모를리가 없죠. 신군부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이런 불교계의 움직임을 캐치를 하고 이들 승려들이 주도를 해서 신군부가 보기에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불미스러운 작태로 변모될 가능성이 있다(1980. 02. 문공부), 이렇게 판단을 하고, 그리고 이들이 다가올 1980년 민주화의 봄에 사회민주화 세력들과 연대해 가지고 어떤 고질적인 저항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를 했던 겁니다.
이시원: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불미스러운 작태는 정말 누가 하는지 모르겠네요.
최원정: 그 거잖아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오제연: 12.12와 5.17 쿠데타는 일으켰죠, 그리고 권력은 잡아야 되겠는데 모양새를 갖추었으면 하고 그럼 이때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바로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 특히 존경받는 종교계의 인물을 포섭해서 그의 지지를 얻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신군부도 사실은 월주 스님한테 세번이나 전두환 장군에 지지 성명을 내달라 (80.4.26, 신임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는 요청을 했다고 그래요.
최태성: 찔찔하다 아이구~ 정말로~
오제연: 이런 거죠, 구국의 영웅,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최태성: 아유~ 남사스러워라
오제연: 이런 거지 성명을 요청했는데 월주 스님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최원정: 전두환은 물러가라 외쳐도 모자랄 판에~ 구국 영웅이 웬 말입니까?
최태성: 그러니까
오제연: (신군부의 심기를 거스린) 거기에 결정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할까요, 1980년 6월 3일, 월주 스님이 광주를 방문합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당시 사망자는 160명, 행방불명 81명, 상이후 사망 추정치는 110명 달함), (월주 스님-1980년 외로운 광주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불교, 나아가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월주 스님 회고록), 그런데 이 소식이 알려지니까 사전에 종로 경찰서장이 조계종 총무원을 방문해서 위에서 광주에 가지 말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월주 스님의 광주행을 만류했다고 해요. (신군부의 압박에도) 그런데 월주 스님은 그냥 있을 수 없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뜻을 굽히지 않게 됩니다.
이시원: 10.27 법난을 했던 이유 중의 또 다른 이유는 1980년 당시 전국이 계엄하에 있었잖아요. 계엄을 계속 둘 수는 없고 언젠가는 풀어야 되는데 풀기 전에 계엄의 긴장된 분위기를 계속해서 이어 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거예요. 사회적 어떤 압박 분위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불교 탄압이었던 것이죠. 실제로 10.27 불교법난 3개월 이후에 1981.01.24에 계엄이 해제됩니다.
최원정: 전국민에 두려움과 경각심을 주겠다. 고도의 작전이었군요.
이시원: 신군부는 다 계획이 있었네요.
최태성: 그래서 결국 10.27 불교 법난 승려와 관계자들은 형사법상 모두 무혐의, 무죄였다. 그래도 수사결과와 상관 없이 신군부의 내적 압박은 계속 들어옵니다. 결국은 아까 말씀 드렸던 월주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내려 놓으라는 거예요.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리고 조계종 중앙총회도 해산될 수 밖에 없고 불교계 자체 징계라는 명목으로 승려 13명이 체탈도첩 (체탈도첩-출가 승려로서 큰 죄를 지은 자에게 자격을 박탈하고 절에서 내쫓는 제도), 이게 뭐냐면 불교 승려들 한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예요. 승적박탈~ 이게 이루어진 거예요. 제적 10명 공권정지 17명 문서견책 2명 흥국사에서 두달간 강제연금 상태로 강요된 참선과 반성 등 일명 ‘승화교육’ 24명,
해설: 1980년 불교법난 당시 참선하는 절에 깡패들이 서식한다. 종단의 분규를 비난했던 전두환은 국민정신 계도에 앞장서야 한다며 종단의 정화를 요구했다. 이는 그가 법난 사건의 전후 과정을 보고 받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8년 뒤 1988.12.31. 5공 비리 청문회장,
해설: 그러나 그는 8년 뒤 열린 청문회에서 법난 수사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전두환의 증언(10.27 법난에 대한): (국회 전두환 증언에 다수 스님들 참석) 10.27 불교 법난으로 알려진 불교계에 대한 정화는 사회 전반에 대한 정화 조치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특정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비춰진 점에 대해서는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 일은 정화 조치의 일환이기는 하나 본인의 대통령 취임 후 몹시 바쁜 기간이었으므로 중대한 사안인데도 집행 기관을 자세하게 챙기지 못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최원정: 아~ 자기가 몹시 바빠서 그랬다네요. 죄송합니다. 바빴습니다.
최태성: 어이가 없어요.
안석환: (앙심은 어디에?)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이네~
이시원: 저는 정말 누군가 잘못했을 때 제일 괘씸하고 짜증나는게 “몰랐어” 이러고는 그만인 거예요. 드라마 내 동백꽃 필 무렵에도 나오잖아요. 필구 아빠가 ‘네가 태어난 줄 몰랐다” 니까 내가 알았다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라고 변명하니까, 아들 필구가 우리는 숙제 안 해오면 반성의자 1분, 숙제 몰랐다고 하면 반성의자 5분 앉아 있어야 돼요. 명대사인데요, 이건 책임 회피, 나는 몰랐다는 대통령의 책임회피는 비겁한 변명이거든요.
최원정: 사실 1988년 청문회에서 저 얘기는 사과는 아닌 거죠?
최태성: 아닌 거죠.
최원정: 근데 저런 태도가 피해자들을 가장 열 받게 하는 태도가 아닌가 해요. 같은해 1988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곳으로 향합니다.
전두환/前職 대통령: 권력을 남용한, 부덕한 전직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지금 국민 여러분에게 속죄하는 뜻에서~
해설: 퇴임 후 대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 헌납을 약속한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로 향한다.
전두환: (백담사에서) 아~ 여기 추워요(동영상)
이순자: 아이 근데 은둔하러 와서 이렇게 막 사진 찍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동영상),
이시원: 제가 지금 뭘 본 거죠?
최태성: 불교법난 주역이…불교사찰에…이 황당한 경우가 뭡니까? ~(헛웃음)~
최원정: 어떻게 해야 될지…(헛웃음)~
허준: 나치 친위대가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에 간 격이네요.
최원정: 그 정도로 지금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이시원: 이스라엘에서 나치 친위대를 받아준 것도 황당하죠!
허준: 혹시 일단 들어오게 하고 따로 손 보기 위한 전략?
이시원: 어머 저게 이상한 게 전두환이 불교신자였어요? 왜 갑자기 백담사 절로 들어갔던 거예요?
최태성: 전두환의 종교는 이거다 정확히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애요. 근데 세례명이 있어요. 베드로~ 천주교 신자였으나 나중에 불교 영향을 받았을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고 참고로 그의 둘째 아들인 전재용씨, 이 사람이 지금 개신교 목사, 실제로 전두환의 장례식도 기독교+불교식으로 치러졌어요.
오제연: 전두환은 퇴임 후 자기 고향으로 내려갈까 했는데 도저히 고향인 합천으로는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 가지고 은둔할 곳을 찾다가 선택한 곳이 강원도 백담사가 되는 겁니다. 백담사는 워낙 고지여서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백담사로 전두환 부부가 들어가 2년 살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전두환의 지지자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서 기독교인들도 많았던 거 같은데 절에서 기독교 집회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민족 반역자 전두환이 어떻게 민족의 성지인 백담사에 있을 수 있느냐 항의하는 시위도 있었다고 합니다.
최태성: 백담사가 왜 민족 성지인지 아세요? 여기가 우리가 얘기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수도했던 곳이에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영혼이 묻어 있는 곳에 전두환이 들어왔다구 용납이 안 되는 거죠.
안석환: 불교계에 못된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필 불교 사찰이냐 반대도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월주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답니다. “참회하러 가는데 막지 않는게 좋겠다. 절집은 흉악한 짐승도 죄인도 내쫓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다 지옥 중생도 건져야 하는 불가에서 죄과가 많다고 자비심을 버려선 안 된다”
최태성: 참회하러 간 거 아니잖아요!
이시원: (월주 스님이) 이렇게 봐주시는데~
안석환: 정말 진정한 종교인이 아닌가 생각되고요.
이시원: 정말 참 종교인이시긴 한데~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최태성: 옛날에 고려후기 귀족들이 온갖 나쁜 짓을 다 해놓고 사찰에 들어가서 극락세계에 가게 해 주세요 저는 죽어서도 극락세계에 가고 싶어요. 그런 모습과 뭐가 다를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허준: 근데요. 월주 스님은 정말 대단하시구나 나쁜 것에 주목하지 말고 저는 월주 스님의 훌륭한 인품에 오히려 경의를 표하는 게 좋지 않을까.
최원정: 성불해야 되겠습니다. 10.27 법난이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어떻게 봐야 될까요?
오제연: 이 사건을 계기로 불교계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그러면서 1980년대가 되면 스님들과 불교신자인 학생,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교계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종교계의 한 축을 불교가 담당하게 됩니다. 특히 5.18 희생자의 영령을 추모하는 행사라든지 스님들이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행진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흔히 민중 속의 불교라고 부르는 그러한 모습들이 불교계에서 더 확연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죠. 그래서 한 때 등을 돌렸던 신도들을 비롯한 대중들이 불교에 대해서 많이 지지를 보내고 그러면서 불교가 대중적인 기반이 넓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최태성: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 우리가 지금 이런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했는데 어쨌든 10.27 불교 법난은 절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는 거죠. 당시 가장 존경받고 숭앙받아야할 종교지도자들이 옷을 벗기고 발목을 부러뜨리고 이런 고문과 수모를 당했고 인권을 탄압당했는데 당시 일반 국민 시민들은 어땠을까.
최원정: 오늘 불법(佛法)을 수행하는 사찰을 불법(不法)적으로 권력이 유린한 그날, 실체 법난을 살펴보았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 굉장히 의미 있는 날이었어요. 꼭 우리가 알아야 되는 역사를 하나 건져 보았습니다.
이시원: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 깊은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많이 몰랐구나. 그래서 오늘 역사적인 그날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서로를 배우고 우리를 배우는 오늘이었습니다.
허준: 모르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쁨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방송을 보아오신 분들과 역사를 사랑하는 분들이시라면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날 이런 일이 있었단다.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었는데 그건 이렇단다. 이렇게 바꾸어 줄 수 있는 날이었던 것 같아서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오제연: 이 사건은 단순히 불교의 상처만이 아니라 사실은 한국 사회 전체의 상처라고 할 수 있구요. 이러한 상처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여러분들이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이것을 정확히 알고 기억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야지만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다.
최원정: 왕자로 태어났지만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서 모든 걸 내려 놓고 그들 곁으로 갔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오늘 이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안석환: 저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서 10.27 법난 때 당하셨던 스님들의 명단을 불러볼까 합니다, 다는 모르지만 기억하는 데로 돌아가신 원천 스님, 월주 스님, 경우 스님, 성혜 스님, 설정 스님, 현광 스님, 원행 스님, 삼보 스님, 정수 스님, 진관 스님 (월주 스님 회고록 중 전두환에게 남긴 말), 지금 살아계시다면 건강하시고 즐거우시길 바라고 돌아가셨다면 극락왕생 하시길 바랍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59회 1980. 10.27 법난과 전두환에서 정리).
① 1980년 10월, 산사에 어느날 새벽 절에서, 고요한 산사에 목탁 소리 들림, 이때 우당탕 쿵쾅, 산사에 들이닥친 수상한 군인들, 군인들이 스님들의 새벽 염불하는 사찰을 군화발로 짓밟고 무조건 연행해갔다, 군인: 당신이 여기 주지야?! 주지: 그렇소만? 군인: 끌어내! 1980년 10월 27일, 전국 곳곳의 사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당시 153명의 승려와 관계자들이 강제로 연행됐다. 사흘 뒤에 10월 30일에는 수색규모가 더욱 확대됐다. 군경확대 병력 32,076명이 동원되어서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 곳을 집중 수색해 무려 1,776명을 검거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모자는 바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다.
② 박대통령은 1979.10.26 오후7시50분께 서거했다. 1979.12.12 전두환은 정식 지휘체계의 명령을 위반하고, 총칼과 탱크로 중앙청, 국방부, 육본 등을 점령하고 상급 지휘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였다. 1980.5.17. 24:00 전두환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 총과 탱크로 행정부와 사법부를 장악했다, 1980.5.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신군부 (전방 9사단 탱크가 서울 시내로 진입), 1980.05.31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서울 삼청동 중앙교육원 청사에 현판을 달고 정식 업무에 들어 갔다. 1980.09.01 마침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1대 대통령 취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79년 가을부터 이듬해인 1980년 9월까지 일년 동안 있었던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사건들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1980년 10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제5공화국 헌법 공포식이 거행됐다. 대통령의 임기는 7년 단임제로 하고 선출방식은 간접선거제도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제5공화국 헌법 공포식이 화려하게 열렸다. 행사 당일 10.27, 몇 시간 전인 새벽에 아까 ①에서 보았던 깜짝 놀랄만한 일이 발생했다. 이른바 10.27 불교 법난(法難)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두환의 신문 TV보도통제로 국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③ 법난은 불교 교단이나 포교하는 사람이 받는 박해를 일컫는 말이다, 불교 법난은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이기 때문에 알아두어야 한다. 80년 당시 불교 정화 사건이란 미명하에 스님들을 범법자로 만들었는데 이건 정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만행이었다. 과거사 진실규명조사 위원회는 2007년에 법난 사건을 국가 권력 남용사례의 하나로 규정했다. 사실 10.27 불교 법난 이라고 하면 낯설다. 이 사건은 2005년에 발족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과거에 정치 군인들이 진행한 여러가지 인권침해사례들을 8개를 골라서 그 진상을 조사했는데 12.12, 5.17, 5.18사건, 실미도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10.27 불교법난 사건 등,
④ 10월27일 전두환이 내세웠던 명분은 비리승려 색출, 10.30에는 사찰에 들어와 간첩-운동권-반체제 인사 색출, 이런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군경에게 실탄을 지급했다고, 실제로 총소리를 들었다는 증언까지 있다. 어느 스님이 말씀하셨는데 군인들이 하두 우악스럽고 무법적이어서 공비가 쳐들어왔나? 했단다, 한데 한국군이어서 더욱 더 충격적이었다라고, 무장한 군경들에게 연행된 스님이나 불교 관계자들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 또 경찰청 특수부대 또 각 지역에 있는 보안부대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근데 이 조사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무조건 혐의를 인정해라,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라, 이런 것들을 강요받는 상황이었다. 보안사는 대공수사를 주도하는 군 기관인데, 스님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없는 죄를 만드는 곳이었다. 전두환은 왜 그랬을까,
⑤ 군경들은 다짜 고짜 스님들을 잡아다가 승복을 벗기고 대신 수의(囚衣)나 군복을 입혔다. 근데 스님들에게 이러한 행위는 그 자체로 성직자의 정체성을 허물어 버리는 큰 충격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구타, 허벅지에다 각목을 넣고 밟기, 그 다음에는 전기 고문, 고추가루 물고문, 잠 안재우기 이런 숱한 가혹행위를 통해서 스님들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 당시 오대산 월정사 재무국장이었던 원행 스님은 그때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듯 까마득 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낭독자가 울컥함) 옆에 다가와 함께 (중단)~ 그러다가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버리면 양동이 물을 냅다 끼얹는 바람에 정신이 들곤했다. 정신이 들은가 싶으면 다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볼펜과 메모 용지를 밀쳐 넣으면서 다그쳤다. “야~ 이 중놈아~ 이 큰 절에서 재무를 10년이나 봤는데 숨겨둔 재산이 하나도 없다는게 말이 돼? 누굴 바보로 아냐 이 새끼야~ 비밀 아파트와 여자는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빨리 적어, 북한 간첩과는 몇번 만났는지 실토해?” 그렇게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면서 고문은 계속되었다.--------
원행 스님이 엄청 고문을 받으셨다, 그 과정에서 발목이 부러졌고 앞니가 부러졌고 엉치뼈 수술을 두번이나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셨다. 그러니까 스님들을 어떻게든 돈과 여자 빨갱이로 엮어서~당국은 이렇게 성직자나 수행자들에게 치명적인 죄목들을 덮어 씌웠다, 그리고 수사개시 불과 2주만에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국민들은 잘못된 기사들을 보면서 이거 정말 스님들이 심각한 거 아냐 이런 인식을 가지니까. 실제로 이 당시 불교 신도 100만여 명이 이탈했다는 추정이 나왔다.
⑥ 여기서 소위 부정 축재액이라는 것은 사찰이나 재단법인이 갖고 있는 재산까지 승려 개인의 재산으로 억지 산정을 해가지고 강요한 것들이 많았고 또 여자와 놀아났다고 하는 것은 사진 한 장 같이 찍은 걸 가지고 이 여자 도대체 누구냐고 추궁하였다. 그런 방식으로 몰아 갔다. 이렇게 대대적인 검거작전도 벌이고 인권유린을 자행하면서 엄청나게 취조도 하고 가혹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대부분 무혐의로 풀려났다. 형사입건 및 기소가 된 경우에도 결국에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죄 판결이 나왔던 것은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았다. 신군부가 조성한 분위기에 불교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으로 변화됐고, 불교 이미지가 땅 바닥에 쳐박혀 버렸다,
⑦ 당시 신군부 입장에서는 허위사실을 유포해서라도 불교계 인사를 소탕하겠다. 이건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전두환은 도대체 왜 불교계를 뒤흔들려고 했던 걸까. 이건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에서 시작한다, 바로 그 다음날 10.27에 계엄령이 발령, 그리고 쭉 이어지다가 1980.5.17, 계엄령이 전국 확대가 되고,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발생,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불교법난을 밀어 부친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노태우, 군통수권자 전두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실제로 불교법난 과정에서 일부 승려들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12.12와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국보위 조직을 만든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유신정권 붕괴후 등장한 신군부가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초법적 임시행정조직), 정의 사회구현이란 것을 강조하면서 확실히 권력을 잡는다. 그들이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사회정화운동, 이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소위 삼청계획, 우선은 김종필이나 이후락 같은 구여권 인사들을 부정축재로 몰아가지고 그들을 다 축출하는 게 첫번째 단계다. 악질적인 폭력배를 잡아다가 교화시켜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라는 명분을 내걸고 소위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인권유린을 자행하게 된다. 정화라는 게 좋은 단어인데 내용은 정치보복 무법천지, 이때 정의사회 구현을 외친 전두환과 신군부 사람들이 가장 부정하고 가장 비리의 온상이었다. 1981년 신군부가 정당을 창당하는데 민주정의당(정의란 단어를 마구잡이로 사용), 신군부가 창의력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낸 게 아니고, 박정희 정권의 수법을 벤치마킹하여 사회안정과 비리척결에 성역은 없다. 종교계도 정화의 대상이 된다. 이미 전두환은 천명을 했고 실제로 자신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불교정화계획에 따라서 1980년 10월에 실행을 하였다. 근데 공교롭게도 신군부의 불교계 수사계획 명칭이 佛敎界 淨化搜査計劃 45計劃인데 1980년 당시 조계종 총무원 주소가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이다
⑧ 예부터 종교공간은 죄인들도 품어주고 소도 같은 신성한 곳인데~ (소도(蘇塗)-삼한시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죄인이 숨어도 잡아가거나 벌하지 않는 특수한 성지를 의미), 성직자를 손을 봐! 그것도 정치군인들이! 1970년대 이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한국 기독교교회 협의회는 직접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다. 신군부도 이들 종교인들을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80년 8월 19일, 전국 검사장 회의가 열렸는데 그 회의록을 보면은 반체제 종교인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속에서 정작 불교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천주교나 개신교도 건드리고 싶었겠지만 그들은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라 세계 선진국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면 종교탄압이라고 하니까 네트워크가 약한 불교계를 쳐야겠다. 굉장히 비겁한 짓이었다. 옛날부터 우리 불교는 바로 호국불교 (護國佛敎)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것 이게 불교의 특징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 그들을 막겠다. 그래서 만든 게 팔만대장경,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스님들이 승병을 조직해서 나라를 지켰고 일제 강점기에 민족대표 33인 중에 불교대표로 한용운이 있었다. 불교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진관사에서 일장기에다 태극권과 4궤를 그렸던 것 진관사 태극기, 항상 나라가 어려울 때 불교가 말 그대로 호국을 위해서 앞장을 섰었다,
⑨ 신앙은 믿음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국민의 인권문제다. 10.27 법난은 불교라는 하나의 대표적인 종교가 겼었던 아픔의 상처이지만 우리 국민이 당연히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며 그걸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권이 침해가 되었다.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박정희 정부에서 불교는 선풍(禪風) 바람이 분다. 선풍이 뭐냐면 참선, 세속에서 벗어나 자기 수양을 쌓는 참선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세속에서 벗어나서 보니까 현실에서 고립되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70년대 후반에 오면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로 억압받고 있는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활동하는 사람들을 드디어 불교계가 품어주기 시작한다.
⑩ 전두환이 이런 불교계의 움직임을 모를리 없다. 신군부는 이미 1970년대 말부터 이런 불교계의 움직임을 캐치를 하고 신군부가 보기에 승려들이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불미스러운 작태로 변모될 가능성이 있다(1980. 02. 문공부) 판단을 하고 이들이 다가올 1980년 민주화의 봄에 사회민주화 세력들과 연대해 가지고 어떤 고질적인 저항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를 했다. 정말 정치발전에 역행하는 불미스러운 작태는 누가 했는가, 전두환의 적반하장~ 전두환은 12.12와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권력은 잡아야 되겠는데 모양새를 갖추었으면 하고 이때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 바로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 특히 존경받는 종교계의 인물을 포섭해서 그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다. 신군부도 월주 스님한테 세번이나 전두환 장군에 지지 성명을 내달라 (80.4.26, 신임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선출)는 요청을 했다. 구국의 영웅,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외쳐도 모자랄 판에~ 구국 영웅이 웬 말, 신군부의 심기를 거스린 것이 결정적이었다.
⑪ 1980년 6월 3일, 월주 스님이 광주를 방문한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당시 사망자는 160명, 행방불명 81명, 상이후 사망 추정치는 110명 달함), (월주 스님-1980년 외로운 광주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불교, 나아가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월주 스님 회고록), 그런데 이 소식이 알려지니까 사전에 종로 경찰서장이 조계종 총무원을 방문해서 위에서 광주에 가지 말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월주 스님의 광주행을 만류했다. 신군부의 압박에도 월주 스님은 그냥 있을 수 없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10.27 불교 법난 승려와 관계자들은 형사법상 모두 무혐의, 무죄였다. 그래도 수사결과와 상관 없이 신군부의 압박은 계속 되었다. 결국은 월주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내려 놓으라.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조계종 중앙총회도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불교계 자체 징계라는 명목으로 승려 13명이 체탈도첩 (체탈도첩-출가 승려로서 큰 죄를 지은 자에게 자격을 박탈하고 절에서 내쫓는 제도), 이건 불교 승려들한테 사형선고다. 승적박탈~ 제적 10명 공권정지 17명 문서견책 2명 흥국사에서 두달간 강제연금 상태로 강요된 참선과 반성 등 일명 ‘승화교육’ 24명, 1980년 불교법난 당시 전두환은 국민정신 계도에 앞장서야 한다며 종단의 정화를 요구했다. 이는 그가 법난 사건의 전후 과정을 보고 받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8년 뒤 1988.12.31. 5공 비리 청문회장, 전두환은 법난 수사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⑫ 1988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전두환은 권력을 남용하였고, 부덕한 전직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전두환은 국민에게 속죄하는 뜻에서~ 대국민 사죄와 함께 재산 헌납을 약속한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로 향한다. 불교 법난 주역이…불교사찰에… 나치 친위대가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에 간 격이었다. 그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거다. 이스라엘에서 나치 친위대를 받아준 것과 같다. 전두환의 종교는 세례명이 베드로 라고~ 천주교 신자였으나 나중에 불교 영향을 받았을 것 아닌가. 참고로 지금 그의 둘째 아들 전재용씨가 개신교 목사, 실제로 전두환의 장례식은 기독교+불교식으로 치러졌다. 전두환은 퇴임 후 자기 고향으로 내려갈까 했는데 도저히 고향인 합천으로는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은둔할 곳을 찾다가 선택한 곳이 강원도 백담사, 백담사는 워낙 고지여서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백담사로 전두환 부부가 들어가 2년 살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되었다. 대부분은 전두환의 지지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절에서 기독교 집회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민족 반역자 전두환이 어떻게 민족의 성지인 백담사에 있을 수 있느냐 항의하는 시위도 있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수도했던 곳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영혼이 묻어 있는 곳에 전두환이 들어왔다는게 용납이 안 되었다. 불교계에 못된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 월주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참회하러 가는데 막지 않는게 좋겠다. 절집은 흉악한 짐승도 죄인도 내쫓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다 지옥 중생도 건져야 하는 불가에서 죄과가 많다고 자비심을 버려선 안 된다”
⑬ 고려후기 귀족들이 온갖 나쁜 짓을 다 해놓고 사찰에 들어가서 극락세계에 가게 해 달랬다. 죽어서도 극락세계에 가고 싶다는 모습과 뭐가 다를까. 이 사건을 계기로 불교계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각성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러면서 1980년대가 되면 스님들과 불교신자인 학생,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한다. 이렇게 불교계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종교계의 한 축을 불교가 담당하게 된다. 특히 5.18 희생자의 영령을 추모하는 행사라든지 스님들이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행진한다든지 우리가 흔히 민중 속의 불교라고 부르는 모습들이 불교계에서 더 확연해졌다. 그래서 한 때 등을 돌렸던 신도들을 비롯한 대중들이 불교에 대해서 많은 지지를 보내고 불교가 대중적인 기반이 넓어지는 결과가 되었다.
⑭ 10.27 불교 법난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였다. 당시 가장 존경받고 숭앙받아야할 종교지도자들이 옷을 벗기고 발목을 부러뜨리는 고문과 수모를 당했고 인권을 탄압당했는데 일반 국민들은 어땠을까. 불법(佛法)을 수행하는 사찰을 불법(不法)적으로 권력이 유린한 그날, 우리가 꼭 알아야 되는 역사다. 이 사건은 단순히 불교의 상처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상처다. 이러한 상처가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것을 정확히 알고 기억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야지만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서 모든 걸 내려 놓고 그들 곁으로 갔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⑮ 10.27 법난 때 고난당하셨던 스님들의 명단이다, 기억하는 데로 원천 스님, 월주 스님, 경우 스님, 성혜 스님, 설정 스님, 현광 스님, 원행 스님, 삼보 스님, 정수 스님, 진관 스님 (월주 스님 회고록 중 전두환에게 남긴 말), 지금 살아계시다면 건강하시고 즐거우시길 바라고 돌아가셨다면 극락왕생 하시길 바랍니다.
⑮ 결론: 나는 올해 76세다. 1967년 5월에 소위 임관하여 18년간 군생활을 하고 1985년 4월에 소령으로 전역하였다. 소위 때 5군단에 배치 받았는데 1969년 한신 대장이 1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1970년 이병형 중장이 5군단장으로 부임했다. 1972년 박정희는 한신 1군 사령관을 합참의장에 이병형 5군단장을 합참본부장에 임명하였다. 이병형 장군은 합참본부장으로서 1974년 율곡계획을 입안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형을 이런 막중한 일을 할 수 있는 적임자로 보았던 것이다. 이병형은 중장으로 2군 사령관에 그쳤다. 박정희는 율곡계획의 집행을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의 회의체인 합동참모회의에 맡기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통제하는 합참본부장에게 맡겼다. 박정희 대통령이 율곡계획 입안에 이병형을 발탁하는 판단으로 이병형을 군의 수장으로 발탁하였다면, 윤필용 前수경사령관과 하나회 등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유신이라는 파탄에 들어선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통수권자로서의 균형감각을 상실했다. 이병형 장군에 의해 군이 이어졌다면 10.26, 12.12, 5.18 등의 비극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많은 예비역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