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발(11시 30분 서해안 고속도로 첫번째 휴게소에서 만남)
-> 충남 안면도 국제꽃박람회장
-> 전남 부안 변산반도 (1박)
-> 부안 새만금간척지홍보관, 변산 채석강, 내변산 내소사
-> 고창 선운산 선운사
-> 목포 (1박)
-> 목포 유달산, 해양유물박물관, 남농기념관
-> 해남 땅끝마을, 두륜산 대둔사, 고산유적지(녹우당), 다산초당
-> 영암 (1박)
-> 월출산 도갑사
-> 화순 천불산 운주사
-> 보성 봇재녹차원, 대한다(업)원
-> 통영(1박)
-> 남해 보리암
-> 부산 해운대(1박)
-> 해운대 동백섬
-> 경주 대능원 천마총, 경주월드, 보문단지
-> 경주 (1박)
-> 영덕 강구항
-> 삼척항
-> 정동진
-> 강릉 경포대 (1박)
-> 낙산사 홍련암
-> 한화 워터피아
-> 속초 미시령 (1박)
-> 속초공항 옆 장산리마을
-> 서울
2. 답 사 기
제가 다니고 있는 동일토건에서 제가 담당하는 일이 개발사업분야입니다. 개발사업이란 토지가 있으면 그곳에 백화점을 지을까, 아파트를 지을까, 오피스텔을 지을까, 호텔을 지을까, 콘도미니엄을 지을까 하고 제일 먼저 검토하는 부서를 말이며, 그에따른 사업성검토와 일정까지 모두 만들어 내는, 다른 회사의 기획예산부서와 비슷합니다. 재미있으나 힘이 많이 드는 그런 곳입니다.
제가 가장 믿는 직원인 김과장과 작년 7월부터 근 10여개월간 매달렸던 소위 "신정동 동일하이빌 프로젝트"를 일단 보류시키고 나니... 회환과 아쉬움과 피로감이 물밀듯이 밀려와 여행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초에는 프로젝이 끝난 뒤 유럽이나 미주를 일주할 계획이었으나 국내일주로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10여개월간 같이 놀아주지 못하고, 같이 집안행사에도 참여해주지도 못한 아빠이자 남편을 지켜봐 준 가족들을 위하여도 같이 하고 싶었던 여행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날도 망년회날도 일했거든요... 참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신동아 출신은 뭐가 달라도 달라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동일토건내에서는 그런 평판이 있으리라 자부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나중에 큰일할 밑천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럴 것이고요.
어쨌건 김승재과장과 저는 여행계획을 수립한 후 집사람들에게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안가와의 합의후 4월 29일부터 답사여행를 시작하였습니다.
후배들이 연잎말고 있을 시점에 선배는 몸과 마음을 추스리려 국토일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초 계획은 서해, 남해, 동해의 순으로 바닷가와 내륙중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골라 답사하기로 하였으나, 아이들이 아프기도 하고 계속되는 비로 말미암아 일정이 다소 늦어져 진도, 완도, 선진강일대와 순창 및 강천산 일대는 다음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서해대교로 가는 서해안 고속도로 첫번째 휴게소에서 2002년 4월 29일 11시 30분에 두 가족이 만나 드디어 그리던 국토일주 기행 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1)첫째날
(1)충남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장
- 명칭 : 2002안면도국제꽃박람회 / KOREA FLORITOPIA 2002
- 주제 : 꽃과 새 문명 / Flower and New Civilization
(부제 : 바다에 물든 꽃)
- 목적
. 화훼시장 확장으로 국내 화훼산업의 획기적 발전 촉진
. 꽃사랑 문화 확산으로 보다 아름답고 윤택한 사회 분위기 조성
. 서해안 조기개발과 충남 및 안면도를 국제적 명소화
- 성격 : 최초『국제원예생산자협회(AIPH)』공인 A2/B2형 국제 꽃박람회
- 기간 : 2002년 4월 26일(금) ~ 5월 19일(일), 24일간
* A2형 : 2002. 4. 26 ~ 5. 5 / B2형 : 2002. 5. 6 ~ 5. 19
- 개장시간 :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 장소 :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및 휴양림 / 793,000㎡
- 면적
.꽃 지(453,000㎡) : 꽃박람회의 주전시장으로 AIPH 기준 적용
.휴양림(340,000㎡) : 꽃박람회의 부전시장으로 박람회 종료후에도 지속 운영
- 참가 : 30여개국 170여업체, 관람객 72만명 이상
- 주최 : 충청남도
- 주관 : 재단법인 안면도국제꽃박람회조직위원회
- 내용
국내 처음으로 국제원예생산자협회(AIPH)의 공인을 받아 오는 4월 26일부터 5월 19일까지 '꽃과 새 문명'을 주제로 충남 태안군 안면도 꽃지및 수목원 일원 24만평에서 열릴 이 박람회는 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꽃과 정원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최근 서해안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서해안 최고의 관광휴양지로 떠오르고 있는 안면도는 수많은 해수욕장과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인 천혜의 섬이다.
꽃 중심의 서양적 이미지를 연출하는 꽃지지구(14만평-45만2천100㎡, 주전시장)와 정원 중심의 동양적 이미지를 연출하는 수목원지구(10만평,부전시장)에서 24일간 개최되며 세계 30개국에서 170여 단체 및 업체가참가하고 국내외 관람객 72만명 이상이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이번 꽃 박람회는 꽃의 UN이라 불리우는 국제원예생산자협회로부터 공인을 받아 개최되는 것으로 93년 대전 EXPO이후 두번째 국제공인 박람회로기록될 전망이다. 충남도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줄 3대 국제문화행사의 하나로 준비하고 있다.
주 전시장에는 8개 실내 전시관이 있는데 명칭이, '꽃과 새 문명관'(주제관),'무궁화관'(한국관), '코스모스관'(세계관), '금강초롱관'(단체.업체관), '야생화관', '꽃음식 전시관', '농협관' 및 '삼성관'등이다. '바닷물결 정원', '평화의 공원', '구근원', '초화원', '장미원', '분재원' 등 13개 테마 야외정원도 화려한 꽃과 조경이 웅장함괴 미려함을 확연히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이국적 이미지로 연출된 주 전시장과 달리 조용하고 그윽한 한국적 이미지로 꾸며지고 있는 33만9900㎡의 부 전시장(수목원지구)은 실내 전시관과 청자자수원, 생태습지원, 철쭉원 등 13개 야외정원이 준공된 상태.조선시대 선비들의 별서정원을 재현한 한국전통정원(7260㎡)이 있다. 주 전시장과 1.1㎞거리의 양지바른 숲속에 자리한 부 전시장은 꽃박람회가 끝나도 철거되지 않는 영구시설로 각종 식물들이 주로 '화분'이 아닌'땅'에 심어져 있다.
그러나 주말에는 아예 포기하기를 권합니다. 평일, 그것도 비내리는 월요일에 찿아갔음에도 3시간여 동안 박람회장 입구에서 주차장에 진입하지를 못하여 기다렸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가시겠다면, 주말에는 아침 일찍 출발하기를 권유하며, 들어가서는 먼저 "꽃과 새문명관"과 "코스모스관" 같은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을 먼저 보시고, 야생화관이나 삼성관, 농협관같은 것은 나중에 보십시오, 그곳은 사람이 적습니다. 그리고 분재원같은 곳은 야외이니 언재든 볼 수 있습니다. 한번 볼만은 한 곳입니다. 제대로 만들어 놓았습디다. 시시한 박람회는 아닙디다.
우리는 3시간의 기다림을 아름다운 꽃향기로 보상받고, 사랑하는 유진이가 많이 아파서 조심하며 다니다가 오후 늦게야 변산으로 갔습니다.
(2)변산
서해안 고소도로를 타고 부안 I.C.에서 빠져나와 드디어 변산입구, 부안읍내 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백합조개의 전문점 "계화식당(063-584-3075)"에 들어 갔습니다. 변산와서 이 백합조개탕과 구이 및 죽을 먹어보지 못하신 분과 바지락죽(반지락죽)을 먹어보지 못한 분은 부안과 변산을 반밖에 안보신 것입니다. 식사후에도 유진이가 계속 열이나서 부안읍내에 있는 한국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의사 曰 "아무래도 주사 맞고, 링겔을 맞아야 겠습니다. 한 2~3시간 걸리겠늦데요"해서... 어쩔 수 없이 저희집 가족만 먼저 변산온천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벌써 11시경이었음), 김과장 가족은 아이의 치료후 새벽 2시경에 변산온천리조텔에서 만나 잠을 잤습니다. 술만 한잔하고서... 김과장 부인이 김밥을 많이 사와서 점심시간에 휴게소에서 많이 먹고도 남아서 한국병원 간호사들에게 줬더니 밤에 완전히 "파티"했답니다. 환자들도 다 일어나서 먹고... 아마도 김과장 내외는 최악의 경우 김밥장사를 해도 잘될 것 같았습니다. 맛이 좋았거든요...
2)둘째날
(1) 변산온천
변산반도에 들어서면서 해창다리를 막 지나고 오른쪽 바다가 쪽으로 공원이 조성 되어 있습니다 이곳을 석정공원이라 칭하며 이곳은 문인 신석정씨 시비와 김오성씨의 조각품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서해바다가 한 눈에 보이며 좌측에 저 멀리 고군산 열도와 중앙에 군산 비행장 한 모퉁이가 보이고 오른쪽에 계화도가 보이며 발아래 펼쳐진 갯벌은 뻘(해금)이 들어 있지 않은 유명한 해창 반지락이 널려 있습니다. 호미를 가지고 어디든 파헤치면 뻘이 없는 맛좋은 바지락이 팍팍 나오는데 누구나 노력껏 잡아 갖어 가실 수 있으니 마음 껏 즐기십시오. 부안에서 해창에 들어 오시면서 11시 방향을 바라보면 변산온천이 보이는데 다리를 지나면서 왼쪽 깜박이를 넣고 좌회전하시면 변산온천과 부안다목적댐을 만나게 됩니다. 들어오시면서(한 50m 쯤) 오른쪽 샛길로 유명한 반지락죽 파는 집(변산온천산장)이 전방 800m 쯤에 깊숙히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지역 향토 음식의 별미로 원조 격이 되며 드셔보시면 보양 강장 음식으로 좋으며 차후에 생각 나실 겁니다. 온천 오른 쪽편에 아구찜하는 음식점도 맛 괜찮아요.
변산온천은 국내 유일한 해변온천으로 유황성분이 다량 함유된 중탄산 나트륨 알카리성 수질로 맑고 무색투명한 부드러운 느낌이 오래 지속되는 물로써 천혜의 온천수입니다. 부대시설로서 40개 객실과 남녀 사우나탕 및 식당, 노래방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김종수사장이 주인이고, 리조텔에서 돈받는 아저씨가 김사장 처남으로 부장입니다.
(2)채석강
변산반도의 최서단으로서 이 곳의 지형은 퇴적암의 성층으로 바다물의 침식으로 절벽이 이루어져 흡사 만권의 책을 쌓아 올린 것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주변의 백사장과 맑은 물이 함께 어우러져 풍치가 아름답다. 중국 당나라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다 하여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채석강입구에서(좌측에 비치랜드) 우측으로 가면 매표소 지나서 채석강, 앞에 바다, 좌측이 침식으로 이루어진 단애 채석강(1㎞), 격포항과 연결되고, 주변에 야영장이 설치되어 있어 탠트생활할 수 있음. 매표소에서 우측으로 1㎞정도 가면 종묘배양장 및 적벽강, 경관이 수려하고 조용한 백사장이 있음.
(3) 변산 내소사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가 이곳에 절을 세워 큰절은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하였는데 그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아 오던중 1592년에서 1597년 사이 임진왜란 중에 불타 버린 것을 조선 인조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했고, 1902년(광무6년)고종 2년 관해스님에 의하여 중수되고 만허스님이 보수했다. 건물은 다포계 양식에 팔작지붕으로 된 불전이다. 전면 3칸은 개방되어 꽃살무늬를 조각한 문짝을 달았는데 이들은 모두 정교한 공예품들이다. 공포는 내 5출목으로 화려하게 결구되었으며 외부로 빠져나온 각 제공의 쇠서는 겹쳐져 매우 장식적이다. 내부는 제공의뒤 뿌리를 일일이 연봉형으로 새겨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단청도 매우 장엄한 금단청으로 채색하였다. 추녀 아래 귀한 대와 내부 충량머리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화려함을 더해 주고 있으며 전내 후불벽에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큰 것이다. 내소사는 변산반도의 남단 바닷가에 위치하여 해중사찰적 성격이 짙으며 부처님이 좌정하고 있는 궁전적의 대웅보전은 해발 424m의 큰바위 산인 취봉 또는 관음봉을 등에 업고 자리하였다. 전후좌우로 삼성각, 진화사, 관심당, 설선당과 요사, 무설당, 보종각,삼층석탑,범종각,봉래루,천왕문, 부도전, 일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내변산에는 직소폭포와 월명암 산행코스가 사찰안과 밖에 등산로 있음(분옥담, 선녀탕, 봉래구곡, 가마소 와룡소, 분초대, 망포대, 신선대)
(4) 새만금 간척지 홍보관
새만금 간척사업은 전북지역 2개시 1개군 19개 읍,면,동을 연계 개발하는 것으로 '91년부터 2004년까지 14년간 2조2백47억원을 투입하여 간척지 40,100ha(여의도 140배)를 매립하여 28,300ha(8천6백만평)의 토지조성과 11,800ha(3천6백만평)의 담수호를 개발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이다.
주요시설로는 세계에서 가장긴 방조제 33km를 공사비가 저렴하고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석·해사성토공법』으로 축조하고, 초당 15,800톤의 홍수를 배제할 수 있는 배수갑문(총18련)과 400톤급 선박이 통과할 수 있는 통선문(길이 65m, 폭 16m) 및 어족자원 보존을 위한 어도를 설치하고, 수질개선을 위한 저층배수시설도 계획되어 있다.특히 특수 배수갑문 문비는 신속한 홍수배제 및 사업지구의 안전을 위해 국내 최초로 2중 유압식 갑문형식을 도입 하는 사업이다.
방조제 축조등 공사 기간중 발생되는 부유물질등에 의한 해양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오탁방지막 설치와 담수호내 수질개선을 위해 제염암거설치등으로 환경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으며, 공사에 따른 환경관리 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사업효과로는 농어업용수 및 생·공업용수 등으로 년간 10억톤의 수자원을 이용할 수 있어 전북 서부내륙지역의 만성적인 용수부족현상이 해소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환경단체에서는 제 2의 시화호가 우려된다하여 극렬한 반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아이들과 현장을 보면서 갯벌을 살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타당한지 개발하여 지역살림을 회복시키고 국토를 확장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지를 토론하였으마 결론이 나지않았음.
선운산(일명 도솔산)에 자리잡은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24년(577)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한창 번창하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에 3천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도솔암,참당암,석상암,동운암 등의 암자가 있고 선운사를 "큰절", 도솔암을 "작은절"이라고 일컫는다. 선운사 에는 천왕문,만세루,대웅전,영산전,팔상전,명부전.산신각 등 10여개의 건축물이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조선중기 건축물로서 섬세하고 장식적인 다포 구성과 꽃살 분합문이 화려하고 단청 벽화가 뛰어난 보물 제 290호 의 법당이다.
선운사 최대 볼거리 중에 하나인 동백은 천연기념물로서 대웅전,영산전과 뒤편의 팔상전을 병풍처럼 두르고 감싸듯 자생하고 있으며, 약 3천여구루로서 자생지로는 최북단에 위치하며 수령이 500년 가량 되는데 4월에 꽃을피우고 질 때는 눈송이처럼 후두둑 떨어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선운사 관음전에 모셔진 금동 지장보살좌상은 머리에 두건과 비슷한 관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넓은 띠는 귀를 덮고 흘러내려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성종7년(1476)에 만들어진 높이 1m의 좌상은 보물 제27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훔쳐갔던 것을 되찾아 1940년에 이곳에 모셨다.
도솔암 가는 길에 있는 진흥굴(眞興窟)은 신라24대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당시 백제땅인 이 산에 의운국사(義雲國師)를 시켜 선운사를 창건케하고, 왕위를 퇴위하고 선운사를 찾아 수도했다는 암굴이다. 또한 진흥왕은 그의 중애공주(重愛公主)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이 굴 윗산에 중애암을, 그리고 만월탑 밑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 한다. 이 굴의 길이는 10m, 높이는 4m의 자연 동굴이다.
선운산 입구에 있는 송악은 천연기념물 제367호로서 가슴높이의 줄기가 80Cm에 이르고, 나무의 높이도 약 15m나 되는 거목이어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내륙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중에서 가장 큰 나무이다.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늘푸른 덩굴 식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남부의 섬이나 해안지역의 숲속에서 주로 자란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간 날에는 이미 동백은 모두 떨어져 바닥만을 장식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라고 늦은 동백 몇몇이 우리 두 가족을 반겨주었습니다. 유진이가 조금 회복하여 다시금 목포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현재까지 목포가 종점인데, 잘 뚫려있고 아직까지는 교통량이 적어 운전하기에는 아주 기분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3) 세째날
(1)목포 유달산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이 228m의 목포 뒷산으로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한다. 이 산에는 대학루, 달선각, 유선각등 6개의 정자가 있으며, 산 주변에는 2.7km 의 유달산 일주도로가 개통되어 있다 .
산 아래에는 4.19 기념탑, 현충탑,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비' 등과 조각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 난공원 등이 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유달산은 모두 140ha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이엉으로 바위 전체를 덮어서 마치 아군의 군량미처럼 꾸며 왜군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노적봉을 비롯하여 해발 228m의 일등바위와 이등바위로 나뉘어져 있다.
정상에 올라서면 목포시와 다도해의 경관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오고 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이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노적봉 유달산 정문격인 등구의 좌측변에 솟아있는 큰바위 봉우리이다. 목포시 대의동 2가 1의 120번지에 위치한 노적봉은 충무공 이순신 장 군의 뛰어난 전술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한때 초등 학교 교과서에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께서는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에 이엉을 덜어 아군의 군량미로 위장함으로써 우리의 군사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겁을 먹은 왜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가게 했다는 장군의 뛰어난 전술을 이야기한 것으로 진도의 강상술래, 영산강 횟사루, 울뚝목 쇠줄 등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아이들이 뛰어놀며 노적봉과 이난영노래비를 보며, "목포의 눈물"을 현대판으로 한번 불러보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어우러진, 아직도 왜정시대 건물이 상당히 남아있는 목포의 밤거리를 비맞으며 걸어보았습니다. 다만, 목포에서 염포탕과 아구찜을 왠만하면 먹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호텔 지배인이 요즘 진짜 홍어가 목포에도 없고, 회나 염포(세발낙지)는 비오는 날이라 그러니... 권할 것이 없다고 고기나 먹으라고 할 때, 그냥 따를 것을 굳이 택시운전사에게 좋은 곳 안내하라고 했다가 실망 많이하고 당분간 염포탕과 아구를 멀리하기로 했습니다.
(2) 목포 해양박물관
목포 해양 박물관은 우리의 오랜 해양역사의 흔적을 밝히고 보존, 전시함으로써 뿌리깊은 해양문화의 전통을 일깨우며, 아울러 국민들에게 배움과 문화의 휴식공간으로서 활용되어지고 있다.
전시실은 완도선실, 신안선실, 해양유물실, 선박사실과 기획전시실등 5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해양발굴을 통해 인양된 예 선박과 유물 그리고 해양관련 자료의 전시를 통해 우리의 해양문화사, 선박사, 대외교류사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 나라 최초 자료의 장으로 배와 바다 기리고 역사가 있는 종합전시관으로서 다양한 전시를 추구하고 있다.
<제1실 완도전시실>
완도 해저에서 발굴된 유물은 고려 도자기 연구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의 유물은 고려시대 초기의 선체를 인양함으로 우리 나라 고대선박자료 연구 및 연안 항로의 추적,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규명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제2실 신안선전시실>
신안유물은 중국 원(元)대의 14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특히 대량으로 출토된 도자기는 세계 수중 고고학(水中 考古學)에서 유래가 없는 것으로, 편년과 생산지 등을 밝힐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e도한, 침몰선은 용골(龍骨)을 갖춘 첨저형(尖低形)에 격벽이 시설도니 구조로 당시의 조선술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안 해저 유물발굴은 원대의 사회·경제상·조선술(造船術),국제 교역사, 공예미술의 연구 q분만 아니라 우리 나라 수중 고고학의 첫장을 열게 한 해양발굴로 한국 발굴사에 큰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제3실 해양 유물 전시실>
해양 유물이란 우리 나라 연근해에서 발굴되었거나 유연히 수습·인양되어 신고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바다는 중요한 교통로이자 문화의 교류로였다. 해양에서 발굴된 유물은 당시의 실생활 용품이 주류를 이루며 이밖에 전쟁무기들이 대부분으로 문화상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 나라 연해에는 현재 약 180여 곳에 달하는 해양 매장 문화재 신고지가 있다.
<제4실 선박사 전시실>
이곳에서는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에 이르는 선박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그 시대의 선박의 형태나 구조 등을 복원함으로 선박들의 옛 모습과 그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제5실 기획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던 곳으로 직접 노를 저어보고, 바다소리를 들어보고, 나무자판에 직접 종이 인쇄를 해볼 수 있는 재미있는 곳이었습니다.
(3) 남농기념관
여행자나 타지인으로 목포에 갔다가 바다에 접한 교외지점인 갓바위 밑의 향토문화관을 찾아가 그 건립 경위를 듣고, 그 안의 기절(奇絶)한 수석 콜렉센 및 서화 작품들을 대한 사람이면 누구나가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목포에서 화필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남농 허건 화백이 수십년 심취하여 모은 엄청난 수량의 수석들을 수년 전 목포시에 흔쾌히 일괄 기증하면서 아울러 소치(小癡) 미산(米山) 남농(南農)의 빛나는 화가 가문 유품과 서화 수장품도 상당수 내놓아 향토문화관의 기틀을 심게 한 것이다.
앞의 공공문호관 창건에 이어 남농은 다시 그 이웃에 자력으로 남농기념관을 세워 주위의 기막힌 풍광미와 조화시킨 목포의 새로운 명소를 창조하였다. 호남화단의 상징적 대가이자 진도 운림산방의 후계자인 남농의 작품들은 방문시 설명을 하고있는 후손들을 통해 더욱 빛을 내고 있었다. 2층에 가면 "인왕산호랑이"니 서예작품들을 설명받는 데, 질문이 꽤까다롭고 재미있다. 그분들의 말씀의 요체는 "아는만큼 본다"였고, 배우고 난 뒤 보면 정말 그러하였다.
이 남농 기념관은 소치,미산의 유묵 외에 남농 자신의 작품과 그의 서화수집품을 상설 전시하여 목포 미술인들의 수준을 전국에 알리고 있었으니... 서울이나 기타 도시의 원로들이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품격이 느껴졌다.
(4) 해남 땅끝마을
북위 34도 17분 38초, 동경 126도 6분 1초.
한반도의 끄트머리에 세워진 토말탑의 위치를 나타내는 수치다. 잘 알려진대로 전라남도 해남은 우리 나라 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고장이다. 철도가 연결되지 않은 대신 도로교통이 잘 발달되어 완도나 진도 등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다.아울러 호남 지방의 대표적인 민속놀이 가운데 하나인 ‘강강술래’(중요 무형문화재 제 8호)의 본고장이 바로 이 곳 해남군 문내면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해남을 가리켜 ‘금비가 내리는 땅’이라고 불렀다. 해남읍에서 남쪽으로 43km쯤 떨어져 있는 땅끝 마을은 같은 장소에서 일출과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지형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명소. 특히 일출보다는 낙조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데 이 마을의 사자봉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다도해의 낙조가 단연 압권이다.
지금은 전망탑이 생겨 7층 전망대에서 성능좋은 망원경의 힘을 빌면 보길도도 보인다. 아이들은 땅끝의 개념보다 시원하고 경치좋은 바다구경에 더 정신이 없었다.
"더이상 차로 갈 곳이 없다. 땅의 끝이다."
김과장,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요......
(5) 두륜산 대둔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둔사(大芚寺)는 근대 이후 대흥사라고 불리었으나 각종 사료에 근거 대둔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둔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둔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둔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4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서산대사 부도(전남유형문화재 제 57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서산대사 유물(전남유형문화재 제 166호),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전남유형문화재 제 167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둔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둔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둔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創建緣起)가 전하고 있다. 이들 창건 연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사찰의 전통과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대둔사에도 몇 가지 창건 연기가 전하고 있다. 대둔사의 창건 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으며, 1823년(순조 23)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 역사를 총 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이다.
『만일암고기』에 전하는 창건 연기는 426년(백제 구이신왕 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둔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 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 스님과 도선(道詵) 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둔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둔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보아야 한다. 또한 정관존자나 아도화상 같은 분들이 창건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둔사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중시되어야할 내용이다.
대둔사 주위 산정상에는 九龍이 여의주격인 대둔사를 쟁취.보위하려는 아홉개의 용바위가 있고, 한쪽에는 불타가 입멸하는 당시 모습인 와불이 있는데, 평소 구름 이 많아 잘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답사여행 첫날부터 비를 만나 계속 비와 같이 지냈고 대둔사에서도 비가 와서 어쩔 수 없이 친구하며 정겹게 같이 다니고 있었는데, 대웅전에서 아이들이 삼배를 드리고 나오니 어찌된 것인지 그토록 많던 구름이 바람에 날려가고 구룡과 와불까지 볼 수가 있었다. 대웅전을 지키던 보살님이 "아이구. 아이들이 기와불사에 삼배공양까지 하니까 부처님이 모습을 보여주는 갑다"하며 기뻐하셨고 우리들도 흐뭇하게 와불과 구룡을 보며 녹우당으로 향했다.
(6) 강진 해남윤씨 고택(고산 윤선도 고택) 녹우당
녹우당은 흔히 '윤선도 고택'으로 알려진,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이다. 그 이름 때문에 윤선도가 직접 지은 17세기 초의 건물로 알기 쉽지만, 실제로는 이 보다 100년 후인 18세기의 것이며, 사랑채는 그보다도 더 1세기 뒤의 건물로 생각된다. 이 집이 본격적인 살림집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화가 윤두서 때부터이다. 따라서 녹우당은 '윤선도 고택'이 아니라 '윤두서 고택'이라 불러야 타당하다.
강진 일대에 세거하던 윤씨들이 녹우당이 있는 연동마을 일대에 자리잡은 것은 16세기 초 윤효정부터다. 그후 윤선도까지 5대에 걸쳐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일대의 명문가문으로,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급제한 종손들은 서울에 자리잡고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해남의 재산은 부재지주로서 관리하게 되고, 종가인 녹우당은 아직 소박한 시골집으로 있었다.
남인 세력의 선봉이었던 윤선도는 송시열의 서인세력과 예송-예법에 관한 논란-으로 결사적인 일전을 벌였지만, 여지없이 패배하여 유배와 보길도 은거로 마감했다. 그 이후 해남 윤씨를 비롯한 남인계열은 정권에 참여할 길이 봉쇄되었고, 증손인 윤두서는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그림에 몰두하게 된다. 윤두서는 1752년 드디어 서울집을 정리하고 해남으로 낙향하게 된다. 그 이전에 있었던 종가집은 재실 형태의 건물이었으며, 윤두서의 낙향과 종손들의 대이동 이후에 본격적인 살림집으로 집을 개수하였다. 1821 년 가묘 중건을 시작으로 3개의 사당이 중건되고, 19세기 말에는 행랑채를 신축하고, 1938년에 녹우당 뒤에 있는 재각인 추원당을 신축함으로써 주요한 건축과정을개수의 과정을 겪은 결과가 현재의 녹우당이며, 지금도 녹우당의 내부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녹우당은 진산인 덕음산에 기대어 서향하고 있다. 앞으로는 일가붙이인 연동마을이 펼쳐지고, 그 앞으로 다시 넓은 논들과 멀리 안산이 놓인다. 마을 앞 들판이 너무 넓고 막힘이 없어서 허해짐을 막으려고 마을 입구에 연못을 파고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마을에서는 이 연못을 '몰(말)무덤'이라 부르며, 윤선도가 직접 조성한 곳이라 여긴다. 현재 몰무덤은 메말랐지만, 아직도 남은 30여 그루의 늙은 소나무들에 둘러싸인 모습은 고산의 원림 경영 솜씨를 다시 한번 자랑한다.
아이들이 소나무밭 옆에 잘라놓은 대나무로 장난을 치고 놀았는데, 윤씨후손이 아이들을 나무란다. 아마도 대나무가 수입원의 하나인가 싶었다. 그래도 조금은 씁쓸... 대나무와 소나무의 향취가 느껴지는 고택... 남도의 종가댁다운 운치가 있었다.
(7) 강진 다산초당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그가 저술한 책 모두를 일컬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고 하는데, 총 500여권에 달하는 이 책들은 철학, 윤리,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그의 유배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유배라는 난관을 오히려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에 임하여서나 혹은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끝없이 연마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의 위치나 지위에 상관없이 고고한 선비의 정신은 대를 이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가 저술의 대부분을 썼던 다산초당(茶山草堂) 역시 한 채의 작은 집에 불과하지만 선비정신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증거로 우리에게 남달리 다가오는 것이다.
다산 초당, 동암, 서암 등은 에전의 자리에 새로 복원한 것으로 김정희가 직접 썼다는 '보정산방'을 집자해서 만든 '다산초당' 현판이 동암에 걸려있고,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 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초당 옆에는 아름다운 연못과 연못 안의 작은 섬,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그대로 이어 연못으로 내려오게 한 대나무 폭포(?), 차를 달여마시곤 했다는 초당 앞의 편편한 바위 등... 뿐만 아니라 집 뒤 작은 샘과 그 위로 바위에 새겨진 '丁石'이라는 글씨에서 나타나는 그의 올곧은 마음들이 절절히 느껴진다. 천일각은 다산이 앉아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산마루 터에 새로 지은 누각이고, 이 곳에서 흑산도에 귀양간 형과, 남겨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바라보던 그 바다가 지금의 천일각에서 보여지는 바로 그 강진만(구강포)이다. 끝내 만나지 못하고 흑산도에서 약전형이 죽었을 때, 상심하던 바로 그 곳에 있으니 코 끝이 찡하다. 깊은 산중 찾아오는 이 없이 지내다가, 백련사에서 거처한 혜장선사와 알게 되면서 오가곤 했던 오솔길이 지금도 백련사로 이어지는 운치있는 길로 남아있다.
늦은 밤에야 도착한 다산초당이라 제대로 운치를 느끼지는 못하였으나 깊고 적막한 산속이라 저절로 글이 쓰여질 듯 싶었고, 인생의 허무함이 몸에 배일 듯 싶은 곳이었다. 오죽하면 조그마한 연못을 짓고 호수를 꿈꾸었겠는가...
4) 네째날
(1) 영암 월출산 도갑사
전라남도 영암의 진산인 월출산은 산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다. 기암 괴석은 만물상을 방불케 할 방대한 수석의 전시장 같다. 여름철 월출산은 산을 뒤덮은 상록수림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수가 절경을 이루고, 겨울에는 흰눈을 뒤집어 쓴 기암괴석들이 장관이다. 월출산자락에 있는 도갑사는 통일신라때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국보 50호인 해탈문이 있고 대웅전 앞에 300년 된 초대형의 고풍스런 석조가 인상 깊다. 조용하면서도 엄숙한 절 분위기와 절을 감싸고 있는 죽림과 동백나무 숲이 어우러져 신선감을 더해 준다. 아직은 작은 읍마을 이어서 대도시와는 달리 군청 앞 광장이 무료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암읍에서 목포쪽으로 8km 정도 달리면 구림 사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군서장터를 지나 4km정도 오르다 보면 도갑사가 나온다. 도갑사로 오르는 길은 50년생 벚나무가 가득하여 봄철 벚꽃이 필 때면 월출산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고, 가을 단풍이 든 벚나무가 봄 못지 않게 아름다우며, 길 옆 구림천 계곡은 여름철에 피서객이 줄을 잇는다. 특히 2km 정도 오르면 오른쪽 주지봉의 산 중턱에 왕인박사가 수학했다는 문산재가 있다.
국립공원 매표소 뒤 일주문을 100m 가량 지나 위치한 국보 제50호인 해탈문은 조선 성종 4년(1473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건축양식이 매우 독특하다. 원래 사천왕문이었겠지만 지금은 좌우 앞쪽 칸에 금강역사상이, 다음칸에는 보물 제1134호인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석조 5층 석탑, 수미왕사비가 있고, 절 100m 위 미륵전에는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100m 더 오르면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비와 중창한 수미왕사비가 웅장하게 서있다. 도갑사는 도선국사의 예언대로 임진왜란과 6.25동란을 겪으면서 화재로 많은 유산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조선 세조 3년(1473년) 신미, 수미 두 왕사가 중창했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총 규모가 966간에 소속된 암자가 12개나 되었으며, 상주한 승려수가 730명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도 대웅전 뒤 천여평의 빈터에는 주춧돌이 선명하게 군데군데 박혀있고, 앞뜰에 5m에 달하는 스님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크기가 도갑사의 옛 사세와 승려 수를 말해주고 있다.
(2) 화순 운주사
화순 운주사는 여러 가지로 특이한 사찰이다. 우선 대부분의 절들이 산 속에 있는 반면에 운주사는 평지나 다름없는 얕으마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다.
그러나 이 곳은 일찌기 천불과 천탑이 있었다는 신비의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는 천불천탑에는 다소 못 미치지만 석탑 12기와 석불 70여기가 남아있는데 그 모양새가 너무나도 다양하다. 예전에는 이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옛 문헌에는 정말로 천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었다고 하니 세월히 흐르면서 많이 유실된 듯 하다.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은 그 모양새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공통적인 이미지는 소박하다는 것인데 그런 느낌이 와불상에 와서는 절정을 이룬다. 와불 한 쌍은 원래부터 와불이 아니라 일으켜 세우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이 와불이 일어서게 되면 세상이 바뀐다는 신화가 있다한다. 입구에서부터 비스듬히 누워져 있는 작은 석불들,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 원형 다층석탑, 부부 불상들, 와불 한 쌍... 운주사는 숫자로는 많이 모자랄지 모르지만 이곳에 다녀가면 정말로 천불과 천탑을 보고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밤하늘 별자리의 북극성 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와불.
운주사 탑들은 별자리 및 별의 밝기와 연관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남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지상에 내려앉은 별자리인가. KBS 제1TV가 역사스페셜(담당PD 우종택)을 통해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별자리를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밤하늘의 별자리와 운주사는 어떤 연관성을 갖는다는 믿음과 그를 뒷받침하는 칠성신앙이 새로운 가설의 줄거리다. 운주사의 불상과 탑들은 보기에는 무질서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떤 질서’를 가지고 조성됐다는 것이다.
역사스페셜은 박종철(성암천문대장)씨가 준비중인 논문 ‘운주사 석탑배치의 천문학적 고찰’을 근거로 이 같은 가설을 제시했다. 4년여동안 운주사의 탑과 불상 배치에 별자리를 접목시키는 연구를 해 왔던 박씨는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는 천문지도에서 일등성 별들을 연결해 운주사 탑배치와 비교했더니 탑의 배치와 별자리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 이를 토대로 역사스페셜은 일등성 별을 연결한 천체도와 운주사 탑을 연결한 배치도를 영상그래픽으로 만들어 비교하는 등 박씨의 연구내용을 뒷받침했다. 밤하늘의 별자리 가운데 일등성들을 연결한 삼각형의 구도가 운주사 가람의 탑배치도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운주사의 탑들이 세우기 어려운 능선이나 비탈에 조성된 점은 별자리와 관련 있을 것이라는 것이 박씨의 주장. 또 북두칠성을 표현한 칠성바위에서 정북 방향에 와불이 위치하고 있는 점도 천체의 질서를 본뜬 것이란 주장이다.
학자들이 운주사의 가람배치와 별자리를 연관지어 연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서쪽 산 중턱에 위치한 칠성바위에서 비롯됐다. 북두칠성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조성된 일곱 개의 바위는 각각의 크기가 다르다. 연구결과 크기가 다른 것은 북두칠성의 밝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밝은 별은 크게 덜 밝은 별은 작게 조성했다는 것이다. 실제 바위의 크기를 통해 부피를 알아내고 그것을 무게로 환산한 결과 12톤에서 17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양한 크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칠성바위가 땅위에 조성한 북두칠성이라는 단서에서 나머지의 탑들도 별자리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가설이 세워졌는데 놀랍게도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일등성들의 위치와 닮아 있었다는 것이 박종철씨의 논문이 주장하는 핵심 내용이다. 역사스페셜은 불교가 습합한 칠성신앙이 운주사의 칠성바위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대둔사의 칠성탱화를 들었다. 탱화에 묘사된 일곱여래의 후광들의 배치가 운주사 칠성바위와 같음을 밝혀 냈다. 운주사의 탑들은 불교가 수용한 별자리 신앙의 또다른 표현으로 밝혀진 셈이다.
고려시대 것으로 유일하게 전하는 별자리 탱화에서 일등성에 해당하는 별자리 하나하나에 불상을 새겨 넣은 점도 운주사가 갖는 칠성신앙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종교학자 김일권씨는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되는 초기부터 불교경전과 천문학이 함께 유입되며 불교와 별자리의 관계를 긴밀히 했다”며 불교가 동양천문학 전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운주사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운주사의 와불전설이다. 하루만에 천불천탑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지상에 내려온 천상공인들이, 닭우는 소리를 듣고 하루가 지난줄 알고 하늘로 올라가버려 마지막 두개의 불상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승천하여 두개의 불상이 완성안된 것이 아니라 완성된 채로, 다만 누운 상태로 남아있다는 그 와불의 전설에는 또다른 전설도 섞여있다. 운주사는 배모양이라 와불이 일어서면 배의 앞부분에 해당되는 일본이 침몰할 것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예전 우리 선조들은 후손들이 세운 나라인 일본이 멸망한다면 얼마나 슬플까하는 측은지심으로 천불천탑을 세워 일본을 살려주었다는 것인데... 그들이 선조들의 깊은 뜻을 알련가... 수정이는 와불을 조금만 세워 혼내주자고 하여... 달래느라 힘들었다.
(3) 보성 녹차원
보성의 차는 재배 차다. 자생 차는 경남 하동 쌍계사 입구와 전남 순천 선암사 것이 유명하다. 차는 맛과 향, 그리고 색으 로 그 질을 판단한다. 밤낮의 온도차가 크고 안개가 많은 곳에서 생 산된 차가 고급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보성, 쌍계사 계곡, 선암사 골짜기가 꼭 그러하다. 곡우(4월 20일) 전후해서 따는 차를 맛이나 향에서 최고로 친다. 자생 곡우차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싸다. 값싼 중작, 대작이라도 차를 마시며 남도의 따스한 햇살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할 것이다.
- 봇재차원
보성읍에서 국도를 따라 율포쪽으로 가다 보면 활성산에 이르는데 이 산의봇재를 넘으면 온산이 마치 녹색의 양탄자를 깔아 놓은것처럼 계단식으로 가꾸어진 `다원'이 펼쳐진다. 도로변에 지어진 `다향각'에서는 득량만의 수려한 해안경관과 끝없이 펼쳐진 차밭을 함께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풍치이다. 원래는 일제시대 때인 1939년 일본인 차 전문가들이 보성을 우리나라 최적의 홍차재배지로 선정, 인도산 차종자를 수입하여 29.7ha 밭에 씨를 뿌린 것이 그 시초라 한다.
1957년 새로운 차 재배단지를 개간 하고 70년대말~80년대초에 재배면적 확대에 힘써 현재는 600ha에 이르는 전국 최대의 다원중 하나이다. 이곳에서 연간 생산하는 차는 약200톤에 이른다고 한다. 보성군에서는 매년 봄 곡우가 지나면서 시작되는 차잎따기 철에 맞춰 "다향제"를 열어 차문화 보급에 힘쓰고 있으며, 첫날 "다신제" 시작으로 차잎따기 경연, 차만들기 경연, 차아가씨 선발, 다례시범 등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 개장기간 4월 중순 - 5월 초순
- 대한다원(업)
전남 보성에 소재하고 있는 대한다업(주) 직영농장 (보성다원)은 해발 350m 오선봉에서 위치하고 있으며, 1957년 설립하여 반세기가 지났다. 지금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한 차 관광농원('MBC 온달왕자' 신혼여행 촬영지)으로 맑은 물과 울창한 삼나무 숲길, 특히 오선봉 자락에 줄줄이 늘어선 초록의 차나무는 방문객의 마음에 깊은 여운을 준다. 영화 '선물'(이영애, 이정재 주연 촬영지), '스피드 011' 수녀편 광고 촬영지이자 겨울연가의 촬영지로서도 유명하다.
이 일대 다원에서는 음다는 되지만 식사가 되지않아 사실 불편한데, 대한다업은 유일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며, 관광농원이라 장소가 넓고 주차장이 여유롭고 녹돈과 녹차수제비등 녹차음식과 우전차를 싸게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서울근교의 아침고요수목원과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아이들이 직접 녹차잎도 따보고, 녹차만드는 과정도 지켜보면서 실습의 즐거운 체험을 하였다. 특히 대한다업(원)에서의 녹돈으로 만든 삼겹살과 녹차수제비는 상당히 맛이 있어 우리들의 다이어트에 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보성을 뒤로하고 김승재과장의 고향인 충무, 요즘은 통영으로 부르지만,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으로 향했다. 여전히 비는 부슬부슬 왔지만... 즐거운 나날이었다.
5) 다섯째날
(1) 통영
경남 통영시에 딸린 한산도에서 전라도 여수까지 이어지는 뱃길을 한려수도라고 일컫는다. 한 삼백리가 되는 이 뱃길 언저리에는 이백개에 가까운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다. 그러나 남국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뱃길로 꼽히는 한려수도의 가경은 통영시의 해역에 들어있다고 봄이 옳은 듯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통영의 바다에는 태깔이 아름다운 고만고만한 섬 140개가 마치 밤하늘에 뿌려진 별처럼 흩어져 있어 뱃전에서 선 채로 "섬나라"의 풍광을 한껏 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앙 기상대의 통계에 따르면 통영은 한해 365일에서 250일쯤이 쾌청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날씨가 좋은 곳인 만큼 그 명미한 경치가 더욱더 돋보인다. 같은 남해안에 위치한 서부 경남 중에서도 유난히 기온이 따뜻하다. 아름다운 해안선의 굴곡이 육지와 잘 어울려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다를 끼고있는 수산업의 도시이면서도 해풍과 높은 일조량으로 인하여 마늘,시금치,고구마,참깨,보리 등의 밭 농작물이 많이 생산되고 그 품질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대구가 많이 잡히던 오십년대까지만 해도 돈 많은 어장애비 곧 어장을 경영하는 수산 업자들이 몰리던 부자 고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통영의 바다는 죄다 좋은 멸치 어장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멸치 떼가 통영의 동북쪽에 있는 진해만에서 들어와 통영군의 바다를 얼추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서남쪽 끝에 자리잡은 욕지면 해안으로 행진해 가기 때문이다. 통영시가 수산업의 한 거점의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통영항이 남해를 누비는 고기잡이 배들이 닿기에 편리한 길목에 자리잡아 이곳의 수산물 위판장 기능이 경남에서 가장 커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깃배가 갖추어야 할 장비와 도구를 만들어 팔거나 수리하는 작은 서비스 공장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과 아울러 고깃배를 만드는 소규모 조선업이 발달 하였다. 우리나라 장어의 대부분이 통영에서 잡히고 있으며, 멍게의 대명사가 "충무멍게"가 될 정도이며 거제와 더불어 통영의 굴은 전국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복,해삼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제주해녀 들의 대부분이 통영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예부터 통영에는 먹거리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충무는 본디 고성군 춘원면에 들었으나 1900년에 춘원면은 진남군에 들어 고성군에서 떨어져 나왔다. 진남군이 용남군으로 바뀔 적에 춘원면은 용남면 두룡포리가 되었다.그 뒤로 용남군이 통영군으로 바뀌게 되고, 1931년에는 읍으로 올려 지면서 산양면의 평림리,인평리,당동리,미수리,봉평리,도남리 등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1955년에는 시로 올려져 통영군에서 떨어져 나왔고 1973년에 용남면 무전리마저 제 땅으로 하여 동 20개를 이루게 되었다. 통영은 대한제국 말엽인 1900년까지 고성군에 딸려 있었다. 그러나 고성군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곧장 통영이란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진남군이라 불리다가 1909년에는 이름이 용남군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14년에야 비로소 거제군까지 병합하여 통영군이라 일컫게 되었다.
1931년에는 거제군이 독립하여 나감과 함께 통영면이 읍으로 올려졌고, 1955년에는 통영면이 다시 충무시로 올려져 통영군에서 제금을 났으며 안정 출장소와 면 일곱개 곧 용남면,산양면,도산면,광도면,욕지면,한산면,사량면 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995년에는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합하여 통영시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충무"는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에서 따온 이름이고 "통영"이 삼도 수군 통제영의 줄인말인 "통제영"에서 나온 이름이다.
춤무, 즉 통영은 굴(김승재과장의 표현을 빌면 꿀이라 함)이 유명하며, 충무김밥으로도 유명하다. 충무김밥은 할머니의 모습이 상호에 새겨져 있는 여객선터미널 앞, 농구골대앞에 있는 집이 원조다.
(2) 남해 보리암
금산 해발 621m 지점에 대한불교 조계종 13교구에 속해 있는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고찰로서, 전국의 3대 기도처 중의 하나이며, 불자들의 발길이 끊일줄 모르는 곳이다. 금산은 태조 이성계가 오랫동안 수도하고 왕이 될 것이라고 유일하게 점지해준 산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보광산을 금산으로 바꿔 말로나마 산을 금으로 들러싸 부르게 되었다한다. 보리암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대장봉과 정면에는 전망이 좋은 탑대가 있다. 금산에 위치하고 있는 보리암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상주 해수욕장, 한려해상은 그 아름다움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보리암에서 새해 일출 광경을 보면 영험이 있다고 하여, 전국에서 수많은 관관객이 오고 있다.
낙락장송과 청정 산죽, 바위 절경이 지키는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해양 기도처(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로 불릴 만큼 효험이 높은 기도처로 소문난 암자다. (보리암 종무소 : 055-862-5570)
보리암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보광사의 부속암자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보리암은 금산의 비경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거대한 바위들이 서로 엉켜있는 사이사이에는 낙락장송과 산죽들이 청정하게 서 있고 산 밑으로는 초승달 모양의 상주해수욕장에서 시작되는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보리암에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이란 돌로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바다를 건너오면서 방향을 잃어 버렸는지, 신기하게도 이 탑 앞에서는 나침반이 제구실을 못한다고 한다. 보리암 삼층석탑 앞은 금산의 제1전망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암자 전체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고,한려수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힐 수 있다. 삼층석탑 옆에는 해수관세음보살상이 인자한 미소를 품고 서 있다. 남해대교에서 보리암 아래 주차장까지는 32㎞, 승용차로 50분 정도 걸린다.거기에서 다시 암자까지는 800m, 20분을 걸어야 한다
보리암은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한다. 원이 많으신 분들은 반드시 한가지를 정해 가볼 일이다. 나도 3~4번째의 방문공덕을 들이고서야 겨우 이번에사 보리암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찰이다.
6) 여섯째날
(1) 해운대 동백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해운대해수욕장의 서쪽 끝에서 바닷가로 쑥 튀어나와 있는 동백섬에는 높이 2.5m의 인어상과 동백공원이 들어서 있다. 동백섬은 아주 작은 섬으로. 이 작은 섬은 경치가 빼어나 옛선인들조차 설래이는 마음과 편안함을 동시에 안겨다 준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이곳을 산책로와 휴식처로 꾸며 부산 시민의 휴식공간과 관광지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그리고 이곳 동백 공원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기념비와 동상이 있다. 이곳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되건 아마도 가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곳의 동백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동백섬에 도착하여 둘려보면 섬같은 느낌이 전혀 없고 작은 공원같은 느낌이 든다. 입구에 들어서면 관광 마차가 눈에 띄는데, 도심 한복판에서 보기 쉽지 않아서인지, 신기해서인 지 꼬마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엄마의 손을 잡고 줄을 서있는 아이들이 새삼 귀여워 보이는 곳이다. 입구를 따라 숲길 같은 곳을 5분 정도 걸어가면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상쾌한 기분이 가슴을 열게하며, 아스팔트 또한 미술적 감각을 살려 돋보인다. 멀리서 엷은 안개가 살짝 바다를 감싸안고 있어 보는 이의 근심 걱정을 모두 끌어안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이곳은 신라말의 대문호인 문창후 최치원(857~?)선생께서 가야산 입산길에 이곳을 지나다 주변 자연 경관이 너무도 아름다워 대를 쌓고 선생의 자 해운을 따서 암석에 (해운대)란 세글자를 세김으로써 이곳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바위에 해운대란 글이 선명하게 보인다. 고려의 문신인 정포(1309~1345)는 해운대란 시중에서 "항대만 부지 유설해운명"(대는 황폐하고 흔적이 없고 오직 해운의 이름만 남아있구나)이라 하였다.
동백섬에 있는 황옥인어공주상은 우리나라로 시집온 인어인 황옥공주가 고향이 그리워 보름이면 동백섬에 와서 고향이 보이는 여의주구슬을 보며 고향생각에 젖어들었다는 안타까운 전설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2) 경주 대능원 천마총
천마총은 경북 경주시 황남동의 대릉원 고분공원 안 서북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원래 경주 155호분이라고 불려왔던 밑지름 47m, 높이 12.7m의 원형분이다. 1973년에 발굴되어 5세기말에서 6세기초경에 만들어진 적석목곽분으로 알려졌다. 목곽 안에서 천마를 그린 장니(障泥:말 다래)와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천마총 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고분 내부를 복원하여 관람할 수 있게 하였다.
고분은 지표에 큰 냇돌을 고르게 깔아 목곽 바닥으로 삼고 거기에 동서 6.6m, 남북 4.2m, 높이 2.1m로 추정되는 목곽을 설치하였다. 목곽 안에는 중앙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길이2.2m, 너비 80cm의 목관을 동서로 길게 놓고, 그 주위에 자갈로 너비 50cm, 높이 40cm의 석단을 쌓았다. 석단 동쪽에 접하여 길이 1.8m, 너비 1.0m, 높이 0.8m의 나무로 짠 부장품수장궤(副葬品收藏櫃)를 남북으로 길게 놓았다.
목곽 주위에는 큰 냇돌을 밑지름 23.6m의 원형으로 목곽과 같은 높이까지 경사지게 쌓아올리고, 목곽 위에는 약4m 높이로 냇돌을 반구형(半球形)으로 쌓아 그 표면에 진흙을 약 30cm 두께로 바르고 정상부에는 진흙 속에 마주장식품(馬具裝飾品)들을 묻었다. 진흙 밖으로는 산흙을 쌓아 봉토를 만들었고 봉토 기슭에는 냇돌을 높이 1.2m로 쌓아 호석(護石)으로 삼았다. 목관 안에서는 피장자(被葬者)가 착용하였던 금관, 금제과대(金製 帶), 요패(腰佩), 팔지, 반지, 목걸이 등의 장신구류와 환두대도(頭大刀)가 발견되었고, 부장품 수장궤 뚜껑 위에서는 금제조익형관식 (金製鳥翼形冠飾)과 금제접형관식(金製蝶形冠飾) 및 금동모(金銅帽), 금동제경갑 (金銅製脛甲)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수장궤 안에서는 투조금동판식죽심장니(透彫金銅板飾竹心障泥), 백화수피제 (白樺樹皮製), 천마도장니, 은제·금동제 안장 등의 마구류가 위쪽에 놓였고, 그 밑에 백화수피제 채화판(彩畵板)이 있었다. 이들 밑에는 금·은·금동 및 청동으로 된 각종 그릇과 많은 칠기와 유리그릇이 있었고, 맨 밑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석단 위에서는 동쪽에서 금모(金帽), 은제과대 등의 장신구류가 발견되었고 그밖의 자리에서는 환두대도를 비롯한 각종 무기류와 철정(鐵鋌)이 나왔으며, 금동제식리(金銅製飾履)는 서북쪽 모서리에서 발견되었다.
경주, 특히 대능원에 갈 때마다 수정이는 "조상님들 묘이니 예의를 갖추고 인사를 하라"라는 제말에 "아빤 올 때마다 다른 사람 보게 창피하게 그런다"고 입이 한자나 삐쳐나와서, 우리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전설이 서려있는 계림에 인사드리러 가자는 제말을 냉정히 거절하여 저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역시 수정이는 놀이동산이 문화답사보다 좋은가 봅디다. 결국 대구 처제들을 만나 아이들이 원하는, 보문단지에 있는 경주월드로 향하였습니다.
(3) 경주월드
유네스코 선정 세계 10대 유적 도시인 경주 시내에서 10Km 떨어져 있는 보문 관광 휴양지 내에 위치한 경주월드는 지역 레져문화의 선두에 서서 이끌어가는 종합 레저 타운이다. 1985년 5월 21일 개장이래 꿈과 사랑, 행복이 있는 경주월드는 당초 정적인 관광도시에 동적인 Motive를 제공하고 보문단지 활성화를 도모하며 점차 늘어가는 국민 레저 욕구를 충족 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개장하였다.
8만평의 부지위에 다양한 첨단 시설들로 꾸며져 있는 경주월드는 크게 5가지 지구인 위락시설 지구, 수영장 지구, 운동시설 지구, 방갈로 타운 지구, 썰매장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 위락시설 지구
꿈과 사랑, 행복의 세계가 펼쳐지는 최첨단 라이드(Ride)시설과 모험과 도전의 세계인 오락시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보는 관람시설 등으로 꾸며져 있다.
- 수영장 지구
7,260평 규모의 수영장은 국제규격의 정규풀, 초보자를 위한 유수풀, 어린이 전용의 유아풀, 뿐만 아니라 다이빙풀, 대규모의 워터 슬라이드, 어린이를 위한 키디슬라이드 등을 갖추고 있는 대규모 옥외 수영장이다.
- 썰매장 지구
겨울만 되면 펼쳐지는 화이트 페스티발의 경주월드에는 썰매장이 모두 세 곳입니다. 첫번째는 영남 최초이며 국내 두번째의 스키썰매장이 그것인데 전장 250m이며 전용 리프트를 갖추고 있어서 경주월드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두번째는, 겨울이면 고객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120m 눈썰매장으로 140cm이하의 어린이와 스키 썰매에 두려움이 앞서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스키썰매를 탈 수 있기를 바라면서 발길을 돌려 찾는 곳이다.
- 운동시설 지구
잔디 축구장 2면, 배구장 2면, 대형 롤러스케이트장, 미니골프장, 테니스장을 갖추고 있고 청소년들의 건강한 심신을 단련시키고자 설치한 11종의 체력단련장을 갖춤으로서 종합적인 스포츠 센터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기업체의 야유회 및 단합대회, 단체 및 학원, 유치원 소풍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한 최적의 잔디밭도 보유하고 있다.
- 방가로타운 지구
1만여 평의 대지위에 1,5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방갈로 타운은 대학생 M.T.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및 환영회, 기업체의 사원단합대회, 연수원, 세미나와 중,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유치원(학원)의 캠프 등 행사에 적합한 대규모 숙소 단지입니다. 30인용(18객실), 50인용(16객실), 100인용(1객실)의 단체 숙박시설과 5인용의 가족단위 숙박시설 20 객실로 구성되어 있다.
(4) 보문단지
경치좋은 보문호를 가운데 두고 3백 23만 평의 부지에 형성되어 있는 보문관광단지에는 호텔, 경주월드, 선재미술관, 유람선, 면세점, 골프장, 자동차 야외극장 등 레저 휴양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보문야외공원장에서는 국악과 무용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보문호에는 제트스키, 윈드서핑, 등 수상 스포츠를 즐길수 있다
7) 일곱째날
(1) 영덕 강구항
MBC TV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촬영지로 전국에서 관광객들로 많다.항구 주변의 난전을 정리해 만든 풍물거리에서는 4인기준 3-4만원의 회와 매운탕을 즐길수 있다.강구에서 축산항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너무나 알려진 길, 갯바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유난히도 많은 갈매기 떼.방파제와 모래사장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곳곳이 낚시터이다. 강구에서 20키로가량 북쪽의 축산항의 시원하고 얼큰한 메운탕... 강구대교 건너편 언덕의 삼사해상공원에 오르면 영덕 앞 바다와 강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영덕대게는 요즘 울진과 원조를 겨루고 있지만 아직은 영덕의 우세함이 앞서는 것 같다. 영덕대게는 몸통에서 뻗어나온 8개의 다리가 대나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죽해(竹蟹)라고 쓴다. 게라고 하면 영덕대게를 떠올릴 만큼 청정해역 영덕군의 특산물로 자리잡은 영덕대게는 영덕군 강구 앞바다에서 강원도 삼척 바다밑을 이르는 해저산맥, 수심 120m∼370m 사이에서 서식하며 죽은 고기의 시체나 바다밑에서 사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산다.
특히, 강구항앞바다와 축산항앞바다 사이 3마일 해저에는 깨끗한 모래로 형성되어 있어 이 곳에서 잡힌대게는 타지역 갯벌에서 잡힌대게에 비해 속살이 많을 뿐 아니라 맛이 좋아 으뜸으로 치며, 축산면 경정리(자연부락명 차유리) 앞바다에서 잡힌 대게는 그 다리가 길고 토실토실하며 크기에 비해 껍질은 얇고 살이 많아서 고려태조가 예주(지금의 영덕군 영해면)를 순시했을 당시 주안상에 대게가 오른 이후 계속해서 진상되어 현재의 영덕대게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덕대게는 수자원 보호를 위하여 매년 11월 1일부터 다음해 5월 말까지만 어획할 수 있으며 대게의 암컷(일명 빵게)는 년중 잡을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영덕대게는 강구항 안에 있는 강구대게(054-733-6942, 주인 이병희)집에 가면 제대로 먹을 수 있다. 관심있으신 분은 서울로 당일 택배도 되니 제이름대고, 마포 김씨 소개라고 하면 한마리 더 줄 것입니다.
(2) 정동진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를 고루 갖춘 천혜의 비경이 곳곳에 숨어있는 강원도
무명의 간이역에서 일약 관광명소로 떠오른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역...
우리 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간이역이며, 조선시대 한양의 광화문으로부터 정확히 동쪽으로 내달으면 닿게 되는 바닷가라해서 "정동진"이라 이름지어진 곳,
새벽기차가 서는 작은 간이역 정동진. 새벽의 정동진역은 기차가 숨을 토해 내듯이 일출을 보기위한 사람들로 붐빈다. 기차역에서 하나 하나 바다로 나와 파도 앞에 서서 새벽 여명이 환한 먼 바다를 응시한다. 이윽고 터지는 빛살. 나직히 울리는 탄성들.
모래시계로 일약 유명해진 정동진역은 일출 관광의 명소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이라는 점도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 당기지만 무엇보다도 바다와 일출...그리고 최근에 새로 생긴 해맞이 공원과 모래시계공원, 드라마 영상 기념관 등이 여행자들을 사로잡는다. 일출 외에는 볼거리가 없다고들 하지만 연인과 함께 바다를 걷고, 바라보고, 느끼고....
이제 콘도가 하나생겨 숙소를 해결하기가 보다 용이해진 듯 하다. 그런데 배같이 만들어 놓은 그 콘도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네요... 하얀 포말의 파도에 나만의 꿈을 실어보고...이것만으로도 정동진의 여행은 충분하지 않는가요? 어느 좋은날 연인과 함께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에 몸을 눕혀도 좋고, 아니면 혼자라도 바다와 대화를 나눌수 있는 정동진으로 일상의 재충전을 위하여 떠나봄도 어떠할지......
수정이는 자신이 고현정이라도 된 듯 모래시계를 가지고 파도가 치는 숫자를 헤아려보기도 하고, 백사장을 이리저리 뛰어놀며 만춘의 바다를 만끽하였습니다. 수정이 엄마는 팔장을 끼고서 우리도 쟤들(아직은 젊은 눈앞의 청춘들)처럼 걸어보자고 하고... 또한번 정동진은 젊음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8)여덟째날
(1) 경포대
제일 관동팔경이라 불리는 경포대(鏡浦臺). 아름답기로 이름난 관동 지방의 경치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여덟 곳을 뽑아서 '관동팔경'이라 하는데, 휴전선에 가로막혀 갈 수 없는 통천의 '총석정'(叢石亭)과 고성의 삼일포(三日浦)를 포함하여,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우러진의 망양정(望洋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 등이다.
관동팔경에는 가는 곳마다 정자나 누대가 자리잡고 있어 많은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고 그 심경을 시로 읊어냈으며, 화가는 화폭에 절경을 담아냈다. 경포대는 정면 6칸, 측면 5칸에 대청을 받치는 28개의 기둥위에 팔각 지붕으로 지은 당당한 규모의 누각으로, 봄이면 누대 주위로 벚꽃이 화사하게 핀다. 흔히 강릉 경포호와 해수욕장 그리고 주변 소나무 숲지대를 일컬어 '경포대'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철을 가리지 않고 찾는 명소 중의 명소로 손꼽힌다..
동해안 해수욕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경포해수욕장을 찾는 이는 매년 수십만 명에 이른다. 사람들은 대개 호수를 바라보며 차로 달려 잠깐 사이에 해수욕장에 닿기 떄문에 호숫가 동북쪽 찻길 건너편 언덕위에 있는 경포대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벚나무 숲에 가려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강릉 경포대의 '경포대'는 관동팔경 가운데 첫 손으로 꼽히는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강릉시 저동에 있는 경포대는 정면 6칸에 측면이 5칸, 대청을 받치는 기둥이 28개나 되는 당당한 규모의 팔각지붕으로 지은 익공계 양식의 누대이다. 바다와 호수를 한아름 안고 있는 빼어난 경치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던 경포대는 당시 그들이 남긴 발자취가 경포대 누각 안에 현판으로 걸려있다. '경포대(鏡浦臺)'와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는 현판이 그것인데, 제일강산이라는 큰 현판에서 암시하는 경포대의 명성을 헤아릴 수 있다.
일찍이 강릉 사람들은 경포대에서 볼수 있는 여덟 경치를 일러 경포팔경이라 부르며 풍광을 즐겨왔는데, 경포대에서 보는 해돋이와 낙조, 달맞이, 고기잡이배의 야경, 노송에 들어앉은 강문동, 그리고 초당마을에서 피워 올리는 저녁 연기 등이 경포팔경에 속한다. 특히 누각 안 호수를 바라보는 쪽 면에다 단을 하나 더 올려 경포호를 좀더 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거울처럼 맑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경포호(鏡浦湖)에는 달이 네 개 뜬다는 풍류가 있다. 하늘에 뜬 달이 하나요, 바다에 비친 달이 하나요, 호수에 비친 달이 하나며, 술잔에 비친 달이 하나. 이렇게 네 개의 달이 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낭만적인 이들은 한 가지를 덧붙여 다섯 개의 달을 이야기한다. 하늘, 바다, 호수, 술잔에 비친 달 외에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에 비친 달까지 다섯 개의 달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포호는 사람에게 유익함을 준다하여 군자호(君子湖)라고도 불렸다 한다.
'경포대에 놀러와서 경포 잉어회와 초당두부를 못먹고 돌아가는 사람은 멋은 알지 몰라도 맛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찌개거리로 애용되는 일명 '때복이'라는 민물 조개도 유명한데,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경포호 자리에 최부자라는 자린고비가 살았는데, 시주를 청한 스님에게 똥을 퍼주어 내쫓았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물이 솟아올라 마을은 호수로 변하고 최부잣집 곳간에 쌓여있던 곡식들은 모두 조개로 변했다는 것이다. 경포호 주변에서 눈여겨 볼 것은 누정뿐만이 아니다. 강릉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중앙과 격리된 지방 행정 중심지로서 경제 및 문화적 독립성이 비교적 두드러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후기 양반주택인 '선교장'이다. 양반주택의 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움을 중시하며 사랑채와 안채, 별당, 행랑 등을 유기적으로 지었는데, 노비들이 살았던 초가도 함께 남아 있어 엄격했던 계급사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선교장에 달린 별당, 경포호 안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해운정', 그리고 선교장 앞뜰 연못의 '활래정'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강릉시 경포호 옆 약 6km의 질 좋은 모래밭으로 이루어진 경포 해수욕장은 평균 수심 1-2m, 경사도 10도 안팎으로 주위에 소나무 숲이 울창하여 경치가 좋고, 영동고속도로가 연결되어 한여름이면 전국 제일의 피서지로 초만원을 이룬다. 주변에 설악산, 오대산 국립공원이 있어 휴가를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주변에 주차장 및 야영장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카페, 횟집이 즐비하여 바다를 보며 낭만을 즐길 수 있다. 특히 경포대에서는 현대호텔(舊 동해관광호텔)에서 밤에 잠을 자며 듣는 파도소리는 또 하나의 경포대 일절이라 부를 만큼 운치가 있다. 꼭 권하는 바이다. 우리도 일출을 보았다. 떠오르는 동해의 일출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자! 이제 남좋은 일 그만하고 창업할 것이냐? 한번 더 재취업이냐? 이젠 옮긴다면 임원으로 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족이 나을까... "
(2) 낙산사 홍련암
법당 안 마루바닥에 반뼘짜리 작은 구멍들이 여기저기 뚫려있다. 그 작은 구멍들에 눈을 바싹대고 들여다보면, 저 아래 깊은 곳에 넘실대는 파도의 놀라운 광경을 보게된다. 홍련암은 그렇게 바다 위에 떠있다. 정확히 말한다면, 가파른 절벽 사이의 바위 틈에, 마치 다리를 놓듯이 마루를 걸치고 집을 지었다. 왜 이처럼 험난한 곳에 어렵게 법당을 지었을까?
홍련암은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경내에 있는 작은 암자다. 낙산사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정선과 김홍도가 그림을 남겼을 정도의 명소였지만, 6·25전쟁 통에 크게 망가져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1960년대에 재건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닷가에 위치한 뛰어난 풍치와 홍련암 의상대를 포함한 넓은 경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건주 의상대사의 생사를 초탈한 구도의 전설들로 가득찬 곳이다.
의상대사가 활동하던 통일기 신라에는 전 국토를 보살들의 거주처로 인식하려는 국토재구성 운동이 한창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오대산으로 문수보살이 계시는 곳으로 받들여졌다. 문수보살과 함께 가장 중요한 보살인 관세음보살은 동해 남해 서해 각 세곳에서 친견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원래 관세음보살은 동쪽의 보타락가산을 주처로 가지고 있다고 화엄경에 나온다. 낙산사의 절이름도 결국 보타락가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관세음보살 제1의 성지가 동해의 낙산사라면, 제2는 남해의 금산 보리암이고, 제3은 서해 강화 보문사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동해의 관음굴을 찾아가 간절한 신앙고백과 원을 담은 <백화도량발원문>을 염하면서 참배하고 있었다. 재계 7일만에 8부신중이 나타나 관음굴 속으로 스님을 인도했고 수정염주 하나를 응답의 징표로 쥐어주었다. 그러나 대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굴 앞 바다 위에 솟아있는 구농석 바위에 앉아 밤낮으로 기도하기를 다시 7일간,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응답이 없음에 대사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함을 탓하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바다 위에 붉은 연꽃이 솟아나 대사를 구해준 것은 물론, 그 속에 드디어 관세음보살이 현신해 친견의 원을 이루게된다. 그 친견의 장소에 지은 법당이 홍련암이고, 홍련암 아래의 암석굴이 바로 관음굴이다. 이처럼 바다 위 절벽에 자리를 잡은 까닭은 수정염주를 바친 바다 속의 8부신중들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목숨까지 바치려했던 의상의 높은 신심을 기념하기 위해 그 자리에 지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가파른 벼랑을 골라 그 위에 건물을 짓는 것은 대단한 난공사였다. 일부러 악조건을 감수하며 법당을 짓는 까닭은 그것이 최대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비단 홍련암 뿐 아니다. 금산의 보리암도 깍아지른 듯 높은 절벽 위 좁은 터에 지어졌고, 관악산 연주암도 마찬가지다. 건축재료들을 나르기도 힘들고 공사도 어려운 곳이다. 강화 보문사는 아예 바위를 파고 들어가 관음보살을 모셨다. 3대 관음 성지가 모두 험난지형과 난공사를 택했던 것이다. 의성의 고운사 가학루는 넓은 계곡을 가로 질러 건물을 올려 놓았다. 금강산 보덕굴은 아예 천길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구조로 이루어졌다. 모두가 극진한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에 난공사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홍련암 바닥의 작은 구멍을 통해 동해의 파도를 보자.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대자연의 힘 앞에 너무나 미약한 인간. 그러나 의상을 비롯한 이 법당을 만든 스님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그들의 치열한 구도자세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선재동자가 53 선지식들을 찾아 다니며 진리를 구했듯이 진리에 이르는 험난한 길을 헤쳐간 선인들의 역정이여.
불교건축은 인력과 기술, 자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은 그 자체가 신심의 상징이어야 한다. 홍련암은 작은 규모에 불과하지만, 이 건물이 담고있는 신심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단지 시주가 많이 들어온다는 이유만으로, 생활하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크고 넓게만 확장하고 있는 현대의 불사는 부끄럽기만 하다. 부처님은 법당의 크기를 어여삐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거기에 담긴 신심과 치열한 구도의 정신을 볼 뿐이다. 바다 위 험지에 선 작은 홍련암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교훈이다.
해마다 낙산사 홍련암을 찿는데 여기는 수정이 엄마도 수정이도 모두 좋아하는 곳이다. 수정이는 홍련암 입구 찻집 바깥 테이블에서 수제비와 차를 마시는 즐거움 때문에 이곳을 좋아하고, 수정이 엄마는 홍련암 자체를 좋아해서 온다. 그리고 나는 가족들이 좋아하니... 그것이 더욱 좋아서 온다.
(3) 한화 워터피아
설악워터피아는 한화설악콘도의 부대시설로서 49도의 100% 온천수만을 사용하였으며, 파도풀(샤크블루), 유수풀, 액션풀(스파빌), 슬라이더풀의 물놀이시설과 연인탕, 바위탕, 폭포탕 등의 옥외레져스파시설과 더불어 원목탕, 침탕 등의 사우나 온천시설이 있는 콘도치고는 새로운 개념의 워터테마파크이다. 아이들이 엄청 좋아한다. 수정이도 슬라이더풀에서 2시간을 내리 노는 바람에 집사람과 벌벌 떨면서 기다렸다. 설악한화콘도는 놀이동산도 있고 타는 호수도 있고, 골프장도 있는 진짜 제대로 리조트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시설은 대부분 오래되어 낡았으나 예전 명성 김철호회장이 제대로 리조트의 개념을 가지고 설립한 곳이라 나도 갈 때마다 제대로 지었다고 느끼는 곳입니다.
9) 아홉째날(마지막날)
설악산의 먹거리를 들라면 물맑고 공기좋은 양양에서 오랜 전통의 메밀국수만을 정성을 다해 만들어 그맛에 누구나 놀라는 장산리 실로암 메밀막국수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박은수이사님이 늘 극찬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날 속초공항 옆에 있는 장산리 실로암 메밀막국수의 참 맛을 느껴고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9일간의 전국일주 답사기행의 장이 내려진 것이다.
내년에도 또 내후년에도 이렇게 여행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며, 고장없이 잘 달려준 애마를 두드려 주며 그리운 집이 있는... 서울로 서울로 향하였습니다. 집 떠나면 다 고생이라고 어른들이 늘 말씀하셨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