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좀 해보자. 소피 마르소에 대한 나의 기억은 비디오와 함께 시작됐다. 80년대 초반에 우리 집에는 역사상 첫 번째 비디오가 생겼다. 소니였는지 금성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나는 [타이거 마스크]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보러 남의 집에 놀러 갈 필요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비디오를 사면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꼭 끼워줬다.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 도착한 서비스 테이프는 [라붐 2]였다.
표지에 예쁜 소녀가 그려진 그 영화는 프랑스 영화라고 했다.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집에 있는 비디오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볼 것도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버릇처럼 [라붐 2]를 틀어놓고 멍하니 브라운관을 쳐다봤다. 그리고 중독됐다. 사실 이야기는 별거 없었다. 얼굴은 꽤 동양적인데 가슴은 꽤 큰 프랑스 소녀가 부모의 불화와 증조할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오스트리아인가 어디에선가 온 남자아이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시는 80년대였다. 한국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상업영화들이 할리우드 영화만큼이나 영향력이 있던 시절이었다. 유럽의 스타는 할리우드 스타만큼이나 열렬한 팬덤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알랑 드롱은 여전히 '미남'이라는 단어의 동의어였다. 심지어 크리스토퍼 램버트같은 배우들조차 소녀 팬들의 방안에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라붐 2]의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또 보면서, 주인공 소녀인 소피 마르소가 참으로 예쁘다고 생각했고, 곧 그녀가 나만이 아끼는 숨겨진 배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피 마르소는 할리우드 배우인 다이안 레인,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등과 함께 당대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코팅 책받침을 수놓았던 당대의 여신 중 하나였던 것이다.
당대의 여신은 사실 우연한 기회에 배우가 됐다. 소피 마르소는 1980년 작 [라붐]으로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트럭 운전을 하는 아빠와 단둘이 사는 평범한 소녀였다. 하지만 '파티'라는 의미의 틴에이지 로맨스 영화 [라붐]은 개봉하자마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박스오피스를 휩쓸었다. 80년대 유럽이 가장 사랑하는 소녀로 등극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소피 마르소의 인기가 한국으로 상륙하게 된 이유? 사실 여기에는 일본의 힘이 크다. 80년대 초반 한국에는 해외 배우들의 화보를 소개하는 영화잡지가 '스크린'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잡지의 전성시대를 이미 60~70년대에 열어젖힌 일본에는 해외 배우들의 오리지널 화보를 수록한 잡지들이 굉장히 많았고, 이를 통해 많은 배우들이 한국에 다시 소개되며 인기를 끌었다(일본 패션잡지와 영화잡지가 일종의 문화 입문서로 통하던, 한국 대중문화의 암흑시절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자). 70년대 한국이 가장 사랑했던 소녀 '올리비아 핫세' 역시 이런 경로를 통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배우 중 하나다.
사실 [라붐]은 2013년 재개봉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한국에 정식으로 개봉한 적이 없다. 1982년 작 [라붐 2]의 한국 개봉도 1986년에야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 마르소가 이미 80년대 초 중반부터 한국의 책받침 여신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건, 일본 잡지를 거쳐서 한국 잡지(이를테면 당대의 '스크린' 같은 잡지)에 실린 사진들 덕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당대의 많은 할리우드 여배우들 역시 같은 경로로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지금처럼 할리우드 영화가 한국에 동시 개봉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그녀들은 영화보다는 사진을 통해 먼저 여신이 된 셈이다.
자,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라붐]과 [라붐 2], [유 콜 잇 러브]와 [007 제19탄 - 언리미티드] 같은 영화들 외, 소피 마르소의 출연작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소피 마르소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랑스 여배우 중 한 명이지만 프랑스 내에서의 경력에는 꽤 부침이 있었던 편이고, 많은 기간 진정한 '톱'에서 저만치 물러나 있기도 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소피 마르소의 [라붐] 이후 시절들을 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라붐] 시리즈가 연이어 성공을 거두자 소피 마르소는 더이상 트럭 기사의 딸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여배우의 길에 들어서기로 한다. 자, 만약 당신이 십 대 중반의 나이고, 수백만 명이 본 청춘 로맨스의 주인공이고,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과 아시아의 여자 친구 지위에 올랐다면, 대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많은 여배우들은 이미 덧씌워진 이미지를 계속해서 소비하는 길을 택한 뒤 잊혀져 버린다. 소피 마르소는 그러지 않았다.
[라붐] 이후 그녀는 당대 최고의 프랑스 배우였던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1983년 작 [사강의 요새]에 출연했다. '프랑스판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만들어진 이 거대한 영화에서 소피 마르소는 필립 느와레, 까뜨린느 드뇌브 등의 거물 배우들과 근사하게 섞여들었고, 프랑스의 오스카상이라 할 수 있는 세자르에서 신인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이제 그녀의 앞에 놓인 길은 아역의 이미지를 벗고 최정상의 여배우로 향하는 탄탄대로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소피 마르소는 아마도 조급했을 것이다. [라붐]은 도에 지나친 성공작이었다. 그녀의 이미지를 영원히 '귀여운 옆 집 소녀'로 가둬버린 일종의 트랩이었다. [사강의 요새]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아역배우'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마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섹시한 포즈로 '롤링 스톤' 표지에 등장했듯, 혹은 브룩 쉴즈가 [블루 라군]에 출연했듯, 과감하게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 10대를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전설적인 배우 쟝-뽈 벨몽도와 위험한 사랑을 나누는 소녀를 연기하는 1984년 작 [나이스 줄리]에 출연했다. 쟝-뽈 벨몽도는 이미 50년대 누벨바그 영화들에서 20대의 근사한 남자를 연기한 '늙은 배우'였다. 영화가 개봉하자 프랑스는 분노로 끓어 올랐다. '감히 사랑스러운 옆집 소녀 같은 소피 마르소를 쟝-뽈 벨몽도의 내연녀로 만들어?'하며 모두가 화를 냈다. 영화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시 소피 마르소는 어쩌면 남몰래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이스 줄리]의 스캔들적인 반응으로 인해, 그녀는 정말이지 성공적으로 아역배우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후 소피 마르소는 점점 대담해졌다.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1985년 작 [격정], 1986년 작 [지옥에 빠진 육체]는 그야말로 소피 마르소의 육체를 스크린에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좋았다. 만약 당신이 80년대에 소년기,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어느 날 갑자기 2본 동시 상영관의 간판에 헐벗은 소피 마르소의 그림이 그려진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겨우 몇 년 전에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늦게) [라붐]을 보고 소녀 소피 마르소와 사랑에 빠졌는데, 갑자기 다 큰 처녀가 되어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영화에 등장한 소피 마르소에 적응을 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아역배우라는 타이틀을 떼어내는 것에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지만, 이후 소피 마르소의 경력은 부침이 심했다. 아니, 커리어를 관리하는 데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단호하게 말해도 무방하리라. [라붐] 시리즈 이후 당신이 소피 마르소를 떠올리면 어떤 영화가 자동으로 떠오르나? 아마 대부분 캐롤라인 크루거의 동명 주제곡으로 유명한 [유 콜 잇 러브]를 머릿속에서 떠올릴 거다. 이 단순한 로맨스 영화는 [라붐]의 주인공 '빅'의 이미지를 그대로 연장한 작품이었다. 어쩌면 소피 마르소가 과감한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대부분의 팬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작품은 [유 콜 잇 러브] 같은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이후 그녀는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1989), [쇼팽의 푸른 노트](1991년), [샤샤를 위하여](1991년), [팡팡](1993년) 같은 프랑스 상업 영화들에서 소피 마르소다운 이미지를 지속적해서 연장하는 작업을 했다.
특히 알렉산드르 자르뎅의 [팡팡]은 90년대 소피 마르소를 대중이 바라보던 시선을 물질화시켜 영화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여기서 소피 마르소는 이미 약혼한 남자(당대의 프랑스 남자 배우인 벵상 뻬레가 연기한다!)를 온전히 자신의 매력만으로 사정없이 뒤흔드는 여자 '팡팡'을 연기한다. 그야말로 이건 '팡팡' 튀는 건강한 20대 여자를 대변하는 소피 마르소에 관한 영화다. 카메라는 그녀의 연기를 파고들기보다는 그녀가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고 서커스 그네를 타는 모습을 감각적으로 잡아내려고 기를 쓴다. 소피 마르소는 정말이지 아름답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라. 우리가 익히 아는 정상의 프랑스 여배우들이 언제나 이렇게 '팡팡' 튀기만 했던가? 까뜨린느 드뇌브, 아누크 에메, 이자벨 아자니, 줄리엣 비노쉬 그들에게는 언제나 일정 정도의 비밀스러움이 있다. 심지어 소피 마르소와 함께 90년대 여배우의 새로운 전선을 만들어 낸 다른 배우들인 엠마뉴엘 베아르, 줄리 델피 같은 여배우들에게도 어떤 프랑스적인 모호함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선과 악의 사이에서 오가고, 남자를 완전히 뒤흔들어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완전히 미쳐가는 자신의 영혼을 끄집어내어 스크린에 전시할 줄 아는 배우들이다.
소피 마르소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오히려 할리우드식 컨벤션을 그대로 가져온 밝고 가벼운 프랑스 로맨틱 코미디 속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고, 우리 역시 그녀가 [라붐]과 [유 콜 잇 러브]의 이미지를 영원히 가져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말이다. 그게 잘못된 일인가?
소피 마르소가 프랑스 여배우로서 이자벨 아자니, 까뜨린느 드뇌브나 줄리엣 비노쉬의 반열에 오른 건 아니다. 영원히 그러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80년대 코팅 책받침으로 만들어 다닌 여배우 중 누가 살아남았나? 브룩 쉴즈와 피비 케이츠의 인기와 경력은 이미 80년대 후반에 끝이 났다. 브룩 쉴즈는 이후 드라마에서 다시 살아남았지만, 그것 역시 오래가지는 않았다. 알리사 밀라노? 중화권으로 가자면 왕조현? 글로리아 입? 책받침 여신들 중 아직 경력을 불태우며 살아남은 배우는 거의 없다. 소피 마르소는 [라붐] 시리즈를 정점으로 조금씩 가라앉았지만, 단 한 번도 영화계를 떠나거나 여배우로서의 행보를 멈춘 적이 없다. 그건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다.
게다가 소피 마르소는 적극적으로 할리우드 진출을 도모한 보기 드문 프랑스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멜 깁슨의 [브레이브하트](1995), 영어 버전의 [안나 카레리나](1997) 등 그녀는 지속적으로 할리우드 혹은 영어권 영화에 출연했고, [007 제19탄 - 언리미티드]는 그녀의 국제적인 인기를 재점화한 어떤 계기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할리우드 진출이 소피 마르소에게 뭔가 거대한 기회를 안겨준 건 아니다. 그녀는 "프랑스 영화인들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하나도 없다"고 맹렬하게 포화를 쏟아내며 할리우드로 건너갔지만, [브레이브하트]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들의 흥행이나 비평적인 성과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두 번이나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줄리엣 비노쉬,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마이클 만의 뮤즈가 됐던 마리옹 꼬띠아르에 비하면 다소 미미한 효과를 얻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쩐 일인지 나는 지금 소피 마르소가 80년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전성기를 한 번도 누리지 못한 여배우인 것처럼 글을 쓰고 있다.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녀의 지난 20여 년 간의 행보가 압도적인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피 마르소의 가장 중요한 점은 (다시 말하지만) 모두의 여동생 같은 이미지의 아역배우로 영화계에 뛰어든 그녀가 여전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피 마르소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피 마르소는 1995년 [L''Aube A L''envers]라는 단편 영화로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사실 그녀가 카메라 앞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 서고 싶은 욕망을 보여줄 거라는 사실은 안드레이 줄랍스키와 동거에 들어갔던 순간부터 어느 정도는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1985년도에 [격정]을 찍으면서 만난 폴란드 출신 영화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와 동거를 시작했다. 팬들은 격정적으로 반대했다. 줄랍스키는 24살 연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줄랍스키와 함께 1989년 작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부터 2000년 작 [피델리티]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 영화를 찍으며 예술적 동지이자 부부로서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했고, 함께 아이를 낳았고, 이혼한 이후에도 여전히 굳건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소피 마르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가 줄랍스키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들은 저를 그로부터 떨어뜨리려고 별짓을 다했죠. 영화 [격정]은 폭력적이고 너무 급진적이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 영화를 했습니다. 계약 위반으로 고몽영화사에 큰 배상을 해야 했지만, 사람들에게 애완동물 취급받는 것보단 나았으니까요”
1985년이면 [라붐 2]를 찍은 지 겨우 2년 뒤의 일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가장 거대한 영화사 중 하나인 고몽과 계약관계였다. 계속해서 '프랑스의 요정'으로서 [라붐]의 이미지를 반복해야 하는 일종의 노예였다. 소피 마르소는 그러지 않았다. 동구권 출신의 24살 연상의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고, 그가 만든 급진적인 영화에 10대의 나이로 출연했고,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 인생을 달렸다. 그 결과가 완벽한 건 아닐지라도 최소한 그녀는 끝없이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를 뿌리치고 보다 성숙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달음박질쳤다. 그것은 프랑스 여배우, 아니, 모든 여배우의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정말이지 희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녀를 3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감독으로서 소피 마르소의 가치는? 소피 마르소는 2002년 [사랑한다고 말해줘]로 첫 장편영화를 감독했고, 2007년에는 [트리비알]을 만들었다. 별거한 부부가 아이들을 통해 재결합을 시도한다는 내용의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그녀에게 몬트리올 영화제 감독상을 안겼다. 사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비평가들에게 조금 짠 소리를 들은 영화였고, 대부분의 리뷰는 '기술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찍혔지만 소피 마르소가 다음에는 더 잘 만들길 바란다'는 투로 끝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아이를 가진 엄마이자 오랜 경륜을 지닌 여배우가 인간관계와 가족애를 돌아보는 썩 근사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연인이 된 크리스토퍼 램버트를 기용해서 만든 두 번째 장편 영화 [트리비알]은 소피 마르소가 안드레이 줄랍스키에게 어떤 어둠을 살짝 빌어온 것이 아닐까, 라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스릴러 영화다.
아마도 소피 마르소는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 것이고, 계속해서 감독으로서 성숙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여배우로 남을 것이다. 소피 마르소에게 이자벨 아자니의 치명적인 독극물 같은 기운이나 줄리엣 비노쉬의 고고한 예술적 아우라, 마리옹 꼬띠아르의 화려한 고전 스타 같은 매력을 굳이 캐어낼 이유는 없다. 소피 마르소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배우다.
얼마 전 개봉한 [어떤 만남]도 그렇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컨벤션을 적극적으로 가져온 이 중년 로맨틱 코미디는 마치 [라붐]의 빅이 중년의 성공한 소설가가 되어 벌이는 로맨스를 담은 듯한 영화다. 소피 마르소는 거의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예쁘고, 귀엽고, 발랄하게 '팡팡'하다. 소피 마르소는 [라붐]의 기억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2009년 한국에 왔을 땐, [라붐]으로 인기를 얻었던 시절을 "힘들고 끔찍했다"고 표현한 적도 있다. "갑자기 물밀 듯이 뭔가가 밀려 들어와 제 삶의 모든 걸 잠식했죠. 사람들은 그걸 몰랐고 이해할 수도 없었을 거에요. [라붐]과 관련된 스토리 자체가 어른들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으니까요. 갑자기 영화 하나로 일약 스타가 탄생했다는 그런 '영화 같은' 스토리가 만들어졌으니까요. 제가 힘들다고 하면 그들의 흥이 깨질 것이 분명했죠. 그래서 혼자 그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소피 마르소는 같은 인터뷰에서 웃으면서 이런 말도 했다. "한국 사람들이 [라붐]으로 여전히 절 기억한다고요? 프랑스에서도 30년이 지났지만 비슷해요. (웃음) 보통, 첫사랑이 오랜 추억이 되잖아요." 그녀는 [라붐]의 빅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파괴하고 새로 태어나려 했지만, 여전히 빅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지금의 소피 마르소는 자신이 [라붐]의 빅이었다는 사실을 더이상 거부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작년에야 [라붐]을 제대로 다시 봤다. [라붐]은 [라붐 2]와는 달리 작년 정식으로 수입되기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국내에서 개봉한 적 없는 영화다. 그런데 [라붐]을 다시 보면서 나는 80년대 소년기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디테일들을 재발견하게 됐다. 알고 보니 [라붐]은 결코 14살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소피 마르소는 남자친구와 파티에서 재회한 뒤 껴안고 춤을 춘다. 그런데 갑자기, 아마도 고등학교 고학년생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성숙한 남자가 파티장으로 들어온다. 소피 마르소는 남자친구에게 안긴 채 이 새로운 남자를 보고 이글이글 격정에 타오르며 홀린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영화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맙소사. 30여 년 만에 다시 본 [라붐]은 한 소녀가 진정한 여자로 깨어나는 순간을 그린 영화였고, 마지막 장면에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라붐]은 정말이지 소피 마르소다운 출발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