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 대한 관심이 절실한 시기
신앙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성경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우리 인간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해야 그 나라가 도래할 것인지
예수님은 말씀뿐 아니라 온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와 질서, 뭇 생명의 아름다움을 다양하게 보여 줍니다.
그럼에도 프로그램 제목이 말해 주듯 초점은 또 있습니다. 동물들 사이에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일련의 쫓고 쫓기는 생생한 긴장감이 그것입니다.
당연히 포악하고 잔인하다 싶은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다만
인간 사회가 아닌 동물 세계의 일들이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도 그런 동물적 본능이 더 심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재물과 지위, 정보나 법 등의 권한을 가진 이들이
민주주의 제도와 장치라는 보편적 테두리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자들 때문입니다.
공권력이란 것을 사회 전체 공동선을 위해 쓰여야 할 공공의 자산이라고는 전혀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민주주의 시대에 있을 수 없는, 독재 시대나
가능할 법한 ‘공권력의 사유화’입니다. 이제 자신들의 명백한 거짓과 범죄에 대해서
수사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을 만큼 勇敢-용감(?)해졌습니다.
한편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시민단체, 언론사, 노동자들에게는 응징하듯 힘으로
내리누릅니다. 부자들의 세금은 줄여 주고, 그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농민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예산은 대폭 삭감합니다.
급기야 바다 생태계 전체를 오염시키고, 어민들의 삶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일본의
핵 廢水(폐수) 해양투기까지 앞장서서 지지해 주는 어처구니없는 행태의 연속입니다.
국민들 대다수가 아무리 반대해도 눈치 볼 것 없이 으레 당당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단호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과 고관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거나
세도를 부려서는 안 된다.(마르 10,42-43 참조)는 것입니다.
진정 높은 사람이 되려거든 섬기는 사람이 돼라(마르 10,43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세상 질서에 심취해 있는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불행한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마태 23장 참조).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힘의 논리들, 가난한 이들에게
드리워진 소외와 억압을 걷어내는데 다시 함께 노력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 중에 하나인 농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스물여덟 번째
농민주일입니다. 지난 1996년 제1회 농민주일에 힘입어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서울대교구 우리 農을 시작으로 敎區마다 우리농이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전주교구 우리 農은 1998년 설립). 다시 말해 가톨릭농민회가 중심이 된
소농들의 생명농업을 교회가 관심을 갖고 함께 발맞춰 온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탄소중립과 생태환경이 시대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약자를
향한 교회의 관심과 공동의 집을 위한 생명농업이 더 커져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글 : 조민철 스테파노 신부 – 전주교구
안정-安定과 자유-自由
신약성경 ‘돌아온 탕자(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자유’를 찾아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결국 아버지 집의 ‘안정’을 찾아 돌아옵니다.
반면 영화 ‘빠삐용’의 마지막은 절해고도(絕海孤島)에 갇힌 채 ‘안정’된 삶을 선택한
드가(Dustin Lee Hoffman)가 지켜보는 가운데 빠삐용(Steve McQueen)이 절벽에서
망망대해로 뛰어내려 ‘자유’를 찾아 떠나가는 장면입니다.
‘안정 對(vs) 자유’ 이 두 가지는 양립(兩立)할 수 없는 것일까요?
70년대는 안정을 위해 자유를 유보해야 한다는 세상이었습니다.
‘국가(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희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논리는 여러 독재 체제를 포함하여 수없이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반면 생텍쥐페리와 같은 ‘자유 영혼’ 중 상당수는 히말라야, 사하라 등 험지에서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안정과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한쪽을 포기하도록 강요합니다.
정형외과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깨 관절은 우리 몸에서 자유도(운동 범위)가 가장 큰 관절인 대신,
안정성이 낮아서 탈구(빠짐)가 잘 발생합니다. 반면에 골반-대퇴골 사이의
엉덩이 관절(고관절)은 훨씬 안정적이어서 탈구가 드문 대신,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 때 어깨를 돌려 크게 원을 그리는 것 같은 회전운동은 할 수 없습니다.
지구상 유일한 ‘움직이는 수직 기둥’인 척추 역시 ‘안정과 자유’라는 양 측면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척추가 수직 기둥으로서의 안정성과 동시에
운동기관으로서의 자유도를 가질 수 있도록 25개 마디(분절)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각 마디에서 조금씩 일어나는 운동이 합쳐지면 엄청난 운동 범위가 가능해지는데,
그럼에도 안정성은 유지됩니다.
척추 골절의 수술 치료 시, 그동안은 ‘안정’이 가장 중요시되었습니다.
금속 고정에 골(뼈) 이식까지 추가하여 철근-콘크리트와 같은 튼튼한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고전적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없을까요?
고정된 분절은 운동 범위(자유)를 잃게 됩니다. 특히 젊을수록 척추의 움직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저는 척추 골절에 대해 일정 기간 금속 고정으로
안정을 얻은 뒤 골절 유합 후 금속을 제거, 운동을 회복하는 치료법을
국제학회지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골절이 붙는 데(유합) 필요한 기간은 안정,
유합된 후에는 자유를 추구한 것이지요.
사회적 관점에서의 ‘안정’은 현 상태를 가능한 오래 유지하려는 것으로,
기득권자에게 더 중요한 요소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마태 19,21)라고 하자,
풀이 죽어 떠나갑니다. 안정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마태 4,21)
‘배와 아버지’로 상징되는 안정을 버리고 곧장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안정’보다는 ‘자유’(의지와 선택, 실천)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글; 김용민 베드로 – 국립경찰병원 정형외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