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아모 2,6-16; 마태 8,18-22 /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2024.7.1.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어기고 죄를 저지르는 북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의 죄를 물어 엄한 심판을 하시리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첫째,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 넘기는 등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 길을 막는 죄도 저질렀습니다.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더 풍요로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갑질 행패를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습니다. 둘째,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가난한 이들을 차별하는 죄는 성적 문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들과 아비가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셋째, 제단마다 그 옆에 저당 잡은 옷들을 펴서 드러눕고,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대는 죄가 있습니다. 종교가 사회를 정화시키지 못하고 세상의 죄에 물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결국 자신이 받은 이 심판의 계시를 직접 기록하기 시작한 아모스(기원전 760~755년) 이후 한 세대도 지나기 전 기원전 720년 경에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치유와 위로, 소생과 구마의 기적 등으로 복음에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케리그마적 행동과 병행하여, 당신과 함께 이 케리그마를 선포할 동지들을 규합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동지들을 단 열두 명으로 한정하신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율법 학자가 제자로 지원했을 때에는 청빈한 생활양식을 실행해야 할 의무를 들어 거절하셨고, 가정사에 연연해 하는 이가 제자로 지원했을 때에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말라고 타이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보이지 않으면 당신께서 목숨을 바쳐 가르쳐 주시고 사랑하실 상대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진성사를 받을 때 입게 되는 일곱 가지 성령의 은사 중에는 사람을 식별하는 의견의 은사와 사태를 식별하는 지식의 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은 의견의 은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스승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말하는한 율법 학자에게는 철저한 가난을 살 각오가 없어 보여서 거절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승을 따르고 싶지만 먼저 집안 일을 챙기겠다는 제자에게는 뒤돌아보지 말고 따르라고 재촉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의 자격은 하느님과 세상 중에서 하느님을, 안정된 미래와 가난한 현재 중에서는 가난한 현재를 철저하게 선택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가 하느님을 멀리하게 할 수 있는 지옥입니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대하면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의 길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식별하는 의견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함부로 헤프게 도반의 연을 맺을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쓸데없이 엮여서 피할 수도 있는 고초를 괜스레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오늘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가 고발하는 세태는 지식의 은사를 통해 식별해야 할 엄중한 요구를 필요로 합니다. 그 세태란 권세와 돈과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상류층의 죄악상이었는데, 권력과 재산 지식과 사회적 지위를 남달리 많이 차지한 이들의 카르텔은 한국 사회의 상류층의 세태에서도 어김없이 관찰됩니다. 특히 최근에는 검찰 권력의 과도한 남용과 이를 묵인하는 언론의 유착 현상이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무속에 기대는 반지성적인 행태도 관찰되는가 하면 보수 개신교단 일부 지도자들과의 유착 관계도 보입니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혼탁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이를 정화시켜야 할 종교의 책임도 엄중한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어제 교황주일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교회에 자상하게 전해준 교회쇄신의 메시지는 사실, 이미 30년 전에 작성된 전국 사목의안에 포함되어 있던 과제들이었습니다. 사목 의안이 작성된 전국사목회의는 한국 천주교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 전체, 즉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같이 참여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행사가 이 ‘사목회의’로 수렴되고 결실을 맺어야 한다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안으로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지향하고, 밖으로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도래케 하며 특히 이 땅에서 고통 받는 모든 사람과 같이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니 사목회의는 교회 생명 자체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안은 복음이 전래된 지 2백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가 20여 년 전에 폐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한국판으로 열어서 교회 쇄신을 이루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이 공의회가 현대의 성령 강림 사건으로 불리운 만큼, 전국 사목회의 역시 한국판 현태 성령 강림 사건으로 불리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전국 교구에서 선출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대의원들의 결의는 굳건했고, 토의 과정은 치열했으며, 이 의안에 대한 교회 안팎의 기대도 뜨거웠었습니다.
모두 12개 의안 중 마지막 순서로 작성된 「사회」의안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저 낮은 민중 속으로 보내셨듯이, 크리스챤이 또한 민중 속으로 투신하도록 이 시간, 우리 모두를 파견하고 계신다.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민중 속에 자신을 묻고, 그들과 함께 복음의 빛을 찾는 ‘민중 속의 교회’만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를 가장 진솔하고 극명하게 증거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교단 앞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라고 충고한 메시지는 이 의안의 메아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후의 경과는 사목 의안이 제안한 메시지와는 반대로 흘러 갔습니다. 한국교회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103위 성인의 탄생을 계기로 조성된 가톨릭 선교붐을 타고 놀랄만한 교세 신장을 이루었으며, 봇물 터지듯 본당 신설과 성전 신축이 전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중산층화된 교회로 귀결되었고, 중산층화는 사회적 보수화 경향으로 이어졌지만, 더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교세 신장 추세가 멈추었음은 물론이요 신앙의 질적 하락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박해 기간에 교우촌에서 목숨을 걸다시피 바치던 제사가 아침 저녁으로 바치던 기도였는데, 이런 일상의 기도 생활을 하지 않고 성사 생활도 게을리한 나머지, 유감스럽게도 주일 미사에 나오지 않는 냉담자의 비율이 영세자의 80%를 넘어 90%라는 참담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이러한 냉담자 양산 사태의 그럴 듯한 빌미가 되어 주었습니다. 결국 양적인 팽창과 위축으로만 귀결된 이런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우리 교회가 새로운 입교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양적인 증가에만 매달리지 않도록 경고하는 한편, 이왕 입교한 새 신자들에게 복음적인 매력을 주지 못한 탓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성의 기회를 주는 사태입니다. 분명히 사목 의안이 제시한 교회 쇄신 의지는 뚜렷하게 후퇴했고 가난한 이들과 젊은이들 그리고 지식인들은 눈에 띄게 신앙을 멀리 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의견과 지식의 은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을 헤쳐나가며 바른 길을 찾게 해 주는 지도와도 같습니다. 정의의 감각과 언행일치된 식별기준으로 방향을 찾아 나갈 일입니다. 기도 생활과 성사 생활의 균형, 성사 배령과 성사적 실천의 조화가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한국 현실에 적용하여 도약하려던 사목 의안의 취지는 이제 빛을 발할 때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이 두 교황이 한국교회에 던진 메시지와 보여준 사랑과 배려에 비추어 한국교회를 향한 하느님과 교황청의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이룩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민족 복음화의 과업이 요원한 이상, 우리는 하느님의 큰 그림을 보고 교황청에서 제시하는 더 크고 원대한 목표 즉 아시아의 복음화를 향한 지향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 지향을 위해 교회 쇄신이라는 희생을 하느님께 예물로 봉헌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복음화라는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의 소원은 덤으로 들어질 것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이후 한국교회에 남긴 메시지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모색이 10년째 계속되고 있지만, 그 답은 이미 30년 전에 사목 의안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그 답안대로 한국교회가 노력해 왔다면, 교황은 한국교회에 관해 교황청이 간직하고 있는 복안의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간 희망찬 메시지를 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악마가 와서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려는 씨앗을 뿌린 것 같다.”는 ‘부드럽지만 날선’ 교황의 훈계를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아모스의 경고성 예언을 듣는 듯 하지 않습니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인생을 걸고 내리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을 먹고 생명의 피를 마시는 한, 믿음의 결단은 진정성 있게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 개인도, 한국교회 전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이미 사목 의안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마침 한 해의 전반기가 끝나고 후반기를 시작하는 7월의 첫 날입니다.