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길 6-2코스는 백양산 임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구포역과 성지곡수원지를 기종점으로 한다. 길의 시작은 성지곡 입구에서부터다. 지세는 수원지를 중심으로 서쪽은 백양산 자락이 동쪽은 새미산(금정봉), 북쪽은 함박고개로 큰 골을 이루고 있다. 성지곡 초입은 가시나무와 전나무를 비롯 삼나무, 편백이 숲을 이루고 있어 시민이 즐겨 찾는다. 이 숲의 나이는 100년쯤 됐다. 수원지가 완공될 당시 비탈 토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심었던 나무들이다. 부산에는 구덕수원지를 비롯해 100년 된 숲이 몇 곳 있다. 아무튼 100년만 잘 가꾸면 그 숲 하나가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는 병원이 된다.
2010년 부산시설관리공단에서 데크로드 녹담길 510m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깔았다. 녹담대는 하부댐 수변을 가로지르는 곳에 있다. 부산직할시 시절 문양이 울타리 쳐진 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오른다. 길바닥 재질은 황토 공굴이다. 배드민턴장을 지나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지댐이 있다.
천년고찰 선암사 전경, 대웅전 뒤편 산 쪽으로 이동하면 용왕단이 있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극락전 , 칠성각, 산신각이 연해 있다.
성지곡수원지의 경우 1907년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착공되어 1909년(대한제국 융희隆熙3) 완공된 철골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부산상수도의 효시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상수도원의 수원지로 27m의 제방 높이를 기록하고 있다. 댐마루 이동통로에 영문 초석이 있다. 공사기간을 포함해 일본인 자문, 감독, 주재, 실행 엔지니어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지교를 건너면 순환도로와 연결된다.
수변길을 돌아 숲체험센터에서 삼림욕장 방향으로 비스듬히 오른다. 지난 비에 불어난 계곡의 물소리가 귀를 세우게 한다. 동천이 발원하는 원류인 셈이다. 지금 그 동천은 물길을 잃어버리고 범내골에서 겨우 이름을 건지고 있다.
삼림욕장 입구 갈림길은 바람고개와 만덕고개 방향으로 나뉜다. 석천약수를 지나 만수정약수터 앞에서 왼쪽으로 90도 꺾어 편백숲 계단을 오른다. 5분 남짓 비탈을 오르자 만남의 숲에서 오는 길과 합류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한낮인데도 어둑하다. 쭉쭉 뻗어 올린 편백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노폭이 넓어졌다. 좌우로 도열한 편백숲은 사철 푸른 기운을 품고 있다. 돌탑을 지나자 수원지를 조망하는 백양대가 열려 있다. 황령산과 금련산이 병풍을 치고 있다.
조선시대 부산장 보러갈 때 넘던 불태령
백양전망대에서 바람고개로 가는 길은 불태령과 백양산 사이 계곡을 끼고 걷는 오솔길이다. 계곡을 앞두고 첫 번째 갈림길이 나오면 윗길로 직진한다. 두 번째 계곡에서 만남의 숲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에서 상수원 보호용 철책을 지나 암반지대를 통과한다. 굴참나무와 상수리 등의 참나무류가 많은 곳이다. 노폭은 등산길 수준이다. 골짜기가 돌출되는 지점, 조망점이 있고 그 위에 무덤1기가 있다.
부산상수도의 효시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상수도원인 성지곡수원지는 1909년 (대한제국 융희 隆熙3) 완공된 철골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불태령(616봉) 자락이 비스듬히 내려서고 새미산 줄기가 포개어지면서 그 너머 만덕고개로 이어지는 백양산의 북쪽 산줄기가 펼쳐졌다. 불태령(佛態領)은 만덕에서 초읍으로 넘어가던 고개이다. 조선시대 서면(西面)에 속했던 만덕리(萬德里)에서 부산장(釜山場: 진시장)에 장 보러 갈 때 넘던 고개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함박고개 혹은 성지고개라고도 부른다.
다시 바람고개로 걸음을 옮긴다. 내리막길이지만 반대편에서 올 때는 꽤나 숨을 헐떡이는 이는 지점을 지나 마른 계곡을 굽이돈다. 진행방향에서 세 번째 갈림길 역시 윗길을 택해야 한다. 키 큰 굴참나무 두 그루가 이정표 역할을 한다. 임도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조붓한 숲길이 사행하는 구간이다. 조만간 신록에 파묻히면 길은 더욱 빛날 것이다. 네 번째 다섯 줄기 서어나무 갈림길에서는 아랫길로 하여 임도로 내려선다. 작은 너덜이 형성되어 있다.
길은 선암사 후문과 연결되어 있지만 사찰 측은 수행의 방해를 들어 아랫길을 이용해 줄 것을 부탁하는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계단을 통해 일주문을 들어선다. 선암사는 산의 비탈진 지형을 이용해서 각 전각들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웅전이고 관음전과 요사체인 방사(坊舍)가 이웃해 있다. 대웅전 주련은 이 절의 창건주 원효대사의 오도송이라고 한다.
사상정 웰빙 산책로 입구.
대웅전 뒤편 산 쪽으로 이동하면 용왕단이 있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극락전, 칠성각, 산신각이 연해 있다. 선암사는 범어사의 말사로 천년 고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견강사(見江寺)라 불렀다. 절 뒤편 절벽 바위에서 화랑들이 무술을 연마하면서 선암사로 개명했다. 1483년(조선 성종 14)에 중창했고 1568년(선조 1) 신연(信衍), 1718년(숙종 44) 선오(禪悟)가 각각 중수했고, 근세들어 1918년 동운(東雲)이, 1955년 혜수(慧修)가 재차 중수한 바 있다. 방문자의 시선을 끄는 그림은 선암바위 사이로 가차 없이 쏟아지는 선암폭포다. 그 시원스러움은 번뇌, 망상을 씻어내는 청정수다. 두 번째 그림은 극락전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백양골 전망이다. 돌아서 나오는 길 대웅전 뒤편 130년 전 심었다는 동백숲이 마지막으로 선암사를 기억하게 한다.
범종루와 명부전을 거쳐 돌아서면 휴휴정(休休亭) 너머 한 무리 솔이 웅성웅성 서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임도를 따라 백선약수터로 향한다. 다섯 번째 갈림길에서 아랫길로 직진한다. 윗길은 지그재그로 백양산으로 향하는 임도다. 얼마쯤 내리막을 향해 가면 백선약수터다. 지나온 길에 만난 약수터들을 떠올려 본다. 석천, 찬물샘, 학수천…헤아려 보니 참 많다. 그러고 보면 백양산은 물을 품은 산이다. 뿜어내는 물길보다 지하로 스며들어 목마른 이 도시민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고 있다. 거의 1km 간격으로 약수터가 있다.
백양대에서 수원지를 조망하는 시민.
구청양묘장을 지나면서 숲머리에 가리어 보이지 않던 백양산 능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등나무약수터 주변도 새롭게 정비했다. 전에 없던 데크전망대도 설치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기점에서 10km 지점이다. 백양산둘레길 걷기는 통상 신라대와 개금 예비군교장 갈림길인 10.6km 지점에서 계속되거나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하산길은 개금 예비군 교장으로 하여 개림초등학교로 빠진다.
성지곡 입구에서 수원지 상부댐마루까지의 데크로드 녹담대길.
이쯤에서 하산하고 싶다는 유혹을 받지만 주례정으로 향한다. 내리막길을 걷다 다시 오르막이다. 진구와 사상구의 경계지점이다. 삼각산 너머로 백양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익어가는 봄이 길을 슬슬 감추고 있다. 주례정에서는 이 도시의 탐욕적 개발 흔적을 고스란히 내려다 볼 수 있다. 건너편 엄광산 자락에 들어선 다양한 형태의 주거형태는 그 적나라한 현장이다. 일반 주거지 한가운데 입지한 대단지 고층아파트의 모습은 폭력 그 자체다. 먼저 들어와서 살던 사람들의 조망과 일조권에 대한 배려를 넘어 일대의 경관까지 훼손됐다. 삶의 터전으로서 도시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지만, 자본의 논리가 우선한다. 해안가에 들어선 고층아파트 역시 마찬가지다. 도시라서 어쩔 수 없다면 할 말이 없다.
자연에 대한 배려 필요해
걸음을 옮기자니 밤나무에 내걸린 야생멧돼지 출몰주의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왜 멧돼지들이 증가했으며, 도심으로 진출하는가. 멧돼지는 활엽수가 우거진 산림을 서식지로 한다. 그들이 서식지를 벗어나 인간세계를 넘나드는 것은 서식지의 감소와 먹이원의 부족, 개체수 증가, 생태축 단절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연계 내에서 개체수 조절이 안 되는 것은 호랑이나 표범 또는 늑대 따위의 상위 포식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고 서식공간의 감소는 멧돼지의 출몰을 필연적으로 야기한 원인이다. 그들에 대한, 아니 자연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늘 빼앗기만 했다.
왕벚나무길을 지나 사상정에서 마지막 굽이를 돈다. 골이 제법 깊다. 삼각산에서 뻗어내린 산자락이 주례2동 쪽으로 흐른다. 그 흐름이 멈추는 곳은 보훈병원쯤 되겠다. 어쨌든 백양산둘레길을 걷다 보면 좀체 산정을 볼 수 없다. 한편 사상정과 주례정 사이 계곡은 약 1.2km쯤 된다. 운수사 쪽이 1.5km, 불웅령 쪽으로 하여 성지곡 수원지로 흐름이 있는 계곡 역시 1.5km 정도 된다. 산세의 크기에 비례한다. 금정산의 경우 대천 계곡이 5km 이상이고 범어사계곡 역시 3km 이상이다. 엄광산과 구봉산 사이 계곡은 1.3km, 엄광산과 구덕산 사이 계곡은 1.5km, 승학산과 시약산 사이 당라동 계곡은 1.5km 정도다. 한편 대천호로 빠지는 장산은 2.5km 정도이며 황령산은 길어 봤자 0.7k에 불과하다.
운수사의 가람배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삼성각, 용왕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 좌우로 길게 종무소, 공양간, 심검당과 세진당이 위치하고 있다.
계곡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생물종 다양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곳이 시가화가 된 점을 감안한다면 예전 부산의 골짜기도 꽤 깊었던 곳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골짜기들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같이 사는 생명이 많다.
웰빙산책로 안내판을 지나 백양산 갈맷길 전망대에 서자 낙동강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승학산으로부터 김해 굴암산까지가 조망된다. 신라대 갈림길을 벗어난다. 그 길에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란 시 한 편이 말을 건다. ‘말없이 티없이 살라고 한다. 성냄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살다가라’고 하는 선사께 대들고 싶었다. “시방 세상이 어떤 세상인줄 아시냐고, 그래 탐욕에 찌들은 저 가증스러운 것들 두고 성냄도 없이 원만하게 살라고 하심은 말이 되느냐고? 저 산 아래가 정녕 사람 사는 세상이 맞냐고? 되레 청산은 날더러 창의(倡義)의 깃발 세워 일어서라 하고 창공은 날더러 성내라 합니다 그려” 혼자서 객쩍은 소리를 했다. 사상구 쪽 둘레길에는 모두 33편의 시가 암벽이며 길섶에 전시되어 있다. 가수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 도 있어 설핏 웃음이 일었다. 하긴 저 노랫말에 묻어 있는 사연도 오죽 많을까. 하여 이 팍팍한 세상에 위로가 될 것이다.
삼각정을 앞두고 골짜기를 휘감아 도는 내리막이다. 임도 개설 시 이루어진 난공사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누런 황토가 드러난 사면은 온갖 식물들이 뿌리내려 녹색으로 뒤덮이는 주변과 대조적이다. 뿌리내릴 적지가 아님을 식물들도 안다는 것일까. 다소 한물간 시이긴 해도 누군가는 위안을 받을 것이다. 시각이 하마 오후 3시를 넘었다.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이 마지막으로 읽힌다.
운수천 입구 계곡을 따라 낙락장송이 한 폭의 그림으로 반긴다.
모라 예비군 교장 입구, 복장단정을 위한 거울이 있어 들여다보니 반백의 한 사내가 보인다. 늘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을 찍는 일에 익숙하다 보니 스스로를 담는 일에는 인색했던 세월이었다. 그 사내는 요즘 고민이 많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 정도(正道)가 뭔지. 길에서 길을 물었지만 섭섭하게도 길은 말이 없다.
예비군 교장을 벗어나면 다시 갈림길이다. 콘크리트길은 오르막으로 백양산 민속당까지 이어진다. 길 옆 골짜기 계단식 경작지가 녹색 그물망 너머 있다. 시각적으로 거부감부터 생긴다. 탱자나무 울타리나 돌담으로 대체한다면 어떨까 싶다. 다시 말해 길을 새롭게 디자인함으로써 음을 양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새로운 볼거리의 조성과 구간 완성도를 높이는 방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속당 앞 히말라야시다에서 여름새인 휘파람새가 울었다. 높고 맑은 울음소리에 귀가 솔깃하다. “어라, 벌써 왔네” 놈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나도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휘파람소리로 답을 하다 호기심에 못 이겨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 앙증맞은 놈은 동족이 아님을 확인하고 “앵, 아이네” 하고는 실망했다는 듯 뾰로롱 산죽 숲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번식철이거나 짝짓기 계절이다. 어쩌면 이미 새끼들을 양육 중인지도 모르겠다. 부모새로서 제일 힘들 때다. 한창 크는 놈들, 밥 달라고 성화가 보통이 아닐 터, 새삼 가장(家長)의 역할을 생각한다. 동동동 굿당에서 징이 울기 시작했다.
운수사의 범종소리
운수정까지는 가파르다. 누군가 가로질러 간 흔적이 시나브로 오가며 샛길이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오른다. 숲이 어둑할 만큼 짙다. 소나무 중심에다 사스레피가 층을 이루고 있다. 가장자리에는 국수나무가 이제 막 꽃을 피우며 촘촘히 가지를 펼치고 있다. 어느 정도 올랐다 싶을 때 길은 사행하며 편하게 펼쳐진다. 숲의 식생도 밝아졌다. 서어나무며 신갈, 느티나무의 수피가 은빛으로 빛난다. 운수골은 백양산 자락이 만든 골짝 중에서도 불웅령 사면과 더불어 식생대가 뛰어난 지역이다. 특히 개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주목되는 곳이다.
운수천의 피서객, 부산에서 계곡 물놀이가 가능한 곳은 손꼽을 정도다. 아쉽게도 그 원형이 많이 사라져 안타깝다.
운수정에서 얼마 가지 않아 운수사다. 절집 입구 느티나무 고목들이 사천왕처럼 지키고 섰다. 천년고찰 운수사의 창건 역사는 명확지 않다. 이곳 역시 범어사의 말사다. 창건에 관한 전설에 의하면 경내 약수터에서 안개가 피어올라 구름이 되는 것을 보고 운수사로 하였다고 한다. 주변 지형은 애진봉과 백양산, 614봉이 높은 담장처럼 에워싼 형국이다. 백양산 주봉을 가운데로 589봉과 614봉이 날개를 펼친 듯하고 운수사는 그 안에 깃들어 있다.
20년 불사 끝에 들어선 새 대웅전과 종루가 그 중심에 있다. 내부에는 높이 2m60cm의 금동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 협시(脇侍: 불상에서 본존인 여래(如來)를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는 상(像)으로 각기의 정토(淨土)를 가진 여래의 보처보살(補處菩薩)이다)하고 있는 삼불을 봉안했고, 그 양옆으로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다. 석가여래가 지긋이 바라보는 풍경은 백양산 자락이 사바세계로 열려 있는 곳에 펼쳐진 낙동강과 김해평야다.
서방정토, 종루에서 그 풍경을 확인한다. 가슴이 트인다. 예서 사상팔경의 운수모종(雲水暮鐘)이 연유되었을 것이다. 사방 15리까지 퍼져나간 범종소리는 사상 민초들이 아침저녁으로 안녕을 고하던 법문에 다름 아니었을까. 유감스럽게도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함락하기 위해 우회하던 왜군들이 운수사를 침범하는 과정에서 종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못내 아쉬워한 주지스님과 신도들은 1974년에 길이 120cm, 지름 70cm 규모의 종을 복원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난 종소리가 또 태풍으로 종각이 유실되면서 종만 덩그러니 대웅전에 남았다고 했다. 이제 종루가 새로이 만들어졌으니 그 범종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일만 남았다.
사상팔경의 운수모종(雲水暮鐘)이 연유된 종각, 범종소리 더불어 서방정토를 실어 날랐다.
주지 유정스님을 만나기 위해 절 마당을 가로질러 세진당으로 향한다. 현재 운수사의 가람배치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삼성각, 용왕각이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 좌우로 길게 종무소, 공양간, 심검당과 세진당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주심포계 맞배집으로 내부는 1고주 5량가이며, 측면가구는 2고주 5량가 형식이다. 이 건물은 부산에서 유례가 드물 만큼 잘 정제되고 기법이 뛰어난 목조건물이다. 운수사 대웅전에 대해 세간의 평은 깔끔하고 단정함이다. 규모가 작지만 비례와 균형이 잘 맞아 편안하고 아름답다는 평이다. 법당 내부에는 목조 석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초면에 불쑥 찾아간 걸음이었음에도 흔쾌히 반겨준 주지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감과 승승의 이야기였다. 다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나서는 길에 주지스님이 운수사는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의 공간이니 절 이름도 그렇게 해석해도 되지 않겠냐고 한다. 하긴 구름같이 떠돌면서 흐르는 물과 같이 깨달음을 구하는 일만큼 중한 일이 또 있을까. 문제는 돌아서면, 산문을 벗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늘 그 자리인 것이 문제다. 산을 내려간다. 바위 틈틈 골골이 모인 물들이 계곡에서 한 목소리로 흐른다. 운수천의 끝은 어디일까. 낙동강, 남해로 이어지는 물의 여행 속에 대양의 꿈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사방공사로 인해 옛 맛을 잃어버렸다는 것인데 2008년 계획이 알려지면서 당시 언론을 통해 지적했던 부분이다. 혀를 찬다. 그 곁에 오리나무 다섯 그루 바람에 “맞다. 맞다” 맞장구친다.
개림초등학교 갈림길에서 주례정 오르는 길.
옛날 거리를 표시하기 위해 5리마다 심었다는 오리나무들은 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잘 안 보이는 나무다. 해서 반가웠다. 이름도 두메오리나무가 맞다. 예전에는 흔했던 것이 1940년 일본에서 도입한 사방오리나무며 물오리나무 등에 의해 북쪽으로 밀려 났다. 아무튼 두메오리의 존재는 운수천 계곡길이 옛길이 맞다는 확신 비슷한 감을 주었다. 필시 운수사와 연결된 것이고, 그 길은 불웅령을 넘어 서면이나 부산진시장으로 열린 길이었으리라. 하지만 산 아래는 이미 오래전에 시가화가 되어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없다. 그 아쉬움을 운수천 초입에 선 낙락장송 한 무리 그림이 되어 위로한다. 이어 운수천의 아픔을 운무가 가려주고 있었다.
예까지가 백양산둘레길이다. 최근 부산시는 기존의 21개 갈맷길을 시 전체로 둘레길화하여 9개로 만들었다. 6-2코스의 경우 을숙도에서 구포역까지의 6-1코스에 이어지면서 구포2동 수향가에서 구남역 → 모라1동 주민센터를 거쳐 신모라교차로를 따라 백양터널로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구포역에서 운수천 초입까지 4.3km가 더해져 총 구간 거리는 23km로서 두 번에 나누어 걷기를 권한다. 지금이 백양산둘레길 걷기가 가장 좋을 때다. 그 맛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