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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浮石寺)
요약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
종파 : 해동 화엄종
창건시기 : 676년 (신라 문무왕 16)
창건자 : 의상조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나라 안에 가장 빼어난 절… 경북 영주 부석사
the-report 기사 입력일 : 2022.11.06.
기자명 : 신정일 기자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유서 깊고 아름다운 신라의 고찰 부석사(浮石寺)가 있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가로 질러 서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큰 돌이 지붕을 덮어놓은 듯하다.
언뜻 보면 위아래가 서로 붙은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서로 이어져 있지도 않고 눌리지도 않았다. 약간의 틈이 있으므로 노끈을 집어넣으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그것으로 비로소 돌이 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이 이 돌 때문에 이름을 얻었는데, 그렇게 떠 있는 이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절 문 밖에 덩어리가 된 생 모래가 있는데, 예로부터 부서지지도 않고, 깎아버리면 다시 솟아나서 새롭게 돋아나는 흙덩이와 같다. 신라 때 승려 의상(義湘)대사가 도를 깨닫고 장차 서역의 천축국으로 떠나기 전에, 거처하던 방문 앞 처마 밑에다 지팡이를 꽂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살아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은 줄 알아라.”
의상이 떠난 뒤에 절 스님은 그가 살던 곳으로 가서 의상을 초상(肖像)을 만들어 안치했다.
창 밖에 있던 지팡이에서 곧 가지와 잎이 나왔는데, 햇빛과 달빛은 이것을 비치지만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았으며. 항상 지붕 밑에 있으면서도 지붕을 뚫지 않았다. 겨우 한 길 남짓한 채로 천년을 하루같이 살아 있다.
광해군 때 경상감사였던 정조(鄭造)가 이 절에 이르러 이 나무를 보고서 “선인이 지팡이 삼던 나무로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라고 명령을 내려 톱으로 잘라서 갔다. 그러자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전과 같이 자랐다. 그 때 나무를 베어갔던 정조는 인조 계해년(1623)에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지만 나무는 지금까지 사시사철에 푸르며, 또 잎이 피거나 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스님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부른다. 옛날에 퇴계선생이 이 나무를 두고 읊은 시가 있다.
옥과 같이 아름다운 이 가람의 문에 기대어,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지팡이가 변하여 신령스러운 나무가 되었다 한다.
지팡이 꼭지에 스스로 조계수가 있는가,
하늘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빌지 않는구나.
절 뒷편에 있는 취원루(聚遠樓)는 크고 넓어 높은 것이 하늘과 땅 가운데 우뚝 솟은 듯 하고, 기세와 정신이 경상도 전체를 위압하는 것 같다. 벽 위에는 퇴계의 시를 새긴 현판이 있다.
내가 계묘년(1723) 가을에 승지(承旨)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태백산을 놀러갔다가 이 절에 들어가, 드디어 퇴계의 시에 차운(次韻)했다.
까마득하게 높은 누각 열두 난간 위에,
동남쪽 천 리 지역이 눈앞에 보이도다.
인간 세상은 까마득한 신라국인데,
하늘 아래는 깊고 깊은 태백산이로다.
가을 골짜기에 어두운 연기는 나는 새 너머에 일고,
바다에 남은 노을은 흩어진 구름 끝에 비친다.
가도 가도 위쪽의 절에는 닿지 못하니,
예부터 행로(行路)의 어려움을 어찌 알소냐.
다시 또한 수를 더 지었다.
태백산은 아득히 하늘과 통하고,
옛 절은 웅대하게 왼쪽의 바다 동쪽에 열렸구나..
강과 산들이 멀리 천 리 밖에서 만나고,
불전과 누각은 날아갈 듯이 천지 사이에 솟았네.
고승이 거처를 떠났는데 꽃이 나무에 피고,
옛 나라야 흥했거나 망했거나 새는 빈 하늘을 지나가네.
누가 알랴. 머뭇거리는 주남(周南) 나그네의,
뜬구름, 지는 해에 하염없는 뜻을.
취원루 위 깊숙한 한쪽 구석에 방을 만들고서, 그 안에는 신라 때부터 이 절에서 사리가 나온 이름난 스님의 화상(畵像) 10여 폭이 걸려 있다. 모두 얼굴 모습이 고아하고 괴이하게 생겼으며 풍채가 맑고 깨끗해 엄연히 당시의 다락집 위에서 서로 대좌하여 선정에 들어간 것 같다. 지세가 꾸불꾸불하게 뻗어 내려간, 그 곳에 있는 작은 암자들은 불경을 강론하고 선정에 들어가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한다.
부석사가 자리잡은 봉황산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경계로 한 백두대간 길목에 자리잡은 산으로 서남쪽으로 선달산, 형제봉, 국망봉, 연화봉, 도솔봉으로 이어진다. 부석사 무량수전 위쪽에 서 있는 3층석탑에서 바라보면 소백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치 호위병처럼 양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와 사과나무가 서 있고, 당간지주를 지나고 천왕문을 나서면 9세기쯤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석단과 마주치고 계단을 올라가면 범종루에 이른다.
범종루 아래를 통과하면 안양루가 나타나는데, 안양루의 안양(安養)은 극락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인 셈이다.
안양루 밑으로 계단을 오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중 가장 우수한 석등인 부석사 석등(국보 제 17호)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 뒤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축인 무량수전(국보 제 18호)이 있다. 1916년 해체·수리할 때에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 지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원래 있던 건물이 중수연대보다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 15호)과 나이를 다투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같은 건축사적 의미나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무량수전은 국보 제 18호로 지정돼 있다.
무량수전 안에 극락을 주재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이며, 고려시대의 소조불로는 가장 규모가 큰 2.78m의 아미타여래조상은 국보 제45호로 지정돼 있다.
무량수전의 동쪽 높다란 곳에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한참 오르면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은 국보(제19호)로 의상스님을 모신 곳으로 1366년 원응국사가 중창 불사할 때 다시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인 이 건물은 단순하여서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데, 조사당 앞에 의상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본래 이름이 골담초인 선비화가 있다.
의상스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는 선비화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라고 한다’고 했는데, 그 나무가 지금의 나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람들의 손길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철망 속에 갇힌 채 꽃을 피우고 그 철망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들이 나 뒹굴고 있을 뿐이다.
한편 <택리지>에 나오는 취원루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순흥읍지>에 의하면 무량수전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 북쪽에 장향대, 동쪽에는 상승당이 있었다고 하고, 취원루에 올라서 바라보면 남쪽으로 300리를 볼 수가 있다고 하며 안양 문 앞에 법당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주문에서 1리쯤 아래쪽으로 내려간 곳에 영지가 있어서 ‘절의 누각이 모두 그 연못 위에 거꾸로 비친다.’고 하였다. 물에 비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보는 것만도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150여 년의 세월 저쪽에 있었다는 영지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그 또한 애석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언제나 가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이 부석사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①--비 한 방울 없이 1300년 살아온 선비화
헤럴드경제 기사 등록일 : 2014.04.14.
[헤럴드경제=남민 기자] 키 작은 나무 하나가 ‘철창’에 갇혔다. 사찰이 가두었다. 잔혹하게도 철창 속에서 물 한 방울 얻어 마시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 그 곳에는 비 한 방울, 이슬 한 방울도 닿지 않으며 물을 주는 사람도 없어 인간의 손길과 자연의 은혜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오로지 그냥, 스스로 척박함을 이기고 살아남아야 했고 또 살아남았다. 딱딱한 처마에서 1300여 년을.
영주 봉황산 부석사 선비화(禪扉花) 이야기다. 의상대사(義湘大師ㆍ625~702)가 지팡이를 꽂아 자랐다는 나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ㆍ1575~1641) 시절 영남 관찰사 정조(鄭造)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에 탐을 냈다. 덕을 쌓은 수행자가 가졌던 ‘대사의 지팡이’를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이 나무 줄기를 잘라갔다. 순간의 욕망을 채운 그는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이 잎을 닳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득남을 간절히 원했던 아낙들이 줄지어 잎을 훑어가면서 이 작은 나무의 수난은 끝이 없었다. 관절염에도 좋다 하여 ‘노린’ 사람들 또한 많았다.
선비화가 ‘옥’에 갇힌 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보호받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딱딱하게 굳은 처마의 지붕아래서 자라니 비와 이슬 한 모금도 구경 못했는데 이 나무는 잘 살고 있다. 누가 물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낮엔 해가 벗이 되어 줬고 밤엔 달빛이 동무되어줬을 뿐이다.
1300여년을 사람들에게 시달려 왔지만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오시는 날엔 개나리 처럼 노란 꽃을 활짝 피운다. 놀랍다.
전해오는 말이 1300여년 지났다는건데 그럼에도 나무는 고목이 아니다. 그저 손가락 굵기다. 키도 170cm 정도다. 누가 이 나무를 1300년 살아온 나무라고 믿을까.
7세기, 의상대사는 열반 직전 자신이 거처하던 부석사 조사당 처마에 중국서 가져온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나면 국운이 흥할 것이다. 나무가 살면 내가 죽지않고 살아있느니라” 라고 했다. 그 나무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정말 그 긴 세월을 여기서 살아왔을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증언한 사람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 문에 기대니 /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린 것이라 하네 / 지팡이 끝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 비와 이슬의 은혜를 조금도 입지 않았네”
“擢玉森森依寺門 (탁옥삼삼의사문) /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 (장두자유조계수) / 不借乾坤雨露恩 (불차건곤우로은)”
부석사를 찾은 퇴계 선생도 이 작은 꽃나무를 두고 감탄한 나머지 찬양한 시 ‘선비화(禪扉花)’다. 그의 시가 이 나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때가 1548~1549년이니 이때 부석사에 들러 시를 지었다면 460여년 전에 이미 지금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기록을 시로 남겼다.
그 때도 지금 처럼 비와 이슬 한 방울 없이 스스로 물이 생겨 살고 있다고 밝혀 놓았다.
그런데 정말 물 한 방울 없이 나무가 살 수 있을까. 또 천년 넘은 나무가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한 대학교수의 분석에 귀 기울여보면 의문점이 좀 풀리려나.
이 선비화는 줄기가 계속 굵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면 죽고 새 줄기가 다시 나와 세대교체를 하며 생명을 이어간다고 한다. 여러 해 살이 풀과 같은 나무다. 그래서일까, 학명도 골담초(骨擔草)다. 나무인데 ‘풀 초(草)’자가 들어간다.
그럼 물 한 방울 없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이 나무는 비와 이슬을 맞지 않는 곳에 있다. 원래 건조한 땅에 강한 나무라고 하지만 물 한 방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뿌리를 길게 뻗게 했고 마침내 먼 곳에 있는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게 했다. 악조건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긴 뿌리를 뻗은 것은 마치 기린의 목이 긴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법이 있는 모양이다.
이 의문점을 풀어주긴 했지만 신비로움까지 다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선비화는 부석사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무량수전에서 삼층석탑이 있는 오솔길로 5분쯤 걸어 올라가면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 처마에 있다.
태백산 끝자락과 소백산 시작점 사이의 남쪽 기슭 800m 고지에 자리잡은 영주 봉황산 부석사, 태백산 부석사라고도 한다. 사찰이름에는 흔히 그 산 이름을 붙여서 부르는데 봉황산은 태백산 끝자락 작은 봉우리다.
신라가 삼국통일한 지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은 시점, 삼국의 접경지였던 영주 주변 고구려ㆍ백제 주민들은 통일신라 국민으로 쉽게 단합하지 못했다. 이에 문무왕은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을 위로하고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의상대사에게 호국사찰 창건을 요청했다.
때마침 의상대사는 당나라 수도 장안 남쪽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던 중 당나라가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한다는 첩보를 얻었고 671년 급히 귀국해 국왕에게 보고한 터였다. 국내외 상황이 긴박했던 시절, 호국사찰로 국민을 통합해야 했다.
그러나 절 건립은 순조롭지 못했다. 500명의 이교도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절을 짓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 의상대사를 사랑했던 한 여인이 나타나 도움을 준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②--의상대사를 흠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낭자
헤럴드경제 기사 등록일 : 2014.04.21.
(영주 봉황산 부석사①에서 계속)
[헤럴드경제=남민 기자] 661년,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갔을 때 양주(陽州)에 이르러 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劉至仁)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때 그의 딸 선묘(善妙)낭자가 의상에게 연정을 갖게 되었다. 의상의 나이 37, 선묘의 나이 17살쯤이다. 하지만 의상은 법도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다.
선묘낭자의 정성으로 몸이 완쾌된 의상은 다시 길을 떠나 종남산 지상사에서 10년을 공부하고 671년 급거 귀국하는 길에 선묘의 집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하고 뱃길로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선묘는 비단 선물을 챙겨 산동성(山東省)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까마득히 멀어져 간 뒤였다. 선묘는 들고 있던 선물을 의상의 배를 향해 던지며 “원컨대 이 비단이 의상대사님께 이르도록 해 주옵소서” 하니 해풍이 크게 일어나면서 던진 선물이 의상이 탄 배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자신도 용이 되게 축원을 하고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으로 변해 의상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배가 신라에 닿았다. 그 덕에 당나라의 침략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게 됐다.
신라로 온 선묘낭자는 다시 의상의 꿈에 나타나 500명의 이교도들을 제압할 방법을 일러주었다. 다음날 아침 의상은 선묘낭자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를 한 번 두들기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올랐다 내려앉았다. 용으로 화신한 선묘낭자가 들어올린 것이다. 이를 두 번, 세 번 이어서 반복하자 겁먹은 이교도들이 일제히 의상대사에게 무릎을 꿇고 함께 절을 짓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공중에 세 번 뜬 바위가 무량수전 서쪽 산비탈에 있는 ‘부석(浮石)’ 바위다.
조선 후기 문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浮石)임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해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는데 지난 1967년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5m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비늘 모습까지 아련히 나타나 있었다고 하니 이 절에선 용을 많이 숭배한 것 같다. 무량수전 뒤에 선묘낭자를 기린 작은 각(閣)이 있다.
황당해 보이는 이 선묘낭자 이야기는 막연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서기 988년 송나라 찬영(贊寧) 등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당~송 350년 간의 고승 533인의 이야기 속에 의상대사와 선묘낭자 이야기가 기록돼 있으니 러브스토리와 그 힘으로 절을 지을 수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절은 서기 676년(문무왕 16)에 창건됐다. 의상대사가 이 삼국의 접경지에 어렵게 건립한 사찰이 우리나라 화엄종찰이 된 부석사다. 이곳에 화엄종찰을 지어 삼국의 백성을 하나로 묶어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화엄(華嚴)은 ‘모든 사물이 어느 하나라도 홀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게 아니라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의존해 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다(일즉일체, 일체즉일ㆍ一卽一切, 一切卽一)’는 사상으로 무진연기(無盡緣起)ㆍ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생사와 열반(涅槃)이 서로 대립되는 현상이 아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그러한 뜻에서 연화장세계(蓮花藏世界ㆍ청정 광명한 이상적인 불국토)라고 한다.
이 화엄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을 대립이 아닌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것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왕권국가의 율령정치체제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니 문무왕은 삼국통일 후 고구려ㆍ백제 백성들을 통합하기 위해 삼국의 접경지에 통일국가의 상징물로 화엄종찰을 원했던 것이다. 또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심신을 어루만져주기 위해 전국 10여 곳에 절을 지으니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일주문 주변의 사과밭과 무량수전, 안양루의 15년전 아련한 기억만 갖고 다시 부석사를 여행했다. 이번엔 좀 제대로 느껴보고 싶었다.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초, 홀로 경내 회전문을 들어서자 마자 때마침 지인을 만났다. 작년 영주 소수서원 여행 때 만났던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손 이용극 선생이다. 이 선생은 영주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시는데 일흔의 연세에도 필자에게 부석사 곳곳을 대동하며 의욕적으로 설명해주신다. 덕분에 절에서 점심공양까지 해결했다.
부석사에는 국보 5점, 보물 6점 등 귀중한 문화재가 많지만 일반 여행객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도 몇 가지 있어 이를 중심으로 여행해 보기로 한다.
사과밭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보였다. 천왕문 입구에 이르니 가파른 계단 오른쪽에 아직 잎이 나지않은 앙상한 보리수 고목이 보인다. 그 계단 위쪽 길게 늘어선 건물이 천왕문 격인 회전문인데 조선시대 때 있다 없어진 것을 근래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복원은 좋았지만 그 바람에 아름다운 경치 절반은 가려져 버렸다. 이 회전문은 윤회를 뜻한다.
회전문을 들어선 다음 두 세 계단 올라선 마당의 오른쪽 끝으로 가서 안양루를 바라보면 희귀한 광경을 접할 수 있다.
누각 속에 부처님 여섯 분이 보인다. 실제 부처가 아닌 건물의 빈 틈이 그 뒷건물인 무량수전의 벽과 어우러져 햇볕이 만들어낸 부처 즉, ‘공포불’이다.
그 틈이 6개가 되다 보니 6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있는 착시현상이다. 근래 부석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햇빛이 강한 여름일수록 더 선명하게 보인다.
다음으로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지장전 마당으로 가서 안양루와 무량수전을 일직선 상으로 바라보면 똑 같은 두 개의 크고 작은 건물이 중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의 큰 바탕 위에 안양루의 작은 그림이 닮은꼴로 중첩돼 있어 우리의 아름다운 건축의 미학적인 부분도 감상해볼 수 있다. 이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진기한 모습이다.
다시 회전문 중앙의 진입로로 돌아와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범종루가 길을 막고 있다. 250년 된 건물이다. 그 누각의 기둥 사이로 통행하게 설계됐는데 바깥쪽은 원래 지을 때 쓰인 굵은 느티나무 기둥인데 반해 안쪽에는 기둥이 가늘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일본서 갖고 온 나무로 교체했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계단을 올라 윗 마당에 올라서서 이 범종루를 바라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사물(四物)’, 즉 종과 법고, 목어, 운판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엔 종이 없다.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만들 때 종을 떼어가 버렸다. 할 수 없이 나중에 새로 만든 거대한 종은 옆쪽에 별도로 종각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는데 그 종을 이 낡은 누각에 걸기에는 너무 무겁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아쉬움은 용이 달래줬다. 이 누각에 숨은 용 두마리가 있다. ‘겸손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용이다. 누각엔 들어갈 수 없는데 입구에서 자세를 낮춰 천정을 바라보면 용 두 마리가 고개를 내밀어 맞이한다. 오른쪽은 수컷으로 황룡이고 왼쪽은 암컷으로 여의주를 문 청룡이다. 귀한 발걸음, 용을 만나고 간다면 기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 마당에는 약수가 있고 그 왼쪽으로 많은 사찰에서 볼 수 있듯이 괘불을 걸던 괘불석주가 있다. 수많은 사람이 몰릴 때 이 야외(野)의 석주단상(壇)에 부처님의 탱화를 걸어 법회(法)를 열던 자리(席)로 이를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고 한다. 즉, ‘야외 단상에서 법회를 열던 자리’인데 이 엄숙히 법회를 여는 자리에 벌 한 마리만 날아와도 큰 소동이 벌어질 것이다. 즉 법회 자리에서 어떤 단서(端緖)가 야기(惹起)되면 시끌벅적한 소동이 벌어지는데 이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야단법석(惹端法席)을 떤다’고 하며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이 야단법석이 심해지면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겠다. ‘아수라(阿修羅)’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혼란의 세계에 있는 귀신들의 왕’이다. 그러니 얼마나 끔찍하고 흐트러진 모습일까. 이런 광경을 ‘아수라장(場)’이라고 부른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③--100년 동안 이런 경치 몇 번 볼까
헤럴드경제 기사 등록일 : 2014.04.28.
(영주 봉황산 부석사②에서 계속)
[헤럴드경제=남민 기자] 안양루 앞에 이르면 가파른 25계단이 있고 이 누각 아래로 자세를 굽혀 마지막 8계단을 오르면 석등과 무량수전이 있는 마당이다. 이곳은 극락세계의 영역이다. 그러니 25계단부터 극락세계로 오르는 33개의 계단은 ‘33천’을 의미하는데 좁고 험난하다. 극락세계로 가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조선 중기에 건립한 이 유명한 안양루(安養樓), ‘안양(安養)’은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의미하는 말인데 경기도 안양시(安養市)의 지명도 이 말에서 왔다. 이 안양시 지명은 서기 900년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을 때 5색 빛깔 구름이 뜬 안양 삼성산에서 고려 개국을 도운 노스님에게 절을 지어주며 안양사라 칭하면서 탄생했다. 필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안양시에서 살고 있다.
안양루에서 확 트인 전망을 바라보면 마치 천하를 호령하는 듯 하다. 저 앞으로 펼쳐진 백두대간 능선이 12겹의 물결을 이루어 부석사를 향해 파도치듯 밀려오는 장관이다. 그래서 이 사찰을 품은 봉황새 닮은 봉황산이 배산(背山), 앞 능선물결이 임수(臨水)이며 좌우 태소백산이 좌청룡 우백호로 풍수지리 명당을 완성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 경치가 그리워 부석사를 찾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천하의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ㆍ1807~1863)인들 이곳을 놓쳤을 리가 없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 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 마냥 헤엄치네
백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있네”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風塵萬事忽忽馬(풍진만사홀홀마) /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이 자연에 대한 감탄과 좀 더 일찍 와보지 못한 한탄을 섞어 지은 시 ‘부석사(浮石寺)’다.
안양루는 누각임과 동시에 극락세계 출입문 역할을 겸하고 있다. ‘안양루’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졌다.
이제 고개를 돌리면 바로 마주치는 것이 국보 제17호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 석등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우며 우아하다는 평이다.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 측면에는 안상을 2개씩 배치했으며 아래쪽에는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또 사면에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상과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학창시절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국보 제18호, 우선 웅장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일반 사찰에서 만나는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여기선 ‘무량수전’이다. 이 ‘무량수전’ 현판글씨는 공민왕의 친필이다.
‘무량수(無量壽)’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수명’을 뜻한다. 이곳에는 화엄도량의 서방극락세계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이 소조여래좌상 아미타불(국보 제45호)은 중앙에 있지 않고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다. 소조여래상은 흙으로 빚은 불상이다.
무량수전은 특히 ‘배흘림 기둥’의 전형이라 할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배흘림 기둥’은 기둥의 아래쪽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굵어지다가 3분의 1 지점에 이르러 가장 굵고 그 위로 서서히 가늘어 지는 형태를 취한다.
건물은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한국건축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358년(공민왕 7) 왜구에 의해 불탄 후 우왕 2년(1376)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구조수법이나 양식 등으로 볼 때 적어도 13세기 초의 건물로 추정한다고 하니 자랑거리임에 분명하다.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갈고 단청을 했고, 1969년에도 보수했다.
무량수전 왼쪽 뒤편에는 절 이름의 근원이 된 ‘부석(浮石)’ 바위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돌 석(石)’ 자에 ‘점’이 찍혀있는데 이는 누가 왜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 바위가 공중부양하지 못하게 고정시켜놓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지나친 것일까.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 산비탈에 삼층석탑이 있다. 보물 제249호다. 이중기단 위에 3층 몸돌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으로 높이는 526m,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하층 기단과 초층 몸돌의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 수리 당시 3층 몸돌 중앙에 얕은 방형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사리구는 없어졌다고 한다.
눈길 끄는 것은 일반적으로 탑은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이 석탑은 법당 동쪽에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산비탈에 있으니 여느 사찰에서 보듯 넓은 마당 가운데 탑을 두고 탑돌이 하는 풍경은 볼 수 없다. 하지만 법당 안의 아미타불이 바라보는 위치에 세웠으니 그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 옆길로 오르면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祖師堂)이 있고 그 처마에 선비화가 자라고 있다. 이 조사당도 국보 제19호로 지정돼 있다. 오르막 오솔길이지만 올라가면 꼭 봐야 할 선비화가 기다리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는 이 부석사도 잃은 것이 있다. 조선후기 불교예술의 대작이라 불리는 목각탱화가 사찰 운영이 어수선할 때 이웃 문경 대승사 극락전으로 옮겨져 현재 그곳에 봉안되어 있다. 무량수전 내의 후불탱화(後佛幀畵)로 조성되었던 것인데 11매의 판목을 잇대어 붙이고 그 위에 본존을 중심으로 각각 지물(持物)도 다르고 자세도 다른 8대보살(八大菩薩), 불제자(佛弟子), 사천왕(四天王)등 총 25구를 조각해 장엄한 부처의 정토세계(淨土世界)를 잘 구현해 내고 있다는 평가다.
나는 비우러 이곳에 왔는데 산은 나에게 그 무언가를 가득 채워준 느낌이다.
부석사(浮石寺) 안내도
부석사(浮石寺) 지도
부석사(浮石寺)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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