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요한복음 7:25-31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떠난 지 벌써 10일이 지났습니다. 1/4정도 걸어온 셈인데, 얼마나 깊어지고 자유로워지셨습니까? 이런 질문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스스로 서 있는 자리를 가늠하며 살자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거울로 삼아 우리 삶이 지향해야 할 곳을 가늠해보려고 합니다.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람으로 한평생 살아가는데, 끝없이 던져야 할 질문은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7장이지만, 6장부터 8장까지 읽다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사람다움이란 ‘보내신 분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사람다움이란 자기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선과 악, 미와 추, 좋음과 싫음,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며 살아갑니다. 삶을 그렇게 구획 짓는 빗금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복잡해지고 또 살벌해집니다. 저는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을 그런 빗금이 스러져가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루뭉술하게 아무런 판단도 없이 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의 다름을 품어 안고 또 존중하며 살기를 배우는 것 바로 이것이 영성의 깊어짐이라고 느낀다는 말씀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보면, 높은 산이나 평지나, 고층 빌딩이나 단층 슬라브 집이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 우리가 그렇게도 집착하는 남과 구별되려는 욕망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참 부질없는 열정일 뿐일 겁니다.
사순절기 한복판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참사람이셨던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시작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가 등장하자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닙니까?”(25) 이 대목에서 제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라는 단어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의 길과 ‘그들’의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26절은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들’임을 암시합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사전을 찾아보면, ‘지도(指導)’란 ‘가리키어 이끎’ 혹은 ‘단체 등의 조직, 방침 등을 결정하고 본래의 목적을 향해 성원을 통솔 인도하는 일’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의 목적을 향해’라는 말입니다. 지도자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할배들을 이끄는 책임을 맡은 이는 언제나 편치 않습니다.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를 체크하고, 가는 길을 확인하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의 시행착오는 그저 애교로 보아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자리에 선 이들은 정말 큰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사람들을 본래 이끌어야 할 그 자리에, 본래의 목적을 향해 바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고 또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지도자연하면서 사람들을 본래의 목적을 향해 이끌지 않고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지도자’라 지칭하셨습니다. 그들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습니까? 아니 세상은 그만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길을 잃은 목자가 많은 시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피터 브루겔(P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은 마태복음 15장 14절에 의지하여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다>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는 6명의 앞 못 보는 이가 등장합니다. 앞사람과 뒷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지팡이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갸우뚱한 채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좁은 개울과 교회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선 사람은 벌써 뭔가에 걸려 넘어졌고, 뒤이어 다른 이들도 순차적으로 막 넘어지려는 찰라입니다. 브루겔이 그 그림을 그린 때는 그가 죽기 일 년 전인 1568년입니다. 이때가 어느 때쯤인지 감이 오십니까?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때가 1517이니까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후입니다. 온 유럽 사회가 종교개혁의 물결로 요동치고 있던 때입니다. 브루겔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종교가 사람들을 본래의 목적을 향해 이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풍자하려던 것이 아닐까요? 제게는 맨 앞에서 나동그라진 사람과 가까운 배경으로 등장하는 교회가 겹쳐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 그림은 5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에게도 예언자적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오늘 지도자라는 이들이 사람들을 바른길로 이끌고 있는가는 의문입니다. 정치 지도자든, 종교 지도자든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제쳐두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아니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을 박해하고 제거하려고 합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무슨 죄가 있으셨습니까? 예수님께 죄가 있다면, 그들과 달리 사람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이 사람’이라는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주님이 아닙니다. 그저 낯선 타자일 뿐입니다. 문제적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선뜻 가까이 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이 사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뭔가 음모를 꾸미는 것은 분명한데 왠지 쭈뼛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속으로 혹시 지도자들이 그를 진짜 그리스도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절대화될 때 그 상식은 몰상식이 되는 법입니다. 그들의 상식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에서 오셨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자랐는지를 알고 있기에 예수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의 근거입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그 알량한 앎을 근거로 하여 세상을 판단하기 일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그가 자기의 무지함을 알기(無知의 知)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더 깊은 앎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중심을 향해 그는 늘 학생의 마음으로 다가갔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으셨던 것일까요? 어느 날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주님은 사람들이 한 말을 인용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있다.”(28a)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분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갈릴리를 유랑하며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는 사실도 압니다. 주님은 그들의 앎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겉모습만 알뿐 그 깊은 속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상식이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로막고 있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의 핵심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평생 교회 다니면 정말 예수님의 핵심을 꼭 붙든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뜻과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편법과 권모술수를 다 부려서 그것을 쟁취하고 나면,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합니다.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잘못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오늘 한국교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기도를 할 때 내 말만 막무가내로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기 초월의 길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자기에게서 벗어나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삶이 영생의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무기력하게 사는 것은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집착은 우리가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물입니다. 뭔가를 붙들고 있는 손으로 다른 것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집착하는 사람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이 명함에 찍어가지고 다니는 직함이 아닙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기에 서술어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8b-2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철저히 ‘보냄을 받은 분’으로 그려집니다. 예수님은 참되신 분, 참이신 분, 곧 하나님이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시기도 하시지만, 누군가를 보내어 사명을 맡기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어 ‘내 백성을 내보내라’는 당신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백성들의 삶을 꾸짖기도 하시고, 그들의 죄로 인해 미구에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절망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더듬으면서 나아가듯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시간에 멀미를 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권태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공포심에 마비된 채 살아가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길을 무반성적으로 따라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보냄을 받은 자로 여기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은 ‘보냄을 받았다’는 이 말을 배타적으로 예수님에게만 귀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나의 ‘있음’이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고, 나의 ‘있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질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뜻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메시지로 가족들 앞에 혹은 동료들 앞에 서 있습니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책임이 아니라 특권으로 받아들일 때 영적 타락이 시작됩니다. 교회의 직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하라고 준 직책을 계급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마땅히 가야 할 곳에 가지 않는 것 또한 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어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아픔의 자리에 가시려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 말하자 사람들은 흥분했습니다. 대단히 불경한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수군거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분에게 손을 대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꼈던 것일까요? 그런데 요한은 그들이 멈칫했던 까닭을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맙니다.
예수님이 걷는 그 길의 끝에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때가 무르익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 유예의 시간인 셈입니다. 그 시간은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요한은 “무리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31)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가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확신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라고 하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러시아의 짜르 암살모의(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고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유형지로 떠날 때 어느 한 부인이 그의 손에 성경 한 권을 쥐어 주었습니다. 그는 유형지에서 신약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1854년에 자기에게 성경을 주었던 그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증명해도, 설령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 해도 나는 그분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것처럼 절절한 신앙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고백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사람들은 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모두가 다 은혜로 합격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그냥 인사치례로 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합격하고 입학하게 되니 그 말이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또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고, 매일 드리는 채플시간이 그렇게 감격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1학년 첫 학기에 기독론을 배우며 예수님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 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을 보았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신 인간 예수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로 가 있었고, 그들의 눈물을 닦고 그들을 위해 기득권층과 싸우시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졌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도 좋다. 그래도 그분께 내 인생을 거는 게 행복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목회 현장에서 시달리다 보니 그런 마음이 많이 퇴색된 것 같아 부끄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선교는 매력의 감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그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이웃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자신 있게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부끄럽지만 저 또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표징을 행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씀이,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표정과 말씨가 사람들 속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 내는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 이것은 교회가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하나님의 초대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라고, 초월적인 삶의 길, 영생의 길을 보여주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정녕 이 세상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라고 보냄을 받았음을 잊지 마시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표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다> - 피터 브루겔
첫댓글 하나님께서 저를 보내셨고 저도 보냄 받은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마음으로는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 목회자들의 몫으로 밀쳐두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을 판단하고 편을 가르며 이렇게 사는 삶은 저를 더 무기력하게 만들고 가끔은 제가 크리스천인가 반문하게도 했습니다. 늘 한편으로는 예수님과의 깊음 만남을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삶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 이중적 삶의 이유가 제 자아에 대한 집착하기 때문인 것을 알겠습니다. 자기의 뜻과 욕망을 쟁취하고 나서는 ‘기도의 응답’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말하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에서 제 모습도 읽혀져 아픕니다. 사순절 여정 동안 이런 것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새롭게 맺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